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 다이어리 <1화> 프롤로그
"으아아아아아악!!!!!!!!!!!!!!!!!"
그녀는 진정할 수 없었다.
방금 전 상황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늘 만나던 그 카페에서 만난 남자친구.
아니, 남자친구였던 그 놈.
그녀는 정말이지 뛰는 심장을 움켜잡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빌어먹을. 젠장. 썩을."
순정이는 괜히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씩씩, 흥분된 얼굴로 욕을 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욕을 하고 있었다.
"헤어지자. 이젠 너 싫어."
그랬다.
귓가에 자꾸 맴도는 그 말.
빌어먹을 그 자식이 했던 그 말.
이순정, 그녀는 지금 실연을 당한 화풀이를 거울을 보면서 하고 있었다.
누구를 향해 하는 욕인 것일까?
차갑게 자신을 버린 그 놈을 향한 욕일까, 못난 스스로에 대한 욕일까.
이순정. 방년 22세. 꽃다운 대학생.
하지만 외모에 별로 자신이 없고, 특별히 집안이 잘나지도 않았고, 잘 나가는 학과에 안전한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다.
별로 잘난 것 없는 그녀.
하지만 분했다.
못난 그녀가 잘난 그 놈에게 차인 것을, 열받아 하면 안 되는 것인가?
하지만 정말이지 제대로 열 받았는 걸?
"분해! 분해! 분해!"
순정이에게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그 놈이었다.
순정이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그 놈이었다.
순정의 마음을 휘집어 놓은 것은 바로 그 놈이었다.
백.지.왕.
인기 많은 그 놈. 백지왕.
"누가 먼저 말 걸랬어? 누가 먼저 손 잡으랬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 이순정.
그녀의 눈에 어느 새 눈물이 맺혀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으려고 참고 있는 그녀.
부들부들, 손이 떨린다.
꽉 다문 입술에 금방이라도 피가 날 것 같다.
"복수할 거야."
하루 사이에 비쩍 말라버린 듯한 그녀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고 있다.
소매로 눈물을 스윽― 닦으며, 이순정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백지왕이 이순정을 버린 그 날부터.
스토커 다이어리 <2화> 과거 회상
"이순정. 너 나 안 좋아하냐?"
지왕은 순정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순정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결이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
지왕은 순정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건 왜 묻는 건데?"
어설프게 두근거림을 감춘 채, 순정은 지왕을 올려다봤다.
남들이 다 킹카라고 인정하는 백지왕.
남들이 희귀한 생물체라고 놀리는 이순정.
비교되는 그 둘이 사랑을 시작하게 될 줄은, 그 날 순정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말 없는 편인 그의 말에, 순정은 뇌세포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죽어버리는 걸까.
심장이 뛰지 않는 것만 같았다.
아니,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것도 귀에 들리지 않고―
세상이 멈춰버린 것이…….
꼭 순정이 죽어버린 것만 같았다.
"야…."
그의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순정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렇게 싫니? 그렇게 돌 씹은 얼굴이라니."
"내…. 내 표정이 띠꺼워?"
"응. 많이 띠꺼워. 싫음 싫다고 해."
"안 싫어."
싫을 리가 없었다.
그런 얼굴로 말하는데, 어떻게 싫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순정은 두근두근, 자꾸 놓고 싶어하는 정신을 애써 잡았다.
"그럼 사귈까?"
"그러든가."
순정은 스스로도 무드없고, 애교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킹카가, 그것도 친구라도 좋다고 생각했던 멋진 놈이…….
'꿈은 아니지? 이거 설마 꿈?'
그러나 곧, 그녀의 이마에 닫는 지왕의 입술의 촉감으로 인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정의 나이 21살.
지왕과 사귀게 되었다.
지왕을 알게 된 지 1년 후였다.
"생일 축하해."
순정은 울고 있었다.
21살의 가을. 스물 한 번째의 그녀의 생일.
자동차에 가득 담은 풍선들이 올라가면서 '사랑해' 라고 적힌 플랜카드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백지왕 만의 특별한 마술쇼가 펼쳐지며, 그녀의 손바닥엔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장미가 나타났다.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홀로 지냈던 생일.
그 생일 날, 이렇게 멋진 녀석과 함께 보내게 해준 신께 감사 드려야만 했다.
생전 찾아본 적 없는 신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도 없는 외로운 그녀, 외로움 많이 타는 그녀.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정말로 외로움을 타는 그녀.
그런 그녀에게 손을 먼저 내민 그 남자.
백지왕.
그녀는 그로 인해 '행복'을 알았다.
'이 남자라면, 평생 믿을 수 있을지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과 함께 계속 이렇게 즐겁게 웃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 사랑하니?"
지왕은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는 여자친구 순정에게 물었다.
"아마도."
늘 그랬듯, 거리감을 두는 대답을 하는 순정이었다.
지왕은 미간 사이에 주름을 잡은 표정으로 순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째서 이 여자는 늘 이럴까.'
지왕을 따르는 여자들은 많았다.
순정도 그걸 알고 있었다.
순정이 그걸 알고 있는 것을 지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순정은 지왕을 붙잡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언제나 멀리서 바라보았다.
'날 믿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걸까.'
지왕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순정은 그의 표정을 보고 그에게 안겨왔다.
따뜻한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 들어오는 그녀의 부드러움.
지왕은 이런 저런 생각을 접고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향기를 맡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순정은 지왕의 포근함을 느끼며, 그 속에서 지왕의 심장소리를 느꼈다.
왠지 모르게 찾아오는 불안감을 떨치려 노력했다.
"행복할 거야. 앞으로도."
무심코 순정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왕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알 수 없는 그 말.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그 말.
그래도 그 날은 행복했었다. 그 예쁜 하루의 막이 내렸다.
"너 바람 피는 거야?"
"내가 무슨 바람을 펴?"
"……."
"너야말로, 바람 피는 거 아니야?"
"뭐?"
"괜히 나한테 그러는 거 아니냐고!"
"이순정! 날 못 믿어?"
"그럼 넌 왜 날 못 믿어?"
알고 있었다. 단순한 오해였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그의 표정.
그의 그 무표정.
마치, 이젠 질렸어―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권태기일까.
권태기?
'우리가 그 정도로 깊었었나? 권태기는 깊은 사랑이 지난 후에야 찾아오는 거 아닌가?'
서로 화를 내며 돌아선 그 날, 순정은 하루 종일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바보처럼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왜 연락이 없는 거야?'
며칠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고…….
한참의 시간을 순정은 홀로 보냈다.
그녀가 외로움을 잘 탄다는 것을 지왕은 알고 있었다.
분명 알고 있었다.
언제나 함께 해준다고,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지왕은 깨버린 것이다.
순정은 배신감에 젖어 매일 울면서도….
그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오늘도 나를 잊고 있는 걸까.'
비쩍 말라 가는 순정의 기다림을 알았던 것일까.
건조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순정아, 나야."
"응……. 오랜만이네…."
"오늘 좀 만나자."
지왕이 먼저 연락하길 계속 기다렸던 그녀다.
눈물이 픽 쏟아졌다.
거울을 보며 모처럼 화장을 했다.
해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면, 지왕은 뭐라고 말할까.
팅팅 부운 눈으로 웃고 있는 순정의 모습이 거울 속에 있었다.
"헤어지자."
설마, 설마, 설마! 하고 아니길, 아니길, 아니길, 빌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꿈이 아니야.
촉촉, 젖기 시작하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지도 않고―
그 나쁜 남자는 자기 할 말만 해버리고 나가버렸다.
언제나 함께 크림거품이 가득가득 얹어진 카라멜 모카를 마시던, 나무 결이 살아 숨쉬는 예쁜 그 카페에서.
이별은 그렇게 찾아와버렸다.
이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순정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나 버려진 거야?'
순정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신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그를 떠나게 만든 것인가?'
순정은 결국은 찾아와버린 못된 이별이라는 놈에게 심하게 뺨을 맞은 기분이다.
얼얼해진 듯한 뺨을 부여잡고, 테이블을 탕탕 치며―
이별이라는 놈을 떼어내려고 해봤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현실은 현실이다.
