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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레 미제라블」: 혁명과 인간 존엄성
얼음같은 ‘정의’ 녹인 따뜻한 ‘환대’… 마침내 열린 구원의 길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지식인은 “인간 본성의 새로운 탄생”이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폭력과 억압 정치로 변질되어 버린 혁명에 실망한 영국의 시인 새뮤얼 콜리지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제도적 혁명도 필요하지만, 각 “개인의 내적 회심”이 우선적으로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완벽한 제도가 있더라도 미성숙한 사람이 운영하면 그 제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갈등을 빚었던 부분이 바로 제도와 내적 태도의 문제이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반문하신다. 율법의 완성은 제도적 보완이 아니라, 한 인간이 보여주는 생명과 자비다. 총 1752개로 이루어진 교회법전의 마지막 조항은 “영혼들의 구원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항상 최상의 법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의(正義)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이다. 영어 단어 justice는 ‘공정한 행위’, 혹은 공정성을 이루기 위한 ‘법 집행’ 등을 의미한다. 올바르고 공정함은 한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등의 관계를 규정하는 본질적 가치이다.
1862년 출판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19세기 프랑스의 여러 혁명과 정치적 혼란, 산업화, 빈곤 등의 감당하기 어려운 소용돌이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대서사시이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특히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을 구원시키는 참된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자베르 경감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며 준법정신이 철저한 타락하지 않은 경찰이다. 그러나 장발장의 대척점에 서게 되며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 이유는 법적 정의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에게 법은 인간의 제도를 넘어서 거의 신성한 도덕적 질서이다. 그는 자신을 “악을 짓밟아 없애는 천상의 사명을 수행하는 정의와 빛과 진리의 화신”으로 생각하였다. 법은 타협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기 때문에, 법에 대한 절대적 순명이 요청된다.
따라서 선과 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세상에 오로지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법을 어긴 사람은 죄수들로서 악한 사람, 법을 잘 지킨 사람은 존경받을 만한 선한 시민이다.
선함과 악함 사이의 애매모호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베르는 누군가가 법을 어겼을 때, 왜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범법자는 그저 범법자일 뿐이다. 더욱이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즉 악에서 선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다. 한번 구별된 선과 악은, 그 상태로 고정되어 버린다.
이러한 자베르의 법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인간 존엄성의 결여이다. 사람들에 대한 그의 판단은 주로 사회적 신분과 법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가난한 사람, 매춘부, 거지, 전과자 등의 법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은 하위 계층의 사람들은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존중이나 연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엄격한 법의 심판, 벌, 응징의 폭력적인 방법이 정의이다.
자베르와는 대조적으로, 장발장에게 정의는 인간 존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출소한 전과자에게 발급되던 노란색 통행증은 사회적 차별과 불신의 상징이었다.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 환대가 필요한 한 인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장발장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한다.
주교는 장발장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수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존엄성을 바라본다. 팡틴이 사람들 앞에서 체포되어 굴욕을 당하고 있을 때, 장발장은 자베르의 엄격한 율법주의에 도전한다. 자베르는 팡틴이 저지른 잘못만을 지적한다. 그러나 장발장의 첫 질문은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아니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녀의 이런 상황에 사회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먼저 물어본다.
샹마티외라는 노인이 사과를 훔치다 체포된다. 법정은 그를 탈옥수 장발장으로 오인한다. 마들렌 시장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던 장발장은 침묵해버리면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자수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달콤한 목소리도 듣지만, 자신을 대신해서 노인의 삶을 희생시킬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자수한다. 아무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어도 근본적인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
장발장의 인간 존엄을 근간으로 하는 정의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으로 확장된다. 길거리에서 체포될 위기에 처했던 팡틴을 구출해 병원에 입원시키고, 임종까지 돌본다. 그녀와의 약속대로 코제트를 찾아 돌봐준다. 바리케이드에서 총상을 입고 기절한 마리우스를 망설임 없이 업고, 파리의 복잡한 하수구를 통해 구출한다.
