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혁명당 (통혁당)과 신영복 >
허현준, 페이스북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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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3월 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김질락, 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다.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됐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서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해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통일혁명당(통혁당) 기관지 <혁명전선>에 담긴 내용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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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3월 15일 어둠을 틈타 비밀리에 모인 이 모임에는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통혁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주의를 사상적 기초로 하고, 반제-반봉건-반식민을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하에 움직이는 남한(대한민국)의 혁명적 전위부대를 자처한 비밀 혁명조직이다.
통혁당의 수괴는 김종태이나 실질적인 두뇌 역할을 한 인물은 김질락, 이문규이다.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은 이진영의 소개로 신영복(육사 교관)을 만난다. 김질락은 신영복을 만나는 자리에서,
"아니 선언문 같은 것을 쓰고도 아무 일 없었소?" 라고 묻는다.
신영복 대답은 이렇다.
"그래서 무척 조심했습니다. 다 걸리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지요. 외견상으로 볼 때 누가 봐도 저는 순수한 자유주의자이죠.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할 수 있는 대로 쉽고 재미나는 말로 계급의식을 주입시키지요. 예컨대 원시사회에는 인간이 뛰어다니며 자연을 착취했고, 좀 더 편하게 살자니 농사를 지었다. 농사짓는 것보다는 남이 지어 놓은 농사나 재물을 빼앗는 게 훨씬 수월했기 때문에 부족 간에 싸움이 생기고, 이긴 자는 지배자가 되고 진자는 노예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인류 역사가 계급투쟁사임을 인식시키는 거죠. 이런 방법이 훨씬 안전하고 사회주의를 모르는 친구들에게는 잘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김질락은 신영복에게 조직원이 될 인물을 포섭하도록 지시했고, 신영복이 포섭한 인물이 바로 박성준이다. 박성준의 아내가 한명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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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을 당했다. 신영복, 이재학, 오병철, 신광현, 정종소는 무기징역을, 류낙진은 20년형을, 박성준은 15년형을, 기세춘 등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2021년 청와대 방역기획관에 영전된 기모란이 기세춘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문재인은 통혁당 기세춘의 딸을 청와대에 왜 들어오게 했을까 하는 의문과 추궁이 있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전향서를 쓴 뒤 1988년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출소 이후 신영복은 인터뷰와 강의 등을 통해 "나는 전혀 전향하지 않았다"라며 자신의 한결같은 이념을 강조했다.
1998년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물론 사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고 밖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가족들이 그게 좋겠다고 권해서 한 겁니다. 전향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라며 사상 전향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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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이 신영복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월남 패망 당시 이대용 전 주월공사의 억류된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남베트남이 패망한 1975년, 공산화된 베트남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우리 외교관은 9명이었다. 이들 중 최선임자는 이대용 공사로, 그는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남베트남 한국대사관 무관(대령)으로 재직하였고, 1968년 준장 진급 후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다시 파월(派越)되어 한국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던 중에 북베트남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북베트남 공산정부와 혈맹 관계를 맺고 있던 북한은 이들 한국 외교관 9명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 그사이 9명의 외교관 중 6명은 탈출하거나 북베트남 공산정부의 퇴거 조치로 한국에 돌아왔다. 나머지 3명(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호 경무관)은 사이공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대용 공사는 6·25 참전 영웅이자 현직 고위급 외교관으로 북한 공작원들은 사활을 걸고 그의 북송 공작을 감행했다. 북베트남 특수경찰도 총살형으로 그를 협박하였다. 북한 공작원들은 북한에 남아 있는 누님과 조카들을 들먹이며 협박하거나 강제 송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저들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이대용 공사는 끝내 '북한 망명 자술서'를 쓰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이들 외교관을 구출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스웨덴 등 우방국들과 유엔 등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했고, 사활적인 구출 작전을 감행했다. 억류가 길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최우선 목표는 억류 공관원들의 조기 석방"이라는 지침을 주었고, 프랑스의 중개로 남북 간의 비밀회담이 시작되었다.
1978년 인도 뉴데일에서 열린 비밀협상에서 북한이 우리 측에 "체포 구금된 남조선 혁명가들로 교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요구한 명단에는 남파 간첩과 김일성에게 충성 맹세를 한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었다. 통혁당 관련자 중 3명은 생존자였다.
북한은 '남한 출신 혁명가'를 넘기라며, '남한 출신 혁명가'를 남한 내 가족 문제로 인하여 넘겨주기가 곤란하다면 가족도 함께 넘겨주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북한이 그토록 집요하고 간절하게 인도를 요구한 '남한 출신 혁명가'는 누구일까. 그는 통혁당의 주범 신영복이다. 북한 대표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우리 측의 대표단에게 '수령님(김일성)의 지시'라며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측의 원칙적인 대응과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따른 북한의 베트남 비난(1979년 1월 12일 자 노동신문 등)으로 베트남과 북한이 급랭관계로 바뀌면서 교환 협상은 결렬되고,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억류 외교관 3명을 우리의 힘으로 구출하게 되어 북한의 집요하고 애타는 요구는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자국민 북송은 안 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지켰다. 북한의 회유와 협박도 이런 원칙을 깨지 못했다.
가석방 출소 후 옥중 수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으로 스타 강사에 영웅 대접을 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낸 신영복을 당시 북으로 보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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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사상이 김일성주의'라는 것은 통혁당 강령, 혁명전선과 조국해방전선, 민족해방전선, 청맥 등 각종 자료, 수사 자료와 재판, 김질락의 옥중 수기(어느 지식인의 죽음), 이대용 공사와 맞바꾸려 한 신영복의 북한 인도 요청 등에서 진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통혁당 수괴 김종태가 사형을 당하자 김일성은 그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해주사범학교를 김종태사범학교로 개칭하는가 하면, 김종태의 이름을 딴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도 설립했다. 북한의 수뇌부가 통혁당의 핵심 인물을 그만큼 존경하고 우대해 준 것이다.
문재인은 2017년 1월 신영복 1주기 추도식에 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신영복 선생은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라는 당명(黨名)을 주고 가셨다"라며 신영복과 민주당의 일체감을 강조하는가 하면, 대선 당시 '사람이 먼저다'를 핵심 선거 슬로건으로 했는데 그 문구도 신영복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전 리셉션에서 문재인은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라고 발언했는데 그 자리에는 북한 김영남, 김여정, 김영철(천안함 폭침의 주범)이 참석한 자리였다. 북한 최고 수뇌부들이 참여한 자리에서 그들이 들으라고 '존경하는 사상가 신영복 선생'을 강조한 것이다. 신영복-문재인-북한의 사상적 일체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김영남, 김여정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는 신영복의 서화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고, 청와대 각 비서관실에 신영복이 쓴 춘풍추상 액자를 선물해 걸도록 했다. 청와대 관저에 있다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 족자도 신영복의 친필이다. 대한민국의 지휘본부이자 사령탑인 청와대의 한 가운데에 신영복과 김일성주의를 심은 것이다.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을 향해 “신영복의 사상을 따른다는 것은 김일성주의자”라고 했는데, 가장 적확한 지점에 침을 찌른 격이다.
NL운동권 출신의 주사파(김일성주의)들이 경악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상적 치부를 김문수 위원장이 너무도 태연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과 달리 서자의 설움도 없고, 사상적으로나 삶의 태도에 있어서나 도덕성에서 앞서 있는 김문수 위원장은 직설과 정론을 택한 것이다.
김문수 위원장은 고영주 변호사의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발언 이후 가장 근본적 문제를 저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