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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백에는 프랑스계 주민이 많고 언어도 프랑스어를 사용한다17세기이래의 건축물이 많아
캐나다 최대의 역사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세인트로렌스강 어귀 갑자기 좁아진 지점에 발달한 항구도시이다
빨간지붕 유명한 집인데 지금은 식당입니다
바이킹의 생가이어요
[캐나다 역사 I AD 1000 ~1700년대]
서기 986년 `비야르니`라는 바이킹이 항해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 돌아가는 길 선상에서 지금의 뉴펀들랜드로 짐작되는 육지를 보았다. 그가 바로 멀리서나마 북극대륙을 처음 본 유럽인이 되는 셈이다.
이후 서기 1,000년에는 레이프(Lief)가 지금의 배핀(Baffin) 섬과 래브라도(Labrador) 반도로 생각되는 새로운 땅을 보게 되었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 포도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곳에 상륙했다.
사학자들은 그곳이 지금의 뉴잉글랜드,아니면 뉴펀들랜드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바이킹들은 그곳 연안에 머물면서 원주민들과 거래를 했다.
처음엔 매우 우호적이던 원주민들은 계속 그들의 땅에 눌러 앉으려고하는 눈치가 보이자 싸움을 벌렸고 결국 바이킹들은 원주민들에게 쫓겨 그곳을 떠났다.바이킹들이 그곳에 정착해 있던 기간은 길지 않았으나 그들이 바로 캐나다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15세기에 들어와서 이탈리아 태생의 항해사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을 전제로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가도 인도에 도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 (Isabella)가 제공한 세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을 태우고 항해한 지 70일 만인 그 해 10월 12일 카리브 해의 한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이 새로운 대륙인 줄 모르고 인도의 서쪽인 줄로만 알았다.그래서 그들은 그곳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고
그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에도 북미 원주민들을 아메리칸 인디언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콜럼버스는 오늘날 미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공인받고 있으나, 사실 15세기에는 이미 많은 항해사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고기잡이 배들이 바이킹의 항로를 따라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멀리있는 뉴펀들랜드까지 수년 동안 대구와고래잡이를 다녀갔다.
그곳이 인도의 서쪽이 아니라는 것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에 의해 알려졌으며,신대륙이라는 것은 1513년에 가서야 파나마(Panama)를 횡단하여 태평양을 발견한 발보아(Balboa)에 의해 확인 되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은 베스푸치의 이름 아메리고를 딴 것이다.
16세기 초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중남미에 식민지를 세우고 많은 황금을 본국으로 실어날랐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왕도 드디어 황금 보화를 찾는 일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1534년 카르티에(Jacques Cartier)를 출발 시켰다. 20일간 항해 끝에 뉴펀들랜드를 지나 지금의 세인트 로렌스 만에 도착했다. 그는 남쪽으로 더 내려 가면서 동양으로 가는 항로를 찾아 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당시 지금의 퀘벡(Quebec)에 해당되는 스타다코나(Stadacona)에는
이로쿼이(Iroquois)족에 속하는 한 부족이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가스페 반도에서 사냥을 주로 하면서 살았다.
카르티에는 이 원주민의 추장 돈나코나(Donnacona)의 두 아들을 배에 싣고 다음해에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프랑스로 돌아갔다. 한 가지 수확이 있었다면 그가 본 엄청난 황금어장과 빽빽히 들어선 울창한 삼림에 대한 정보였다.
카르티에는 이 정보로 프랑스 왕을 설득하여 두번째 항해를 허락받아 다시 도전하게 된다.
두번째 항해에서 카르티에는 추장의 두 아들을 약속대로 돌려주었다. 원주민들로부터 강 상류에 가면 큰 마을과 아무도 끝까지 가보지 못한 큰 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주민들과 탐사에 나섰다.세인트 로렌스 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원주민들이 북쪽연안을 가리키며 `가나타Kanata`라고 했다. 가나타는 이로쿼이 어로 마을이란 뜻이었으나,카르티에 일행은 그 말을 그곳의 지명으로 알아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캐나다(Canada)라는 나라 이름이 지어진 유래가 된다.
카르티에는 지금의 몬트리올(Montreal)에 속하는 한 언덕에 올라가서 `국왕의 산`이란 뜻으로 몽레알(Mont R`eal)이라고 명명한 다음 강을 내려다보니 물살이 빠른 속도로 역류하고 있어 더 이상의 탐사는 포기했다.
캐나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괴질로 많은 선원들이 죽었다.카르티에는 살아남은 선원들과 추장 돈나코나를 납치하여 프랑스 왕에게 데려갔다. 돈나코나는 금은 보화가 많은 신비의 왕국을 알려 주겠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돌아가길 희망했으나 프랑스 땅에서 끝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프랑스 왕은 돈나코나 추장이 생전에 했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카르티에에게 세번째 항해를 명했다.
1541년 카르티에는 추장 돈나코나가 말한 왕국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더욱 혹독한 추위와 괴혈병 등으로 많은 선원들의 목숨만 잃은 채 이듬해 봄에 귀국했다. 이와같은 쓰라린 경험 때문에 프랑스는 그 후 60년간 북미 대륙에 다시는 정착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이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았다.
