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제니친의 ‘암병동’
작가 ;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초판 발행 ‘ 1968
암병동》(러시아어: Раковый Корпус, 영어: Cancer Ward)은 러시아의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67년 발표한 소설이며,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소설이기도 하다. 1966년 사미즈다트로 처음 출판되었고, 1968년 4월 영어 번역본으로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 배경은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이후의 소련 타슈켄트(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의 병원이며, 올레그 필리모노비치 코스토글로토프(Oleg Filimonovich Kostoglotov), 파벨 니콜라예비치 루사노프(Pavel Nikolayevich Rusanov) 등의 암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련에 대한 사회의 모순과 부정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본국에서는 출판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솔제니친 작품들처럼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무대는 스탈린 사후의 1960년대로서, 중앙 아시아의 한 지방병원이다.
이 작품은 소비에트 문학지 Novyi Mir에서 수차례 간접 발표를 시도한 후에 결국외국에서 출판했다. 이 작품은 관점과 화법의 중심을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아무런 거침없이 전환함으로 완전한 세계를 구성했다. 그러나 강제노동수용소나 탄압 등 소비에트 체제로 인한 정치적, 철학적 문제보다도 왜곡된 사회가 개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더 치중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주인공인 코스토글로토프는(솔제니친 자신처럼) 한때 정치범이었으며, 지금은 암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는 성생활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는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로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모두 뻬앗긴 고스토글로토프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삶의 희망마저 산산조각나고 만다. 코스토글로토프는 외로운 중년의 여의사와 생각도 못한 관계로 발전시키고, 줄거리는 그들의 잠정적인, 그리고 끝내 깨닫지 못하는 감정적 친교를 탐구한다.
러나 그들의 개인적 이야기가 다른 인물들의 타블로 전체에 섞임으로서 이 소설의 효과가 더욱 강렬해진다. 이 소설은 자기기만과 경력주의, 젊음의 욕망과 순수, 분노와 신앙, 그리고 체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부분은 강제 수용소 안에서의 부서진 삶에 대한 것이다.
(소설의 배경)]
스탈린의 죽음, 베리야의 처형, 말렌코프의 해임 등 일련의 사건을 거쳐, 스탈린 시대에서「해빙(解氷)」기로 접어 들어가는 1995년, 산업 관리국에 근무하는 관리 루싸노프는, 악성종양(惡性腫瘍) 때문에 중앙 아시아에 있는 타시켄트의 암병동에 입원한다. 그가 입원한 큰 병실에는, 여러 가지 인생을 거쳐 온 온갖 노소(老少)의 환자들이 가득히 있다. 간가르트와 돈쩨와의 두 여의사(女醫師)를 중심으로, 간호원들이 헌신적으로 환자를 보살핀다. 그러나, 절대 안전하고 확실한 치료법은 없다. 어느 비 오는 날, 라게리(수용소)에서 돌아오는 코스트그로트프가 입원한다. 그는 되도록 이면 수술이라든지 의미가 불명한 치료에서 벗어나, 한때 추방 생활은 한바 있는「아름다운 땅」우시 텔레크에서 다시 살 것을 꿈꾸면서, 입원 생활을 하는데, 간호원 쪼카와의 연애를 경험하고, 여의사 간가르트에 대한 사모의 정을 품는다.
암병동에 수용되고,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도 삶에 집착하는 환자들은, 유한한 삶을 직면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혹은 현재를 향락하려고 한다. 퇴원이 강요되는 회복 불능의 환자, 가슴의 절단 수술 선고를 받고 절망하는 미모의 소녀. 그러나 코스트그로트프에 있어서 암병동은 라게리보다는 자유로운 고장이었다. 한때, 숙청에 협력한 루싸노프는 시국이 변화하여 숙청된 사람들의 복권(復權)의 기색이 감동에 전전 긍긍하고 있다. 코스트그로트프와 루싸노프의 치열한 논쟁. 곧, 루싸노프는 퇴원한다. 코스트그로트프도 계속하여 퇴원한다. 그때, 역시 암에 걸려 있던 여의사 간가르트는 코스트그로트프를 자기의 집에 머물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코스트그로트프는 그녀에게 이별과 감사의 사연을 적은 편지를 역에서 띄우고, 우시 텔레크 행의 장거리 기차를 탄다.
