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24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연중 제4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5RmUVK27g80 (한장호 베네딕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수도자 충만한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설날 아침 미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오니... 세상에! 한 폭의 풍경화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사가 그렇듯이 기쁨과 환희의 순간은 찰나입니다. 잠깐의 눈요기가 끝나고 길고 긴 수고의 시간이 남아있었습니다.
떡국 한 그릇 후루룩 초스피드로 흡입하고 나서는 곧바로 전투 복장을 하고 제설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세상 좋아져서 강력한 송풍기를 등에 메고 하루 온 종일 이곳저곳 눈을 치우고 또 치웠습니다.
새해 첫날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길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저 순백의 눈처럼 다들 깨끗하고 순수해졌으면, 구리지 않고 솔직담백해졌으면, 잔머리 굴리지 않고 좋으면 좋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오늘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한국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의 말씀대로 수도자들은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 만큼 잘 존재(Well-Being)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살아계시며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바로 축성생활자들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축성생활자들은 모든 일에 앞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잘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 생활의 날을 맞아 스스로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수도생활, 과연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의 수도생활에 대해 나는/세상 사람들은/주님께서는 정녕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수도자들의 현존에 대해 정녕 가치와 의미를 찾고 있는가? 수도자들은 존재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우리 수도자들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반대 증거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보고 ‘저게 뭐야? 수도자가 저래도 되는거야?’라며 충격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4~50년전, 한해 입회자가 4~50명씩 되던, 그래서 침실이 부족하던 수도 성소의 호황기 시절을 그리워며,‘라떼는 말이야!’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끼리만 알콩달콩, 오손도손, 재미있고 편안하게 살면서, 수도원 담 너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잘 짜여진 일과표에 따라 수도 규칙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고통받고 있는 세상과 가난한 이웃을 향한 개방과 환대, 나눔과 헌신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것은 아닌지?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참으로 큰 도전 앞에 서 있는 축성 생활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수도 생활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 회복시키기 위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도자들 한분 한분의 내면에 성령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수도 공동체 생활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들의 얼굴에서 기쁨과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고통받는 세상 속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수도자들의 적극적인 봉사와 헌신도 아주 중요합니다. 각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적 현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입니다.
어쩌면 한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수도자 한분의 현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가운데 살아 숨쉬고 계신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98GCkkt0uBI
++++++++++++++++++
<우리가 성장을 멈추는 이유>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봉헌된 이들, 특별히 수도자들의 봉헌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또 넓게 보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 봉헌된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의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전통에서 가장 부러운 것 중의 하나는 ‘자녀를 봉헌하는 전통’입니다. 성경에서 비롯된 이 전통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자녀를 주님의 것으로 봉헌하고, 또 12~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며 완전히 주님 것으로 내어드립니다. 우리도 유아세례와 첫영성체, 그리고 견진성사가 있기에 이 전통을 물려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부모의 정신과 우리 신앙인의 정신은 자녀를 봉헌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봉헌하면서 또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칩니다. 이 제물은 가난한 가정이 자녀 대신 바치는 것인데, 이 제물들은 다 죽임을 당해 주님께 불살라집니다. 이 제물이 불살라질 때 부모는 자녀가 그렇게 주님께 봉헌된다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권리를 ‘나의 것’으로 절대 여길 수 없게 됩니다.
조선 시대, 효종 임금의 친척 중 ‘덕원령’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둑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국수(國手)의 호칭을 얻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마당에 말고삐를 매고 있었습니다. 덕원이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번을 서려고 올라온 향군입니다. 저도 바둑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리께서 국수라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물리치지 마치고 한번 대국해 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덕원이 마치 심심하던 차라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니 그 사람은 덕원에게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대국에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만약 나리가 지면 소인에게 봄철 양식을 대주시고, 소인이 지면 저기 마당에 매어 둔 말을 나리께 바치겠습니다.”
덕원도 그가 제시한 내기 조건을 쾌히 수락하였습니다. 첫 번째 대국에서 덕원이 한 점을 이기고 두 번째 대국에서도 또 한 점을 이겼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군말 없이 자기의 말을 내놓았습니다. 덕원은 그 말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약속 이행이라 하지만 명색이 국수라 불리는 고수가 하수에게 말을 받는다는 것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걸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덕원은 웃으면서 말하였습니다.