궁극적으로 장발장이 추구하는 정의는 범죄자에 대한 응징보다는, 자비와 자기희생을 근간으로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차가운 분노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은, 19년 동안의 감옥 생활이라기보다는, 은 식기를 훔쳐 달아난 그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자비와 용서이다.
바리케이드 안에서 경찰 스파이로 들통난 자베르는 혁명군에게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장발장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오랫동안 절대적 법의 심판을 믿었던 자베르는 장발장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확신이 사라진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법의 눈에도 눈물이 흐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신에게 의존하는 정의였다. 그는 지금껏 이런 정의는 알지 못했다. 도덕의 태양이 암흑 속에서 무섭게 뜨는 아침이었다. 아침이 그를 겁나게 했다.”
범죄자였던 장발장이 도덕적으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변화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한 인간의 파멸이라기보다는, 법에 갇힌 정의의 한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레 미제라블은 혁명의 이야기다. 구시대의 악습을 개혁하는, 혹은 정의로운 사회를 회복하는 혁명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존엄성 회복은 혁명이나 법적 정의가 아니라, 한 개인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능하다.
바리케이드 에피소드는 1832년 6월 파리 봉기를 배경으로, 부조리한 세상과 가난에 맞선 민중의 저항, 그리고 자유 평등 박애의 인류애를 상징하는 서사의 절정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적 미래의 열망은 폭력적인 현실과 죽음으로 얼룩진 비극의 공간이다.
예수님도 혁명가이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십자가 사건을 ‘위험한 기억’으로 해석한다. 십자가의 희생을 믿는 사람들은 부정의한 현실 앞에서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혁명의 중요한 특징은 소외당한 사람, 죄인, 혹은 병자 등, 한 개인의 근본적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영성의 샘] 예수, 십자가, 그리스도
피정 중에 성모님의 군단 월간지의 청탁을 받아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영성이라고는 기본만 갖추어져 있던 저에게 글을 써달라고 해서 처음에는 “부족합니다”라고 했는데 담당 신부님들이 돌아가면서 쓰게 되어 있다고 해서 전담 지구장 5년을 하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영성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단상을 레지오 단원 여러분들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제 글은 35년 차 사제로 살면서 특히 5년 동안 전담 지구장으로 살면서 예수, 십자가, 그리스도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입니다.
사제로 살면서 성경을 많이 접하고, 또 그 성경 말씀을 신자분들에게 전해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어떤 것은 이해가 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이해하기 힘든 말씀들이어서 그것을 전하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강론과 고해성사만 없으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물론 이 말은 저만의 이야기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아주 훌륭히 말씀과 성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관해서 공부를 안 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진리)을 잘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을 전담 지구장 5년 동안 본당 없이 홀로 있으면서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다 보니 알게 된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십자가, 그리스도’라는 제 안의 작은 영성으로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전담 지구장 전, 사제 생활 30년을 본당에서만 사목하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전한다고 했는데 돌아보니 예수님을 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고 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지금 전담 지구장으로 살아가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많이 갖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1코린 15,31), “그러나 내 안의 그리스도는 날마다 사십니다”(갈라 2,20)라는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이 육이 죽지 않고 살려고 해서 매일매일이 영적 전쟁이지만, 바로 이것이 우리 신자들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겉으로만 알고 있던 말씀의 뜻을 조금 알고 나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묵상과 공부를 하는 동안 시간이 언제 가는지 모르게 흘러갔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시면서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도 알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말씀을 힘있게 전할 수 있게 되었고, 부족하지만 이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말씀에 목마르고, 말씀에 배고파하는 신자분들에게 목마름을 해소해 주고, 배고픔을 해소해 주는 말씀을 전해주기 위해 앞으로도 더욱더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고 결심해 봅니다.