이 작품은 암병동을 무대로 다채로운 인물을 등장시켜, 스탈린주의가 인간의 의식에 남기고 간 상흔(傷痕), 사회주의의 왜곡(歪曲)과 자유의 억압, 인간에 대한 모멸 등을 대담하게 파헤친 장편 소설이다.
(줄거리)
1955년 중앙아시아 어느 암 병동. 노인부터 십 대 소년, 유형수부터 고위 공무원까지, 모두 암이라는 병으로 인해 이전에 살아온 삶과는 완전히 단절된 채 같은 병실에 머물고 있다. 환자복을 입는 순간 각자의 사회적 지위와 배경은 사라져 버리고 병과 싸우는 환자로서의 생활을 공유하게 된다. 병과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지난 삶을 반추하며 회한과 슬픔을 느끼고, 누군가는 절망과 분노에 휩싸이고 누군가는 욕망과 의지를 불태운다. 스탈린 체제하에서 동료를 배반하며 높은 자리에 오른 이가 있는가 하면, 수용소와 유형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이가 있고, 가족을 모두 잃고도 눈앞의 현실에 고개 숙여 온 이가 있다. 그리고 스탈린이 사망한 지 2년, 그 체제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곪아 가던 고름은 모두에게 암과 같은 커다란 아픔이 되어 있다.
여학생 꽁무니를 따라다니기 바쁘던 대학생 시절, 사소한 말 한마디로 체포되어 감옥과 수용소를 떠돌아야 했던 코스토글로토프. 그는 사회에 대한 냉철한 비판 의식도 없지만 권력에 영합해 출세할 만한 영악함도 없었고, 단지 거짓말을 못했던 탓에 핍박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의 운명 역시 그와 같아서 그는 “한 여자는 자살했고…… 한 사람은 아직 살아 있어요. 남자 셋은 이미 죽었고……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요.”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루사노프는 평생을 체제에 영합해 무고한 사람들을 밀고하고 괴롭혀 부와 지위를 얻은 사람이다. 병동에서조차 뇌물을 주며 특별 대우를 바라지만, 목에 생긴 종양 앞에서, 즉 삶과 죽음의 갈림길 앞에서는 그토록 무시했던 사람들과 같은 운명일 뿐이다. 스탈린 체제하에서 가장 영광을 누리던 그의 현재는 오래전 희생시킨 이웃이 찾아와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움에 떠는 것이며, 스탈린 사망 2주기에도 그에 대한 추모 기사 한 줄 실리지 않은 신문을 보며 충격에 휩싸이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증오합니다.” 그녀에게서 얼굴을 돌린 그의 시선은 날카로웠고 턱은 불쾌한 감정을 나타내며 떨고 있었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짐승이자 다른 사람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악당이에요. 우리 나라에서는 그들이 갱생했다느니, 그들이 ‘사회적 동포’라느니 하면서, 삼십 년 동안이나 떠들어 댔지요. 그들의 원칙이란 ‘너를 ……하진 않아.’라는 것일 뿐이에요. 이것은 그들이 쓰는 은어지만 아주 악랄한 것이죠. 예를 들어 ‘너를 때리진 않아! 그러니까 너는 가만히 앉아 있어, 네 차례를 기다리란 말이야!’ 혹은 ‘네 이웃의 옷을 벗기는 중이야, 너는 가만히 앉아 있어, 네 차례를 기다리란 말이야.’ 같은 것이죠. 놈들은 이미 쓰러진 사람을 짓밟는 짓을 즐기는 자들이죠. 그런데도 낭만적인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자들이 전설을 만들도록 거들어 주고, 영화를 보고 그자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어요.”(본문 중에서)
