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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불교적 세계관을 투영하다
1.
아날로그의 몰락과 디지털 시대의 개막을 본격적으로 알린 2010년대는 통신망의 진화로 지구촌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거기에 2007년 출시된 스마트 폰의 대중화가 시작되었고, 아날로그 시장은 점차 소멸하여 기존의 PC 중심에서 모바일 웹 서비스 기반의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다. 리얼리즘의 세계관을 조정했던 아날로그 문학은 디지털 시장에 지배되면서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디지털의 파급으로 문학적 풍토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학의 존재 방식 또한 다원적으로 재편되었다. 시공간을 넘어 인터넷이라는 가상현실 속에서 창작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상호 간 또는 일 대 다자의 소통 커뮤니티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한편 첨단 과학문명의 발전과 민주 의식의 확산으로 세계는 평화로운 2010년대로 기록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각국에서는 각종 전쟁과 테러 그리고 무차별적인 사회적 혐오와 증오 등의 감정의 난립 등의 사건들이 여과 없이 인터넷망으로 전파되었다. 이에 따라 범지구적 차원에서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서서 공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의 문학도 윤리적 문제를 강조하며 세계적 공존으로서의 탈경계, 탈국가, 탈민족 등 의식의 변화로 21세기를 횡단했다.
또한 2010년대의 한국사회는 2000년대에 팽창해왔던 신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결탁하여 차별과 배제의 지배구조를 확산시키기도 했다. 경제적 불평등, 중산층의 몰락, 청년 실업의 문제가 지배적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혼돈의 시기에 보여주는 디지털 시대의 문학적 경향은 이데올로기나 이념이라는 대담론보다 주변부에서 가치 있는 것을 찾고자 했다. 즉 2000년대 이전까지 지배해왔던 국가와 민족, 평화와 통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등의 거시적 논쟁보다는 현실적인 차원에서 존재를 이해하고 시대를 조망하는 데 편중되었다. 그만큼 21세기 문학은 무한 경쟁을 요구하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내는 개인들의 일상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다원적 상상력을 부과하였다.
2010년대 시조시단은 시대사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난삽한 자유시의 경향과 달리 시형의 자율화와 내용적인 측면에 충실하면서 2000년대의 연장선에서 그 흐름을 유지했다. 그것은 변화와 갱신을 거듭한 테제로서 유의미한 일이며 지난 세기 동안 형식 논쟁을 통해 지배적인 가치와 담론을 다원적으로 수렴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앙 문단을 표방하는 자유시단과 달리 시조시단은 지역과 지방을 중심으로 2010년대 말 3,000여 명에 달하는 시인들이 전국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조시인들의 양산은 문학이 실버예술이 된 것에 일조함과 동시에 시조가 자유시에 비해 비교적 창작하기 쉬운 양식이라는 데 힘입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 각 지역에 분포한 시조 단체와 공공시설, 평생교육원과 사설 아카데미 등에서 열리는 시조 심포지엄, 낭송회, 문학의 밤 등의 다양한 문학 관련 행사들이 시조 창작 욕구를 고취해 왔다.
이런 가운데 등단과 문학상 등을 둘러싼 관행화된 중견 시조시인들의 문단 권력은 문단 장사라는 시조계의 부정적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21세기의 문단 풍토로서 문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중견 시조시인들의 성찰과 각성이 요구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시조단에 대한 대책 없이 무분별한 비난은 오히려 ‘시조의 세계화’와 ‘시조의 국제화’를 열고 있는 21세기 시조문학사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2010년대 시조시인들의 배출에 공헌한 일간지 신춘문예와 함께, 1960년에 창간된 시조 전문지 《시조문학》을 필두로, 40여 개로 추산되는 월간, 계간, 반년간 문예지 등에서 시조 작품을 게재했다. 이 가운데 시조 전문지인 《시조시학》(2000) 《시조21》(2001) 《나래시조》(2003) 《화중련》(2008) 《정형시학》(2012) 《좋은시조》(2015) 등이 디지털 시대의 시조문학을 선도해 나갔다.
2.
2010년대 시조 형식에서 시행 배열이 실험적 · 감각적으로 자율화되면서 현대시조의 정체성을 불명료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대시조가 자유시와 분별력이 없다는 자유시단의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시조의 시행이 엄격하지 않지만 모호하다고 해서 자유시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조의 구조는 논리를 벗어난 형식이므로 외적 표지의 경계는 모호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각 장과 음보와 음수율의 전개 방식에서 자유시와 차별성이 있다. 이를테면 현대시조의 정체성은 다원화되고 모호해진 시대를 형식 실험의 형태로서 전위적이고 전방위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는 데 있었다.