“아이, 이 사람아. 내가 농담으로 한 약속이니 그 말을 받을 수 없네.”
덕원이 받기를 꺼렸지만, 그 사람은 정색하며 고집하였습니다.
“나리께 소인이 감히 식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끝내 고집하고 자기의 말을 두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다시 와서 또 내기 바둑을 간청하였습니다. 덕원은 할 수 없이 대국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두어도 그의 수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끝내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덕원령은 처음부터 그 사람의 상대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영문이나 알고 싶어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청하니 그는 죄송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저 말을 무척 좋아하고 제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에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번을 서는 동안 저 말을 먹여 줄 데가 없어 결국 제 말은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인은 그 말을 살릴 욕심으로 조그만 바둑 재능으로써 감히 나리를 기만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바둑을 잘 두는 것이 ‘지식’이라 하면, 그 바둑을 지면서까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지략이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님이 어떻게 자랐는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이 성장은 분명 아드님의 봉헌과 관계가 있습니다. 봉헌은 성장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만드는 고치를 봅시다. 그 고치의 크기는 그 안에서 자라는 나비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그 고치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경계’라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고치 크기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부모에 의해 정해집니다. 부모가 심할 경우 그 경계를 무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이는 성장을 멈춥니다. 어른이 되어도 실제로 상처받은 아이로 남습니다.
히틀러의 경우를 봅시다. 히틀러는 아버지로부터 강요와 체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경계선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상처를 히틀러는 감히 누가 자신을 건들려고 하면 굉장한 화를 낸 것입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경계는 무시할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경계에 대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녀들은 자기 속으로 더 들어가고 남의 자유도 존중하지 못하는 관계 불능의 상태로 성장합니다.
그 경계를 엄청나게 존중해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과잉보호입니다. 문제는 그 크기가 너무 좁고 두꺼워 숨 막혀 죽는다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엄마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딸’이란 내용이 있었습니다. 배우 출신 재무 설계사 여현수 부부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이 혼자 샤워를 하겠다고 하자, 예의 주시하다가 머리를 말리는 것까지는 할 수 없다며 결국 도와줍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기 방에서 자려고 할 때 자다가 오줌을 쌀까 봐 아이도 불안하고 엄마도 불안합니다. 아이는 잠이 들 때까지 기도하고 자고, 엄마는 결국 아이가 잠들기 전에 올라가 화장실에 데리고 갑니다.
이것은 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범위를 엄마가 막아버리는 행위입니다. 자라면 마마보이, 마마걸이 됩니다. 아이는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자존감 낮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더 성장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 아이를 살찌우고 성장시킬 수 있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고치의 크기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는 크기로 커집니다.
tvN ‘고스트 닥터’에서 정지훈은 실력은 좋지만 남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인 천재 의사로 나옵니다. 그런데 어쩌다 사고가 나서 코마 상태로 빠지고 영혼이 병원을 마구 돌아다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마나 버릇없는 사람이었는지를 보게 되며 서로 성장해가는 내용입니다. 유령이 된다는 말은 지금의 껍데기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범위가 넓어지니 자신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했던 일들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변해온 모습까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줄 알게 되고 점점 착한 의사가 되어갑니다.
성장은 이렇게 이뤄집니다. 부모가 아이를 자기 범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면 그 틀을 깨고 더 넓고 큰 고치 안에서 성장하게 해야합니다. 그러려면 탄생과 죽음 이후의 세상까지 포함하는 하느님의 세상에서 살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자녀가 믿게 하려면 부모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둑에 져서 맡겨놓은 말처럼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건들지 말고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는데, 우리는 왜 할 수 없겠습니까?