"나쁜 놈!"
먼저 다가온 그 놈, 먼저 좋아한다고 했던 그 놈, 순정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그 놈.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놈.
순정을 길들이게 만든 그 놈.
'이제 너 없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카페 문을 열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순정은 집으로 돌아갔다.
"누가 먼저 말 걸랬어? 누가 먼저 손 잡으랬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 이순정.
그녀의 눈에 어느 새 눈물이 맺혀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으려고 참고 있는 그녀.
부들부들, 손이 떨린다.
꽉 다문 입술에 금방이라도 피가 날 것 같다.
"복수할 거야."
하루 사이에 비쩍 말라버린 듯한 그녀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고 있다.
소매로 눈물을 스윽― 닦으며, 이순정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백지왕이 이순정을 버린 그 날부터.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복수가 시작된다.
스토커 다이어리 <3화> 시작
그가 잘 가는 헬스장.
그가 좋아하는 음식점.
그가 자주 가는 호프집.
그가 친구들과 종종 놀러 가는 당구장.
그가 즐기는 영화관람.
그에게 중독되게 만든 것은, 그의 탓.
그에게 길들이게 만든 것은, 그의 탓.
이순정은 배신감에 백지왕을 원망했다. 거침없이, 또렷하게―이별을 멋대로 통보한 그 자식.
'어떻게 해줄까? 어떻게 복수를 해줄까?'
어쩌면 이순정은 제정신이 아닌 건지도 몰랐다.
처음 느끼는 감정.
자꾸만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고 다시 온 몸을 휩싸는 분노.
배신감. 배반감.
버려졌다는 좌절감.
그 비참함.
"백지왕……. 보고 싶다. 아니, 무슨 헛소리야! 정신차려 이순정!"
입술이 남아나지 않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절규에 가깝게.
그녀의 눈에는 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약함의 증거.
"백지왕, 이 자식!"
문득 순정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이제 너 싫어. 헤어지자."
백지왕의 그 말.
그 마지막 말.
그 이별의 말.
'이제 나 싫어? 그럼 다른 여자가 좋아?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거야?'
자신에게 질려서 다른 여자가 생겼고, 그래서 자신을 버린 것일까…….
그 생각에 순정의 마음은 또 다시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이 나쁜 백지왕!"
그녀는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그가 지금 어디 있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의 시간표, 그의 수업시간을 다 꿰고 있는 그녀.
지금쯤은 그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겠지.
숨이 헉헉 차오르는 것도 상관치 않고 달려갔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엉망으로 휘날렸다.
눈에 맺힌 눈물이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언제나 반갑게 친절한 인사를 하는 종업원들.
순정은 지왕이 있는지 안을 살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함께 자주 왔던 곳이라 피한 것일까.
이제는 이 음식점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일까.
순정은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어디에 있는 거야…….'
순정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멀리서 오고 있는 그 남자, 지왕이 보였다.
순정은 재빨리 가게 옆에 있는 벽 쪽으로 숨었다.
'혼자잖아?'
순정은 숨어서 그를 지켜봤다.
지왕은 가게 앞에서 멈추어 섰다. 순정을 보지 못한 듯 했다.
한참을 가게 앞에서 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표정.
왠지 더 마른 듯한 체격.
꽉 다문 입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왕은 한참을 가게 앞에 서 있다가, 마침내 발걸음을 떼었다.
돌아서서 다시 왔던 길로 가고 있다.
순정은 그 뒤를 슬그머니 쫓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안에 있기라도 할까 봐, 들어가지 않았던 거야?'
순정은 괜히 화를 더 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나는 이렇게 슬픈데……. 넌 아무렇지도 않니?'
순정은 그의 뒷모습에 몹시도 가슴이 아려왔다.
심장, 그 근처가 전부 아려오는 느낌.
발걸음이 조심 조심.
앞서 걷는 지왕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앞을 본다.
뒤를 잘 돌아다 보지 않는다.
순정은 종종 보곤 했던 그의 뒷모습을, 몰래 보고 있었다.
숨어서 따라가는 그녀의 모습.
어쩌면 집착의 또 다른 형태일지도 모른다.
미련의 또 다른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여기는…….'
순정은 떨리는 두 주먹에 힘을 실어 꼭 쥐었다.
그에게 달려가 때려주고 싶었다.
바보 같은 그의 모습에 화가 났다.
'우리가 헤어졌던, 우리가 자주 갔던 그 카페.'
카페에 들어가지 않고 카페 안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순정은 화가 났다.
'너도 미련이 남았다는 거니? 아니면 마지막으로 나와의 추억을 하나씩 지우고 있는 거니?'
순정은 달려가 그를 붙잡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그의 뒷모습엔 힘이 없었다.
그의 한숨소리가 순정의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카페 안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떨구며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다.
'여기도…….'
함께 왔었던 영화관.
순정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무슨 의미로 이러는 거야?'
헤어진 것을 후회하는 것일까. 미련이 남아 이러는 것일까.
아니면 잊으려고 그러는 것일까. 어떤 추억들도 이번을 마지막으로 다 버리는 것일까.
'누구지?'
순정의 눈이 동그랗게 더 커졌다.
지왕의 앞에 멈춰 서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왕은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마주 선 상태로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순정은 주먹을 다시 꽉 쥐었다.
'저 여자야? 우릴 헤어지게 한 여자가?'
순정이 보다도 큰 키. 하얗고 고운 피부.
어울리는 파마스타일에 적당히 갈색인 머리.
순정은 자신도 모르게 그 여자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다.
외모에서는 순정이 딸리는 것만 같았다.
지왕과 그 여자가 더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나눈 시간이 얼만데……. 어째서 내가 그를 뺏겨야만 하는 거지?'
그 때 갑자기 그 여자가 지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어서 손을 잡으라는 눈빛으로 지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왕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윽고…….
마침내 지왕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떨리는 손길로, 그 여자의 보드라운 하얀 손을 잡았다.
순정이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그 여자는 지왕을 이끌고 갔다.
어떤 차에 지왕을 태웠다.
지왕은 차문의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지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여자가 지왕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차의 앞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여자가 지왕 쪽으로 몸을 숙여서 안전벨트를 해주었다.
지왕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순정의 마음이 아파왔다.
'저 여자가 너를 유혹한거니…….'
순정은 떨리는 눈빛으로 애타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라고 그 여자가 말하면서 시동을 걸었다.
차가 곧 미끌어져 나갔다.
멀리 가 버렸다.
쫓아 뛰어가려는 듯이 순정의 발걸음이 몇 발자국 옮겨졌다.
그러나 곧 멈췄다.
혼자 남겨졌다.
또 홀로 남겨져 버렸어.
버려졌어.
버려진 거야.
순정의 입술이 다시 또 새빨갛게 피를 머금었다.
여전히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버려졌어, 나는.'
순정의 눈동자에 원망의 빛이 가득 담겼다.
누굴 향한 원망일까.
스스로에 대한 원망도 뒤섞인, 그 분노는 순정의 눈동자에서 빛을 숨기기 시작했다.
스토커 다이어리 <4화> 오늘 하루
금요일.
오전 11 : 49
그가 학교에서 나왔다. 오늘은 수업이 하나 뿐이고 지금은 수업 마칠 시간이다.
옆에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 거야?
나는 이렇게 혼자인데, 너는 친구들과 그렇게 떠들고 웃는 거니?
내 존재를 알고 있는 그의 친구들의 모습.
함께 밥도 먹고 함께 노래방도 갔었던 그의 친구들.
그의 친구들도 우리의 이별을 알고 있을까.
오후 12 : 50
처음 보는 음식점.
그와 그 친구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인 듯 하다.
나는 준비해왔던 빵 한 조각을 입에 베어 물었다.
입맛이 없어서 며칠 째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여위어 가는데, 너는 밥이 넘어가는 거니?
어째서, 나만 이렇게 억울한 것 같지?
그와 친구들이 향하는 장소는 노래방인 듯 했다.
밥을 먹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던 그의 습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함께 갔던 노래방들은 피하고….
