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 우리말 톺아보기]백기완선생이 쓰는, 살려쓰고 싶은 우리말
옛살라비, 벗나래, 땅별, 넉넉살, 잔잔, 끈매, 달구름, 아리아리꽝!..............
모처럼 몇 년만에 백기완선생을 점심에 모실 기회가 있었다. 백기완이 누구인가? 한평생 민주화투쟁에, 통일운동에 한 삶을 바친 분 아닌가. 한때는 민중후보로 대통령선거에도 나올만큼 과격하다면 과격할 수도 있겠으니, 꼭 그분 생각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그냥 이 땅의 몇 안되는 ‘생각있는 ’어르신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연포탕을 들면서 “선생님, 여기 야채하고 싸드세요” 했더니 정색을 하고 하시는 말씀이 “최부장(옛날 직함), 될 수 있으면 야채라고 하지 말아. 야채는 일본말이고 채소가 우리말이야. 순우리말은 남새나 푸성귀라고 하지” “예, 선생님. 주의하겠습니다”했더니 “주의도 일본말이야. 우리는 조심이라고 했어” 연거푸 두 번이나 지적을 받아 “감사합니다,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했더니 “감사합니다도 고맙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 하는 게 아닌가.
이 대목에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우리말은, 우리글은 어떠한 것인가? 칠순을 훌쩍 넘은 저 어른은 단어마다 말뿌리(어원)를 얼마나 매섭게 짚어내는가. 우리말과 글이 너무 많이 오염되었다는 것은 이미 뉴스가 아니다. 국제화 시대답게 ‘영어 공용화’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마당이니, 이를 일러 새삼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으나, 말의 근원을 아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있어 선행과제가 아닐까 한다.
이 분이 쓰는 순우리말들이 참으로 독특하다. 최근에 펴낸 ‘부심이의 엄마생각’(노나메기출판사 12000원)을 보면 차고 넘친다. 그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알고나 넘어가자. 어느 문인은 ‘철학’을 ‘궁리’라고 풀었지만 이 책에서는 ‘깨침’이라고 쓴다. 또한 ‘욕망’은 ‘뚱속’이다. 용례를 보자.
한 번→한 술 문장→글월 대한→마주한 바닷속 화산→쌈불 일생→한살매 세월→달구름 성질→본떼 희망→하제 내일→하제 거리→뜸새 한꺼번→한꺼술 점점→따름따름 급한→쭐이타는 물범벅이 된 흙→감탕 고향→옛살라비 주먹→조마구 일단→한축 이상한→야릇한 은처럼 빛나는 까래→은팡석 망치고→쌔코라뜨리고 심통→뜨저구니 향내나는 듯이→상그러히 세상→벗나래 목화→흰솜풀 별명→덧이름 한때→한축 얼굴 앞으로→쌤통 연기→내 술에 취한→술에 맴친 도대체→썅이로구 특히→땅불쑥하니 들 것→마주잽이 반찬→건건이 절대로→뻥나가도 빨리→얼떵 살아가는 정서→푸닥새 시끌한데→떴다고는데 감옥→때 이번에→이참에 순두부→갓두부 심지어는→됫싸게는 두드러기→살방울 시작하다→차름하다 지구→땅별 늘→노다지 적(敵),원수→부셔 우주→널판 농사꾼→씨갈이꾼 사실은→알로는 순간→때참 조형물→조래 대답→말받이 화두→말뜸 대담→댓걸이 역시→똑뜨름 식구→입네 배신자→등빼기 찡그러진 심통→샤통 급해맞은→쭐레맞은 걱정→쓰레 분명하다→핸중하다 공짜→거저 지옥→넋빼 초가집→이응집 흐느끼다→쿨쩍거리다 끔찔한→시꺼먹은 약속대로→매긴대로 혹시→얼추 병나다→탈나다 잠깐→얼짬 어리석은 못난이→미육 행복→넉넉살 주인→알범 결코→마땅쇠 수준→찰썩 인연→끈매 삶의 평화→삶의 잔잔 구조→틀거리 증거→갓대 가치관→값 북쪽→노녘 위대한→어먹한
황해도 구월산자락 방언도 있겠고 억지 우리말도 있을 것이나, 눈으로 글을 읽다보면 그 뜻이 명확해지는 것들이 많다. 스포츠 경기를 응원할 때 쓰는 ‘파이팅’이라는 말도 영어권에서는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말로 ‘아-리 아-리 꽝’으로 하면 어떠냐는 데는 기가 질린다. 건배를 하면서 윗사람이 ‘아리 아리’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꽝’ 한 술(번) 해보라.
‘달동네’라는 말도 한국전쟁직후 언덕빼기에 사는 무허가촌을 보고 백선생이 처음 지었다던가. 달을 가장 먼저 보는 동네. 남산터널을 뚫는데, 터널이라는 영어 대신 ‘판굴’이나 ‘맞뚫레’로 하자고 건의했다고 한다. ‘마주 뚫리니’ 맞뚫레, 산중턱을 파 굴을 만들었으니 ‘판굴’, 이 아니 좋은가. 최근 국립국어원에서 ‘웰빙’을 ‘참살이‘로 ’파이팅‘을 ’아자‘로 네티즌의 의견을 모아 정했다 한다. 말도 진화한다지만, 좋은 우리말은 언중(言衆)이 활발하게 사용하여 오래도록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백선생의 우리말과 글이 생소한 것 투성이이지만 살려쓰고 싶은 말들도 많다. 땅별, 널판, 옛살라비, 한살매, 벗나래, 말뜸, 댓거리, 넉넉살, 잔잔, 끈매, 달구름 등은 호수에 퍼지는 물무늬처럼 널리널리 쓰였으면 좋겠다.
첫댓글 어렸을 때 마당에 이어져 있는 넓은 남새밭에서 자라던 봄동, 상추, 오이, 가지, 먹때왈을 따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왜 남새밭인지 궁금했는데 남새, 푸성귀가 채소(菜蔬)의 우리말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