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의 봉전제도(封田制度)〉
고구려에는 녹공신(祿功臣) 사식읍(賜食邑)이란 기록이 있다. 따라서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 식읍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 유리왕(瑠璃王, BC19~AD18) 때 분노(芬奴)가 해비(解卑)를 쳐서 항복시키니 왕이 공상으로 식읍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분노는 모든 것이 왕의 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내가 무슨 힘으로 공을 세웠겠느냐며 사양하자 황금 3천근(문헌비고,下 p. 524)양마 10필을 사했다.
△ 신대왕(新大王, 165~79) 때 왕이 달가(達可)를 안국군(安國君)으로, 향안(鄕安)을 호국군(護國君)으로 봉하면서 봉군제를 시작한 기록이 있다. 또 명임답부(明臨答夫)가 대거 내침하는 한병(漢兵)을 대파하자 좌원군(坐原君)을 봉하고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줬다.
△ 동천왕(東川王, 227~248) 때 왕이 밀우(密友)라는 승전(勝戰) 공신에게 곡청과 수곡을, 유유(紐由)라는 공신에게 압록 두눌 하원을 식읍으로 주었다.
△ 봉상왕(烽上王, 292~300) 때 모용외(慕容廆)와 고노자(高奴子)가 적국을 치니 모용외에게 9등급 중 제6등급인 북부소형(北部小兄)을 주고 고노자에겐 제5등 등급인 대형(大兄)벼슬을 주어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주었다.
△ 평원왕(平原王, 559~590) 때 온달(溫達)이 북주(北洲)의 무제가 요동왕을 치고 여세로 고구려를 침입하는 것을 격파하자 그 공으로 대형의 벼슬을 내렸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봉전제도(封田制度)〉
조정에 공신당(功臣堂)을 설치하고 3한공신(三韓功臣)의 그림을 그려 동․서벽에 걸었다는 기록과 11대 문종(1046~1083) 때 정2품인 상주국(上柱國)과 주국의 훈계를 설치해 25대 충렬왕(1274~308) 때 폐지한 후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5등급의 작위를 신설했다. 이는 중국의 송(420~478), 북주(557~581), 당(618~907)대의 제도로 북주 고조가 편원왕에게 내린 관직 중 요동개국공이라 한다.
공후국공(公侯國公)은 식읍 3천호, 군공(郡公)은 2천호, 현후(縣侯)는 1천호, 현백(縣伯)은 7백호, 개국자(開國子)는 5백호, 현남(縣男)은 3백호의 식읍을 주었으며, 충렬왕 때 폐지했다가 31대 공민왕 5년(1356)에 다시 복구했다가 1371년에 다시 폐지했다. 작위제도는 정연하게 시행됐으나 말기에는 혼란했다. 하지만 공이 크면 군에 봉하고, 기왕의 식읍 대신 조정에서 일괄적으로 녹을 주는 제도를 운영했다.
△ 태조(太祖, 918~943)
태조는 3국통일 후 민족의 융합과 호족들을 다스리기 위한 정책을 폈다. 그 연장선상에서 신라의 경순왕(927~935)이 투항하자 태자보다 상위인 '정승(政丞)'에 임명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주는 한편 신라의 귀족들에게도 전록을 주고 관료로 등용했다. 또 후백제 견훤이 935년 투항하자 그를 상부(尙父)로 대접, 백관의 상위(上位)에 서게 하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 현종(顯宗, 1009~1030)
왕이 즉위한 직후 글안족이 침입하면서 조정의 재정이 궁해 경군(京軍)의 영업전(營業田)을 빼앗아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최질·김훈 등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가도(李可道?~1034)는 화주(和州)방어사로 재직하다 만기가 돼 집에 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격분, 김맹(金猛) 등과 모의해 스스로 서경유수판관의 직함을 가지고 이들의 목을 베는 등 자주 공을 세우자 상서우승(尙書右丞), 동중추부사(同中樞副使), 호부상서(戶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등 벼슬과 공호를 받았다.
그는 현종 20년(1029) 때 이응보(異膺甫) 등과 함께 개경의 나성(羅城)을 쌓았다. 왕은 공을 인정하여 검교태의행이부상서 겸 태자소사, 참지정사, 상주국개성현개성백(上柱國開城縣開城伯)을 봉하고 식읍 7천호를 주고, 왕씨로 사성했으며 문종 때는 또 협모동덕치리공신(協謀同德致理功臣)에 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란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설총(辥聰)의 자는 총지(聰智) 호는 빙월당(氷月堂)이다. 신라 35대 경덕왕(724~765) 때 강수·최치원과 3대 문장의 한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원효대사(617~686)는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라, 기둥을 깎아 하늘을 받치리(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불러 태종무열왕(654~661) 김춘추의 귀에 들어가 왕의 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게 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설총이다.
설총은 경사에 정통했고 이두(吏讀)를 만들었다. 박사로 9경을 처음으로 구결(口訣)로 강론하며 후학을 지도했다. 흔히 그가 이두를 창제했다 하나 그가 출생하기 이전인 진평왕(579~631) 때는 서동요(薯童謠), 선덕여왕(632~647) 때는 풍요(風謠) 등이 이두로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집대성한 것으로 보이며,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신문왕(681~692)에게 충간한 유학자니 현재 경주시 서악동 서악서원에 홍유후 설총이란 위패가 있다.
고려의 현종은 설총이 비록 신라 때의 인물이지만 그의 업적을 기려 왕 13년(1023)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내리고 공자묘정(孔子廟廷)에 종사케 했다. 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 3대문장으로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경주 사랑부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수학, 6년만인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해 그곳에서 관리생활을 했다. 귀국 후 시무(時務) 10조를 내어 아찬으로 봉직했다.
그는 신라가 기울자 고려 태조 왕건에게 「계림은 낙엽이요 송악은 청산이니(鷄林黃葉 鵠林靑山)」란 글을 보냈다. 왕(현종)은 최치원이 "태조의 조국(肇國)을 은밀히 찬동하며 도왔다" 하여 왕 11년(1020)에 그 공을 찬양하여 내사령(內史令) 벼슬을 내려 문묘에 종사하게 하고 14년(1023)에는 문창후(文昌侯)를 내렸다. 사육집(四六集) 1권, 계원필경 20권, 문집 30권, 잡시부 및 표주집(表奏集) 28권, 중산복궤집 5권, 금문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