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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박용하
사람에게 존경심을 갖는 저녁이다
……
마더 테레사의
주름 높은
황혼의 얼굴을 보면
거기엔 어떤 미풍도 남아 있어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거기에 어떤 無限이 흐르고 있다
인종을 넘어간……
종교를 넘어간……
국가를 넘어간……
나를 넘어간……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어떤 훈풍이 흐르고 있다
무한을 보여줄 수 있는 인류가 있다니!
훈풍을 보여줄 수 있는 죽음이 있다니!
마음을 무릎에 붙이고
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존경하는,
있을 수 없는 저녁이다
<시 읽기> 남태평양/박용하
박용하의 제3시집 『영혼의 북쪽』을 읽던 날 저녁, 저는 이 시집 속에 들어 있는 한 편의 시 앞에서 오랜 시간 동안 눈길을 떼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를 쓰던 첫날부터 이 땅의 인간들을 향해 당신들이야말로 한 구루의 나무만도 못한 존재라며 지구에서 빨리 떠나라고 마구 호통을 치던 박용하가, 이 한 편의 작품 속에서만은 인간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한 채 머리를 숙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다소곳이 인간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게 한 것일까요? 이 궁금증은 그가 쓴 한 편의 작품을 보면 금방 풀립니다.
사람에게 존경심을 갖는 저녁이다
……
마더 테레사의
주름 높은
황혼의 얼굴을 보면
거기엔 어떤 미풍도 남아 있어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거기에 어떤 無限이 흐르고 있다
인종을 넘어간……
종교를 넘어간……
국가를 넘어간……
나를 넘어간……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어떤 훈풍이 흐르고 있다
무한을 보여줄 수 있는 인류가 있다니!
훈풍을 보여줄 수 있는 죽음이 있다니!
마음을 무릎에 붙이고
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존경하는,
있을 수 없는 저녁이다
─<남태평양> 전문
어떠십니까? 금방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으셨습니까? 박용하가 “사람을 존경하는” “있을 수 없는 저녁” 시간을 맞이한 것은 바로 저 유명한 이 시대의 성녀, 마더 테레사의 생애를 기억해내었기 때문입니다. 마더 테레사에 대한 설명은 이곳에서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그의 생애를 모르는 사람은 이 시대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글이 진행을 위하여 몇 가지만 덧붙여보기로 합니다. 그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난 카톨릭 종파의 수녀입니다. 그러나 그는 카톨릭 교계를 넘어, 저 인도에 있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집에서 죽음 앞에 비참하게 놓인 뭇 인간들을 돌보며 살다가 그이 생애를 마친 사람입니다. 그의 이런 생애는 자아를, 가족을, 국가를, 종교를, 그리고 또 무엇을, 그것이 인간들의 인간적인 삶을 가로막는 것이라며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과감히 뛰어넘고자 한, 한 인간의 ‘헌신적이고도 용감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한 인간이 뭇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자아의 이기적 욕망을 버릴 수 있는 극한이 어느 지점인지를 그는 몸으로 직접 실천하여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마더 테레사의 일생을, 그렇게 살다가 곱게 맞이한 그의 죽음을 보면서, 박용하는 위의 시를 쓴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진정 “사람에게 존경심을 갖는 저녁”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존경심을 갖는 시간이 오게 되면 마음이 어떻게 되던가요. 불행하게도 여태껏 그런 시간이 없었다고요? 어쩌면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존경하기가 어려운 난해한(?) 동물이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어렵게. 진정, 한 인간을, 아니 더 많은 인간을 존경하는 시간이 오면, 우리의 내면은 정말로 큰 변화를 겪지 않습니까? 그런 시간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의 거칠었던 숨소리는 차분해지고, 우리의 메말랐던 마음은 촉촉이 젖어들고, 우리의 충혈됐던 두 눈을 부드러워지고, 우리의 차가웠던 몸에는 온기가 감돌고, 우리의 들떴던 심장은 가라앉고, 우리의 막혔던 숨구멍은 열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럴 때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난 것 앞에 모처럼 감사의 마음을 갖고 속으로 떨게 됩니다.