건물 전체가 그림입니다
미대륙을 횡단해서는 동양으로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탐험가들은 남미대륙을 돌아가는 남쪽항로를 찾으려고 했으며 이에 곧 스페인 항해가들은 남미대륙의 끝,케이프 혼(Cape Horn)을 돌아 태평양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탐험가들은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스페인 함대의 공격이 두려워 감히 이 길을 택하지 못하고 대신 북미대륙의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고 했다.
1610년 영국태생의 탐험가 허드슨(Henry Hudson)은 지금의 허드슨 해협과 허드슨 만을 처음으로 탐사했다.
그러나 북극의 바다는 밤이 너무 길고 추위가 혹독해 견디기 힘들었다.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선원들의 선상반란으로 허드슨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몇몇 심복들을 작은 보트에 태워 칠흑같이 캄캄한 혹한의 북극해에 버려졌고 선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북쪽으로 통하는 길을 찾으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고 20세기 초에 와서야 비로소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Roald Amundsen)이 1903년부터 1906년까지 3년에 걸친 사투 끝에 북서 통로의 탐사에 성공한다.
캐나다에서 혹한과 괴혈병 등으로 많은 생명을 잃었던 카르티에의 쓰라린 기억 때문에 프랑스는 몇몇 모피 상인들과 대구잡이 어부들만 드나들었을 뿐,60년 동안이나 캐나다에 대해 아무 미련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계속 미대륙을 탐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영국 탐험대는 중국으로 가는 북서통로를 찾고 있고,특히 영국이 뉴펀들랜드를 자신들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이드님이 사진을 많이 찍어주셨네요
자주 못 찍어줘 미안했나 봐요, 포즈가 다 달라 모두 올립니다
1604년 마침내 지도 제작자인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선장과 몽트(Sieur de Monts)가 이끄는 프랑스 탐사대가 절반이 혹한,괴혈병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은 후 지금의 포트 로열(Port Royal)에 상륙하여 정착했다.
이곳이 프랑스가 북미에 와서 최초로 성공한 정착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프랑스인들은 믹맥(Micmac)부족과 모피 등을 거래하면서 잘 지냈으나 포트 로열은 위치적으로 모피 수집과 내륙 탐사에 불리한 곳이었으므로 그들은 다른 정착지를 찾아야 했다.
그들이 찾은 곳은 카르티에 부하들이 목숨을 잃은 쓰라린 기억의 고장 스타다코나였다.
샹플랭 일행은 생존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큰 문제없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거리의 악사들이 많은곳
문화와 예술의 도시~~ 쾌백 !
지금의 퀘벡 시에 해당되는 스타다코나는 그후 서서히 성장하여 1650년에는 70명의 주민이 살게 되었으며, 북미대륙에 있어서
뉴프랑스 (New France)의 초석이 된다.
1605년 아나폴리스(Annapolis) 강 하구로 이동해 온 프랑스 인들은 통나무로 거처할 집을 짓고 부락을 세웠으며,부락 주위를 요새와 같이 통나무로 겹겹이 울타리를 쳤다. 이곳이 바로 샹플랭이 캐나다 땅에 최초로 영구적인 정착지를 세운 포트 로열이며,그들은 이곳을 아카디아(Acadia)라고 불렀다.
1650년 후부터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200명이던 인구가 1670년에는 370명이 되었고,1750년에는 1만 명에 육박했다.
새로 온 이주민들은 주로 펀디 만 (Bay of Fundy) 연안을 따라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가 아카디아와 퀘벡에 식민지를 세우고 있을 때 영국은 아카디아 남쪽에 뉴잉글랜드라는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늦게 시작된 뉴잉글랜드 식민지는 프랑스의 아카디아보다 훨씬 빨리 성장했다.
식민지 건설 초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뉴잉글랜드로 이주해 왔으며, 조선업과 일용품 생산업체도 늘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 본토와 카리브 해로부터 상선들이 정기적으로 보스턴 등의 항구에 들어왔다.
아카디아에 정착한 프랑스 인들은 세월이 가도 프랑스 정부가 자기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자 모국에 대해 배신감을 갖게 되었으며,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자신들을 이제 프랑스 국민이라기보다 아카디아 인(Acadian)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주로 펀디 만 연안에 모여 살았다.
그런데 프랑스는 통상 지금의 노바 스코샤(Nova Scotia)와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 그리고 뉴브런즈윅(New Brunswick)까지 통틀어 자기들의 식민지라고 했고,영국 역시 이 지역을 자기들의 식민지라고 주장했으므로 영,불 간에
갈등이 움텄다.
그러던 중 1621년 영국 왕 제임스 1세가 알렉산더 경(Sir William Alexander)에게 아카디아를 하사했다.
스코틀랜드 태생인 알렉산더 경은 이곳 이름을 `새로운 스코틀랜드`라는 의미인 노바 스코샤(Nova Scotia)라고 명명하고 그의
아들로 하여금 이곳에 식민지를 세우도록 했으나 그 계획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아카디아는 북미대륙의 교두보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었다.
당시 영국은 뉴펀들랜드에 정착기지를 두고 황금어장인 그랜드 뱅크(Grand Bank)에서 대구잡이를 장악했고,프랑스는 세인트 로렌스 강 유역에 정착기지를 두고 원주민들과의 모피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카디아를 먼저 손에 넣는 쪽이 이 두가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아카디아의 이와같은 지정학적 가치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아카디아를 놓고 100년간이나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이때부터 생긴 두 나라 사이의 숙명적인 앙숙 관계는 오늘날 캐나다가 안고 있는 영국계와 프랑스계 간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진다.