봉헌은 바로 아이의 경계를 죽은 뒤까지 확장하는 것임을 알고 나의 세계에 아이를 가두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을 멈추는 이유는 하느님께 진정으로 봉헌되지 않아서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22-4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나 큰 기쁨,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으로 우리의 유한한 것이라도 그분에게 닿기만 하면 즉시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율법에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 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의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된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 역시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한나는 일찍이 사별하였지만,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봉헌>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첫아들은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 구약성경의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탈출 13,2) ‘짐승의 맏배’의 경우에는 실제로 죽여서 제물로 바쳤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실제로 바친 것이 아니라, ‘은 다섯 세켈’을 바쳤습니다.(민수 18,15-17)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은, 이집트에 내린 열 번째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뒷날, 너희 아들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그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 그러나 아들들 가운데에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탈출 13,14-16)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님 몫으로 돈을 바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한나가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친 것처럼(1사무 1,28), 예수님을 직접 하느님께 봉헌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봉헌을 겉으로만 보면,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 일로 보이지만, ‘믿음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갓난아기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질문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라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시고 메시아가 되신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은 그때 ‘시작’되어서 일생동안 계속되었고,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부활과 승천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 ‘봉헌’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이야기’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6-27) 여기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라는 말씀은,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작은 기적’을 행하신 것은,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해석합니다. (잡은 물고기를 시장에서 파는 평범한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베드로 사도의 입장에서는, ‘나의 노동의 대가로 번 돈’을 바치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헌금’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원래 이 말은, ‘불우이웃 돕기 성금’에 관한 말인데, 봉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형편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이 바치는 것, 그리고 부담스러워하면서 억지로 바치는 것은 올바른 봉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착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봉헌의 모범’으로 자주 언급되는 ‘가난한 과부’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께서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라고 그 과부를 칭찬하셨는데,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바친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모두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한 말로 예수님 말씀을 풀이하면, 부자들은 풍족하게 살면서도 얼마씩만을 억지로 낸 사람들이고, 그 가난한 과부는 궁핍하게 살면서도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다 ‘기쁨으로’ 바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봉헌에 관해서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한 말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에게 어떤 물질적인 것을 많이 바치기를 우리에게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의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제물과 헌금을 많이 바치는 것은,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는 것과 같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봉헌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1요한 4,20)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이웃을 섬기는 일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일과 이웃에게 사랑 실천을 하는 것은 함께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오늘을 축성생활의 날로 정했습니다. 하느님께 가난, 정결, 순명을 서원한 수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교회는 오늘 1년 동안 제단에서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예전에는 초를 많이 사용했지만 전등이 발명되면서 요즘은 가정에서 초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전례 때, 미사 때, 기도할 때 우리는 초를 사용합니다. 단지 어둠을 밝히는 용도라면 더 이상 초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가톨릭평화신문의 심리여행에 기고하신 수녀님의 ‘촛불 명상’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묵상하기에는 좋은 글입니다.
“미사나 전례 때에 초를 켜는 이유를 생각합니다. 첫째 이 초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자신을 태워서 세상에 빛을 주신 구원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둘째, 나 자신을 의미합니다. 나를 태워서 주변을 밝게 하라는 사명입니다. 셋째, 이 불꽃처럼 뜨거운 기도가 되어 하느님께로 올라가기 위함입니다. 천천히 타고 있는 심지, 뜨겁지만 묵묵히 자신을 죽이고 몰래몰래 눈물짓는 촛불을 바라보노라면 한평생 자녀들을 위해 온몸이 부서져라 살라진 노모의 주름진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종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도 켜기 전에는 초가 아닙니다. 초는 켜서 달아 없어져야 합니다. 삶은 무엇인가? 타인을 위해 살라지는 한 자루의 촛불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남김없이 살라져 없어지면서도 주변을 밝혀주기 위해 불타는 초의 사명, 자신을 송두리째 불사르기 위해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 촛불을 통해 내 안에 임재하시는 그분을 느끼며 세상 곳곳에 온기를 전하라고 속삭이고 계신 주님입니다. 지금도 마음의 추위, 영혼의 추위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이 빛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촛불 같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촛불같이 소리 내지 않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어둠을 원망하지 않고 그 어둠을 밝히는 한 자루 촛불이 되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오늘도 이른 새벽, 어둠이 맴돌고 있는 대지 위에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손이 그립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 세상은 더욱 밝고 따뜻해 질 것입니다.
