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명품시계의 나라다.
또한 철도왕국이다.
그래서 톱니(鋸齒)기계공업과 토목기술이 세계 으뜸이다.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의 모노레일은 톱니기계공업과 토목기술의 합작품이다.
탁월한 토목기술은 스위스를 터널왕국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남한)의 반도 못되는 41.300평방km에 671개의 터널이 있다니까.
이 중에는 육상터널로는 세계 최장인 34.6km 뢰치베르크(Loetschberg)터널이 있으며
육상, 해저 통틀어 가장 긴 57km의 고타르(Gotthard)터널도 개통을 앞두고 있단다.
1975년에 개통된 첫 영동고속국도는 터널을 뚫지 못해 굽이굽이 돌고돌아 넘어야 하는
높은 산이 즐비해 말뿐인 고속도로였다.
무자비하게 절개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이즘은 헉헉대며 영(嶺)넘을 일이 없고, 이는 고속도로뿐 아니라 모든 도로가 그러하다.
영동고속국도 대관령 구간에만 7개의 터널이 있다.
우리 국부(國富)에 다름 아닌 이 토목기술이 진즉 이랬더라면 통한의 낙남정맥 절개도
없었으련만.
옛 고속국도가 이름 없는 임도처럼 쓸쓸하기 그지 없다.
스스로는 존재의의가 없는, 생물체가 아닌, 무기물일 뿐인 길의 운명이다.
길을 지배하는 인간에 의해 좌우될 뿐이다.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옛길을 두고 생명력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nonsense)다.
강한 생명력이 아니라 인간의 효용가치 차원에서 좌우될 문제다.
유구한 세월동안 무수히 왕래한 대부분의 길이 존재하지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지자체들이 내세우는 복원이라는 명분 기저에 있는 계산은 따로 있지 않은가.
실은, 강릉시가 복원했다는 이 옛길도 상당부분 작위적이지 않은가.
율곡 이이(栗谷李珥)의 자당 사임당 신씨(申師任堂)가 걸출한 여인이며
훌륭한 어머니임을 모르는 이가 몇이랴.
더구나 우리 최고액 화폐에 등장했는데.
사친시(思親詩)에는 고향을 떠나 한양으로 가는 딸의 효심이 담겨있다.
慈親鶴髮在臨瀛 身向長安獨去情 (자친학발재임영 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村時一望 白雲飛下暮山靑 (회수북촌시일망 백운비하모산청)
학발의 노모를 고향(臨瀛)에 둔채 홀로 서울로 가는 마음이 어떠했을까.
뒤돌아볼 때 북촌(고향)이 아득해 흰구름 내려앉는 저녁산이 무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시비(詩碑)는 반정에서 대관령마루 사이 옛 고속국도변에 있다)
기관(記官)은 품계도 없는 하찮은 지방관리(鄕吏)였을 뿐이다.
많은 재산이 없을 것임은 뻔히 알만한 일이다.
그런데도 사재를 털어 주막을 짓고 면식부재인 나그네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었음은
물론 동사의 위험을 막아주었으니 가상할 만한 일이 아닌가.
기관 이병화의 유혜불망비가 지역민과 나그네들의 합심으로 서게 된 이유다.
제민원이 있고 주막도 있었다.
그러나, 군림하는 관리와 내로라하는 양반네들이 얼씬이나 하게 했겠는가.
답설꾼, 선질꾼으로 부려먹기나 했지.
굽굽이 돌아돌아 오르고 내리는 길에서 한과 설음이 얼마나 사무쳤을까.
말단 향리라도 벼슬인데, 우쭐대지 않고 천민을 위해 베푼 선행이 가상하지 않은가.
하지 않고 한 것처럼, 하찮은 일 하고도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소위 뻥튀기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이같은 의인이 더욱 갈망되는데.
장황하고 너절하게 새겨놓은 낯 간지러운 공덕비, 공적비, 선정비, 불망비의 주인들
에게 이병화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단원 김홍도(檀園金弘道)는 이조 21대영조, 22대정조때 화가다.
특히 이조의 문예부흥기인 정조때의 대표적인 화가로 정조의 초상화를 그린 어진화사(御眞畵師).