박용하의 그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한 후에, 다시 앞의 인용시를 놓고 방금 함께 나눈 이야기를 더 이어갈까 합니다. 그것은 박용하와 그의 시가 가진 개성적인 면모를 듣고 났을 때, 박용하의 앞 인용 시에 대한 감상도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박용하는 강원도 토박입니다. 그는 강원도 사천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닐 때까지 강원도에서 살았습니다. 강원도는 그의 원체험을 형성한 곳입니다. 저는 이렇게 강원도가 원체험을 형성한 박용하에게서 강원도의 이미지를 슬며시 읽어냅니다. 강원도의 이미지라고 써 놓으니 조금 어색하고 막연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군요.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저는 그에게서 읽은 강원도의 이미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강원도가 그를 키웠다고 말한 만큼 박용하의 정신세계는 강원도의 이미지와 떼어놓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박용하에게서 강원도의 기세 좋은 산세를 읽어냅니다. 저는 박용하에게서 사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의 분출력과 강인함을 읽어냅니다. 저는 박용하에게서 문명의 오지인 강원도 땅의 순결성과 순정성을 읽어냅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조금 의아해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박용하의 시를 보면, 그는 기세 좋은 북방의 사나이처럼 소리칩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강합니다. 그는 이 땅의 인간과 자연과 지구를 홀로라도 끝까지 지키려는 전위병처럼 싸움터의 맨 앞자리에 서서 목놓아(?) 외칩니다. 그의 이런 목소리는 단호할 뿐만 아니라 간절합니다. 다들 약은 자가 되어 성대를 아끼고 몸을 아끼며 에너지를 적절히 배분하고 있는 이 시대에, 박용하는 순정한 터프 가이처럼 자신의 성대가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몸이 신음하는 줄도 모르고, 일선에 나서서 날마다 온몸으로 외쳐대는 시인입니다. 그는 이 땅의 인간들이 살아온 모습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다그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인 당신들은 어쩔 셈이냐고? 도대체 인간인 당신들은 지구를 이끌어갈 능력이 있기나 한 것이냐고? 도대체 인간인 당신들은 지구를 이끌어갈 능력이 있기나 한 것이냐고? 도대체 인간인 당신들은 가망성이 있는 존재이냐고? 박용하가 이 땅의 인간들을 향해 토해내는 안타까움의 말들은 얼마나 강력하고 간절한지 그의 몸을 상하게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듣는 이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할 정도입니다.
순정성과 순결성이 없다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기세 좋은 산맥의 강직함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나무들이 생명력을 내장시키지 않은 자가 어찌 이렇게 외쳐댈 수 있겠습니까? 기세 좋은 산맥의 강직함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나무들의 생명력을 내장시키지 않은 자가 어찌 이렇게 외쳐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점에서 그야말로 강원도의 시인이라고, 그에게서 강원도의 이미지가 포착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박용하는 인간 대신 나무를 믿는 시인입니다. 여기서 나무란 나무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그는 ‘나무교도’처럼 보입니다. 나무 앞에서, 아니 자연 앞에서, 그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겸허한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숙입니다. 나무가 아니면 그는 이 땅세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에게 나무는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그의 첫 시집 제목은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입니다. 그는 이 시집 속의 한 작품, <절망에서-숨쉼의 나무로>에서 감히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건대 난 여자 없인 살아도
나무, 나-아我- 무無 없인 못 산다
단 하루는 둘째로 치고 거짓말 보태
찰나도 못 건너간다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중심이라곤 없는
집단으로 쥐약을 처먹은 이놈의 세상에
나무는 예나 이제나
저기 황량한 야野-심心에
그냥 그렇게 서 있다
─<절망에서-숨쉼의 나무로> 부분
더 이상 제 말이 없어도 박용하의 ‘나무교도’다운 측면을 충분이 짐작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요즘은 우리 시단에 ‘나무교도’가 하도 많아서 그 진위를 가리기가 쉽지 않고, 또 그 수가 많아진 관계로 희소성도 아주 줄어든 편이지만, 누가 뭐래도, 제아무리 ‘나무교도’가 많이 생겨서 교계가 혼탁해졌다 하더라도, 박용하는 원조 격의, 아니 대부 격의 ‘나무교도’로서 그 품격을 달리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저 앞에서 인용한 박용하의 작품 <남태평양>을 함께 감상해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앞에서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다른 길을 거쳐왔습니다.