기도는 성취되고 있는 희망입니다. 낙담한 사람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희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힘을 확신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자신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선과 권능을 희망합니다. 기도는 성취되고 있는 희망입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오늘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시메온과 한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을 들어 올려 축복한 사람은 언제나 기도하였던 시메온과 한나였습니다. 예수님을 축복하면서 시메온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봉헌축일을 지내면서 제가 좋아하는 한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春蠶到死絲方盡(춘잠도사사방진) 蠟炬成灰淚始乾(납거성회루시간)” 뜻풀이는 이렇습니다.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뽑기를 그치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눈물이 그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요한 신부님]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의 관례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첫아들로 태어난 그 갓난아기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귀하고 특별한 존재였을까요? 구약의 율법은 맏아들, 가축의 맏배, 햇곡식 등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소중하게 여길 만한 것들을 주님께 바치도 규정하는데(탈출 13,2; 레위 23,10 참조), 이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가장 좋은 것을 내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자신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소중한 아들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봉헌합니다. 성전에 등장하는 나머지 두 인물도 자기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였던 이들입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곧 메시아의 도래로 실현될 구원의 때를 간절히 기다리며 의롭고 독실하게 한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나도 마찬가지로 과부로 지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값진 보상을 얻게 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시메온과 한나처럼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약한 수도자들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봉헌된 이들의 숭고한 삶에 깊은 존경과 기도를 드리면서, 아울러 우리 각자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봉헌할 수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각자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주님께서 몸소 마련하신 구원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쁘게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는 참으로 놀라운 구세주 강생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신 것으로 모자라, 사람의 도움으로 하느님께 봉헌되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갓난아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길을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되셨던 것입니다.
정결례가 끝난 뒤에 장면이 전환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한 시메온은 ‘시메온의 노래’를 부르면서 구세주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보았음에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이렇게 두 개의 손길과 마주합니다. 하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신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손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품에 안는 두 팔입니다.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도움과 손길을 요구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두 팔로 따뜻하게 안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님께서는 성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우리의 손길과 도움을 청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두 손과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 드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아울러 오늘은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며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40일째 되는 날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주님 성탄과 공현을 마무리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본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맏아들, 곧 첫아들은 주님의 몫이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그러하였습니다(탈출기 13장 2절 참조).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될 때, 하느님께서 이집트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이 맏아들과 맏배를 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맏아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를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 그것을 본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건너뛰게 하여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그 건너감에서 ‘파스카’라는 말이 나왔고, 맏아들의 봉헌은 곧 이집트에서 해방됨을 기억하는 행사였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에 모든 맏아들을 성전에 봉헌해야 한다는 율법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뒤 모든 맏아들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 되고, 부모들은 성전에 제물을 바치고 맏아들을 하느님에게서 받아 오는 것입니다.
이 율법에 따라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하느님이시기에 당신 자신을 봉헌하실 필요가 없으셨지만, 스스로 봉헌하심으로써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는 성자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모범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봉헌의 모범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메온의 말대로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겪게 되실 성모님께서도 당신 자신과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온전히 하느님께 돌려 드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과연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이라는 의롭고 경건한 이를 만납니다.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저마다 꿈을 실현하고자 일생을 바칩니다. 그런데 시메온에게 꿈은 오직 한 가지, 주님께서 구원하러 오시는 것을 보는 것이었지요. 이를 위해 전 생애를 주님께 봉헌하며 끝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처럼 아기 예수님을 통해 주님을 체험하지요. 신앙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봉헌이란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침으로써 내가 근본적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봉헌 중에 가장 뜻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메온처럼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일생을 봉헌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결국 평생 자신을 주님께 얼마나 봉헌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삶의 마지막 순간에 시메온처럼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시메온처럼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라삐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노래를 불렀듯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 시매온이 찬미합니다. 이 찬미를 흔히 라틴어 성경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릅니다.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미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주며,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은 ‘풀어주셨다’, ‘쉬게 하다’, ‘죽게 하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해주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다른 민족들”에게도 “계시의 빛”이 비추심을 말해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는 더러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일어나고” 곧 구원되고, 그렇지 않는 이들은 “쓰러지고” 곧 멸망할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 생각”, 곧 믿지 않는 마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 줍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도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셨다는 것,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과 구원의 길에 참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혹 지금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비록 어려움과 아픔,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 중에 있다고 해서 축복이 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2,22)