이처럼 다원화된 디지털 시대의 시조는 다양한 형식을 허용하면서 여러 구조의 형태로서 현실을 담아낸다. 21세기의 다문화 구조 속에서 단장, 양장, 사설, 장시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구조로서 다층적이고 복잡한 다문화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디지털 시대 전통과 현대의 영향 속에서 혼재한 모습을 실험적, 감각적으로 현현하면서 ‘현대시조의 독자 생존의 다원성’을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2010년대에 등단한 백윤석 · 배경희 · 김태경 · 인은주 · 김영란 · 류미야 · 정황수 · 유선철 · 김범렬 · 조성국 · 김진대 · 김양희 등은 제각기 활동 지역과 출신지, 성별과 성량, 학력과 전공 등이 다른 것만큼 창작 패턴도 차이가 있다. 거기에 1940년대 출생에서 1980년대 출생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령군으로 포진되어 있다. 또한 1960년대생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볼 때 40대 혹은 30대 중 · 후반에 신춘문예 또는 주요 문예지로 등단한 시인들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현재에도 활발한 문단을 하고 있으며 여기서 보여주는 불교 미학은 대체적으로 다원화된 세계를 겨냥하고 있다.
먼저 살펴볼 백윤석 · 배경희 · 김태경의 시행에서는 불교적 사유가 무의식적인 흐름으로 견인되고 있다. 자아를 송출하는 억압된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주장에 의하면 원시적 충동을 통해 미해결된 욕구와 기억 등의 심층을 드러내는 기제다. 시조시인들에게 내재한 개인적 · 집단적 무의식이 작품 저변에서 발휘되는데, 감각적이면서도 모호한 시상과 다채로운 형식을 통해 불교적 사유를 드러내면서 자아의 근원적 세계를 분출한다.
아래의 시편을 창작한 백윤석은 1961년 서울 출생이고, 2016년 〈경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오늘의시조시인상과 나래시조 젊은시인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스팸메일》이 있다.
전시관에 누워 있다, 헐벗은 돌부처가
강요된 침묵 속에 입 닫은 지 70여 해
못한 말 꾹꾹 누른 채
탐라의 별 헤고 있다
무람없는 군홧발이 휩쓸고 간 산간마다
별이 된 사람들은 빛을 잃고 낮게 뜨고
목격자 붉은 동백꽃은
목을 긋고 울었다
언젠가는 일떠서리, 막힌 입 봉합 풀고
뭇별들 다 내려와 붓끝 꼿꼿 세우는 날
저 와불 벌떡 일어나
오도송을 외울 터
― 백윤석 〈백비(白碑)를 읽다〉 전문
비석에 새기지 못한 근현대사의 서사를 간직한 백비(白碑)는 공동체가 경험하고 개인이 목격한 억압된 무의식이다. 70여 년 전 제주 4 · 3 사건을 발굴하여 3수로 새기고 있는 이 시편은 한국사의 비극적 현장을 불러낸다. ‘전시관에 누워 있는’ 침묵을 ‘돌부처’로 회화하면서 불교적 심상으로 펼쳐내는데, 여기서 ‘70여 해 강요된 침묵’은 개인적 무의식이지만 “못한 말 꾹꾹 누른 채/ 탐라의 별 헤고 있”는 것은 집단적 무의식의 발현이다. 그만큼 제주 4 · 3 사건은 개인적 · 집단적 무의식으로서 “무람없는 군홧발이 휩쓸고 간 산간마다/ 별이 된 사람들은 빛을 잃고 낮게 뜨고/ 목격자 붉은 동백꽃”으로 그날의 사건을 환기한다. 비로소 억압된 “막힌 입 봉합 풀고” 무의식에서 나온 침묵이 “붓끝 꼿꼿 세우는 날”을 보게 한다. 이어서 “저 와불 벌떡 일어나/ 오도송을 외울 터”라는 돌부처의 증언으로 새로운 주체의 언어를 생성해 낸다.