처음 보는 다른 곳에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 또 화가 났다.
이젠 정말 잊겠다는 건가.
의도적으로 날 잊으려고 저렇게 하는 것일까.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듯 쳐다보며 나는 또 노래방 앞 근처에 숨어 있어야 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
알고 있다. 바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수업도 듣지 않고, 그의 뒤만 따라다니는 바보 같은 짓을.
그는 내가 수업도 안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이렇게 혼자서 수업도 잘 듣다니…….
학교에 내가 없어서 허전한 느낌은 못 받는 거니?
오후 2 : 33
노래방에서 서비스가 별로 많이 없었던 것일까.
생각보다 일찍 그들이 나왔다.
나는 쪼그려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섰다.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는 내 모습을 그들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나와 사귈 때도 무표정일 때가 많았었지.
하지만 그 표정들 속에 숨어 있는 애정을 난 알 수 있었다.
나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그 느낌.
다른 이에게 똑같은 무표정을 보여줘도, 나에겐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와 이미 헤어져 버렸는 걸.
아니, 헤어진 것이 아니지.
나는 일방적으로 버려진 거야. 다 먹은 음료수 캔이 밟혀 버려지듯이.
마치 나는 발로 눌러져버린 깡통 같아.
그래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계속 아픈 것만 느껴.
오후 4 :50
당구장에서 나오는 그들을 기다리면서 나는 우리의 추억을 또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버렸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생각나는 걸.
포켓볼을 그에게서 처음 배우던 날.
까만 공을 자꾸 집어넣는 나의 실력에 그는 많이 웃었었다.
조금의 짜증도 내지 않고 가르쳐주면서, 그리고 미소를 띄우면서…….
까만 공을 넣으면 게임 끝이야, 흰색을 쳐서 다른 색의 공을 맞춰야지.
줄이 있는 공을 넣었으면, 이제 그것이 너의 공이야.
계속 줄이 있는 공을 넣어야 해. 나는 색깔만 있는 공을 넣는 거고.
다 집어넣고 맨 마지막에 까만 공을 넣어야 이기는 거야.
그가 말해줬던 친절한 설명.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생각났다.
무뚝뚝한 걸로 따지면 내가 더 심했지, 그가 더 심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에게 질린 이유가 무엇일까.
그 여자는 나처럼 무뚝뚝하고 표현 못하는 게 아닌 걸까.
그 여자는 그에게 어떤 식으로 대할까.
그에게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줄까.
내가 한번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던 그 말.
저녁 8 : 49
역시나 익숙지 않은 그 호프집에서 드디어 나왔다.
나는 맞은 편 카페에서 그를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기다림을 알 리가 없지.
그가 나의 애타는 마음을 알 리가 없지.
그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그의 모습.
달려가 그를 부축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나에게 이제 그럴 권한이 없어.
카페를 나서 그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두고 먼저 나온 그는 집으로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버스를 타지 않고, 걷고 있었다.
그를 따라서 나도 걷고 있었다.
점점 익숙한 길로 들어섰다.
같이 걷던 길.
같이 걷곤 하던 그 길.
함께 그의 집으로 가던 그 길.
몇 번이나 그의 집에 가봤었다. 깔끔한 원룸에서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내가 밥을 하면, 그는 찌개를 끓였다.
내가 청소를 해주면, 그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가끔 부부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다.
그랬었다.
그랬었지.
이젠 과거다. 과거의 일부분이야.
지금은….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걸을 수 있을 뿐이야.
그것밖에 할 수가 없어.
밤 10 : 05
걷다보니 밤이었다. 한시간이 넘게 그를 따라 걸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그는 걷고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서 걷고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어느 틈에 점점 그의 집이 가까워졌다.
집 앞에 그 여자가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한참을 기다렸는지 몹시도 반가워하며 그 여자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역시나 별다른 표정 없이 그녀에게 이끌려 집에 들어 갔다.
어떻게 그 여자가 그의 집을 알고 있을까.
나와 사귄 지 100일이 넘었을 때, 그가 집에 초대했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어떻게 벌써 그의 집을 알고 있을까.
나는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그와 그 여자가 나오길 기다렸다.
아니, 그 여자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그의 집에서 안 나오는 건 아니지?
자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러진 않겠지?
"나쁜 자식……."
새벽 2 : 28
그 여자가 나오지 않았다.
끝내 그 여자는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항상 집까지 바래다줬는데, 그 여자는 왜 너의 집에서 자고 있는 거지?
그 여자가 나오길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 여자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면서 둘이서 무엇을 할까, 나는 화가 났다.
던지고 싶었다.
돌이라도 그의 창문에 던지고 싶었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그에게 대놓고 화내고 싶었다.
눈물이 흘렀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추워.
춥다.
추운데….
내가 여기서 얼어죽든 말든 너는 이제 상관없겠지…….
너는 그 여자랑 이제 웃기만 하겠지…….
토요일.
오전 9 : 40
그녀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날이 새고, 해가 뜨도록 한참을 기다렸는데….
그녀는 그의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일어섰다. 돌아서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밤새 내린 이슬에 온몸이 젖어버린 기분.
눈물로 범벅되어 엉망이 된 내 얼굴.
찢어지는 우리의 추억.
날카롭게 찔려버린 나의 상처.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린 너.
확실하게 나는 또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맙다.
고마워.
고마워.
정말이지 너무 고마워.
또….
내 눈에서는….
쓸데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병신 같이….
지겹게 울고 또 울어도…….
어째서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일까…….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오후 2 : 20
나는 집에서 한참을 죽은 듯이 잤다.
차가운 밖에서 밤을 새워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너를 붙잡고 싶어.
붙잡고 싶어…….
나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나에게 널 붙잡을 이유가 있을까.
매달리면 넌 다시 나에게 돌아올까?
너의 발 밑에서 울부짖으며 매달리면 너는 나에게 다시 올까?
그 여자를 버리고….
나에게 다시 올 수 있을까?
죽여버리고 싶어….
모두를…….
그리고 나까지도…….
오후 4 : 00
그의 집 앞에 또 숨어 있었다.
바보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는 걸 보면….
나는 정말 바보인 것 같다.
아니.
나는 바보다.
바보다.
그의 집 앞에서 그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씩 하나씩….
나의 눈으로, 나의 머릿속으로…….
주워담고 있었다.
뼈 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는 나를 잊고 있겠지만….
나는 그를 더욱 기억하려 하고 있다.
그는 나를 지우려 하겠지만…….
나는 그를 새롭게 담으려고 하고 있었다.
스토커 다이어리 <5화> 그 여자를 훔쳐 보기
토요일 오후 6 : 54
그의 집에서 나오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다정한 모습으로 그녀를 배웅하는 그도 보였다.
어떻게, 나를 버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니?
그렇게 그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거야?
나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여자만 생각하는 거야?
어째서, 백지왕!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야?
넌 그런 애 아니잖아.
차가워 보여도, 사실은 정말 다정한 애잖아.
내가 생각해도 성의 없는 대답들을 내가 하고 있어도….
넌 언제나 대화를 이끌어가려고 노력했잖아.
그런 노력들이 이젠 귀찮아진 것은 다 저 여자 때문이야?
날 만나고 있을 때에도 저 여자를 생각했니?
저 여자가 그렇게 대단해?
그렇게 대단한 여자니?
저녁 7 : 12
저 여자를 따라 나는 택시를 잡았었다.
앞에 가는 차를 쫓아 가달라고 하자, 택시기사 아저씨는 물었었다.
'뭐시여? 형사여? 아님 남편이 저 여자랑 바람난 겨?'
아니, 아저씨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내 남편을 저 앞에 가고 있는 나쁜 여우가 꼬드겼어요.
나는 아저씨에게 울먹거리며 얘기하고 싶었었다.
마치 내가 조강지처라도 되는 양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잘 알아. 자만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남자도 잘 알아.
저 여자를 모르니까.
관찰하는 거야.
어떻게 백지왕을 유혹했는지, 캐내고 말겠어.
어떻게 내 남편을 바람나게 만들었는지, 알아내고야 말겠어.