<봉헌의 삶!<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님봉헌축일'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들의 날'인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 기쁘게 봉헌의 삶, 증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수도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봉헌되십니다. 예수님께서 봉헌의 삶을 사십니다. 이 봉헌은 당신 뜻대로가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시겠다는 의미이며, 그리고 그 결정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인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 열두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제자들, 성인성녀들, 예수님 봉헌의 순간을 목격한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와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많은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과 오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게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봉헌축일을 맞이해서 하느님께 봉헌한 나의 약속을 기억하고, 이 약속을 잘 실행하고 있는지 한번 조용히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을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다시 '봉헌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아멘.(본기도)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봉헌>
루카 2,22-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봉헌>
나를
낳으신 분께
내가 안긴다네
나를
보시는 분을
내가 바라본다네
나를
느끼시는 분을
내가 느낀다네
나에게
주시는 분께
나를 드린다네
나에게
오시는 분께
내가 나아간다네
나를
품으시는 분을
내가 품는다네
나와
하나이신 분과
내가 하나라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삶은 늘 새로운 시작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으로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으로 또는 사회인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결혼으로 처녀·총각의 삶이 끝난 것 같지만, 가정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정년퇴임, 은퇴 등으로 사회생활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새로운 삶인 인생 2막의 시작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시작과 끝은 늘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끝을 보면서 절망과 좌절을 하고, 누구는 시작을 바라보며 희망과 기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망할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끝’이라는 체험을 하게 될 때, 새로운 ‘시작’의 희망도 맞물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도 분명 희망이 맞물려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사제 연피정에서 피정 지도를 해주셨던 주교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오면, 눈을 감고 울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 하느님의 선물도 같이 오기에 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봐야 합니다. 눈 감고 울다가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슬피 웁니다. 그러나 울 때가 아니라 선물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지내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 유다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주님봉헌 축일을 오늘 보냅니다.
이날 아기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던 시메온 예언자와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 한나 예언자를 만납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며 큰 기쁨을 표현했고, 한나 예언자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인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말씀이 실현되었음을 본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외세의 점령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두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선물이 이 땅에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계속 하느님과의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어쩌다 기도하고 어쩌다 성당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구원의 손길을 늘 기다려야 합니다. 분명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기에 큰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다림의 기쁨>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가 메시아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는“주님께서 모든 민족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기에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은 “나의 소망은 주님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는 것이다.”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 50,14)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라고 말합니다. 사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었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신앙과 삶은 하나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30,18)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봉헌 삶의 축복-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특별히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생활의 날입니다. 또 주님 봉헌을 기리며 우리의 봉헌의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는 날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봉헌의 삶에로 불림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믿는 이들의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바로 봉헌 삶의 축복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원하신 그분께 대한 봉헌의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수차례 인용했던 아주 예전에 써놨던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라는 자작시입니다. 바로 봉헌의 열망을 표현한 글입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 역시 봉헌 열망의 표현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사는 정주 수도자들입니다.
세상에 봉헌이란 말마디보다 아름다운 말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의 의미가 바로 봉헌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봉헌뿐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자발적 삶의 표현이 봉헌입니다. 그러니 참 기쁨은 봉헌의 기쁨이요 참 행복은 봉헌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고귀한 축복의 삶이 봉헌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봉헌 삶의 모범을 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칩니다. 율법에 따라 산비둘기 한 쌍과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도 제물로 바칩니다. 이런 율법 준수의 삶을 통해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봉헌의 삶에 충실한 예수님의 부모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예루살렘의 시메온과 한나가 봉헌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둘다 주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고 살았던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전형입니다.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던 시메온이었습니다. 이런 봉헌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하던 시메온 위에는 늘 성령께서 머물러 계셨다니 그대로 봉헌 삶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고 마침내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고, 오매불망 그리던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봉헌의 삶에 충실하던 시메온이 봉헌되신 주님을 성전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대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라는 말라기 예언의 실현입니다. 성전에서 구원자 아기 예수님을 만나 두 팔에 받아 안고 감격에 벅차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시메온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대로 봉헌 삶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잠자리 들기전 시메온과 함께 끝기도때 마다 주님을 만난 기쁨을 노래하며 바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봉헌의 삶에 충실하던 시메온이 봉헌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은 봉헌의 삶이 아름다운 노년을 보장합니다. 수도자, 사제는 물론 주님을 믿는 모든 분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은 단 하나, 각자 주어진 봉헌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시메온에 이어 한나라는 예언자도 봉헌 삶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봉헌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시메온과 한나의 모습이 우리를 마냥 부끄럽게 합니다.