칠판을 긁었다, 날카로운 금속성
뇌 속에 인지되는 저 비명이 나는 싫다
거대한 공룡이었을까 몸을 숨기고 있나
뭔지는 모르지만 무서운 게 틀림없어
먼 옛날 혹시 나는 고라니 염소였을까
내 몸속 기억하는 것, 강한 것의 두려움들
연둣빛 풀들 사이 검은색이 꿈틀한다
천년의 고요를 심장 속에 감추었나
한겨울 바람 소리에도 온몸이 붉어진다
— 배경희 〈검은 DNA〉 전문
위 시조를 쓴 배경희는 1967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 《흰색의 배후》가 있다. 3수로 된 이 시의 제목 〈검은 DNA〉는 인간 심연에 내재한 ‘무의식의 DNA’에 ‘검은’ 색깔을 주입한 것이다. 무의식이란 지각되지 않는 색채인 검은색과 같이 어둠의 세계이며, 현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으로 ‘뇌 속에 인지되는’ 것이 아닌 비과학적인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비과학적인 영역은 이 시에서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거대한 공룡’ ‘고라니’ ‘염소’ 등을 소환한다. 그것은 ‘날카로운 금속성’으로 죽임을 당한 화자 전생의 형태로서 구현되는 것으로 바로 “내 몸속 기억하는 것, 강한 것의 두려움들”을 말한다. 이에 ‘검은색’이라는 현재가 통과하지 못하는 미지의 무의식은 “천년의 고요를 심장 속에 감추”고 있는 윤회의 색상으로 형상화된다.
오늘도 손목에는 하루를 채웠지만
홀로 길을 나설 동안 방향을 잃어버렸다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셀프가 아니었지
몸을 불린 전신망이 너와 나를 이어줄 때
사람과 사람 사이 옭아매는 숱한 그물
문 닫은 방 안에 앉아
SNS의 불을 켤까
정규직 꿈을 꾸다 알바마저 놓친 나날
점점의 순간들이 제 발로 멀어진다
오늘도 셀프서비스로
내일의 문 두드린다
— 김태경 〈셀프라이프〉 전문
3수로 된 이 시를 창작한 김태경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4년 《열린시학》에서 평론이, 2017년 〈매일신문〉에서 시조가 당선되었고, 시집 《액체 괴물의 탄생》이 있다.
셀프는 자기 또는 자아를 표상하는 용어로서 타인 또는 타자와 구분된다. 이 시는 독자 생존의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이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셀프가 아니”었지만 청년기에 이르러 “홀로 길을 나설 동안 방향을 잃어”버린 화자는 사회라는 공동체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인드라망같이 얽히고설키어 있다. 인드라망 같은 이 세계에서 “몸을 불린 전신망이 너와 나를 이어줄 때/ 사람과 사람 사이 옭아매는 숱한 그물”로 인연의 얽힘을 상기한다. 무의식에서 출산한 불연속적 찰나인 “점점의 순간들”이 멀어져 가는 걸 보며, “오늘도 셀프서비스”라는 ‘독존’의 인식으로 “내일의 문 두드”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3.
시인이 언어를 소유하는 방식은 사물을 통해 본질에 접근할 때 가능해진다. 불교적 사유를 담은 시편들은 불교가 표상하는 사물의 관찰을 통해 시 의식을 구체화하는 특징이 있다. 시인이 사물에서 발견한 근원적 세계를 새롭게 보여주는 언어를 통해 불교 의식을 표상함으로써 현실 너머의 세계로 이동한다. 사물을 감각적으로 사유하면서 불교적 세계를 형상화하는 인은주 · 김영란 · 류미야의 시작술은 사소한 일상 속을 파고든다. 이런 가운데 고유한 주체는 산화되고 페이소스를 유발하는 서정만이 극대화됨으로써 청정한 세계를 밝혀준다.
한잠을 자고 난 후 연해진 몸의 빛깔
꿈인 양 구도인 양 한 생이 잠잠한데
아사삭 공양마저도 봄비처럼 푸르다
햇빛을 먹고 자라 하늘로만 향하는지
허물을 벗자마자 새로 나온 머리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섶을 찾아 오른다
평생에 딱 한 번만 오줌을 누는 누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비우고
누운 채 펼치는 설법 길고도 청명하다
— 인은주 〈와불〉 전문
1964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한 인은주는 2013년 《시조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우리의 관계는 오래되었지만》 《미안한 연애》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이 시편의 제목인 ‘와불’은 누워 있는 불상이다. 수행에 정진하여 진리를 체득하고 열반에 오른 ‘와불’은 이 시에서 ‘누에’로 치환된다. 온갖 미혹과 집착을 끊고 속세로부터 탈속의 경지에 이른 ‘와불’처럼 고치는 “허물을 벗자마자 새로 나온 머리”를 가진 누에로 거듭난다. 이때 누에는 “꿈인 양 구도인 양 한 생”을 가진 껍질을 벗고 나온 해탈을 표상하며 그것은 “평생에 딱 한 번만 오줌을 누는 누에”와 같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비우고” 마는 신성성을 획득한다. 이같이 바닥에서 생을 보내면서 해탈에 이르는 누에라는 소재를 통해 “누운 채 펼치는 설법 길고도 청명”한 ‘와불’을 감각적으로 지각하게 한다.
