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6.10. 11) 말씀/ 계시록3:8-11
죽도록 충성하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오늘은 소아시아 교회 두 번째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편지하시는 당시의 서머나 교회가 위치한 에베소는 지역은 황제를 숭배하는데 일등 도시였습니다. 신격화된 황제를 위한 신전이 서머나에 최초로 세워졌고 어떻게 보면 서머나는 로마의 황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업을 하며 잘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억압하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기독교인들은 우상 숭배하는 도시에서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고, 물질적인 궁핍을 당하며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서머나 교회를 이렇게 인정하며 위로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계 2:9) 환란과 궁핍. 그러나 실상은 네가 부자다! 여러분, 세상에는 주님이 보실 때 실상의 부자가 있고 실상의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부자인 것 같은 데 실상은 가난한 자, 가난한 자 같은데 실상은 부자.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잠언서 11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아멘.” 많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허상은 세상에 보여주는 가짜입니다. 성경을 보면 흩어 구제하며 나눠줘도 늘 부자인 사람이 있고 지나치게 아껴도 가난한 자가 있다고 합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부자는 소유를 많는 자가 아니라 마음이 겸손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입니다. 이런 존재가 부요한 사람이 진짜 실상의 부자입니다(딤전 6:17-19). 에리히 프롬은 많이 가진 자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나눠주는 자가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연보궤에 연보하는 것을 보셨는데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고, 한 가난한 과부도 와서 두랩 돈을 넣었습니다. 주님은 과부가 가장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많은 것 중에 일부였고 그 과부는 작은 두 렙돈 밖에 넣지 못했지만 전 재산을 다 넣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헌금의 액수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태도를 보십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마음에 예수가 없고, 인색하고, 줄 줄 모르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면 실상의 가난한 자입니다.
미국의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말년에 병균을 두려워 하여 닭고기 통조림과 쥬스만 마셨습니다. 이발사를 두려워하여 머리를 엉덩이까지 내려뜨리고, 손톱도 안 깎고, 매의 발톱처럼 긴 상태로 살다가 결국 영양실조 때문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법정에서 그의 유산을 빼앗으려는 싸움만이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미남이요, 억만장자요, 신념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수많은 여성을 편력했지만 아무에게도 진실한 사랑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허상의 부자였고, 가련하고 가난한 자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물질적으로도 가난하고 세상 적으로도 내세울 것이 없었고, 또한 우상 숭배하는 도시에서 유대인들의 테러 대상이 되었고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지만 예수님 한 분을 소망하며 늘 감사하며 주님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서머나 교회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축복의 메시지를 오늘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서머나 교회에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뭐였습니까? 다른 교회들과 근본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닏. 오히려 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것이며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는 도전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심지어 마귀가 장차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고 십일 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죽도록 충성하라 하셨습니다(계 2장 10)을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가난해서 힘이 드는데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하시니 이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아무런 위로도 없는 이런 명령의 말씀은 우리의 형편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무정한 말씀처럼 들려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명령의 말씀은 서머나 교회를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시는가를 말해주는가를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믿음을 끝까지 변치 말고 지켜서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세상 풍조를 좇아 죄를 지으며 내 앞에 살지 못하고 있지만 너희는 조금만 참고 인내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될 것이다. 죽음도 두려워 말라. 마침내 너희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축복하실 때에 무엇인가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당장 위로가 되는 것을 기대합니다. 돈을 좀 주시던지, 집을 주시던지, 좋은 차를 주시던지, 병을 고쳐주시던지...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이 오히려 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더 충성 된 자가 되라고 요구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고, 존재가 단단해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고의 상급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살 직전에 피에를 신부를 찾아온 목수에게 신부도 어떤 위로도 주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일주일만 가난한 사람들 집을 지어주는 일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곧 죽을 사람보고 도와주라고 하였으니 헛웃음이 나올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서 그 목수의 인생이 달라졌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때 신부님이 돈이나 옷이나 집이나 필요한 무엇을 도와주었다면 자신은 다시 자살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서 그는 살아났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엇던 것입니다.
