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기에 무를 썰어서 말리려다 그만 스 윽....
왼쪽 가운데 손가락을 깊게 베이고 말았다.
그러게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말았어야 했는데.
간단히 밴드만으로 상처를 감싸기에는 심상치가 않았다.
피는 쉬지 않고 철철 흐를 듯 했고,
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최대한 꼭꼭 눌렀다.
배추 겉절이에, 생채무침에... 무우청 시래기 삶기...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도대체 내가 한 일이 몇 가지던가?
식구도 없는데 날마다 나는 습관처럼 곧 비워질 김치통을 염려하고
꼭 채워두어야 할 것을 걱정한다.
스스로가 벌이는 일이니 탓할 대상도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바쁜 시간들이 왜 이리 기쁜지 모르겠다.
"냉장고에 있는 것만으로도 한참은 먹겠는데,
왜 날마다 뭘 만드는지..."
- 나물이며, 김치며 다 사다 먹을까요?
"반찬 몇 가지 먹으면 끝인데, 나 같으면 십분 설겆이로 끝날 일을
온 종일 꺼냈다 넣었다 일 삼아 하고 있으니...."
- 반찬 하나 하려면 거기에 딸린 양념들을 준비해 놔야 하니 일이 많죠.
"그냥 간단히 먹으면 되지."
그의 핀잔이 예전처럼 상처가 되거나 하지 않으니
그러든 말든 나는 나의 일을 한다.
흐르는 시간은 그래서 참 고마운 것이지.
아침에 손가락을 베이고 나니 어젯 저녁 그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너무 일을 만들어 하지 말라는 뜻인데....
한참동안 눌러도 멈추지 않는 피를 네모난 밴드 두개로 감싸고
다시 밴드 두개까지... 칭칭 동여맸다.
사과, 호박, 무까지 건조기에 말리려던 것을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다음에 하자.
******
세인이는 엄마가 만들어다 준 겉절이를 맛보며
"엄마, 음식도 자꾸 만들면 늘지. 맛있다."
- 이번엔 좀 짜게 됐어. 그래도 익으면 그게 나아. 싱거우면 우선 먹기는 좋지만 지려서...
자꾸 관심을 갖고 하니까 요리도 늘어.
그래서 늙을 때까지 배우는데는 끝이 없나보다.
버섯 불고기랑, 연시감, 단감, 뻥튀기 등을 식탁 위에 펼쳐 놓으니
배가 고팠는지 세인이는 이것 저것 살펴 보며 뿌듯해 한다.
근래들어 세인이는 엄마의 모든 것에 무작정 신뢰를 보인다.
- 밥통에 밥이 왜 이래? 언제 적 거니?
"좀 됐어. 다빈이는 집에서 안 먹거든."
- 엄마가 얼른 해줄께. 햅쌀로 지으면 맛있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가까운 사이라 해도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쓰는 기분으로 사는 일.
그리고 그로 인해 변화되어지는 작은 기쁨들.
나는 이 맛에 산다.
한참동안 아주 오랫동안 가까이 하기엔 먼 아이였는데....
- 그 해 6월 어느날 오후,
세인이가 엄마랑 바람 쐬러 가자고 해서 찾은 곳이 백운호수였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날마다 지금 오가는 그곳이더라고...
사람 일은 정말 예측할 수가 없어서
그날 그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것 같다.
엄마는 그 때 세인이랑 함께 했던 날을 잊지 못하지!
참 고마웠다는 생각, 우리 열심히 착하게 살자.
" 아! 그 젤리팥빙수... 내가 운전면허 따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떻게 보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복선을 제시한 것일수도.
살면서 거쳐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어떤 일에서든
진상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살다보면 다시 볼 일이 생기니까.
그래서 착하게 산 사람들이 나이 들면 맘 편하게 사는지도."
세인이가 든든한 엄마 편이 되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그래서 절대 슬퍼할 일도, 걱정할 것에 대해서도
당신의 뜻이려니 ......
우리는 그저 열심히 오늘을 살 뿐이라고.
2017년 10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