어디든 봄이야
다 그렇게 푸르겠지
길 따라 언덕 따라
무진장 꽃도 피지
꽃보다
더 아름다운 그런 사람 있을까
얹혀서 가지 말라
성파스님 설법처럼
계절을 끌고 가는
서운암 들꽃무리
그 절집
된장 항아리 꽃향도 가득하지
— 김영란 〈들꽃 법문〉 전문
김영란은 1965년 제주 출생으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오늘의시조시인상과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꽃들의 수사(修辭)》 《몸 파는 여자》 《누군가 나를 열고 들여다볼 것 같은》 등의 시집이 있다.
2수로 된 이 시는 ‘들꽃’과 ‘법문’이라는 서로 다른 사물과 관념을 합성하여 ‘들꽃 법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 시인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들꽃의 생명성을 “어디든 봄이야/ 다 그렇게 푸르겠지”라는 법문으로 읽어낸다. 들꽃은 “길 따라 언덕 따라/ 무진장 꽃”을 피우며 홀로 피고 스스로 저문다. 그러면서 “얹혀서 가지 말라”라고 한 “성파스님 설법처럼” 계절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절을 끌고 가는” 주체가 되어 ‘무위자연’을 설하고 있다.
일생을
바닥을 닦아
저물녘 생불이 되다
행적마저 지워서
무설설(無說說)
법문이 되다
어머니
옹이진 능선마다
들어앉은
천불천탑
— 류미야 〈손가락부처〉 전문
1969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한 류미야는 2015년 《유심》 신인상을 받고, 2020년 중앙시조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눈먼 말의 해변》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가 있다. 그녀는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발행인이자 주간으로서 자유시는 물론 시조 보급 운동에 전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른바 디지털 시대 현대시조의 주역이다.
이 시편은 ‘손가락’을 통해 ‘부처’를 현출하며 그 부처를 단수로 기록한다. 그것도 “일생을/ 바닥을 닦아/ 저물녘 생불이” 된 손가락을 감각적으로 현현하면서 손가락의 ‘행적마저 지우는’ “무설설(無說說)의 법문”으로 어머니의 헌신을 승화시키고 있다. ‘무설설’은 설함이 없는 가운데 설하고, 법이 없는 가운데 법이 있는 고요의 중심에서 파동치는 진리의 요체 중 하나다.
4.
불교적 사유를 담은 시편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되는 시작법이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의 다섯 가지 이미지의 발현이다. 이러한 오감각이 이미지로 체화하면서 공감 능력을 획득한다. 살펴볼 정황수 · 유선철 · 김범렬 시에서 시화된 감각적 이미지가 깨달음을 얻게 한다.
운선구곡 너럭바위 하루 해름 지그릴 때
곳집 들기 하 아쉬워 오방빛 터는 낙조
음각된 발자국마다 날씨금을 들앉힌 채.
웅숭깊은 하늘 한 켠 피멍 노을 걸어놓고
탄로가(嘆老歌)에 빚은 글귀
닦고 꿰맨 역리(易理) 행간
책더미 첩첩이 쌓여 불콰하게 해독하나.
짓쳐드는 어둑발에 허기 지친 저 경전들
안거 든 수행승처럼 들숨날숨 가다듬고
밤도와 독경 소리로 단애 차츰 깎는 것을.
— 정황수 〈사인암 책 높이〉 전문
1948년 영주에서 출생한 정황수는 고령을 극복하고, 2015년 〈경남신문〉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그 후 《안개의 꿈》과 《기리에를 위한 변주》 등의 시집을 펴냈다.
이 시편에 등장하는 ‘사인암’은 단양팔경의 하나로 고려 말 역동(易東) 우탁(禹倬)이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지낼 때 자주 들러 이같이 불렸다고 한다.