예수를 만나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십자가를 통과해야
우리 레지오 단원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예수 안에 성령의 그리스도를 숨겨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바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십자가 지기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역사 속 예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눈으로 보여주고, 말씀으로도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예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를 심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바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 레지오 단원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상에서의 사랑을 깨닫고,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십자가-그리스도’
부족한 제가 레지오 월간지 ‘성모님의 군단’이라는 책에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이 글을 읽을 레지오 단원 여러분들도 성모님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꼭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8) 사도직의 열매 : 그리스도를 남기는 삶
이탈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방학 때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자주 찾던 고요한 수녀원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베소쪼(Besozzo)에 위치한 ‘성십자가의 애덕 수녀회’(Le suore di carità della Santa Croce)였습니다. 이 수도회는 1844년 카푸친 수도회 테오도시오 플로렌티니 신부에 의해 알프스 부근의 외진 시골 마을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척박한 산악 지역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치료받지 못하던 이들을 돌보는 교육과 의료 사업이 수녀회의 영성이자 사명이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오랜 시간 이 분야에 헌신하며 복음적 사랑을 구체적으로 살아내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머물던 시기, 수녀원에는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수녀님들만 계셨고, 한 젊은 수녀님은 고령의 수녀님들을 돌보고 행정 업무를 감당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방학 동안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논문을 쓰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식사 시간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수녀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젊은 시절 자신들이 하셨던 사도직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애정을 가득 담아 들려주셨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픈 이들을 돌보며, 복음을 위해 평생을 봉헌했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 당신들의 젊음을 온전히 사도직을 위해 바치셨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도직’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어원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희랍어 ‘~로부터 떨어져’를 뜻하는 전치사 ‘아포’(ἀπό)와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텔로’(στέλλω)가 결합한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라는 동사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자신을 파견한 이에게 소임을 위임받아 파견된 사람을 지칭합니다. 이들에게 부여된 직무와 사명을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 ‘-아투스(-atus)’가 결합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아포스톨라투스’(Apostolatus), 즉 ‘사도직’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형성되었습니다. 한자어 사도(使徒) 역시 복음화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은 사도직의 가장 깊은 원형
초기 교회에서 사도라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파견하신 열두 제자와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면서, 사도직의 의미는 열두 제자의 범위를 넘어 확장되었습니다. 이후 교회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통해 사도직의 계승을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도직을 단지 교계적 직무의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 안에서 새롭게 조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은 소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같은 하나의 사도적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모님은 사도직의 가장 깊은 원형이십니다. 성모님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분은 아니셨지만, 누구보다 깊이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첫 사도직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태에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셨고, 믿으셨으며,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사도직은 그리스도를 품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머무르셨습니다. 십자가 아래, 그곳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고통을 없앨 수도 없고, 상황을 바꿀 수도 없으며, 아드님의 죽음을 막을 수도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사도직은 해결이 아니라 동반이었고, 설명이 아니라 머무름이었으며, 말이 아니라 사랑의 현존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도직도 이와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사도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필요한 것은 해결사가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사람입니다. 아픈 사람 곁에 머무르는 것, 불안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넘어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 희망을 잃은 이에게 조용히 기도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사도직입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은 바로 이러한 마리아적 현존을 세상 안에 확장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사도직을 끝까지 살아가는 충실함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성모 신심이 레지오 사도직의 뿌리라고 말합니다.