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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흑인 사회의 분노
- 4.29 흑인폭등은 한.흑인 갈등이 아니다.
글/ 은호기, 자유기고가, 샌디에이고 거주
그 다시 치솟은 흑인들의 분노
27년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리고 27년 전의 상혼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또다시 거대하고 강렬한 흑인들의 분노가 로스• 엔젤레스를 무섭게 할퀴었다. 비록 이번 폭동의 직접적인 발단은 로드니 킹 구타 사건으로 기소된 백인경찰에 대한 무죄평결에서 비롯되었지만, 근본적인 흑인문제가 아직도 무섭게 도사리 고 있다는 것을 거듭 입증한 셈이다. 이른바 '왓츠폭동' 이라 일컬어지는 1965년의 분노가, 똑같은 지역에서 동일한 형태로 다시 일어났다는 것은 한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흑인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의 노력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의 분노는 치유되기는 커녕 오히려 끊임없이 더욱 축적되어 왔으며, 마치 활화산이 지각의 얕은 곳을 찾아 분출되듯이 분출의 계기만을 찾아왔다고 하겠다.
이번 폭동의 진원지인 로스 엔젤레스의 중남부지역 은 흑인 밀집지역(인구 523, 000명)으로써 40%에 달하는 실업율, 고등학교 중퇴율이 30%에 이르는 빈곤과 범죄에 시달리는 지역이다.
1965년 왓츠폭동이후 존슨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Great Society) 프로그램에 힘입어 흑인빈곤문제에 많은 진전을 보아왔으나, 1969년 이후 특히 레이건 부시정권을 거치면서 국제 긴장정책이 중시되는 반면, 상대적으로 사회복지제도가 등한시되어 왔다. 미 전국 도시흑인 빈민율은 1969년의 21.2%에서 1990년 33.8%로 약화되었으며(백인 14.3%), 흑인아동의 34%가 성장과정의 10 년을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백인아동 3%)
여기에 1990년부터 불어닥친 경제불황은 흑인의 생활에 결정적인 타격으로 작용했으며, 라틴계 인구의 급속한 증가 동양계 이민자의 수적 증가 및 흑인지역 상권의 장악은 흑인사회에 위기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흑인의 불이익은 전적으로 백인위주로 되어있는 제도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사법제도 역시 흑인에게는 불공평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그들은 강하게 믿고 있다. 표에서 보듯이 모든 흑인의 폭동이 흑인과 경찰 관계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많은 시사를 던져 주고 있다. 이번 사건도 백인경찰에 의한 흑인 구타사건의 무죄평결에서 비롯되었음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D 로드니 킹 구타사건
작년(1991년) 3월 3일, 과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한 무리의 경찰차들이 추격, 흑인 운전수를 체포하였다. 체포과정에서, 네 명의 백인 경찰관들은 십여명의 경찰 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흑인피의자를 곤봉으로 죽도록 두들겨 팼다. 마침 한 시민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 장면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았으며, 이 구타장면은 곧바로 TV를 통하여 전국에 방영되었다. TV를 지켜본 시민들은 경찰관들의 과도하고도 불필요한 폭력에 분노하였으며, 급기야 부시 대통령도 '혐오스런 일(Disgusting) 이라고 경찰관의 폭력을 비난하기 에 이르렀다.
로스 엔젤레스 경찰위원회는 즉시 크리스토퍼 위원 회(The Christopher Commission) 를 구성, 조사에 착수하였다. 동조사 위원회는 경찰국내에 만연되어 있는 인종주의와 폭력성을 지적하면서 경찰국의 범죄전쟁은 곧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공격'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궁색한 경찰국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네 명의 백인 경찰관은 기소되어 로스 엔젤레스 지방법원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피고인들의 변호인은 공정한 재판을 이유로 법원 기피신청을 내게 되었고, 로스 엔젤레 스 항소법원은 기피신청을 이유있다고 받아들여 로스 엔젤레스 인근 벤추라 카운티의 한 주택 도시인 시미 밸리시의 지방법원으로 사건을 이첩하였다. 의도적이었던 아니면 우연이었던, 시미 밸리시는 많은 전• 현직 경 찰관이 거주하는 백인주택도시로서 경찰관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인 도시이다. 게다가 배심원 구성에 있어서, 거주 인종비율에 따라 흑인 배심원이 배제되었으며 (10명의 백인, 아시아계 1 인, 히스패닉계 1인), 피해자의 증인 출두마저 봉쇄되는 등 피고인(경찰관) 변호사들이 재판을 몰아가는 꼴이 되었다. 확실한 물적 증거인 비디오 테잎은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으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배심원은 네 명의 백인 경찰관에게 무죄평결을 내렸다.