중인(中人) 출신으로 산수화, 풍속화, 인물화 등 다양하며 서민의 일상생활도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의 프로필(frofile)이 애매해 출신 내력을 알 수 없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가 그의 호를 땄다 해서 알아보았으나 안산 거주의 표암 강세황(豹庵姜世晃)
에게서 7~8세부터 20대 초반까지 그림을 배웠다는 이유뿐이란다.
따라서 그가 어찌하여 대관령을 그렸는지도 알아볼 길이 없다.
대관령옛길 반정은 구산역~횡계역 간 옛길의 중간지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대관령 옛길에는 두개의 반정주막이 있었단다.
현 고속국도와 구 국도의 교차지점 부근에 아랫반정 주막이 있었고, 고속도로 준공비
근처, 조망권이 강릉은 물론 멀리 동해까지 뻗어있는 지점에 윗반정 주막이 있었다고.
(그렇다면, 현재의 반정은 두 반정의 중간지점으로 또 하나의 반정인 셈인가)
그리고, 옛길은 지금의 사임당 사친시비 앞을 지나 윗반정으로 나갔다는 것.
그러니까, 사임당이 이 길에서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踰大關嶺望親庭)는
사친시를 읊었을 것이란다.
나는 기관 이병화의 반정 선행 이야기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선행 자체가 아니라 선생장소인 반정의 위치에 대해서다.
제민원은 관영 숙박소라 천민이 얼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제민원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주막이 있는데 여기서 3km에 불과한 곳에
또 주막이 필요했겠느냐는 것.
한데, 반정이 윗반정으로 멀리 가면 쉬이 납득이 된다.
반정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산으로 오르면 극사성황당 옛길이다.
얼마동안은 낭만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난동이라 해도 겨울 대관령 아닌가.
서서히 드러내는 본색에 930m 대간 마루까지 고전했다.
남당 한원진(南塘韓元震:1682~1751)은 경연관(經筵官)으로 출사하여 21대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적성 혹은 체질에 맞지 않았던가.
당쟁의 와중에서 우여곡절을 겪고는 프리랜서(freelancer)학자로 전업했다.
그 후,호해(湖海)가를 맴돌며 연구에 몰두해 남당집38권을 남겼다.
경포호와 동해의 강릉은 정녕 그의 체질에 맞는 곳이었던가.
平生四方志 今日駕長風 (평생사방지 금일가장풍)
평생 떠돌아 다니며 품은 뜻을 오늘 비로소 이루는구나
머리 좋은 사람은 경솔하단다.
머리 회전이 너무 빨라 실수를 자주 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외도 있나 보다.
신동(神童) 김시습(金時習)이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1435~93))은 세조가 망가뜨렸나, 세조의 덕을 본 것인가.
좀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세종때 크게 기여했을지도 모르는데.
세조는 그를 생육신의 하나로 만들었다.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함으로서 그로 하여금 권력투쟁의 추잡한 현실을 버리고
중 설잠(雪岑)으로 변신, 관서와 관동과 삼남을 비롯해 8도를 유랑하게 했으니까.
권력의 와중에 뛰어들었더라면 피를 보고 만지고 뿌렸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짓고 '매월당집'을 내놓은 것은
세조 덕이었을까 세조 때문이었을까.
성종때 윤씨폐비론을 보고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난 것으로 보아 어차피 그는 현실
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겠다.
두번의 관동 유랑중 언제 이 시를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大嶺雲初捲 危顚雪
未消(대령운초권 위전설미소), 즉 대관령 구름이 걷히는 것을 처음 보았으며 구름
걷힌 꼭대기에 녹지 않은 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첫번의 초봄이었을 듯.
대관령옛길 안내도(그림 상)와 국사성황당 넘어가는 930m대간마루의 이정표(그림 하)
대관령국사성황당 경내에는 강원도기념물 제54호인 성황사(城隍祠)와 산신각이 있다.
풍작, 풍어를 비롯해 강릉 안위의 키를 쥐고 있다는 국사성황신은 통일신라 때 지금의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굴산사(崛山寺)를 창건했다는 범일국사(梵日國師)다.
UNESCO의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선정된(2005년) 강릉 단오제의 주신(主
神)도 범일국사라고.
또한, 대관령 산신각의 주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이란다.
통일신라파의 아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