(5장) 레지오의 사도직은 성모님과 일치하여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영적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지오의 활동은 기도와 분리될 수 없고, 성화와 분리될 수 없으며, 교회의 사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베소쪼에서 만난 수녀님들을 떠올리면, 사도직의 열매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녀님들은 더 이상 학교와 병원에서 소임을 하실 수 없습니다. 이제 그곳의 활동은 국가나 사회 기관이 더 체계적으로 맡고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수녀님들이 하지 않았어도 결국 누군가는 그 일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세상도 교육을 하고, 병원을 운영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그 일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루어졌는가”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이유는, 세상과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기 위해 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교육은 지식의 전달에 그치며, 그리스도 없는 의료 활동은 효율과 비용의 논리 안에 갇히고, 그리스도 없는 복지는 관리와 제도의 차원에 머물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의 선한 노력도 귀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도직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을 단순한 대상이나 수혜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현존하는 고귀한 영혼으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맡았던 직책도 사라지고, 우리가 세웠던 계획도 지나가며, 우리가 흘린 땀을 기억하는 사람도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한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 남고, 기도는 은총 안에 남으며, 사도직은 영혼 안에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모님과 함께, 주님께서 맡기신 작은 사도직을 끝까지 살아가는 충실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에게 물으실 것은 아마도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충실했느냐, 얼마나 그리스도를 품고 세상에 전했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조용히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부족했지만 당신께서 주신 사도직을 위해 성모님과 함께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묵주기도 학교] 관상의 정점
영광송과 구원을 비는 기도
묵주기도는 단순히 반복하는 소리 기도가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관상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각 단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친 뒤, 영광송과 구원을 비는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기도는 단순한 덧붙임이 아니라, 앞서 바친 기도의 의미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그 열매를 청하는 묵주기도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기도
먼저 영광송은 묵주기도의 가장 본질적인 방향을 드러냅니다. 영광송을 바침으로써 묵주기도는 그리스도교 기도의 일반적인 형식과 마찬가지로 한 분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 끝맺게 됩니다(「마리아 공경」, 25항 참조). 곧 묵주기도는 성모님께 머무는 기도가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 행위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그 자체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드리는 흠숭이기 때문입니다(「마리아 공경」, 25항). 묵주기도의 매 단 끝에 바치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라는 기도는, 바로 이러한 전례적 흠숭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 안에서 영광송은 매우 오래된 기도 형식입니다. ‘영광’은 사람에게 쓰일 때는 빛나는 영예를 뜻하지만, 하느님을 향할 때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권능, 그리고 존재의 찬란함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영광송은 하느님께 영광과 영예를 드리는 찬미의 경문입니다. 시편의 각 권이 영광송으로 끝맺는 전통은 유다교에서 비롯되었고, 교회는 이를 이어받아 미사 전례 안에서도 ‘대영광송, 마침 영광송, 주님의 기도 뒤의 영광송’ 등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전례적 전통은 성무일도와 묵주기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묵주기도가 한때 ‘성모 시편’이라 불렸던 것도, 성모송 150번을 바치는 구조가 시편 150편의 전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매 단 끝에 영광송을 바치는 것은 우연한 추가가 아니라, 교회의 오래된 기도 전통 안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관상의 정점
묵주기도 안에서 영광송은 단순한 마침이 아니라 관상의 정점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모송에서 성모송으로 이어가며 그리스도와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각 신비를 생생하게 깊이 묵상하는 그만큼, 각 단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형식적인 마무리가 아니라, 마치 우리 마음을 하늘 낙원으로 들어 올리고 타볼산의 경험을 다시 체현하는 것과 같습니다”(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4항)라고 말씀하십니다. 영광송은 묵주기도를 바치며 묵상한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를 모두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바라보게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처럼, 인간의 시선을 잠시 땅의 현실에서 들어 올려 하늘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짧은 마침 기도인 구원을 비는 기도
이러한 흐름 안에서 구원을 비는 기도는 영광송 뒤에 이어지는 ‘짧은 마침 기도’로서, 묵상한 신비의 열매가 구체적인 청원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오늘날의 묵주기도에서는, 영광송 다음에 짧은 마침 기도가 이어집니다. 신비의 묵상이 고유한 열매를 맺도록 그 신비를 기도로 마무리한다면, 신비의 관상이 더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깁니다”(교서, 35항)라고 말합니다. 곧 구원을 비는 기도는 관상을 끝내는 부속물이 아니라, 묵상한 신비가 삶의 청원으로 열매 맺도록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구원송’, ‘구원경’, ‘파티마의 기도’로도 불렸습니다.