하지만, 알아내어서 어쩌지?
알아내어서 어쩌지?
흉내라도 내?
흉내를 낸다고 그가 돌아올 것 같아?
대체 나, 지금 왜 이러는 거야?
집착, 미련 덩어리….
내 존재가 그딴 이유로 버티는 이 현실이 너무도 싫다….
저녁 7 : 24
그 여자가 주차를 했다. 병원 건물 주차장에서 능숙한 솜씨로 차를 대었다.
택시 아저씨도 진지하게 그 여자의 차가 잘 보이는 위치에 택시를 대어 주었다.
마치 힘내라고, 말하는 눈빛으로―
택시 요금을 받고는 날 내려주고 가버렸다.
힘낼게요, 아저씨.
그 눈빛을 나는 내 멋대로 이해했다.
그 여자가 가는 길을 슬며시 나는 따라가고 있었다.
전화가 온 것일까, 무슨 이야길 하는 것일까.
도청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 여자는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갔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서 간호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갔다.
잠시 그 여자를 놓쳤다.
그러나 곧 다시 발견했다.
바쁜 듯,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는 그 여자의 모습.
하얀색 가운을 걸친, 의사의 모습이었다.
의사였어?
그런 거였어?
잘난 여자…. 나보다 잘난 여자…….
아직 젊어 보이는데, 의사라니…. 말도 안 돼…….
나는 아직 학생인데…….
저 여자가 백지왕보다 연상인 걸까?
그래, 그러고 보니…. 나이가 좀 있어 보여…….
치사하게, 남의 새파랗게 젊은 남편을…. 나이든 아줌마가 꼬셔?
의사면 다야? 집에 돈 좀 있나 보네?
정말이지…. 화가 났다.
왜 빼앗아 가냐고 마구 따져볼까?
내 남편을 돌려달라고 애원해볼까?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하면 돌려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까.
밤 9 : 40
응급실 쪽으로 뛰어간 그 여자…….
더 이상 따라다닐 힘도, 관찰할 힘도 없다.
그리고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여자 의사…….
그 곁을 쫓아서 빙빙 맴도는 바보 같은 이 여자가 어찌나 우스운지.
나는 바보를 비웃으며 그 여자를 부러워했다.
역시 바보야, 바보….
넌 바보였어…. 이순정…….
아니, 난 바보가 아니야…….
바보가 아니라고…….
저 여자가 못된 거야…….
저 여자가 나쁜 거라고!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야!
저 여자가!
저 여자가 잘못한 거라고!
내가 아무리 속으로 울부짖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마음이 움직여주진 않는다.
커져만 가는….
그리움과 미련과 집착은….
자꾸만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든다.
밤 11 : 20
멍청이, 해삼, 말미잘, 문어 대가리!
비참한 밤이다.
내가 도착한 곳은 또 그 녀석의 집이다.
날 밟아버린….
이제 차버린 깡통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백지왕의 집.
차라리 그의 집 앞으로 이사해버릴까.
반대방향인 이 집으로 자꾸 와버리다니…….
정말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의 그 자체다. 이순정! 이 한심 덩어리, 한심해. 한심하다고! 너 진짜 꼴불견이야!
그의 집 근처에 골목에 쭈그려 앉아서 그의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나 웃기고 병신 같은 지….
백지왕이 보였다.
비틀 비틀….
또 술이라도 한 건지…. 흔들리는 모습…….
술은 내가 마셔야하는데….
왜 백지왕이 자꾸 마시는 거지?
아니면, 넌 이제 그 여자로 행복해서….
넌 기분 좋게 마시기라도 한 거야?
날 잊기 위해서 마신 거야?
백지왕은 집 앞에 주저앉았다. 쓰러질 듯―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의 버릇….
자꾸만 머리를 양손으로 부비적거리며 걱정하는 버릇.
그럴 때마다 흐트러진 머리를 내가 바로 해줬었는데, 기억이나 할지…….
날 이제는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날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지?
밤 12 : 58
그는 괴로운 듯,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한동안 대문 앞에 주저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하늘을 한번 올려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
그의 뒷모습은 보기 싫어.
앞모습을 더 보고 싶어.
난 더 보고 싶다고….
매일 매일 너를 보고 싶어…….
새벽 2 : 12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그가 이 시각에 나올 리가 없겠지.
멍청하게 여기 계속 앉아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집에 가자, 이순정.
한순간 불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건물에 불이라도 내버리면, 그가 뛰쳐나오지 않을까―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해버렸다.
하―
내가 미쳐 가고 있는 것일까.
불이 나서 그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안 돼, 그건.
그를 못 본다면, 그와 헤어졌을 때 보다 내가 더 아플 거야.
안 된다.
정말 안 된다.
건물을 한번 더 올려다보고, 온몸을 둘러싸는 찬 새벽 공기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3 : 32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불면증인가.
왜 잠이 안 오는 걸까.
나는 앨범을 꺼내들었다.
추억의 우리 앨범.
그와 함께 찍은 사진만 모아두는 우리의 앨범이었다.
함께 바다에 갔던 일, 함께 먹었던 맛있는 수박….
사소로운 일 하나 하나 사진에는 기록되어 있었다.
사진은 즐거웠던 그의 표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것도 잘 나왔네….
이것도 정말 잘 나왔네….
여기 놀러갔을 때 정말 재미있었는데….
나는 잘 나온 그의 사진 몇 장을 내 방 벽에 붙였다. 침대 옆에 붙였다.
누워서도 잘 보여….
사진을 하나 하나 앨범에서 빼기 시작했다.
흥미를 느낀 게임이라도 하듯이, 하나 하나 벽에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예쁜 사진….
이것도 너무 예쁜 사진…….
둘이 함께 찍은 최초의 이 사진…….
둘이서 함께 셀프로 찍었던 사진…….
함께 놀이공원 가서 찍었던 사진…….
한 장 한 장, 붙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내 방의 한 벽에 가득히 그의 사진이 붙여졌다.
예쁘다….
벽지 보다 예뻐….
나는 다른 벽에도 사진을 붙이기 시작했다.
내일 필름이란 필름은 다 끌어 모아서 다시 현상을 해야겠다.
내일 다시 더 많이 인화해야겠다.
큰 싸이즈로도 인화해서 천장에 잘 보이게 붙여야겠다.
우리의 사진들로 내 방을 꾸며야겠다.
하하….
하하하하…….
마치 무슨 스토커의 방 같아.
나는 웃었다.
소리를 내어 혼자 크게 웃었다.
나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렸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울면서 웃는다….
그 말 그대로였다.
한심한 나의 모습……. 그가 이런 모습을 알고 있을까…….
스토커 다이어리 <6화> 숨어있는 눈동자
지왕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치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서, 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안타까움이 가득 묻은 한숨을 뱉어내는 것말고는.
또 다시 지왕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쩌면 이 칙칙한 어둠은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자동차에 올라타면서, 백미러를 힐끗 바라보았다.
예상한 대로, 그녀가 보였다.
이순정…….
그녀가 보였다.
첫사랑….
소중한 사람….
여자친구…. 였던…….
주차되어 있는 차 뒤에 숨어서 이쪽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원망하는 빛을 가득 담은 그 눈동자로….
하지만 달려갈 수는 없다.
지금 이 상황에 변명할 수도, 아니 변명할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왕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안 돼…. 제발 나를 잊어…….'
지왕의 가슴 언저리가 시퍼렇게 멍이라도 드는 것처럼, 쑤시고 쓰리고 아팠다.
금방이라도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난 곧 병원 가봐야 해…. 집에 바래다주고 갈게…."
옆 좌석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현정은 지왕을 살짝 바라보며 웃음을 보였다.
"바쁜데……. 매번 이렇게 나 안 태워줘도 돼……."
지왕은 현정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말을 했다.
언제나 미안한 느낌….
"……. 지왕아, 너 정말 괜찮은 거니…. 내 눈에는 안 괜찮아 보여……."
"괜찮아…. 난 괜찮아…. 괜찮을 걸…. 그럴 거야…. 괜찮을 거야……."
"지왕아……."