두 나라 사이의 전쟁에 원주민 부족들도 함께 휘말렸다. 동부 삼림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이로쿼이 부족동맹이 영국 편에 가담했고 휴런과 믹맥 족은 프랑스 편에 가담해서 싸웠다.
마침내 1713년 , 두 나라 사이에 위트레흐트 평화조약(Peace of Utrecht)이 체결되었고,이로써 한동안 싸움이 뜸해졌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영국에게 허드슨 만과 뉴펀들랜드,그리고 아카디아까지 내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는 그들에게 주어졌던 천혜의 식민지를 끝내 지키지 못하고 일찍이 뉴잉글랜드 상인들에게 상권을 넘겨주어야 했으며,
끝내는 영국의 공격에 방어할 능력과 대책을 잃고 만 것이었다.
나도 저곳에 서서 사진찍고 싶었는데~~ㅠㅠ
아카디아를 영국에 내준 프랑스는 지금의 케이프 브래턴 섬에 튼튼한 군항을 세웠다. 도시는 적의 공격에 대비해서 돌로 튼튼하게 축조했으며,도시의 이름은 프랑스 국왕의 이름을 따 루이스버그(Louisbourg)라고 명명했다. 프랑스 정부는 뉴펀들랜드에서 정착하고 있던 프랑스 인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키고,아카디아의 쓰라린 경험을 교훈 삼아 본국에서 많은 군대를 데려와 주둔시켰다.
한편 영국의 지배하에 남게 된 프랑스계 아카디아 인들은 영국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은 그 요구를 거절하는 대신 앞으로 영,불 간에 다시 전쟁이 발발할 때는 어떤 편에도 가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은 그들의 약속을 믿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그들을 묵인했다.이렇게 해서 소위 `중립파 프랑스 인(Neutral French)`들이
생겨났다.
영국도 아카디아를 다시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바 스코샤에 강력한 군대를 데려왔고, 1749년 지금의 노바 스코샤에 강력한 군대를
데려왔고,1749년 지금의 노바 스코샤(Nova Scotia)의 주도 핼리팩스(Halifax)에 군사시설과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는 해군 수송선을 동원,2500명이 넘는 사람들을 핼리팩스로 이주시켰다.
영국은 아카디아에서 영국계가 프랑스계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것을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켜야 한다는 판단하에 카톨릭 교도인 프랑스 계 아카디아 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외국인 개신교도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그들 중 대부분은 독일과 스위스계 개신교도들이었고, 그 밖에 네덜란드에서도 모집해 왔으며,심지어 프랑스의 노르망디(Normondy)와 브르타뉴 지방의 프랑스 인 개신교도들까지 데려왔다.
유화인데요 좀 특이한 그림입니다
이와같이 영국이 핼리팩스에 군사시설과 해군기지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켜 프랑스 계 아카디아 인들을 경계하고 있기는
했지만,노바스코샤 식민지는 영국에게 항상 불안한 존재였다.
프랑스 계 아카디아 인들이 영국계 이주자들보다 수적으로 3배나 많은데다,싸움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한 중립파 프랑스 인들도 언제 약속을 깨고 배신할 가능성과 종교적 갈등이었다.
영국은 1755년 프랑스계 아카디아 인들에게 또 다시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강요했다.
또 다시 거절 당하자 드디어 영국은 모든 프랑스 계 아카디아 인들에게 아카디아를 떠나도록 추방령을 내렸다.
당시 1만명의 프랑스 계 8천명 이상을 추방하여 영국 배의 좁은 선창 바닥에 몰아넣었다.
많은 사람들이 항해 도중 목숨을 잃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멀리 남쪽에 있는 영국 식민지로 실려 갔다.
그중 더러는 지금의 루이지애나(Louisiana)까지 실려갔는데,지금까지도 그곳에 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이 사용했던 프랑스 어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변형을 거쳐 오늘날 `루이지애나 `식 불어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 인들이 추방된 후 프랑스 인들이 일구어 놓은 펀디 만 유역의 기름진 땅은 영국인,스코트랜드 인, 독일인 이주자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영국은 아카디아를 더욱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비슷한 시기에 식민지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150년이 지난 후에는 영국 식민지는 2백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식민지에는 고작 6만명이 살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는 본국의 지원과 도움이 항상 필요했던 반면, 영국 식민지는 본국의 지원과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뉴프랑스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것은 영,불 간의 싸움이 언제나 영국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었다
초창기 뉴프랑스의 수도 퀘벡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정착지라기보다 잠시 들렀다 가는 경유지에 불과했다.
방문자들을 유혹하는 것은 역시 서쪽으로 갈 수 있는 강줄기와 그 너머에 있는 동양의 보물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탐험가들은 미지의 땅을 찾아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샹플랭에게 원주민 `휴런` 족이 다가와 만일 그들의 숙적인 이로쿼이 족과 싸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서쪽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제의했다. 샹플랭은 휴런 족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1615년 동맹을 맺고 휴런 족과 함께 서쪽으로 떠났다.