구원을 비는 기도는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살아 있는 이들과 죽은 이들 모두를 위한 구원을 청합니다. 이 기도의 특징은 맨 먼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비는 기도는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성모님의 인도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자비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불에서 구하시고”라는 청원은 살아 있는 이들의 회개와 보호를,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라는 청원은 죽은 이들의 정화와 구원을 향합니다. 우리말로 ‘구원을 비는 기도’라 칭하는 것도 살아있는 이들과 죽은 이들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묵주기도는 개인의 경건에 머무르지 않고, 산 이와 죽은 이를 함께 품는 교회의 보편적 기도가 됩니다(‘구원을 비는 기도’는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마리애의 결정에 따라 레지오 회합 중에는 바치지 않습니다).
흠숭과 청원
묵주기도 안에서 영광송과 구원을 비는 기도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영광송이 묵상한 신비를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흠숭으로 들어 올린다면, 구원을 비는 기도는 그 찬미를 구체적인 구원의 청원으로 확장시킵니다. 하나는 하늘을 향한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하늘의 자비가 우리와 세상, 산 이와 죽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의 매 단을 마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동시에 구원을 간절히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묵주기도의 참된 목적입니다.
결국 매 단 묵주기도의 마무리는 단지 기도의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희망의 고백이며, 모든 영혼이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사랑의 청원입니다. 영광송은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 구원을 비는 기도는 그 하늘의 자비를 이 땅과 연옥의 영혼들까지 끌어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기도는 묵주기도의 형식적 결론이 아니라, 그 신비 전체를 완성하는 찬미와 전구의 절정입니다.
[돋보기] 신심(信心)에 대한 이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공표한 「일치 교령」에는 ‘진리의 서열’(ordo veritatis)이 언급된다. “가톨릭 교리의 여러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이루는 관계는 서로 다르므로,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11항) 공의회는 그리스도교의 ‘공통 핵심 교리’를 위계의 상위에, 교회 분열의 원인 중 하나인 ‘가톨릭 교회만의 교리’를 위계의 하위에 배치함으로써 ‘일치를 위한 대화’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1. 신앙과 신심
‘삼위 하느님을 향한’ 신앙과 ‘이 신앙에 구체적 도움을 제공하는’ 신심 사이에서 신앙은 위계의 상위에, 신심은 위계의 하위에 속한다. 신앙은 공적 계시에 대한 ‘긍정의 응답’(아멘)이다. 수신자가 접하는 계시의 두 가지 양식이 ‘계시자’(하느님)와 ‘계시 내용’(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신앙은 두 방향으로 정의될 수 있다. 첫째, 신앙은 계시 내용에 대한 적극적 ‘동의’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선포한 이웃 사랑에 대한 수용이 신앙이다. 둘째, 신앙은 계시자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의탁)며, 이는 하느님 사랑으로 귀결된다. 「계시 헌장」은 신앙의 최종 목표인 ‘하느님과의 만남’을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항)로 명시한다.
이와 더불어, 신앙은 계시 내용의 보존·관리·해석 권한을 지닌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요청한다. 그러나 교도권은 계시자 하느님과 계시 내용의 통로인 성경과 성전 위에 있지 않고 종속되어 봉사한다(「계시 헌장」 10항 참조).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의 계시’와 ‘계시하는 하느님’으로 인해 신앙에는 ① 내용적 측면(동의)과 ② 인격적 측면(신뢰)이 있고, 신앙의 장소인 교회로 인해 ③ 교회적 측면(순명)이 있다.