"지금은 괜찮지 않아도…. 곧 괜찮아질 거야……."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 마는 지왕이었다.
현정은 그런 지왕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운전에 몰두했다.
지왕의 집에 도착하였다.
현정은 지왕을 혼자 남겨두는 것이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지왕은 한사코 어서 가라고 등을 떠민다.
현정은 하는 수 없이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마치면 얼른 올게."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연락할게……. 연락하면 그때 와……."
"……. 푹 쉬어……."
"응, 고마워."
"괜찮겠지?"
"응. 어서 가. 늦겠다."
현정은 걱정이 되긴 하지만, 병원에 가야하므로 차를 빼내어 운전했다.
백미러로 보니 지왕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곧 손을 흔드는 것을 멈추고 대문 앞에 쭈그려 앉아 하늘을 보는 것이 보였다.
애처러운 지왕의 모습….
'보고 싶으면, 가서 봐…. 함께 있고 싶으면 함께 있어달라고 말해…….'
현정은 눈물이 괜시레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왕은 대문 앞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니,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은 어딘가 슬픔이 배여있었다.
'제발…. 제발 그만 너의 자리로 돌아가…….'
지왕은 주먹을 꽉 쥔 채 하늘을 괜히 더 노려보고 있었다.
순정의 시선….
어딜 가나 느껴지는 순정의 체취….
그녀의 기다림, 슬픔, 원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녀의 아픔…….
지왕은 오늘도 집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는 순정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의 헤어짐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충격이 오래 가고 있다.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오로지 지왕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숨어있는 그녀를 지왕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숨어 있는 순정을 찾아내어서 그녀에게 소리지를 수는 없다.
지왕은 그녀에게 더 상처를 줄 수는 없다.
그녀는 약하니까…….
이순정은 약해서 쉽게 부서질지도 모른다…….
이순정보다 백지왕은 강하니까….
백지왕은 견딜 수 있다…….
지왕과 순정은 많은 추억을 함께 했다.
지왕은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또 추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시선을 마치 갈구하듯이 이렇게 대문 앞에 앉아있는 초라한 꼴이라니.
순정이 곁에 있다고 느끼고 싶어서, 자꾸만 그녀의 숨어있는 눈동자가 바라보길 바라다니.
모순….
잊으라고 이젠 잊으라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도 잊지 못하고….
잊지마, 잊지 말아 줘…. 마음 한 구석 끝자락에 버티는 미련이…….
지왕은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고민이 있을 때 항상 하는 그의 버릇.
현정이 왔을 때, 지왕은 일부러 그녀에게 자고 가라고 했다.
혼자 있어서 무섭다고, 일부러 자고 가라고 했다.
순정이가 자꾸만 이 늦은 시각에도 가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기에….
그녀에게 이젠 그만해, 라는 의미를 담아서….
순정에게 더 상처를 주고야 말았다.
'이런 상처들로 아파하는 널…. 잘 알지만…. 더 이상 약해지지마, 순정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괴로운 생각들과 고민들로 슬퍼하다가 무심코 잠에 빠졌던 지왕은 깜짝 놀라 시계를 바라 보았다.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네….
하지만 창문으로 살짝 밖을 내려다 본 지왕은 벽을 세게 쾅 쳤다.
'왜 아직도 이 추운 새벽에, 그 길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거냐고!'
지왕은 화가 났다.
바보 같은 순정이, 그래도 이렇게 약한 아이일 줄은 몰랐다.
이젠 인정할 때도 되었는데, 어째서 순정은 그렇게 매번 포기를 못하는 걸까.
이젠 단념할 때도 되었는데, 어째서 순정은 지왕의 그림자를 찾아 맴도는 것일까.
지왕은 눈물이 흘렀다.
벽을 때린 주먹이 아파서, 그런 것이리라….
지왕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며 눈물을 흘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일어서는 순정이 보였다.
지왕의 집을 한 번 올려다보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순정이 보였다.
'울고 있겠지….'
지왕은 애써 눈물을 주먹으로 닦아 내었다.
하지만 닦아도 닦아도, 아픈 주먹은 자꾸 지왕을 울게 했다.
벽을 너무 세게 쳐서, 주먹이 아픈 거야…….
그래서 눈물이 멈추질 않는 거야…….
다른 곳이 아픈 것이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계속 부리고 있는 지왕이었다.
그 차가운 새벽길을 혼자 돌아가고 있는 순정이 걱정되었다.
순정의 작은 어깨의 떨림, 감싸주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지왕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순정이 피우지 말라고 했는데, 하며 지왕은 라이터에 불을 켜지 않았다.
그냥 물고만 있었다.
힘없이 떨어뜨리는 라이터….
걱정이 자꾸 되었다.
하지만 보내야만 한다.
그냥 보내야만 한다.
더 잔인하게 그녀에게 자신을 단념시켜야만 한다.
모질게 다시 마음을 다 잡는 지왕이었다.
숨어있는 그리운 그 눈동자를 잊으리라, 다짐을 하는 지왕이었다.
스토커 다이어리 <7화> 현정의 이야기
현정은 자신이 더 아파 미칠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지왕의 모습.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까지 맴돌고 있는 순정의 모습.
어째서 말하고 싶지 않을까.
할 수만 있다면 순정에게 대신 말해주고 싶었다.
'제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요. 힘들게 하지 말아요.'
그 가련한 스토커가 지왕과 자신의 곁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
전혀 섬뜩하지도 않았다.
예상했던 일일지도 몰랐다.
못 잊어서, 이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백지왕을 사랑해서…….
현정 조차도 다 알고 있는 이유였다.
현정이 지왕의 집 근처에 숨어 있는 순정을 알아차린 것은, 지왕의 행동 때문이었다.
한숨을 내뱉으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 지왕.
슬쩍 백미러로 보이는 숨어 있는 어떤 여자.
그 여자가 백지왕이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 이순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현정은 지왕을 설득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답답한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
현정의 설득에 응하긴 했지만, 이런 식은 정말 난감한 상황이다.
"싫어. 얘기 못 해."
"지왕아, 그게 말이 되니?"
"……."
"헤어지기라도 할거야?"
"……."
"지왕아……."
"나, 순정이랑 헤어지면 죽을 만큼 괴로울 거야."
"그럼…….
"하지만 헤어질래."
"지왕아!"
"헤어지는 게 그녀를 위한 길이야. 그렇지?"
"지왕아……."
"이순정, 미치도록 사랑하지만…. 나 때문에 힘든 것보단 그냥 놓아주는 게 나을 지도…."
"……."
"비겁한 변명이라고 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겁이 나서 안 되겠어."
"……."
"나는 겁쟁이라서, 무서워서 안 되겠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거야."
"지왕아…."
"그럼 갔다가 올게."
그렇게 순정을 찾아갔던 지왕은 그 날 밤,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채 잠이 들었다.
현정은 얼마전의 그 일을 떠올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날 술에 젖어, 눈물에 젖어버린 나약한 지왕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순정이라는 그 여자도 많이 울었겠지, 지왕이 그랬던 것처럼.
현정은 오해를 하고 있는 순정의 모습을 알아버렸다.
지왕이 일부러 그런 것이겠지만 순정의 상처받은 모습에, 현정의 마음도 아팠다.
쉽게 아물지 않은 그런 상처…….
현정은 병원에서 얼마 전에 다시 받은 지왕의 검사를 보고 있었다.
'역시 수술을 바로 해야겠어. 이대로는 정말 위험해. 더 손도 못 쓰게 될 상황이 오기 전에….'
현정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현정이 살아갈 수 있는 의지가 되는 하나 뿐인 그 녀석.
백지왕이 그녀를 잊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유는 단 하나.
백지왕이 이순정을 매몰차게 버린 이유는 단 하나.
바보 같은, 아니 슬픈 이 이유.
백지왕의 병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종양의 발견.
그것으로 지왕은 순정과 헤어짐을 택했다.
아픈 모습으로 그녀를 슬프게 할 수 없다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이유.
현정은 울던 그와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현정은 지금이라도 순정에게 달려가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라고, 딴 여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고, 헤어지고 싶어 헤어진 것이 아니라고.
