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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 인식론과 존재론
과학이 등장하면서 철학은 학문의 왕좌를 물려주게 됩니다.
실제로 과학은 그동안 철학이 차지했던 영역을 대체하면서 신뢰받는 학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 완전히 무의미해진 것은 아닙니다.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은 철학을 통해 가능합니다.
과학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일, 그리고 과학의 존립 기반에 어떤 관념이 있는지를 철학은 탐구할 수 있습
니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지식을 추구하지만 그 지식의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묻지 않았
습니다.
아니, 그러한 물음은 오히려 금기에 가까웠습니다.
세계에 무엇이 있는가의 질문은 존재론에 속합니다.
그 무엇, 즉 존재를 인간이 경험하여 아는 것은 인식의 영역입니다.
인식론과 존재론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전통적인 과학철학에서 강조하는 ‘경험 세계’라는 개념은 세계의 실재들을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인간의 경험은 세계의 본질적 속성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감각 경험이 포착한 것만을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중심주의적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근대와 현대의 철학은 대부분 인간중심성, 즉 휴머니즘을 특징으로 합니다.
인간이 없으면 세계도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세계는 인간 없이도 거기에 존재할 것입니다.
인간이 없어도, 다시 말해 인간의 경험이 없어도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실증주의 과학의 오류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데카르트 이래 인식론적 전통은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 왔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이 세계에 대해 확고하고 참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인간중심적으로’
고민해 온 셈입니다.
경험론자들은 경험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만을 지식으로 한정했습니다.
그런 다음 지각에 대한 현상주의적 분석을 통해 지각에 알려진 것은 확실하다고 논증합니다.
지각만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므로 지식은 지각에 주어진 것만이어야 한다는 게 경험론의 관점
입니다.
경험론적 인식론의 관점에서는 세계란 지각의 대상과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사실들로 구성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객관적 실재에 관한 진술을 그 실재에 관한 감각 자료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에 관한
진술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에 관한 진술을 인간의 특성이나 행위에 관한 진술로 바꿔치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세계의 전부는 아닙니다.
세계에 무엇이 있느냐의 문제를 단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자면 ‘경험이라는 인식론적 범주에 존재론적 특권을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독단’입니다.
이러한 인식적 오류는 오늘날 탈근대주의 담론에서 제기되는 극단적 상대주의를 낳습니다.
파이어아벤트 같은 탈근대주의 학자들은 과학 지식의 확실한 기초를 확보하려는 ‘기초주의적 기획’이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지식에 대한 모든 주장은 오로지 맥락이나 패러다임 안에서만 납득 가능하며, 자연스럽게 더 이상 객관
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은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아니면 신화든 모든 지식은 동등한 인식적 지위를 갖는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 무슨 주장이든 각자의 입장에서는 다 맞는 것이고, 서로 누가 더 진실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입장은 해체주의와 허무주의로 나아갑니다.
철학은 과학의 형이상학적 근거, 즉 존재론이 무엇인지 탐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식적 오류에 빠지지 않습니다.
실증주의에서 말하듯 내가 경험하여 알게 된 것만이 세계의 전부라는 생각은 인식의 문제를 엄밀하게
분석하려다가 잘못된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경험한 세계만이 진정한 세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훨씬 더 크고 그렇기 때문에 인식의 가능성이 풍부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나요?
존재론의 문제로 돌아온다면 세계는 인간의 경험이나 인식과 상관없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탈근대주의는 세계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경향으로 나아가면서 존재적 오류에 빠졌습니다.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다만 인간의 경험은 세계 존재의 극히 일부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과학관의 전제입니다.
인간이 있든 없든 세계는 존재할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반일원론과 반연역주의 역시 암묵적인 경험적 실재론의 존재론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인식적 오류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두 흐름의 합리적 통찰을 살려 내려면 이 둘을 지배하고 있는 낡은 존재론을 대체할 새로운 존재론을
구성해야 합니다.
이 새로운 존재론은 인간중심성에서 벗어난 ‘반인간중심적 전환(anti-anthropocentric shift)’이라는
또 다른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포함합니다.
여기에서의 혁명은 철학 안에서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전환', 존재론 안에서 경험과 사건이라는
인간중심적 범주에서 그것을 발생시키는 '구조와 기제라는 반인간중심적 범주로의 전환'이라는 이중의
함의를 갖습니다.
흄과 그의 후예들이 대표하는 경험론은 지식을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들의 기계적 결과이자, 오로지
감각 경험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로써 존재론적 차원을 외면하는데, 이는 존재론을 추방하는 게 아니라 경험론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존재론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실증주의 과학관을 비판하는 반일원론과 반연역주의도 마찬가지로 ‘존재’에 관해서는
경험론적 실재론의 설명을 공유합니다.
경험주의적 존재론의 핵심에는 흄의 인과성 이론이 자리합니다.
상식적 의미에서 인과관계 개념은 시간적 선행성, 인접성 그리고 필연적 연관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포함한다고 흄은 지적합니다.
그런데 시간적 선행성과 인접성은 경험에 직접 근거하지만 필연적 연관성은 경험에서 이끌어낼 수 없
습니다.
이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사건이 연결돼 발생하는 사례들의 반복, 즉 사건들의 일정한
결합이 전부입니다.