높이 50m 기암 아래 남조천이 흐르는 사인암을 ‘책 높이’로 시각화하고 있는데, 이 시각적 이미지는 각 수에서 저녁이 오는 풍경으로 확산되면서 불교적 사유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지는 해 주위로 퍼지는 붉은빛이 서린 사인암을 중심으로 첫 수에서 “오방빛 터는 낙조/ 음각된 발자국마다 날씨금을 들앉힌 채”라고 암벽의 깎아내린 듯한 세로선과 가로선의 비범함을 묘사한다. 2수에서는 ‘노을’을 걸어놓은 ‘피멍’이라는 아픔으로 병치하면서 늙음을 한탄한 ‘탄로가(嘆老歌)에 빚은 글귀’로 묘사한다. 이 같은 시각 이미지는 “닦고 꿰맨 역리(易理) 행간”에서 “책 더미 첩첩이 쌓여 불콰하게 해독”하는 문장으로 파고든다. 나아가 마지막 수에서 “허기 지친 저 경전들” “안거 든 수행승” “밤도와 독경 소리” 등 사인암을 높이 쌓인 경전으로 형상화하면서 수행의 무게와 깨달음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고요의 칼을 갈아 비늘을 건드리면
소리는 움츠리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단숨에 소리를 잡는
고요의 놀라운 힘
풀죽은 낮달처럼 스러지는 소리에는
어쭙잖은 지난날의 변명이 묻어 있다
꽃으로 피지 못해서
꽃을 감은 덩굴 같은
철옹의 넘사벽을 꼭 한 번 넘으려고
따가운 채찍으로 나를 키운 소리들아
보아라,
범종 소리도
고요 아래 눕는다
— 유선철 〈고요에 눕다〉 전문
1959년 경북 김천 출생의 유선철은 201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천강문학상 시조 부문 대상과 오늘의시조시인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찔레꽃 만다라》가 있다.
청각적 이미지로 전개되는 2수로 된 이 시편은 범종 소리를 통해 “고요의 놀라운 힘”을 산출하고 있다. 법구 사물 중의 하나인 범종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쓰이는 대표적인 불구다. 종이 울릴 때마다 약 3초에 한 번씩 공명이 생기면서 종소리가 퍼져나가는데 시인은 그것을 “고요의 칼을 갈아 비늘을 건드”린다고 한다. 이 고요함 속에서 내는 “소리는 움츠리며 거친 숨을 몰”고 오고, “단숨에 소리를 잡는” 고요의 소리를 청각으로 체화시킨다. 이 소리는 대중을 모으고 깨달음을 일깨우는 범종의 설파로 “따가운 채찍”이 되어 그동안 “나를 키운 소리들”로 심장을 뛰게 한다.
용문사 가는 숲길
바람 그도 솔내 젖고
어머니 그 푸근한 품속 같은 오솔길에
깡마른 솔방울 하나
발등에
툭!
챕니다.
— 김범렬 〈용문사 가는 길〉 전문
김범렬 시인은 1961년 경기 여주에서 출생,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 《천수만 가창오리》를 출간했다.
‘용문사’는 경기 양평 용문산에 자리한 사찰로 신라시대에 세워졌다. 시인은 “용문사 가는 숲길”에서 ‘어머니 품속’을 만나는데, 솔향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솔향은 촉각적 이미지로서 용문사라는 유서 깊은 사찰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생겨난 시 의식이다. 이른바 용문산이 품고 있는 오솔길에서 어머니의 푸른 가슴을 피부로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종장에서 “깡마른 솔방울 하나/ 발등에/ 툭!/ 챕니다”라는 촉각 이미지는 자신을 건드리는 ‘깡마른 솔방울 하나’를 통해 현실 속 피폐한 자아를 돌아보면서 청정한 정신을 일깨우려 함이다.
5.
지금까지 살펴본 불교 시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사찰과 불상이다. 그만큼 사찰과 불상은 불교의 대표적인 표상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 지배적으로 각인된 살아 있는 전통문화다. 사찰과 불상을 중심으로 시조를 창작한 조성국 · 김진대 · 김양희의 시편에서도 천 년 넘게 민족정신을 수호해 온 불교가 전통 양식인 시조와 만나 빚어내는 민족 고유의 정한을 엿볼 수 있다.
돌 무게만 남겨놓고
생각은 다 깎아 냈다
옷 벗고 돌 입는 일
쉽지는 않았겠지
이제는 돌에 맞아도
툭, 툭, 털면 되겠어
— 조성국 〈마애불(磨崖佛)〉 전문
1958년 서울에서 출생한 조성국 시인은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5 · 18문학상 신인상을 받았고, 시집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를 펴냈다.