현정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병원에서 일하게 된 것도 다 지왕의 덕분이었다.
지왕을 힘들게 하지 않기 하기 위해, 지왕을 위해서….
현정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지왕의 탓이었다.
죽고 싶었던 옛날의 기억들.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
술에 미쳐 언제나 취해있는 아버지의 구타.
그리고 매일 매일 겪는 차별.
또한 눈물은 언제나 그치지 않았지만, 억지로 참고 견뎠다.
마침내 술에 미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현정은 가장이 되어야만 했다.
그 옛날의 아픔을 견디고, 그 불행한 과거를 밟고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백지왕이 종양이라니.
조금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멍청하게, 왜 뒤늦게 서야 알아챈 거야!
현정은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책했다.
'안 돼…. 포기해서는 안 돼…….'
현정은 강한 여자가 되기로 했던 결심을 다시 떠올렸다.
아버지가 죽어버린 그 날부터, 더 강하게 살리라! 악착같이 살리라!
다짐했던 그 어린 현정을 떠올렸다.
그래도 마음이 아픈 것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현정은 지왕의 곁에 있어주기 힘들었다.
눈물이 나와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힘들어서…….
현정이 얼마전에 유학을 가려고 했을 때, 붙잡지 않던 지왕의 모습.
그러나 유학 준비를 하던 중에, 동료에게서 들었던 지왕의 검사 결과…….
알고 있었으면서!
다 알고 있었으면서!
현정이 힘들지 않도록, 현정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지왕은 현정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달려서 울지도 않았다.
어릴 때의 그 겁쟁이가 이제는 어른이 다 되어서….
현정에게 마냥 기대려 하지 않았다.
사는데 바쁘고 지쳐 사랑이란 걸 하지 못한 현정이 보다 먼저 사랑이란 걸 시작한 지왕.
지왕의 사랑은 망할 악성 종양 때문에 깨져 버렸다.
무표정인 듯, 무뚝뚝한 듯 하지만….
지왕의 속은 언제나 따뜻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정.
그런 지왕이 종종 웃음을 비치는 이유가 순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현정.
현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이 너무 참기 힘들었다.
'하늘에 신이 있다면!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괜한 하늘을 한번 더 원망하고 현정은 병원에서 입원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수술은 얼른 진행해야 해. 그리고 꼭 성공시켜야 해.'
현정은 늘 성공적인 수술로 인정받는 김박사님을 찾아가 부탁을 해야만 했다.
김박사는 현정에게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수술을 하는 조건은 현정이 자신의 연구실에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연구를 하는 것이었다.
현정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의사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제약 연구라면 이미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것이고….
현정은 김박사의 파격적인 대우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수술 날짜를 잡았다.
"내일 입원하자.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실 잡아놨어."
현정은 지왕의 집에서 자고 있는 지왕을 깨워 말했다.
"별로 준비할 것 없이 바로 입원하면 돼."
"……고마워."
"고맙다는 말, 하지마."
"……미안해."
"그런 말도 절대 하지마."
"……."
지왕의 마른 얼굴에 현정은 손을 갖다 대었다.
지왕은 자꾸만 말라가고 있었다. 순정을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순정이 곁에 있다면 지왕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날 텐데…….
멍해있는 지왕을 바라보는 현정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지왕은 슬며시 손가락으로 현정이 눈물을 닦아낸다.
"울지마…. 더 미안해지잖아……."
"나쁜 놈…. 넌 실컷 울고…. 나는 왜 울면 안 되니……."
"……."
여윈 지왕의 얼굴을 슬며시 잡은 현정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지왕에게 말했다.
"정말 스토커처럼 너를 맴도는, 이순정은 버릴 거니?"
현정의 눈에 비친 지왕의 흔들리는 모습.
지왕은 애써 시선을 돌리고 현정에게 말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말 모르겠어…."
스토커 다이어리 <8화> 병원에서 만난 그녀
현정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서 도망치듯 달려오는 병원복을 입은 여자. 미친 듯이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그 여자는.
바로 순정이었던 것이다.
현정은 순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현정은 그냥 고개를 돌렸다.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듯이, 순정을 외면하듯 피했다.
그러나 순정이 뒤에 쫓아오는 간호사의 외침이 현정의 고개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그 환자 좀 잡아주세요! 아무나 도와주세요!"
현정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도망가고 있는 순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 앞쪽에 있던 남자 의사들이 도망치는 순정을 붙잡았다.
"놔!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거칠게 반항을 하면서 고래고래 악을 쓰는 그 여자는 순정이었다.
지왕과 헤어진 후, 스토커처럼 몰래 따라다녔던 순정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간호사?"
"이 환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기도 했던 환자입니다."
"그런데?"
의사와 간호사의 대화가 또렷하게 현정의 귀에 들어왔다.
'뭐라고? 자살기도!?'
현정의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죽음의 길을 택하려 했던 것인가.
이 사실을 지왕이 알게 된다면, 지왕의 마음 역시 괴롭겠지.
"놓으라고! 이 빌어먹을!"
서슴없이 마구 욕을 지껄이며 발버둥치는 순정을 꽉 붙잡는 젊은 의사들의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간호사가 소곤거리듯 의사에게 말했다.
"약간 정신이상 증세가 있는 것 같아서……. 곧 정신병동으로 보내야만 할 것 같아요."
곧 의사들에게 이끌려 사라지는 순정을 보면서, 순정이의 고함소리를 들으면서….
현정은 넋이 나간 듯이 서 있었다.
'정신병동? 정신이상?'
현정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감옥에 갇히게 되면,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하고, 또 무슨 짓을 하는지 점점 잊어가게 되고….
현정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애써 진정하며 벽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이윽고 발견한 의자에 털썩, 무너지듯이 앉아버렸다.
'어떻게 하지…. 지왕아…….'
현정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억지로 참고 있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으나, 주먹을 꽉 쥔 채 그 떨림을 멈추려 노력하고 있었다.
온 몸에서 열이라도 날 듯이, 추워지는 느낌…….
'지왕에게 말하면, 지왕이 걱정할텐데….'
현정은 어떻게 말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지왕의 상태가 더 나빠지면 안 되는데…. 하지만 저대로 순정을 내버려둘 순 없어.'
현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일어난 현정은 결심을 한 듯이 어디로 가고 있었다.
도착한 그 곳은 지왕의 병실이었다.
수술날짜가 벌써 나흘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심리 상태가 안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지왕에게는 살고 싶어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지왕에게 의지를 부여할까. 아니면 더 악화시키는 독약이 될까.'
현정은 지왕의 얼굴을 빠안히 바라보면서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지왕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현정을 응시했다.
그렇게 조용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10 여분이 흘렀을까나….
현정이 참지 못하고 입을 떼었다.
"지왕아…."
"말해. 무슨 말이 하고파서 그렇게 뜸을 들였어?"
지왕은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머금고 현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고픈 이야기 있으면, 다 해."
"……. 지왕아……."
"말하기 힘든 거야? 다른 쪽으로도 종양이 전이되었대?"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뭐야? 응? 수술해도 안 될 것 같아?"
"그런 것도 아니야, 지왕아…."
지왕은 우물쭈물하는 현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대체 뭐야∼ 얼른 말해봐."
현정은 잠시 망설였지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정이 얘기야."
현정의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자마자 지왕의 얼굴이 굳어져버렸다.
어두운 그늘이 금새 깔린 지왕.
"순정이? 그 애에겐 아무 말 하고 싶지 않아…. 그 애가 나로 인해 아프는 건 싫어…."
자신의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지왕은 그렇게 말했다.
언제나 자신이 쓸모없는 지금 순정을 놓아주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정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왕에게 계속 말햇다.
"순정이…가…. 자살기도를 했었대……."
"……. 뭐…라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지왕이 현정을 올려다보았다.
걱정의 빛이 가득한, 놀란 그 눈을 보는 현정은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되었어? 괜찮은 거야?"
"…죽지는 않았어……."
"그…그래…? 순정이도 참…. 왜 그런 바보같은 짓을……."