두 가지 사건의 규칙적 연쇄나 일정한 결합을 관찰하면 우리는 이 규칙성이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반복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흄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관의 관념이 감각과 습관의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즉, 필연성 관념은 사건들의 연쇄에 인간의 정신이 습관에 기초해 덧붙이는 심리적 현상일 뿐 실재하는
세계에서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흄의 후예들은 감각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필연적 법칙이라든지, 발생 기제 같은 것은 경험
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논리실증주의자인 루돌프 카르납에 따르면 법칙이란 단지 관찰된 규칙성의 서술일 뿐입니다.
법칙은 경험적 규칙성일 뿐이라는 흄의 인과성 이론은 원자론적 사건들의 규칙적 연쇄가 과학적 법칙
이라는 견해로 이어집니다.
*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는 1861년 2월 27일 헝가리 크랄예백(지금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철도 전신기사인 요한 슈타
이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잦은 전근 탓으로 자주 이사를 하기는 했으나, 슈타이너는 유년시절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 속에서 아름다움과 신비를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한편, 기차역 근처에서 기차를 통해 현대 물질세계의 기술문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덟 살에 이미 그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초감각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에 관심을 두었다.
10살 때는 마을의 신부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들은 훗날 그의 교육론에 토대가 된다.
슈타이너는 1872년 초등학교를 마치고 철도회사 기술자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실업학교
(Realschule)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인 직업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이 철학과 역사와 종교로
이어져서, 칸트의「순수이성 비판」을 20번 이상 반복해서 읽는다.
그리고 자연현상의 창조와 인간의 사고 사이의 관계를 통찰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 공대(1879-1883)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부전공으로 문학, 철학, 역사
학도 공부하였다.
그는 대학시절 21살의 나이에 이미 칼 슈뢰어 교수의 추천으로 괴테의 여러 작품들(특히 괴테의 자연과학
작품들)을 슈뢰어의 독일민족문학 대전집에 출간하는 일들을 하였으며, 빈에서는 한 가정의 가정교사로도
일하였다.
그리고 대학시절의 경험들을 통해 후에는 독일 바이마르의 괴테-쉴러 박물관(1890-1897)에 취직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괴테의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론의 기본”을 이룩하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살아 있는 것의
현상’을 위한 괴테 인식론의 학문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게 되었다.
1891년에 그는 독일 로스톡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당시의 논문 내용은 후에 “진리와 과학
(학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작품은 나중에 슈타이너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자유의 철학"
(1894)을 만들어내는 전초가 되었다.
이렇게 바이마르에서 지내는 시기에 수많은 철학과 철학사에 관한 글들을 쓰게 되었으며 1894년에 “자유
의 철학 -현대적인 세계관의 요강”을 집필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주로 정신과학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괴테의 “순수 인식학”, “원초형상”을 기반으로 하여 슈타이너는 새로운 유기체적인 세계에 대한 연구
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를 통하여 그는 “순수한 사고 안에서의 활동하는 자아”에 대한 통찰력을 터득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그는 인간과 세계에의 닫혀진 면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준비하였다.
또 이 시기에 그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에른스트 헤켈에 관한 저서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슈타이너는 1897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1899년부터 1900년까지 문화 잡지인 “문학지”의
편집자 그리고 베를린 노동자교육학교에서 교사로서 일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편집한 잡지에 “시대에 맞지 않는 김나지움의 개혁”, “콜레기움 로기쿰”, “대학교와 공적인
생활” 등을 발표하여, 교육학적인 견해들을 제시했다.
슈타이너의 철학적 기초가 되는 저서인 <특히 쉴러를 고려한 괴테의 세계관 인식론 초고, 1886>, 자신의
박사학위논문 <특히 피히테를 고려한 인식론의 기초, 1886>, <진리와 학문, 1891>, 철학적 대작 <자유의
철학, 1894> 등을 출판했다.
이것들은 정신과학적 저작들로의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런 이념들을 그는 <정신과학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 교육>, <신지학, 1904>, <인간은 어떻게 더 높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얻는가? 1904>에서 새로이 정리했다.
초기에 슈타이너는 “신지학자(Theosophist)”로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그의 강연 활동도 실제로 1902년
10월 이후 신지학회의 테두리 안에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1913년 그는 신지학회와 이별했다.
1902년부터 슈타이너는 자신의 고유한 연구결과들만 집대성하여 자신 정신과학적 연구 방법을 시종일관
하게 사용하였으며 그것을 인간의 참된 본질을 의식하도록 이끌어준다는 의미로 ‘인지학(Anthroposophie)’이라고 불렀다.
이는 신지학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일종의 인간중심사고에 터한 인간학이라 할수 있다.
인간의 본질속에 내재해 있는 정신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우주에 내재해 있는 정신현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슈타이너는1925년 3월 30일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저서들과 6000회 이상의 강연으로 인지학을 제시했다.
1912년 베를린에 인지학협회가 결성되었고, 이어서 1913년에는 스위스 바젤 근교의 도르나흐(Dornauch)
에 두 개의 돔이 있는 건물을 세웠는데, 그 건물에 괴테아눔(Goethean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괴테아눔은 예술 활동의 다양한 방법을 위한 공간으로서, 그리고 정신과학적인 연구와 인지학 운동을 위한 중심지로서 슈타이너가 직접 건축설계를 하고 건물의 완성을 주도했으며 무엇보다 예술적인 형상화에 몸소 관여했다.
그는 4편의 신비극을 써서 연출했고 소리의 질과 어조의 질이 몸짓을 통해 표현되는 새로운 동작예술, 즉
오이리트미(Eurythmie)를 창조해 내었다.
이러한 슈타이너의 독특한 인지학적 인간 이해에 기초하여 발도르프학교의 교육사상을 정립하였다.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