지금의 샹플랭 호수에 도착했을 때 이로쿼이 족과 마주쳤는데, 샹플랭 일행이 쏜 수발의 총성에 이로쿼이 족은 혼비백산하여
숲속으로 도망쳤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는 이로쿼이 족의 숙명적인 적이 되었다.
퀘벡으로 돌아온 샹플랭은 몇 해 뒤에 다시 서쪽으로 떠나 멀리 조지아 만 (Georgian Bay)근처까지 가서 둘러보았다.
그후 15년 동안 많은 프랑스 탐험가들이 원주민들의 땅을 탐사했다.
1678년 라 살 (La Salle)은 중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 미시시피 강을 타고 내려갔으나 중국으로 가는 대신 멕시코 만에 도착했다.
그는 강 유역의 모든 땅을 프랑스와 루이 14세의 소유라고 선포한 후 그곳을 `루이지애나(Louisiana)`라 불렀다.
서쪽으로 진출한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모피를 구하고 있었으며,모피는 뉴프랑스 식민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있던 비버 털모자와 털외투,털옷은 모두 북미산 모피로 만든 것들이었다.
탐험가들의 뒤를 이어 `숲속의 장돌뱅이(coureurs de bois)`라고 불리던 모피상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왔다.
그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카누를 타고 다니며 원주민들처럼 생활하면서 자기들이 가져온 물건으로 원주민들의
모피를 교환해가곤 했다. 이 `숲속의 장돌뱅이`라고 불리던 무허가 떠돌이 모피상들의 생활은 매우 인기가 있어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와 농촌을 버리고 모피를 찾아 숲으로 떠났다.
프랑스는 지정된 곳에 머물면서 원주민들이 가져오는 모피를 교역할 수 있는 모피 교역소를 세우기로 하고 세인트 로렌스로 부터
서쪽으로는 위니펙(Winnipeg)호수까지, 남으로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 모피교역소들을 세워두고 교역소들을 서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매년 모피와 교환할 물건들을 가지고 세인트 로렌스를 떠나 각 교역소에 들러 원주민들이 가지고 온 모피와 바꾸어 돌아오곤 했다.
이때 영국 탐험대도 모피를 찾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모피상들은 1743년 마침내 멀리 로키 산맥 기슭에까지 이르렀으며
그 지역의 원주민들과도 많은 모피 교역을 했다. 그때 그 모피상들이 최초로 로키산맥을 본 유럽 사람들이었다.
1628년 프랑스국왕은 일백조합상사(Company of One Hundred Associates)라는 회사와 계약을 맺고 뉴프랑스 식민지를 양도 했으며, 뉴프랑스에 정착민을 보내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모피 교역 특허권을 주기로 했다.
바로 그해에 회사는 400명의 이주민을 배에 싣고 프랑스를 떠났다. 그러나 퀘벡에 도착하기 전,세인트로렌스 강 하구에 들어서자
마자 영국기를 단 배가 기습적으로 나타나 배와 함께 이주민들을 납치해 갔다.
이 영국 배의 선장 커크(David Kirke) 형제는 이듬해 봄 다시 퀘벡에 상륙하여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도시를 방어할 인원이 없었던 프랑스 측은 결국 속수무책으로 퀘벡을 커크 형제에게 내주는 수밖에 없었고, 그로부터 3년간 퀘벡은 영국의 통치하에 있다가 조약에 의해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 왔다.
그후 30년 동안 일백조합상사는 이주민들을 조금씩 데려와 땅을 빌려주고는,세인트 로렌스 강 유역을 따라 농사를 짓게 했으며,
특허권을 가지고 모피 교역을 독점했다.
1663년에 와서 프랑스 왕은 일백조합상사로부터 뉴프랑스를 돌려받고, 영국과 이로쿼이 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군대 1천 명을
보내면서 뉴프랑스를 다스릴 세 사람을 임명했다.
국왕을 대표해 총독을, 교회를 대표해 주교를, 그리고 식민지의 일반 업무를 돌보기 위해 집정관을 현지에 파견했다.
초대 총독은 군인출신인 프롱트나크 백작(Comte de Frontenac)이었고, 그의 임무는 국왕의 명령을 전하고 식민지를 방위하고
법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초대 주교는 라발(Francois de Laval)로,그의 임무는 교회,병원,학교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초대 집정관은 타롱(Jean Talon)으로, 그의 임무는 모피거래와 수출입업무 및 정착민의 유치였으며,동시에 식민지 번영에
책임을졌다.
1663년 일백조합상사로부터 뉴프랑스를 돌려받은 프랑스 왕은 이번에는 세이녜르(Seigneur)라고 불리던 지주들에게 식민지를
맡겼다. 지주들은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정착민들에게 프랑스의 영주제도와 같은 방식으로 농토를 빌려주었다.
뉴프랑스에 있어서의 영주제도는 지주와 소작인 쌍방간에 공평하게 운영되었다.
이로 인해 지주들은 농지를 많이 소유하는데서 오는 즐거움과 긍지를 느낄 수 있었고,소작인들은 추수하여 먹고 남은 것을 팔 수
있었으므로 본국에 있을 때보다 살기가 나아졌다.