고개를 힘없이 떨구는 지왕은 그래도 순정이가 죽지 않았다는 얘기에 안도를 했다.
작게 한숨을 내뱉으면서 지왕은 순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애교는 없었지만, 사실 알고보면 정말 다정한 아이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바보 같아, 이순정.'
왠지 모르게 화가 나려고 하는 지왕이었다.
바보처럼, 자살이 뭐야….
기껏 남자 하나 때문에…….
그것도 멍청한 지왕 자신의 탓이라는 사실이 지왕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했다.
하지만 현정이의 마음은 더 슬펐다.
"그런데…."
끝나지 않은 현정의 머뭇거리는 말에 화들짝 놀란 지왕은 현정을 올려다 보았다.
침대에 똑바로 앉아서 현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현정의 눈동자도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뭐…? 뭐가 문젠데? 뭐가 잘못된 거야?"
다급히 따지듯이 묻는 지왕의 말에 현정은 마지못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눈으로 지왕은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물었다.
현정은 지왕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곧 정신병동으로 보내진대."
지왕은 기가 막혔다. 아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이런 기구한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일까?
어째서 이렇게 운명을 뒤흔들며 인간을 조롱하는 것일까.
지왕은 저주스러웠다.
나약한 자신과 또 나약한 순정이라는 그녀가.
약한 우리가.
스토커 다이어리 <9화> 시작일까 끝일까
곧 이순정이라는 여자가 어디에 입원했는지 알게 된 현정은, 지왕을 데리고 그 병동을 찾아가기로 했다.
또각 또각 현정의 구두굽 소리가 복도에 울러퍼졌고, 예상 외로 병동이 조용했다.
"여기입니다. 난동을 자꾸 부려서 독실로 격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가 왠지 어두침침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병원 복도를 지나쳐, 어떤 병실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의사 역시 무표정에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금방 사납게 변해버리니까, 조심하십시오. 어떨 때는 얌전하기도 합니다."
차갑고 건조한 말투로 대충 말하고 사라지는 무책임한 의사를 보내놓고 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문을 열기를 망설이는 지왕의 모습은 더 야윈 것만 같았다.
현정은 지왕의 손을 잡아 문의 손잡이에 얹어주었다.
"어서."
재촉하는 듯한 현정의 짧은 말에 지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늘해 보이는 침대 위에 쪼그리고 앉아 벽을 쳐다보고 있는 순정의 모습이 보였다.
문소리를 들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보는 순정의 모습.
순정의 눈동자가 순간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다시 벽을 응시해버리는 순정.
"순정아…."
금새라도 흐느낄 것만 같은 지왕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병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병실이 아니라 감옥 같았다.
햇볕도 잘 들어오지 않은 칙칙한 병실 안.
세 명의 사람 모두 조용히 있었다.
지왕이 발걸음을 떼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여자. 이순정에게로.
지왕이 다가가서 순정을 바라보며 머리에 손을 뻗어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야, 지왕이야. 나 기억해? 나 알아보겠지?"
눈물이 촉촉하게 눈동자를 적셔버린 지왕은 울먹거릴 듯 떨리는 음성으로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순정의 대답은 없었다.
멍한 듯, 가만히 앉아 벽을 응시하는 순정.
지왕은 두 손을 뻗어 순정의 양 뺨을 잡았다.
"순정아…. 미안해…. 나 같은 바보 때문에……."
지왕은 눈물이 쏟아질 듯한 것을 참고 있었다.
그 때 였다.
순정이가 홱 돌아서 지왕을 노려보듯 쳐다 보았다.
지왕은 순정이가 자신을 알아본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안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순정은 손톱을 세워 지왕이 얼굴을 할퀴었다.
"아앗!"
지왕은 놀라 그녀를 뿌리쳤다.
으르릉 거릴 듯이 순정은 지왕을 노려보았다.
적을 마주한 살쾡이 같은 눈빛으로 지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순정아!"
지왕은 마침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탓으로 순정이가 이렇게 된 것이리라, 지왕은 자신을 자책하며 울었다.
뒤에 선 현정은 아무 말 없이 지왕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순정아…. 나야! 나! 백지왕이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는 지왕.
하지만 순정은 마구 으르릉 거리면서 지왕의 손길을 거부했다.
이윽고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자세로 점프해서 바닥에 뒹구는 순정.
그 순정을 잡으려다 같이 넘어지는 지왕.
"지왕아!"
현정의 애타는 마음도 누구 못지 않았다.
하지만 지왕은 끝까지 순정을 안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제발! 제발! 순정아! 제발!"
도망치려는 순정을 억지로 몸싸움을 벌여가며, 그녀를 다치지 않게 안으려고 하는 지왕이었다.
이미 지왕의 뺨에는 손톱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순정아!"
크게 소리지르듯이 순정의 이름을 부르며 마침내 그녀를 끌어안은 지왕.
그녀를 꽉 안은 채, 그녀를 꽉 안아 진정시키면서 지왕은 현정에게 말했다.
"나 꼭 성공해야만 해."
현정은 그런 지왕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내가 아니면 순정이는 누가 돌 봐…. 이렇게 약한 순정이를 누가 돌보겠어……."
그치지 않고 흐르는 눈물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순정을 놓지 않는 지왕이었다.
순정은 힘이 빠졌는지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둘이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현정은 마음이 좀 놓이기도 했다.
수술을 할 때, 환자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아는 현정이었기에….
지금의 지왕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되어버린 순정일 위해서라도 꼭 살아줄 것을 현정은 지왕에게 당부했다.
"꼭 살아."
"응. 살게."
끄덕 끄덕, 여전히 순정을 안고 있는 지왕이었다.
현정과 지왕은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조금 진정되어 가만히 있는 순정을 침대에 눕혀 재웠다.
순정은 웅크린 채로 잠이 들었다.
잠이 든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지왕과 현정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나라도 꼭 순정이를 지켜야해."
"응, 그래. 꼭 지켜."
"그런데…."
지왕은 나가려고 문고리에 손을 뻗다가 중얼거렸다.
"정말 수술하면 나을까."
"지왕아…."
"정말 내가 살 수 있을까…."
"……. 그런 생각하지마…. 살아야 해. 순정이는 어떻게 하고!"
"응…. 미안해."
"……. 어서 가자."
"미안하고, 언제나 고마워…. 누나…."
지왕은 문을 열고 나갔고, 현정도 그의 뒤를 따랐다.
곧 문이 닫히고….
다시 어두워진 조용한 병실 안.
침대 위에 누워있던 순정이 번쩍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하얀 천장이었다.
순정의 눈동자의 떨림이 불안했다.
순정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손이 바르르르 떨리는 순정이었다. 아니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순정의 눈에서도 곧 눈물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았다.
스토커 다이어리 <10화> 마침표
'누나…라고? ……살아날 거라고…?'
순정은 멍하니 한동안 앉아 있었다.
조용한 병실에서는 곧 자책 어린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병원 복도 앞.
초조하게 수술실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현정이 보였다.
현정은 지금 자신의 일을 마치자마자 지왕의 수술실로 달려와 있었다.
자신은 들어갈 수 없는 지금, 현정은 불안한 마음에 정신이 없었다.
'정신차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억지로 참으려는 표정이 역력한 현정은 털썩 주저앉았다.
현정의 연약한 눈물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데, 가까스로 참고 견디고 있었다.
이윽고 다른 동료가 와서 현정에게 음료수를 내민다.
"괜찮아요, 백선생?"
현정은 음료수를 받으면서 일어서려는데 힘이 없어서 휘청거렸다.
동료가 현정을 부축해주었고, 옆에 있던 의자에 그녀를 앉혀주었다.
"동생이 수술 중이라고?"
"네…."
힘없는 현정이 대답에, 동료는 현정의 어깨를 두드린다.
"박사님이 직접 하시는데…. 당연히 성공할 거야…."
"네…. 아직 위험한 단계도 아니고…하니까……."
"힘내."
"하지만…."
힘겨운 그녀의 얼굴에서 드디어 눈물이 떨어졌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에요…."
"백선생…."