(1992년 4월 29일)
로드니 킹 구타 경찰관 재판을 신경을 곤두세워 지 켜보던 흑인사회는 무죄평결의 결론에 접하자, 그들의 관심은 곧바로 분노로, 분노는 폭동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흑인 커뮤니티의 주장처럼, 미국의 법은 흑인에게 불공평하고, 법의 집행과정 및 사법과정은 흑인에게 불공정한가. 만일, 네 명의 흑인 경찰관이 백인 피의자를 죽도록 팼다면, 그 경우에도 무죄평결이 가능했을까.
공교롭게도 로드니 킹 구타사건의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평결을 받던 바로 그날, 쌘디에고의 한 흑인, 리키 데일 토머스(Ricky Dale Thomas)는 텍사스의 홉킨스 형 무소에서 무죄 석방되었다. 토머스는 지난 1991년 1월 89세의 노파로부터 단돈27불을 강탈했다는 혐의로 체포• 기소되어 있었다. 흑인 토마스는 사건 당일인 1989년 10월 20일에는 쌘디에고의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아리바이를 내세웠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진범이 자수하여 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1년 4개월만에 무죄 석방되었다.
또 얼마전에는 로스 엔젤레스 경찰관을 살해했다는 협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두 명의 흑인이17년만에 무죄 석방된 일이 있었다. 그들의 재판과정에서 경찰관의 증거, 증인조작이 들어났기 때문이다.
흑인과 미국사회
흔히들 미국을 풍요와 영광, 정의와 평화 등의 좋은 말로만 규정하여 왔다. 그러나 풍요와 정의의 저편에는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처참한 삶, 법률 밖으로 내팽개 쳐진 부정의한 삶이 있어 왔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 사회구조를 제시• 잭슨은 국내 식민주의로 규정한다. 미국의 신은 돈이며, 백인들의 돈에 대한 만족감 성취를 위하여 흑인은 부단히 착취당하고 희생을 강요하여 왔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백인 - 흑인간의 종속관계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기본관계를 제도화하였으며, 이 기본 관계를 유지키 위하여 무한한 경찰력을 동원, 침묵을 강요하고 있으며, 사법제도는 제도권의 무한폭력을 늘 정당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속에서 흑인의 행동양식과 사고능력은 늘 백인에 의해서 강제로 규정되어 왔으며, 역사는 백인 중심으로 조작되고 단절되어 왔다. 그리하여 흑인은 자기들의 뿌리마져 잃어버렸으며, 그렇다고 이 땅에서 그들 자신을 백인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역사적 기아가 되어 버렸다.
한때 멜팅• 팟(Meling Pot) 이론이 기세를 부리었다. 그러나 이 어줍잖은 멜팅• 팟 이론은 기실 백인 종족간의 이론이지 유색• 소수민족간의 설명은 아니다. 흑인은 (유색소수민족도 마찬가지이지만) 백인과 융해• 통합은 커녕, 조화조차도 이루지 못한 채, 백인의 문화를 위하여 솥도가니 밑에서 다만 탓을 뿐이라는 흑인 의 절규는 깊이 새겨 볼만하다.
미국의 사회구조는 크게는 백• 흑구조로, 다시 흑인 사회로 대변되는 유색소수민족간의 갈등구조를 기본으 로 하고 있다. 백인들은 큼직한 자기들 몫을 아예 확연히 금그어 확보하고, 나머지 작은 몫(자기들이 포기한 몫)을 유색소수민족사회에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가끔, 백인의 몫에 과감히 도전하는 소수민족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 갈등구조를 유지, 관철키 위하여 백인 정치권력은 끊임없이 국내, 국제적으로 긴장을 조성시키고 있다.
흑인과 흑인사회
이번의 4.29 흑인폭동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측은 우리 한인사회이다. 우선 이번 폭동과정에서 한 청년의 목숨을 잃어야 했으며, 부상자 수도 적지 않게 나왔다. 재산피해는 엄청나다. 흑인지역의 가게는 물론, 흑인사회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코리아타운마저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한인사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이민 1세임을 감안할 때, 이제까지의 피나는 노력이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억울함,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한• 흑인간의 갈등은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어왔다. (손쉽게 한• 흑갈등'으로 표현되지만, 정확하게는 한인가게주인과 흑인고객간의 갈등이다.)