그런데 지주들은 본국으로부터 이주민들을 계속 공급받기 힘들었고,그렇다고 소작인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킬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또한 이웃과 이웃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로쿼이 족들의 습격을 막기가 어려웠다.그 때문에 퀘벡에서 멀리 떨어진 농가에서는 이로쿼이 족의 습격을 받아 소작인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종종 있었다.
1534년 프랑스 인 카르티에가 이끌던 프랑스의 첫 탐험대가 지금의 캐나다 땅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맨 처음 한 일은 가스페(Gaspe) qksehdp shvdl 10m 나 되는 십자가를 세운 일이었다.
프랑스 국왕은 뉴프랑스에서 모피와 재물을 많이 수집해오는 것은 물론이고, 원주민들에게 하나님과 기독교를 알려 그들이 모두 카톨릭 교도로 개종되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 선교사들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카톨릭 교도로 개종한 원주민은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그들 고유의 종교와 풍습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1615년,지금의 샹플랭 호수에서 샹플랭 일행이 쏜 수발의 총성에 혼비백산하여 숲속으로 도망갔던 이로쿼이 족은 뉴프랑스 정착민들과 그들의 동맹인 휴런 족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그들은 아카디아 남쪽에 있는 뉴잉글랜드 식민지에 가서 네덜란드 인 및 영국인들과 동맹을 맺고 총과 탄약을 공급받았다.
원주민들의 전쟁 양상도 과거에 비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유럽 인이 도착하기 전에는 서로 상대방 마을을 습격해 불을 지르든지
한두 명의 포로를 잡아가는 것이 고작이었으나,유럽 인들로부터 총을 손에 넣은 후에는 대량 살상이 자행되었고,전쟁은 점점 치열해져갔다.
그러던 중 1640년대 유럽에서 건너온 전염병이 번져 휴런 족 전체인구의 절반쯤이 죽었고, 이로 인해 세력이 약해진 휴런 족은
이로쿼이 족의 기습까지 받아 거의 대부분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특히 1649년에는 예수회의 선교사들이 세웠던 휴런 족 지역의 생트 마리가 이로쿼이 족의 습격을 받아 불타렸고 프랑스 인 사제들도 많이 죽었다.
그후 10년이 지난 1660년, 이로쿼이 족은 또다시 뉴프랑스의 제일 서쪽에 있던 몬트리올을 공격하기 위해 오타와 강의 롱 솔트에
도착했다.그러나 이로쿼이 족은 오르뮤가 이끌던 소수의 프랑스 인들과 휴런 족의 결사적인 방어에 부딪혔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프랑스인과 휴런 족의 대부분이 전사했으나,이 전투로 인해 기습공격을 하려던 이로쿼이 족의 작전은 몬트리올에 도착하기 전에 노출되어 그들은 몬트리올 공략을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후로 수십 년 동안,이로쿼이 족은 뉴프랑스에 있는 큰 도시나 마을을 공격하지 않는 대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농가를 습격해
프랑스 인 농부들을 많이 죽였다.그래서 뉴프랑스의 농부들은 이로쿼이 족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혼자 들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 했다.
퀘벡은 1690년대에 와서 뉴프랑스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1700년에는 퀘벡시의 인구가 2천 명을 넘었고,세인트 로렌스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윗마을에는 성당 건물들의
뾰족한 종탑들과 행정관서 빌딩들이 웅장하게 들어섰다.
그 위쪽에는 도시를 방호하는 성채가 있었다.해안에 접한 아랫마을 부둣가에는 창고,상점,민가가 즐비하게 들어섰고,항구에는
프랑스 경비정들이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었으며, 그 사이로 작은 어선과 카누들이 오갔다.
또한 마차와 손수레들이 부두와 창고 사이를 끊임없이 지나다녔다.
퀘벡의 부둣가 저지대에 위치한 아랫마을에는 주로 노동자들과 기술공들이 살았는데,목수,석수,대장장이,점원,재봉사,하인 등과
같은 하층계급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집은 이 지방에서 나는 검은 돌로 지어졌는데,지붕을 짚으로 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밀집해
있는 이 아랫마을에는 항상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그래서 아랫마을 주민들은 화재예방을 위해 정기적으로 굴뚝 소제를
했고,집안을 청결히 정돈했으며,건초와 같은 마른 가축사료는 옥내에 두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했다.
이곳 서민가정에서는 집집마다 작은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가꾸었고,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해 여러가지 가축을 기르기도 했다.
또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집에 가게를 꾸며 간판을 걸고는 양복이나 구두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퀘벡은 지형상 저지대와 고지대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해안에 접한 저지대에 위치한 아랫마을에 비해 산비탈 고지대에 위치한
윗마을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았다.
윗 마을은 모두 석조건물이었으며,식민지의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거주,집무하는 곳이었다.
그 옆에는 또 돈 많은 상인들과 지주들이 화려한 저택을 짓고 살았다.
윗 마을의 중앙부에는 높고 뾰족한 종탑이 솟아 있는 대성당(Cathedral)이 자리잡고 있었고 광장을 지나 맞은 편에는 주교의 관저가 있었고,관저 가까이에는 신학교와 사제들 및 선교사들이 수련하는 수도원이 있었다.
세인트 로렌스 강과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더 위쪽에는 총독 관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이 관저를 생 루이 성(Chateau Saint Louis)이라고 불렀다.