‘한나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한결같이 봉헌의 삶에 충실했던 한나는 정주 영성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만난 한나도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해 전해 줍니다.
참 좋은 모범이 아름다운 봉헌의 삶입니다. 봉헌의 삶도 보고 배웁니다. 수도자들의 봉헌 삶의 모범이 신자분들에게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의 부모인 요셉 마리아의 봉헌의 삶을 그대로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부모의 모범과 더불어 하느님의 총애가 늘 함께 했음을 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아기 예수님뿐 아니라 봉헌 삶에 충실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이런 봉헌 축복을 깨닫는 다면 찬미와 감사의 응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총애寵愛를 받을 때 이웃 형제들을 두루 사랑할 수 있는 겸애兼愛가 자연스럽게 뒤따름을 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가 이를 입증합니다. 겸애兼愛야 말로 총애寵愛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생명, 봉헌의 향기, 봉헌의 빛,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지혜, 봉헌의 자유, 봉헌의 충만, 봉헌의 총애 등 끝이 없습니다. 봉헌의 삶자체가 우리 삶의 모두이자 의미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인간 품위를 지켜주는 봉헌의 삶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 대한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한결같이 봉헌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봉헌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오늘 성전이신 분이 성전에 봉헌되심으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축성되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인간이 거저 의미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의 귀한 아들이고 딸임을
세례와 서약을 통해 알게해 주시니
또한 감사드립니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론 주님이 안 계신 것 같고
나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노인 시므온처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묵묵히 주님의 구원의 날을 기다리게 하시고,
예언자 한나처럼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봉헌의 삶을 살게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주님을 만나뵈옵는 기쁨을 누리고
주님의 구원을 체험하여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여기고
평화로이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게 하소서.
오늘도
저의 보잘 것 없는 봉헌을 받아주시고
주님의 축성으로 깨끗하게 하시어
주님 마음에 드는
의로운 제물을 바치는
그런 종 되게하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_SKMvSJC_U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주님께 바쳤다."(루카 2, 22)
종신서원 때의
그 떨림과
그 감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하느님께
올려지는
모든 것은
뜨겁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먼저 봉헌을
가르쳐주신다.
먼저
하느님께
바쳐지는
봉헌의
삶이다.
가장 적극적인
사랑이 바로
봉헌이다.
봉헌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봉헌은 단순하고
축성은 소박하다.
거룩함은
생활을
끌어안고 있다.
하늘의 삶은
봉헌의 삶이다.
거룩함은
봉헌으로
시작되고
봉헌은
생활로
이어진다.
주님의 모든
시간은 봉헌의
생활이었다.
수도자는
봉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생활을
새롭게 맛본
행복이다.
봉헌과
축성의
은총으로
복음의
새생활을
배운다.
봉헌이 무너지면
생활도 무너진다.
봉헌의 생활로
주님을 닮아간다.
봉헌은
삶의 모든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봉헌이
우리 모두를
살리고 있음을
믿는다.
생생한 봉헌의
새날이다.
++++++++++++++++++
(2)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 23)
봉헌이 일상이며
봉헌이 우리
생활이 되어야합니다.
봉헌으로
우리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함께 하는
믿음이 진정한
봉헌입니다.
흐트러진 우리 삶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봉헌입니다.
삶의 모든 배경이
되어줍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봉헌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봉헌 안에
존엄함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봉헌이 우리를
정화시켜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봉헌으로 당신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봉헌으로
모인 공동체가 바로
수도 공동체입니다.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은
봉헌입니다.
나약함과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를 봉헌이
주님께로 데려갑니다.
가야할 길을
아름답게 하는
봉헌이 있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는 봉헌입니다.
봉헌은 모든
일상임을 믿습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