공적 계시와 직결된 신앙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하느님이 주도하는 은총의 영역 안에 있다면, 신앙 성장을 위한 성실, 헌신과 관련된 신심은 하느님을 향하는 인간이 주도하는 행업의 영역 안에 있다. 가톨릭 교회는 세례받은 이에게 신앙에 대한 의무를 부여하지만, 신심 행위에 대해서는 권장한다. 초대 교회 이후로 신심은 특정인(은수자/동정녀/수도자)의 생활 방식으로 이해되다가, 점차 모든 신앙인에게로 확장되었다. 신앙의 세 가지 측면과 비교하여, 신심은 공적 계시를 지원·강화하는 보조 주제와 신앙인의 개인 성향을 반영한다. 신심의 긍정적 작용은 성실과 헌신을 통한 신앙의 심화이며, 부정적 작용은 영적 우월주의나 자기 신심에 대한 절대화다.
2. 공적 신심과 특별 신심
신심은 일반적으로 ‘공적 신심’과 ‘특별 신심’으로 구분된다. 공적 신심이 위계의 상위에, 특별 신심은 위계의 하위에 속한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교회 교도권의 공적 인준(승인)이며, 구분점은 권장 강도의 차이다. 가톨릭 교회는 공적 계시를 보조하는 공적 신심을 ‘적극 권장’한다. 공적 신심의 분야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따른 전례주년 안에 추가로 구성된 성월(聖月)에 명시된다. 성모성월, 묵주기도성월은 ‘성모 신심’을, 예수성심성월은 ‘성체 신심’을, 위령성월은 연옥 교리를 배경으로 ‘성인들의 전구 신심’을 강조한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내용을 부정하는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위해 ‘좋고 유용한’(bonum atque utile) 방안으로 교회 전승을 통해 확립된 다양한 공적 신심을 제안한다.
교회 전승에 기반한 공적 신심과 달리, 특별 신심은 공적 계시(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보편 교회가 인준한 사적 계시와 연관된다. 교회 교도권은 사적 계시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검증 불가능한 초자연적 발현 자체보다 검증 가능한 발현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판정한다. 가톨릭 교회는 특별 신심이 신앙 성숙을 실현하려는 신자들에게 유익하다고 판정하고, 이를 ‘권장’한다. 한국 가톨릭 교회에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성모 발현(루르드/파티마)으로부터 파생된 특별 신심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신앙인은 발현 메시지의 실현을 의도하는 특별 신심을 통해 신앙 성숙의 계기를 조성한다.
3. 성모 신심과 성체 신심
한국 가톨릭 교회에 분포된 신심의 두 가지 축은 ‘성모 신심’과 ‘성체 신심’이다. 성모 신심은 ‘마리아 공경’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증대시킨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교회의 어머니’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차원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녀’란 호칭이 수여되었다. 교회의 어머니 차원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적용된 교리는 마리아 생애의 시작과 끝에 주어진 은총인 ‘무염시태’(원죄 없음)와 ‘성모 승천’이다. 이 교리는 성모 마리아가 ‘구원받길 원하는’ 신앙인의 표본이며, ‘구원받은’ 인간의 전형임을 선언한다.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을 위해 전구한다. 성모송의 마지막 문구인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는 전구의 대표적 양식이다. 신앙인은 성모 신심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마리아의 신앙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성체 신심은 최후 만찬에서 제정된 성체 성사와 연관된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최후 만찬을 재현하며 예수님을 기억하였고, 빵과 포도주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사도 2,42 참조) 예수님의 현존을 강력하게 체험하였다. 성체 성사는 ‘성변화 예식’으로 마감되지 않고 ‘영성체 예식’으로 완료된다. 곧 성체 성사는 성체를 ‘보고 만짐’이 아니라 ‘받아 모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지향한다.
수 세기 이후 성체의 보관 필요성으로 등장한 감실로 인하여 성체조배, 성체현시, 성체강복이 교회 전례에 첨가되었다.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라는 구절은 가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성체·성혈 교리를 명확히 진술한다. 성체·성혈은 빵과 포도주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다. 이를 전통 신학은 ‘실체 변화’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형태의 성체 신심 중 으뜸은 미사 전례에 매일 참여하여 성체를 직접 모시는 것이다.