학창 시절, 풋풋한 첫사랑을 나누었던 남자가 전사한 후 오랜 시간 그를 그리며 살아온 베라. 투옥되었던 오빠마저 어느 날 소식이 끊어지고, 반송된 소포를 유골함처럼 품에 안고 돌아오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죽고 싶다는 욕망이 실현되지 않”아 그녀는 의사가 되었지만, 매일 밤 어둡고 좁은 방으로 돌아갈 때마다 “우리에게는 슬픔을 견디는 능력이나 정절의 능력이 없다. 우리는 세월에 항복할 수밖에 없다.”라고 되뇌인다. 그러나 혼자가 된 것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거칠어지고 멍든 손으로 프랑스 책을 읽는 청소부 옐리자베타. 레닌그라드 봉쇄 당시 오케스트라의 플루트 연주자였던 남편과 함께 추방되어 딸은 유형지에서 죽고 수용소로 끌려갔던 남편의 소재를 알 수 없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가 자라면서 묻는 질문에 숨 막히는 진실을 가르쳐야 할지 숨겨야 할지를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한다.
황금빛 천사 같은 열일곱 살 아샤, 대학에서 공부할 꿈으로 가득한 열여섯 살 죠마. 머릿속엔 운동과 춤, 이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다. 그러나 죠마는 한쪽 다리를 잘라 내야 했고, 아샤 역시 유방에 생긴 종양 때문에 한쪽 가슴을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는다. 아직 인생을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못한 채 가혹한 운명을 맞게 된 둘은 서로에게서 위안을 찾기 시작한다.
의사가 어디까지 환자에게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냐는 영원한 화두가 이 책에도 극명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청년을 사랑하는 여자의사는 성기능저하라는 호르몬치료의 부작용을 이야기 안합니다. 육체적 관계보다는 정신적 관계를 자신은 중시하기에 안 알렸을 수도 있고, 성기능이 저하되더라도 그 청년을 살리고 싶어서 안 알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청년은 큰 배신감을 느낍니다. 청년이 치료를 거부할 것을 알면서도 알렸어야 했는지, 아니면 부작용을 안알려서라도 치료받게 했어야 하는지 솔직히 저는 아직까지 명확한 판단이 안섭니다.
물론 오늘날의 의료환경에서 법적인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는 100프로 정보를 제공하고 환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겠지만 이런 탓에 불필요한 정보를 접한 접한 환자가 치료를 꺼리다가 병을 키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본주의하에서는 공식적 견해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의사들이 암암리에 지지하는 주장, 가령 '디스크 수술은 최후의 수단이다' 같은 정보를 환자에게 제공할 경우, 의사의 수입하락이라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의사라고 해서 희생만을 강요할 수는 없기에 참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다 암 병동에 모여든 이들. 누군가는 병이 나아 두 발로 병실을 나가고 누군가는 죽음을 맞아 병원을 떠난다. 그리고 아직 앞으로의 운명이 정해지지 않은 환자들과 그들을 치료하는 의사와 간호사, 청소부 들도 각자 삶의 짐과 슬픔, 병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의문 속에 삶은 계속되고, 웃음과 사랑도 싹트기 시작한다.
암 병동이라는 공간 역시 단순히 암 환자들의 치료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머무르지 않는다. 암 병동의 공간적 의미는 작품에서 훨씬 확대된다. 솔제니친의 언급대로 어떤 병인이 사람의 몸에 암을 발생시킨다면, 암을 발생시키는 병인을 품고 있는 사회는 결국 암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거짓과 기만, 가공할 악행,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 내야 했던 수많은 감옥과 수용소와 유형지는 소비에트 체제에 암을 발생시키는 병인이었다.(「작품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