이분 노래 아주 잘 하십니다~~ 잠시 감성에 빠져~~ 멍 때림 ^&^
퀘벡은 17세기에 있어서 뉴프랑스의 정치,경제,종교,문화의 중심지로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퀘벡은 17세기 말부터 몬트리올에 상업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고,뉴프랑스의 세번째 도시로 부상한 트루아 리비에르
(Trois Rivieres)에 뒤 쫓기고 있었다.
몬트리올은 원래 원주민들에게 카톨릭을 전도하기 위한 선교지로 시작 되었다.
초기에는 이로쿼이 족들의 공격을 자주 받아 도시 주위를 통나무로 겹겹이 성벽을 둘렀는데,모피 교역이 서쪽으로 점점 뻗어나가
오대호까지 진출하자 몬트리올은 자연히 모피 교역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트루아 리비에르도 인디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통나무로 성벽을 쌓고 모피 교역을 하던 중심지였지만, 차츰 모피장수들이 타고
다니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카누를 제작하는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뉴프랑스의 농촌생활은 도시생활과는 판이했다.
소작인 남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가지고 들에 나가 하루종일 농사일을 했고,부인들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고된 살림살이를 하면서 텃밭의 채소를 가꾸는 일까지 해야 했다.
해가 진 저녁시간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가족끼리 카드놀이를 하거나,배를 타고 이웃에 마실을 가기도 했다.
명절이나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는 신나는 바이올린 음악에 맞춰 온 마을 사람들이 춤을 추며 즐겼다.
농촌은 마을단위로 나누어 교구(Parish)라고 불렀으며, 각 교구마다 교구신부가 있었다. 교구신부는 예배를 인도하고 마을에서
치르는 결혼식,세례식,장례식 등 마을의 중요한 행사들을 돌보았다.
농촌에는 초기에 도로가 없어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다니는 것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강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다녔다. 세월이 지나 도로가 생기기 시작하자 그때에야 비로소 육로도 조금씩 이용하게 되었다.
그 당시 농촌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농작물로 그럭저럭 자급 자족 했으나 설탕이나 양념류 등은 도시에 가서 구입해야 했다.
그들은 각자 재배한 작물들을 도시로 싣고가 팔고,그 돈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사왔다.
소작인들은 매년 며칠간 지주를 위해 일해야 했고,자신들의 농장에서 재배한 것을 조금씩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소작인들은 그때가 되면 오랜만에 마을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도 하고 시간을 보낼 심산으로 닭 한두 마리나 밀 한 포대를 가지고
지주가 사는 곳을 방문했다.
1610년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북쪽으로 떠났던 영국인 허드슨이 선원들의 선상반란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북극의 얼음바다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후,북서항로의 탐험은 50여 년 동안 포기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중에 라디송(Pierr Esprit Radisson)이라는 사람이 세인트 로렌스를 출발하여 육로로 허드슨 만까지 가기로 했다.
그는 프랑스 태생으로 15세의 어린나이에 뉴프랑스로 건너왔다가 이듬해 이로쿼이 족에게 포로로 잡혀 2년 동안 그들과 지내면서
원주민 생활에 매우 친숙해진 사람이었다.
그는 뉴프랑스로 돌아온 후 손위처남인 `그로세이예르`와 함께 모피장사를 떠나기로 했다.
게획한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많은 모피를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뉴프랑스 식민지는 휴런족의 앙숙인 이로쿼이 족들이 뉴프랑스로 모피반입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인해 뉴프랑스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엄청나게 많은 모피를 가지고 돌아온 그들을 주민들은 영웅처럼 환영했다.
그러나 당시 뉴프랑스 총독은 그들이 허가도 받지 않고 모피교역을 했다는 이유로 그들이 가져온 모피를 모두 압수하고 두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
화가 난 그들은 풀려나자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국왕을 설득했고,이에 영국 왕과 돈 많은 재벌 한 사람이 영국에서 허드슨 만으로
항해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지원했다.
두 사람은 허드슨 만에 도착하여 많은 모피를 수집하여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본 돈 많은 영국 부자들이 허드슨 만에 모피 교역소를 차려 모피 교역을 하기로 결정하고 `허드슨 베이 컴퍼니`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영국국왕은 1670년 허드슨 만으로 유입되는 모든 강 유역의 모피전매권을 허드슨 베이 컴퍼니에 주었다.
이 지역은 허드슨 만의 서쪽과 남쪽에 뻗어 있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이었다.
그후 50년 넘게 이 회사는 허드슨 만에 모피 교역소를 차려놓고 회사를 운영할 직원들을 파견했으며,그들은 내륙으로 들어가서
모피교역을 하는 대신 지정된 교역소에 앉아 원주민들이 가져오는 모피를 사들였다.
프랑스가 주로 내륙에서 모피교역을 했고 허드슨 베이 컴퍼니도 프랑스 모피 교역상들과 경쟁하기 위해 내륙에 모피 교역소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결과적으로 숲속을 뒤지며 모피장사를 하던 프랑스의 두 젊은 처남남매로 인해 캐나다의 북부를 장악하게 된 셈이었다.
1600년대에는 많은 유럽 국가들이 미대륙에 있는 제국들을 손에 넣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금은 보석이 풍부한 멕시코와 중남미에,프랑스는 세인트 로렌스와 아카디아, 카리브 해에 식민지를 세우고 있었다.
