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5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루카 24,13-35)
매일미사 말씀보기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7).”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루카 24,19-2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침통한 심정’이 된 것은,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걸었는데, 그 기대가 ‘너무 큰 실망’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라는 말은,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분은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사람들을 구원하실 구세주로 믿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두 제자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신자들 모두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으니 너무 허망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두 제자는 자기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은 메시아가 아닌 사람을 메시아로 잘못 믿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메시아께서 왜 그런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돌아가셔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 꼭 그런 방식으로 하셨어야 했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있더라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파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신비’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그런데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5-2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구약성경에 있는 메시아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과, 그 수난의 의미와 이유 등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 뒤에 부활이 있음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어린양으로) 바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에 대한 설명이고,
“왜 꼭 그런 방식이어야만 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두 제자가 예수님에게서 들은 설명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떻든 두 제자는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서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고, 실망감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에는 두 제자의 마음이 열렸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는 눈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과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인도로 그들이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직후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 또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어도 놀라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라는 말은,
그들이 어떤 감동에 사로잡혔음을 뜻합니다.
그 감동을 ‘영적 은혜의 충만함’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자기 눈에 예수님의 모습이 안 보여도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고,
그 믿음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미사 전례 중에, 또는 기도 중에, 또는 성경 묵상 중에,
또는 사랑 실천을 통해서,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 가운데에, 또는 우리 곁에 존재하십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난 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루카 24,35).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엠마오 사이의 길을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엠마오로 가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에게서 떠나가는 길이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중간에 십자가를 만나기도 하겠지만,
끝까지 잘 걸어가면 부활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원문보기▶ Rev.S.Moyes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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