"단 하나밖에 없는 가족, 단 하나밖에 없는 동생…."
"……."
현정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동료가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현정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 냈다.
"그래도 분명 성공해요."
"그래, 성공할거야."
"성공해요…."
현정의 단호한 말.
"지 애인을 위해서라도 그 녀석. 반드시 살아날 놈이에요."
"애인?"
"누나보다 더 사랑하는 그 애인 위해서 반드시 살아요."
분명하게 말하는 현정.
그녀의 가운에 붙여진 이름표에는 그녀의 이름 세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백현정….'
넋이 나간 듯이 현정과 그 동료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멍하니, 한참을 벽에 달라붙듯 기댄 채….
병원복을 입고 있는 그녀….
바로 이순정이었다.
'백지왕…….'
순정은 중얼거리듯 입을 옹알거리며 그 이름들을 떠올렸다.
눈에는 눈물이 그득 담겨진 순정.
달려간다.
그 동료가 어깨를 툭 치고, 현정을 떠났을 때였다.
순정은 마구 달리듯 현정에게로 뛰어갔다.
그 짧은 거리를 달리면서 순정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온 내장이 내려 앉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순…정…. 순정씨?"
현정은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나 자신 앞에 서 있는 순정을 바라보았다.
현정의 앞에서 병원복 차림의 그녀가 울고 있었다.
현정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 듯이 잡으며 물었다.
"순정씨, 지금 여기 어떻게……."
마침내 터트리듯이 울어버리는 순정이었다.
"괜찮아요, 순정씨?"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현정.
그러나 순정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순정은 한참을 울었고, 현정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부둥켜안은 그녀들이 한참이나 수술실 앞에 서 있었다.
"미안해요…."
마침내 울음을 가득 묻힌 목소리로 순정이 말했다.
"난…. 흐흑…. 그가 날 버린 게…. 당신 때문이라고……."
울음이 잔뜩 묻어나 끊기는 순정의 말.
그러나 순정의 말을 알아들은 현정은 순정의 어깨를 쓰다듬듯이 어루만져주었다.
"흐흐흑….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를 힘들게 하고…. 흐흑…."
"아니야, 아니에요. 순정씨, 절대 그렇지 않아요."
"흐흑…. 나쁜 건 나야…."
"아니요, 순정씨가 나쁜 거 아니에요."
어린 아이를 달래듯 현정은 순정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순정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 자살 시도한 것도 쇼였어요. 다 연극이었어요…. 미친 척한 것도 연기…."
현정은 그런 말을 힘들게 꺼내는 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나가 있다고 들었었는데…. 오해만 하고…. 흐흑…. 어엉……. 나쁜 년이야, 나는……. 어어흑…."
현정은 계속 울음을 터트리는 순정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리고 분명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지왕이가 바보였어요. 하지만 순정씨를 위해 살아날 놈이니까."
"흐흐흑……."
"전혀 걱정하지 말아요. 순정씨가 이렇게 말짱한 걸 알면 그 녀석도 무지 기쁠 걸요?"
"으흑… 으앙…!"
안겨 울고 있는 순정을 꽉 안아주는 현정이었다.
현정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걸리었다.
'귀여운 여자애구나. 그래서 지왕이 좋아하는 거구나. 다행이도 이 여자애도 지왕을 사랑해.'
현정은 왠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다고, 신도 기쁘게 지왕의 손을 들어 주실 거야.
그렇게 현정은 스스로를 달래며, 순정도 달래어 주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박사님!"
외치듯 현정의 소리가 들렸고, 수술실에서 나오는 김박사를 붙잡았다.
순정도 깜짝 놀라며 걱정의 눈길로 김박사를 바라보았다.
지친 기색이 보이는 김박사는 마스크를 벗고 살짝 웃음을 보였다.
"성공적이네."
"박사님!"
기쁜 목소리로 현정이 소리를 질렀고, 순정은 두 손을 모았다.
안도의 미소를 담은 그녀들의 얼굴을 보며, 김박사는 끄덕거리며 말했다.
"경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아주 성공적이야. 모두 제거했고 다른 곳으로 전이된 곳은 발견 못했어."
김박사는 그렇게 말하고, 연신 감사합니다를 외치는 두 여자를 두고 가버렸다.
남은 여자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기뻐하고 있었다.
"순정씨!"
"네?"
서로를 마주본 그 여자들의 얼굴에는 기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미친 척 연기 너무 잘한 것 같아요!"
"…예?"
"그 녀석이 순정씨 돌보기 위해 살기로 약속했어요!"
"아……."
이윽고 현정은 기쁘게 다시 순정을 끌어 안았고, 순정도 안겨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스토커 다이어리 <11화> 짧은 뒷 이야기
"거짓말쟁이!"
지왕은 커다랗게 소리쳤다.
정신병동을 찾아간 지왕은, 퇴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퇴원한 순정을 찾아서 순정의 집 앞으로 갔었다.
그런데 그녀의 집 앞에서.
바쁘다고 자신의 전화를 무시했던 현정이….
순정과 함께 수다를 떨면서 차에 타려고 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어? 왔어?"
현정은 지왕에게 웃으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고, 순정은 머뭇거리듯 가만히 있었다.
"퇴원 축하 파티 하려고…. 안 그래도 너 데리러 가던 중이었는데…."
생글생글 웃으며 현정이 말하자 지왕은 순정을 노려보았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순정은 머뭇거리듯 말했다.
"그거…. 미친 척 한 거…. 미안…해…."
순정이 겁 먹은 듯이 조심스레 말했고, 지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있었다.
"야!"
소리 지르듯이 외치는 지왕.
현정과 순정은 깜짝 놀라서 지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 좋은 말 할 때!"
지왕은 속으로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소리지르듯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셋은 웃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댔다.
"이순정! 너! 좋은 말 할 때! 다시 내 애인 해라!"
모두가 행복해진 그 짧은 이야기. 여기서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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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us-_-@hanmail.net
읽어주신 분들 모두, 행운 가득찬 하루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_</
아, 그리고...eunus로 검색하시면 다른 단편들도 보실 수 있어요^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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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eunus] 스토커 다이어리 (1~10)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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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24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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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짜 재밌어요>ㅁ< 길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계속 그래서 봤어요 ㅠ ㅠ 너무 소설을 잘 쓰시네요!
유치원종일반♡님, 꼬리말 감사합니다^_^ 재미있으시다니, 정말 기쁘네요;ㅂ;/ 읽어봐주셔서 정말 감사하구요....언제나 늘 예쁜 하루 되세요~
끝마무리가 좋네요 이쁜소설 감사하구요. 다음 소설도 기대할게요
아...늘사랑님, 꼬리말 정말 감사합니다>_</ 꽃잎 2와 판타지 쪽에서 놀다가 간혹 여기도 옵니다..; 다음에도 단편 올릴게요^_^오늘 하루도 예쁜 하루 되시길 바래요~
재밌어요 ... 중간에 슬펐어요 - ㅠ ㅠ
. 헨아 *님, 꼬리말 감사합니다^_^부족한 이 글이...재미있다고 해주셔서 너무 기쁘네요;ㅂ;/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고 예쁜 하루 되시길^ㅂ^/
우와 !~~ 재미있네요 ~^^ 허허허
㉵㉺㉻㉨l㉲님, 꼬리말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ㅂ^/ 재미있다고 해주셔서 기쁘네요 >_<)/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요, 늘 예쁜 나날되세요~
오랜만에 단편에서 재밌다고 생각했네요~잘 읽었어요>_<
tndlsdl312님, 꼬리말 감사합니다;ㅂ;/ 복 받으실 거에요~ 헤헤. 재미있다고 하시니 기쁩니다. 지금은 꽃잎2에서 연재 중이에요; 종종 오셔용;ㅂ; 그럼 오늘도 예쁜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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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윤호님 꼬리말 감사합니다;ㅂ; 정말 정말 감사해요. 늘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헛헛헛~너무 재미있어요..~
꽃을단소녀님, 꼬리말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꼬리말 답변을 열심히 달아보네요;ㅂ; 오늘도 예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