[구역반장 월례연수] 평화 <화해>
신앙생활을 하며 많은 신자들이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용서와 화해입니다. 고해성사를 앞두고도 가족이나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 마음, 화해하지 못한 마음에 무겁고 찜찜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기도하고 다짐해보아도 마음의 상처와 갈등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더 무거운 마음을 간직하게 됩니다.
화해는 여정입니다.
화해는 갈등이나 대립, 상처로 인해 멀어졌던 개인이나 집단이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바로 “과정”입니다. 화해는 한 번의 이벤트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길을 떠나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과 같은 긴 순례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치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여러 도시를 거쳐야 하듯, 화해 역시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충족되어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화해의 과정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갈등이 왜 일어나는지부터 이해하는 것입니다. 갈등은 칡나무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가 만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넝쿨 식물인 칡나무와 등나무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서로 ‘신념과 목표가 충돌하는 것’이 갈등입니다. 우리가 화해하려면 우선 나의 신념과 목표는 무엇이었고, 상대의 그것은 무엇이었는지를 구분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정체성, 인정, 이익, 안전 등의 목표가 서로 충돌할 때 우리는 갈등을 겪는데, 화해의 여정에서 이 중 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라보는 것은 갈등을 객관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별히 나의 목표만이 아니라 상대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면 거기서부터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지를 살필 수 있습니다.
화해에 이르기 위한 그 다음 요소는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입니다. 갈등 과정에서 내가 피해를 준 것과 내가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기에 나의 손해는 크게 보이고, 나의 가해는 적게 인식합니다. 서로 주고받은 상처에서 내가 준 것은 무엇이고 받은 것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진실에 기반한 보상도 필요합니다. 갈등에서는 물리적이건 심리적이건 회복될 수 있는 상황으로 되돌리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물론 사과와 보상은 피해자 측에서 감해줄 수도 있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가 꼭 보상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과와 보상이 없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진 다음에 진행되는 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사실 용서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시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전부 아시기에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실 수 있는 것처럼, 상대가 어떻게 살아왔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모든 것을 용서하시지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이해하기에 용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궁극적으로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가 더이상 나를 파괴하지 않도록 용기있게 나아가는 나 스스로를 위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정을 걸어갈 수 있는 영적인 힘
이러한 과정 전체가 바로 화해입니다. 갈등을 바라보며 조정하고,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지고, 더이상 미움과 증오를 선택하지 않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전체의 과정이 바로 화해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중요한 단계들을 생략하고 곧바로 용서하려 하거나 즉시 화해를 이루려 하기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선은 우리가 갈등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더는 증오와 미움의 마음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겠다는 다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으로 화해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화해를 위한 다음의 다섯 가지 영성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영성은 <희망>입니다.
틀어진 관계와 상처를 되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비록 어렵더라도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바로 희망입니다.
둘째 영성은 <하느님 사랑 체험>입니다. 우리는 조건적으로 사랑하고 부분적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 마음을 깨달을 때, 우리 역시 그 마음으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셋째 영성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화해의 여정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넷째 영성은 <유혹 이겨내기>입니다. 화해의 과정에서 얼마든지 우리는 중단하거나 포기하고 싶어지기에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 역시 중요합니다.
마지막 다섯째 영성은 <우주적 차원의 시선>입니다. 갈등의 관계를 단순히 가해자-피해자 도식이 아닌 더 넓고 높은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새롭고 역동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나에게 맞는 방법 찾기
희망, 하느님 사랑 체험, 기도, 유혹 이겨내기, 우주적 차원의 시선. 이 다섯 가지 모두를 충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는 넓은 차원의 시선을 간직할 수 있으나 자꾸 복수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는 하느님 사랑 체험이 강하지만 기도로 이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제 화해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각자 하느님께 청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주신 은총에는 감사드리고, 부족한 은총은 청하며 용기있게 걸어간다면 우리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관계가 변할 수 있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화해로 나아갈 마음을 먹는 것! 그것이 화해를 살아가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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