박용하는 <남태평양>에서 아더 테레사의 생애와 죽음이 세계를 보고 “마음을 무릎에 붙이고/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존경하는” “있을 수 없는 저녁”을 맞이했다고 숙연해진 마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의 수가 60억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있을 수 없는 저녁” 시간을 이토록 드물게 맞이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뿐입니까? 인간사가 전개된 이래 지금까지 이 땅에 발붙였던 인간의 수가 얼마나 엄청난데, 이렇게 “있을 수 없는 저녁” 시간이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만큼 특별한 시간으로 찾아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저는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박용하의 이런 심정에 충분히 공감하시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 본래의 그 난해한 혹은 난처한(?)본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박용하가 지적하듯 “색과 근육의 공화국”인 이 시대 속에서 진정 인간이 존경받을 만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내면은 검고, 우리의 표정은 번들거리고, 우리의 걸음걸이는 탐욕스럽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보며 우리는 자장自淨의 시간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영혼을 말갛게 헹구어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을 찾아갑니다. 바다를 찾아갑니다. 사막을 찾아갑니다. 절을 찾아갑니다. 교회를 찾아갑니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하늘을 바라봅니다. 지평선을 우러릅니다. 푸르른 들녘을 바라봅니다. 어떻게든 우리의 영혼은 헹구어지기를 소망하니까요.
박용하가 마더 테레사 앞에서 “마음을 무릎에 붙이고/아주 오랜 만에/사람을 존경하는” “있을 수 없는 저녁” 시간을 맞이한 것은 바로 마더 테레사가 그의 영혼을 말갛게 헹구어낼 수 있게 해준 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박용하에게 산이었습니다. 바다였습니다. 사막이었습니다. 절이었습니다. 교회였습니다. 하늘이었습니다. 지평선이었습니다. 푸른 들녘이었습니다. 그는 마더 테레사 앞에서 “색과 근육”으로 무장된 자아의 이기적인 방어벽이 무력하게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가 없는 ‘나무(無我)’의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박용하는 <남태평양>의 첫 행이자 첫 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사람에게 존경심을 갖는 저녁이다
그러고 나서는 그는 다음 연의 말을 이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시간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말없음표만 찍어놨습니다.
……
사실 존경심 앞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말을 잊게 하는 것, 말을 필요로 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존경심이고 그 존경심의 원천인 감동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박용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몇 마디 말을 이어갑니다. 말없음표만으로 끝낼 수 없는 말들을 그는 조용히 열어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주름 놓은
황혼의 얼굴을 보면
거기엔 어떤 미풍도 남아 있어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거기에 어떤 無限이 흐르고 있다
여러분들은 ‘무한無限’이 표정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 무한의 표정 속에 자신을 넣어보지 않은 자가, 그리고 그 무한의 세계를 그리워해보지 않는 자가, 어떻게 겸허한 마음의 자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러한 자가 무심함 속에서 찾아오는 고요함의 참된 의미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무한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고 난 자만이 성숙한 어른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요?
박용하는 이러한 무한의 표정을 마더 테레사에게서 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마더 테레사의 주름 많은 “황혼의 얼굴”을 보면서 “어떤 미풍”도 그곳엔 없었지만 “어떤 無限”이 거기서 흐르고 있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박용하가 방금 말한 “어떤 미풍”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표현일까요? 그것은 생물학적인 차원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박용하가 이 시를 쓸 무렵의 마더 테레사는 한 인간으로서 생물학적인 수명을 다할 지경에 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미풍”보다 더 값진 “어떤 無限”을 그에게서 발견하였습니다. 박용하가 마더 테레사에게서 발견한 이 “어떤 無限”은 유한의 세계가 아닌 영원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영원의 세계는 이기성을 띤 세계가 아니라 자아 초월과 자아 해체의 세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무한 혹은 영원의 세계 앞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지 않고 물처럼 부드럽게 흐릅니다.