이 시조에 나오는 ‘마애불’은 암벽에 새긴 불상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불심이 깃들어 있다. 7세기 전후로 충청도 해안지역에 처음 나타난 서산과 태안의 마애삼존불은 ‘백제의 미소’라는 애칭이 붙어 있다. 화자는 ‘마애불’을 “돌 무게만 남겨놓고/ 생각은 다 깎아 냈다”라면서 고뇌를 끊어버린 수행자로 탐구한다. 또한 “옷 벗고 돌 입는 일/ 쉽지는 않았겠지”로 측정할 수 없는 깨달음의 무게를 표현한다. 마지막 연에서는 “이제는 돌에 맞아도/ 툭, 툭, 털면 되겠어”라는 구절로 모든 것을 초탈한 마애불의 모습을 그려냈다.
백담사 마당에 팥배나무 가지마다
만해가 전하지 못한 자유와 평화가
경내를 휩싸고 돌아 꽃으로 피기까지
지난날 과육만 먹고 버린 씨앗 한 알
만해로 퍼지게 잎까지 손 맞잡아
천둥과 번개 앞에서 열매를 맺었다
오늘 아침엔 이방인도 입맛을 다시고
우레와 침묵으로 만해에 이르려열매에 담긴 경전을 가슴에 새긴다
— 김진대 〈만해의 계절〉 전문
김진대는 1963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201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풋굿》과 《빈손 화법》이 있다. 일반적인 정형률을 유지하는 이 시편은 ‘백담사’와 선승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백담사 마당에 팥배나무 가지”로 ‘만해가 추구한 자유와 평화’를 형상화한다. 팥배나무가 ‘씨앗 한 알’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천둥과 번개 앞에 자신을 내어 주었고, 만해 정신 역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결실이 오늘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매에 담긴’ 것은 ‘우레와 침묵’이며 부처의 말씀이 내재된 ‘경전’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리라.
봄볕이 내려앉자 설법하시는 항아리
금낭화 할미꽃 옹기종기 둘러서서
가득 든 말씀도 듣고
텅 빈 말씀도 듣는다
― 김양희 〈서운암의 봄〉 전문
1964년 제주 한림에서 출생한 김양희는 2016년 《시조시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정음시조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넌 무작정 온다》를 펴냈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는 절 ‘서운암’은 ‘금낭화’와 ‘할미꽃’ 등의 야생 군락지로 봄에 수많은 사람의 발길을 한곳으로 모은다. 통도사는 이 절의 위치가 부처님이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 사찰이라고도 불린다.
시인은 “봄볕이 내려앉자 설법하시는 항아리” 곁에 봄꽃들을 구경 온 인파들이 “금낭화 할미꽃 옹기종기 둘러서서” 설법을 듣는다고 이 자리를 영산회상으로 형상화한다. 중생들은 “가득 든 말씀도 듣고/ 텅 빈 말씀도 듣는다”며 ‘항아리’는 봄볕처럼 자비롭고 꽃처럼 향기로운 부처님 말씀을 내뿜고 있다고 비유한다.
이처럼 2010년대 불교 시조는 세계적으로 공존과 공생을 강조하는 탈경계, 탈국가, 탈민족 경향 속에서 현대화된 사유 체계를 선보였다. 디지털 시대에도 다채로운 시 의식에 불교적 사유가 자연스럽게 접목되어 수준 높은 작품을 양산할 수 있는 것은 불교적 가치관이 디지털 세계의 가능성을 더욱 확장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1906년 대구 여사의 〈혈죽가〉를 효시로 하여 현대시조가 민족의 혈관에 면면히 흐르는 전통적 가치를 담아내는 문학 양식 역할을 해왔음을 8회에 걸쳐 살펴보았다.
종교와 사상을 떠나 시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시조라는 전통적 가락에 스며든 불교적 정서는 공동체 안에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들을 계승하며 고유한 잠재적 능력을 확대해 왔다. 또한 시조는 불교를 매개로 하여 민족정신을 구현하고 그 문학적 의미를 확장해왔다.
시조는 앞으로 인류의 보편적 정서를 노래하는 세계적 문학 양식으로 발전해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현대시조에 담긴 불교적 정서를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시조시인들이 앞장서 줄 것을 당부하면서 긴 연재를 마친다. ■
권성훈 poemksh@naver.com
문학평론가.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한신대 종교학과, 경기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 박사후과정 수료.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등이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