영국도 일찍이 1585년부터 버지니아 식민지를 시작했으나,영국 탐험가 롤리(Walter Raleigh)가 데려온 정착민들은 과거 프랑스
인들이 북쪽에서 겪었던 것처럼 혹한과 질병과 인디언들의 습격 때문에 정착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의 많은 상인들은 미대륙에 식민지를 세우기를 원했고,스페인 식민지 보다 북쪽에 있는 땅을 차지하고 싶어했다.
최초로 영국 식민지가 북미 대륙에 세워진 것은 1607년으로 지금의 버지니아(Virginia)에 있는 제임스타운(Jamestown)이었고,
식민지의 이름은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금과 은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들이 찾은 것은
겉보기만 누런 황철광뿐이었다.
식민지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겨울이 오자 혹독한 추위가 불어 닥쳤고,식량이 떨어져도 보급이 되지 않아 죽을 고생을 했다.
마침내 식민지를 맡았던 스미스(John Smith) 선장은 우선 인디언들과 교분을 맺고 담배를 재배하는 법을 배웠다.
식민지에 이주해온 정착민들은 열심히 담배농사를 지어 본국에 담배를 가져다 팔아 그 돈으로 겨우 생필품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북미대륙에 처음으로 영구적인 식민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1619년에는 각 지역마다 대표자를 뽑아 식민지 의회(House of Burgesses)를 구성했는데,이것이 바로 북미대륙에서 최초로
선거에 의해 탄생한 정부가 된다.
네덜란드 배가 이곳에 들어와 20면의 흑인 노예를 농가에 팔고 갔는데 이것이 북미 식민지에서 노예제도가 시작된 기원이 된다.
1620년에는 한 영국 이주민 집단이 메이플라워(May Flower) 호를 타고 지금의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의 플리머스(Plymouth) 근처에 상륙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청교도(Puritans)라 칭하는 종교집단이었다. 그들은 영국 교회의 개혁이 불충분한 데 불만을 품고 더 많은 것을
개혁하도록 주장한 영국의 신교도들로서,영국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메이 플라워 규약(Mayflower Compact)을 작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식민지의 복리를 위해 규약에 명시된 모든 규칙과 법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이곳 사정에 어두웠던 그들은 추위가 오기 전에 거처할 집과 식량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이곳에서 처음 맞은 겨울은
그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혹독한 겨울을 지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견디지 못해 죽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그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북미대륙에서 두번째로 성공한 영국의 식민지를 이룬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영국의 두번째 식민지를 세운 이후부터 150여 년간에 걸쳐 남쪽의 조지아(Georgia)에서 부터 북쪽의 매사추세츠까지 대서양 연안을 따라 영국 식민지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식민지에 이주해온 정착민들은 대부분 영국인들이었으나,아일랜드,스코틀랜드,독일,네덜란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왔기 때문에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해갔다.
그 당시 이곳 식민지는 뉴잉글랜드 식민지,중부 식민지,그리고 남부 식민지 등 세 식민지군으로 나뉘어 불렸다.
뉴잉글랜드 식민지에는 매사추세츠 , 뉴햄프셔(NewHampshire,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코네티컷(Connecticut)등
북쪽에 위치한 4개 식민지들이 속해 있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해안을 따라 도시를 건설했다.
고기 잡는 어부,배를 건조하는 조선공, 그리고 무역업자와 상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보스턴(Boston)
이가장 큰 도시였다.
중부 식민지에는 뉴욕(New York),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뉴저지(Newjersey),델라웨어(Delaware)등 4개의
식민지들이 속해 있었으며, 땅이 평탄하고 비옥하여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었다.
뉴잉글랜드에 접하여 바로 남쪽에 붙어 있는 중부 식민지는 영국이 세운 식민지였지만 주민들은
대부분 독일,네덜란드,스웨덴,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온 이주민들이었고,새 농토를 얻기
위해 서쪽 내륙으로도 뻗어나갔기 때문에 원주민들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다.
남부 식민지는 북쪽으로는 중부 식민지와 접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그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플로리다(Florida)
와 접해 있었다.
메릴랜드(Maryland),버지니아(Virginia),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그리고 조지아(Georgia) 등 5개 식민지가 속해 있었는데,이 지역은 땅이 평탄한 평원이었
고 기온이 높아 쌀,담배,콩 농사가 잘 되었다. 그후 이곳은 목화재배에 적당한 기후였으므로 목화의 주
산지가 되었다.1619년에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을 이곳 남부 식민지에 처음 데려왔고 목화재배
가 본격화 됨에 따라 큰 목화농장에서는 그 일손을 흑인노예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흑인들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1770년에는 대서양 연안의 13개 영국 식민지들의 총인구 210만 명 중
40만명이 흑인노예들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흑인노예들은 남부에서 살았으며,흑인들의 북미대륙
출현은북미대륙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정도로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영국은 1713년 체결된 위트레흐트 평화조약에 의해 프랑스로부터 아카디아 등을 넘겨 받았다.
1755년에 아카디아를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 아카디아에 정착하고 있던 프랑스 인들을 추방하고 영국계 정착민들을 이주시키기로 했다.