1965년의 왓츠폭동으로 혼쭐이 난 유태인이 흑인지역 장사에서 손을 떼고 나오면서 그 자리를 우리 한인들이 메꾸기 시작하여 유태인들보다 더 극성을 부리면서 크게 성장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한인가게들은 강도, 피살, 도둑, 방화 등의 범죄에 시달려 왔으며, 반면 부당하게 높은 가격, 경멸과 불친절을 흑인고객은 감수하여야만 하였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한인가게수가 늘어나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욱 깊어졌다. 그러던 차에 로드니 킹 구타사건 바로 전에 이른바 '두순자사건'이 일어났다. 리쿼 스토어 주인 두순자여인이 흑인 소녀와의 다툼끝에 뒤돌아 나가는 흑인소녀를 뒤에서 쏘아 살해 한 충격적인 사건 말이다. 이 사건은 가게주인과 고객간의 단순한 사건을 넘어서 양 코뮤니티 사건으로 비화되었으며, 두순자 피고인이 백인판사에 의하여 3년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인종간의 갈등으로 발전하였다.
마침 로드니 킹 구타사건에 시달리던 경찰당국과 언론은 두순자사건을 크게 확대, 한 •흑갈등으로 물고 갔으며, 이러한 시작변경은 4.29폭동기간에도 크게 작용하여 엉뚱하게 한인사회가 흑인분노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백인에 대한 흑인의 적대 감정을 두순자사건을 이용, 한인에게 돌렸다는 말이다.
흑인지역에서는, 지난 65년의 왓츠폭동때 유태인이 당했듯이 어쩔수 없었다 할지라도 흑인사회와는 관련이 없는 코리아타운마져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하겠다. 더욱이 시간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코리아타운은 충분히 보호될 수 있었고 마땅히 방어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어전선을 코리아타운 외곽에 친 것은 당국의 의도된 처사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물론, 초기 폭동진압의 회피, 폭동당시 경찰국장을 비롯한 대부분 경찰간부의 이석, 경계령(Tatical Alert) 의지연 등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으며, 윌슨 주지사의 즉각 출동명령에도 불구하고 방위군마져 늦장 투입되는 경위 등이 곧 밝혀지리라 본다. 그 때에 코리아 타운 방위문제도 정직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한인사회의 과제
4.29폭동의 주역은 흑인이고 피해자는 백인 아닌 우리 한인이어서 문제의 본질이 감추어진 채 한• 흑갈등이 더욱 첨예화되고 있다. 그러나 본질은 어디까지나 백• 흑 이중사회구조에 내재하고 있는 갈등에 있는 것이다.
1965년 왓츠폭동의 진상을 조사한 바 있는 커너위원회(The Keme Connision)는 미국은 '두 개의 사회, 즉 백인사회와 흑인사회가 따로 따로 불공평하게 분리되어가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으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 는 한 폭동의 가능성은 항상 내재되어 있다고 경고한바 있다. 그런데도 백인들은 이 이중구조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당연시하여 왔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모두가 당연시 하듯 말이다. 다만 뉴톤만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원리를 알아냈듯이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작용할때에만 이중구조의 모순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이 이중구조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폭동은 인종간의 갈등의 표현이며, 인종갈등은 빈약한 사회보장제도에 기인한다면서, 이번 흑인폭동은 미국이 너무나 보수화하고 자본주의화한 결과라고 지적한 불란서 대통령 미테랑의 말을 되씹어 볼만하다. 우리는 억울하긴 하지만 우리의 분노를 흑인에로부터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돌릴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다. 이번의 4.29폭동은 흑인사회 측에서 보면 민권운동의 가장 강렬한 표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만큼 기를 펴고 살 수 있다는 것도 흑인들의 줄기차고 강렬한 민권투쟁에 힘입은 바 크다. 초기의 이민 1세 선조들의 노예적 생활을 상기한다면 이점 얼른 수긍이 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백인편에 두고 백인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따르려는 허위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키 어렵다. 우리는 이러한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흑인을 비롯한 소수민족그룹과 손을 맞잡고 미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데 더욱 노력을 쏟아야 할 줄 안다.
또한 이번의 값비싼 회생을 계기로 우리 삶의 자세를 차분히 검토해봐야 한다. 무리한 경제팽창주의, 경제 제일주의가 한인 코뮤니티의 급속한 양적성장에 기여하긴 하였으나 바람직한 삶이었다고는 자신있게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이번 폭동으로 코리아 타운이 쑥밭이 되는 동안, 중국타운이나 일본타운은 철저히 보호되었으며, 방위군 투입시에도 즉시 배치 • 보호되었다. 이 사실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무게, 한국 정부는 깊게 생각해 보길 권고하는 바이며, 이는 결코 사족이 아닐 터이다.
199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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