박용하는 이어서 조금 더 말합니다. 그것은 역시 마더 테레사에 관한 것입니다.
인종을 넘어간……
종교를 넘어간……
국가를 넘어간……
나를 넘어간……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어떤 훈풍이 흐르고 있다
위 인용 부분에서 관심을 끄는 표현은 “넘어간”과 “어떤 훈풍”입니다. 그러니까 ‘넘어간 사람에게서만 맛볼 수 있는 “어떤 훈풍”을 가진 사람, 그가 바로 마더 테레사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넘어간다는 말입니까? 박용하는 위 인용 부분에서 인종, 종교, 국가, 나 등을 열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만큼 인간들의 세계에서 이기적인 실체도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이들을 넘어선 사람이라면 다른 그 무엇을 넘어서기란 아주 쉬운 일이겠지요. 다시 한 번 더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훈풍”이란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훈풍이란 따스한 기운입니다. 이 따스한 기운은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을 살리는 원천입니다. 따스한 기운은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을 살리는 원천입니다. 따스한 훈풍이 흐르는 자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칼날을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따스한 훈풍은 타인을 무장 해제시키는 원천입니다. 마더 테레사의 늙은 얼굴과 작은 체구 앞에서 박용하가 무너진 것은 바로 이 따스한 훈풍의 힘 때문입니다.
박용하는 이렇게 무너진 자신을 보면서, 놀란 듯이, 경탄조로, 느낌표를 찍으며, 다음과 같이 격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무한을 보여줄 수 있는 인류가 있다니!
훈풍을 보여줄 수 있는 죽음이 있다니!
무한을 보여줄 수 있는 삶은 진실로 성공한 삶입니다. 훈풍을 보여줄 수 있는 죽음은 진실로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무한을 보여주는 삶은 그것이 비록 한 개인의 삶일지라도 무한과 같은 넓이를 갖고 있습니다. 훈풍을 보여주는 죽음은 그것이 비록 한 인간의 생물학적인 해제로 이어지는 것일지라도 영원한 살림의 일에 동참하는 신비를 숨기고 있습니다. 박용하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박용하가 찾아내서 보여준 그 ‘무한’과 ‘훈풍’의 얼굴을 박용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로 하여금 오랜만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박용하는 그가 마더 테레사에게서, 다시 말하면 “어떤 無限”과 “어떤 훈풍” 앞에서 느낀 존경심을 또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표현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음을 무릎에 붙이고
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존경하는,
있을 수 없는 저녁이다
그는 자신의 가장 낮은 자세를 가리켜 “마음을 무릎에 붙”였다고 말했습니다. 육체의 무릎을 끓듯이, 그는 마음의 무릎을 끓은 것입니다. 마음의 무릎을 끓었다는 것은 한 대상을 온전한 존재로 가슴속에 받아들이고 그를 존중한다는 뜻입니다(저는 여기서 ‘온전한 존재’란 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런 시간이 찾아온 그날 저녁은 박용하의 삶에서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그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있게 된 것 같다고 그날 저녁의 그 일을 아주 놀라운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존경하는 일이 이토록 놀라운 사건이라니, 참으로 착찹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이것이 사실임을 부정하기가 어려우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 존경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또 어찌하겠습니까?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할 수 없는 한, 인간 속에서 “마음을 무릎에 붙이고” 존경할 만한 대상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먼저 스스로 존경할 만한 대상으로 거듭나자고 초등학교 학생 같은 반성문과 결의문을 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우매한 짓 같으나, 그래도 인간을 믿고 싶은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
첫댓글 시끄러운 요즘 세상에 한번쯤 읽고 생각해볼만 좋은 시입니다. 들끓는 욕망 속 자신을 다 내려놓은 죽음, 한참 사색에 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시를 지은지도 17년이 되는데 이런 좋은 시 한 편 남기고 갔으면, 하고 마음 차분해진 시와 해설에 무릎을 붙여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