이와 같은 정책 때문에 1760년부터 1776년 사이에 7천명이 넘는 영국계 정착민들이 뉴잉글랜드에서 노바스코시아로 옮겨왔고 그들은 프랑스 인들이 살던 펀디 만 연안의 비옥한 땅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 사람들이 축조한 간척지의 제방을 관리할 줄 몰랐으므로 제방이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옥토가 바닷물에 유실되었다.
아카디아는 영국이 점령한 후 곧 이어 영국의 자치식민지가 되었으며, 드디어 1758년 핼리팩스(Halifax)에 입법부가 설립되고 돈 많은 상인들과 고급장교들이 권력을 잡았다.
노바 스코샤에서 영국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은 하늘 높이 치솟아 있던 수목들이었다.
그 당시 대서양 연안의 식민지에는 백송과 가문비 나무 숲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었고 이 나무들은 영국 해군 함정들의 돛대를
만드는 데 안성마춤이었다.
특히 여기서 자란 백송은 곧고 옹이 없어 중간에서 잇지 않고도 35m나 되는 돛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노바 스코샤의 해안은 물론 세인트 존(Saint John) 강과 미라미치(Miramichi)강 유역 일대의 나무들과, 지금은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로 개명된 세인트 존 섬 등에서 수많은 나무들을 벌채해갔다.
당시 노바 스코샤 연안의 숲은 영국군 장교들과 특허권을 딴 토지회사들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이곳에서 마구잡이 벌목을 해 간 결과,1800년 무렵에는 대서양 연안의 그렇게도 울창했던 나무들이 몽땅 사라졌고
오늘날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뉴펀들랜드 근해에 위치한 그랜드 뱅크는 대구잡이 황금어장으로 200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곳으로 200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곳으로,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이곳을 서로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들 두 나라는 같은 시기에 뉴펀들랜드에 정착기지를 세우면서 프랑스는 오베스크(Aux Basques)항 부근에,영국은 플라센티아 (Placentia)항 부근과 동족 연안에 각각 정착지를 정했다.
그러나 이곳 땅은 농사짓기에 척박했고,춥고 습기가 많았기 때문에 거의 사람이 살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잡은 대구를 선상에서 소금에 절여 유럽으로 가져 갔으나,17세기 후반부터 영국으로 가져가기 전에 고기를 말리기 시작했다. 덜 상하고 더 좋은 가격을 받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이곳에는 대구를 연안에서 건조하는 일을 할 인력이 없었으므로 뉴펀들랜드에 상주할 정착민들을 데려와야 했다.
영국 정부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확충하기 위해 어업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뉴펀들랜드 내의 어떤부동산도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법령을 통과 시켰다. 처음으로 이곳에 상주하려고 이주해 온 정착민들은 폭풍이 몰아치는 겨울철에 선착장과 창고 등의 건물을 지킬 경비원들이었다. 그러나 그후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이 법은 엄격하게 시행되지는 않았다.
뉴 펀들랜드의 인구는 18세기에 와서 느린 속도로 꾸준하게 늘어났다.
1713년에 3천 명이던 인구가 1749년에는 6천명으로 두 배가 되었고 1765년에는 1만 2천 명이 되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국 본토의 서쪽 해안가에 살던 가난한 선원들과 어부들이었고, 더러는 영국에서 출발한 배들이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기 위해 아일랜드에 잠시 들렀을 때 그곳에서 선상잡부로 채용되어온 사람들이었다.
한편 오베스크 항 부근에 살던 초기 프랑스 정착민들은 영국이 아카디아를 점령한 1750년대에 뉴펀들랜드를 많이 떠났다.
17세기 북미대륙의 두 앙숙인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으며,이 두 나라는 1689년부터 1815년까지 유럽과 세계 도처에서 식민지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지금까지 서기1,000년에서 시작되어 1700년대(17세기)까지의 진행된 캐나다의 역사를 간략하게 둘러 보았습니다.
`캐나다`라는 국명을 들으면 인간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눈 덮인 깨끗한 산과 푸른 침엽수 숲,그리고 명경 같은 맑은 호수를
떠 올리고 역사는 없고 자연만 존재하는 세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캐나다가 있기까지 그곳에도 처절한 인간의 도전과 투쟁의 역사가 있었답니다.
짧지만 급변했던 캐나다의 역사를 깊이 있게 조망해 보고자 했습니다.
이상 `캐나다의 역사 : 제 1 부 AD 1000 - AD 1700 연대`였습니다.
2013. 11. 21. 스카이워커 (스캇)
<이상 퀘백과 인디언과의 관계를 검색하다 퍼왔습니다>
아주 작은 조형물인데 사진은 크게 나왔어요
말의 눈을 가려야 말이 놀라지 않습니다
쾌백과 인디언의 관계는~~? 원래 살던 주민 같은데요
자료 알아보고 위에 올렸어요
빛의 천사가 날개를 활짝 편 모습~~ 악의 천사일수도 있지만
참 재미있는구름입이다.
왼쪽으로 머리를 풀고 오른쪽으로 두팔은 내리고 두 다리는 쭉 뻣고
두눈은 아래쪽을 향하고 왼쪽귀는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해석이어요~~
경 비행기가 여러대 있네요 개인 소유 같아요
차의 종류도 용도에 따라 가지가지~~
국경을 통과 플렛츠버그 지역으로 30분정도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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