충성하라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충성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보람을 찾고 또 장차의 하나님의 약속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에게 즉도록 충성을 요구하셨다면 “아, 나를 믿으시는구나,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를 축복하시고자 하시는 구나” 생각하고 얼른 “아멘”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위에서 충성을 요구할 때는 사실 무엇인가 큰 것을 준비해 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나중에 결산 할 때 주인은 열심히 장사를 해서 남긴 종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태복음 25:21). 칭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 하였고, 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충성 된 자가 되라 하실 때는 그만큼 큰 축복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카네기도 자신의 성공철학 일대기 책을 충성스럽게 책임 맡아 일할 적임자를 찾고자 할 때 나폴레온 힐 앞에서 스톱 워치를 손에 쥐고 20년이라도 무보수로 일할 수 있는가 질문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시간은 60초 그런데 그는 29초만에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4개월만에 책을 출판했고, 대박이 터져서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 한권이 있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현대그룹 창시자 정 주영 회장이 청년시절 쌀가게 종업원으로 있을 때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통 쌀 배달을 할 때 종업원들은 자전거에 한 가마를 실고 배달을 합니다. 그런데 배달을 하다 보면 한 집 걸로 배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먼 길을 다시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한 번에 두 가마를 실고 오면 훨씬 시간 절략이 되고 일도 효율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쌀 두 가만를 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정주영 청년은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거듭 연습을 해서 마침내 두 가마씩 실고 다니면서 배달을 하였습니다. 쌀가게 주인이 평소에 이런 정주영 청년의 충성스럽게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결국 쌀가게를 접어야 할 때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정주영 청년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아들은 게으르고 술 좋아하고 줘봐야 말아먹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 그룹은 이렇게 충성된 청년의 쌀가게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예화들은 어떤 큰 일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충성스러운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충성의 댓가는 엄청나게 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죽도록 충성된 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절대 손해 없습니다. 오너는 충성된 자를 찾습니다. 그리고 오너의 축복을 함께 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일도 그렇지만 하나님 생명 구속 역사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칼리 브란트의 책 예언자를 보면 사랑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이 그대를 부르거든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그를 따르라.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감싸 안거든 비록 그 날깃 속에 숨겨진 칼날이 상처를 입힐지라도 그에게 몸을 맡기라.사랑이 말할 때에는 비록 그 목소리가 사막을 쓸어버리는 북풍처럼 꿈을 산산조각 낼지라도 그 말을 믿으라”. 사랑을 충성으로 바꾸워보면 됩니다. 사랑하는 일, 충성하는 일 주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저자 안이숙 사모는 순교사가 되기를 사모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목숨바쳐 충성하고 싶었습니다. 옥에도 갇히고 고생도 했습니다. 그러나 순교를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순교 낙제자라 하였습니다. 최광휴 선교사님도 필리핀 선교지에서 죽을 수도 있었지만 알고 보니 순교 자격이 안되어 퇴자 맞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바쳐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폴리갑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정말 충성된 자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다가 80세가 넘어서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고 마음껏 음식을 먹으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는 한 시간 동안만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마침내 잡혀간 폴리갑은 총독 앞에 섰습니다. 총독이 설득을 했습니다. “당신의 나이를 생각하시오.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풀어주겠소. 지금 그리스도를 모독하시오.” 그러나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가 있겠습니까?” 총독이 위협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독하지 않을 경우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 두었소.” 그러자 폴리갑은 대답했습니다. “그 짐승들을 부르시오.” 총독은 더 강도 있게 협박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화형에 처하겠소.” 그러자 폴리갑은 꿋꿋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잠시 타오르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소.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왜 지체합니까? 당신이 원하는 데로 불을 지르시오.” 폴리갑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짐승에 물려 죽어도, 불에 타서 죽어도, 죽기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다. 그 마음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으로 살았습니다. 그에게 고난과 환란은 오히려 주님께 충성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사도바울도 디모데후서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딤후 4:8). 그가 예수를 만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수많은 핍박과 궁핍과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위대한 사도로서 변치 않고 충성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 안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였습니다. 종이 되어 충성되이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영광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충성된 종? 충성된 증인? 그리고 나는 어떠한가? 어떤 일을 하다가 상황이 조금만 어려우면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까? 작든 크든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는 자인가요? 물론 충성스럽다는 소리를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평가받는 충성은 단편적이거나 지엽적일 뿐입니다. 진짜는 주님으로 부터 들어야 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얼마나 감격스러운 호칭입니까? 사람들로부터 이 소리를 듣지 못해도 주님으로부터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도, 어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선진들처럼 주님은 충성된 자를 찾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왜 그런가요? 마음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결단을 하지 않아서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충성된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니다. 인간 의지로는 죽기까지 충성하지 못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아멘.”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의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충성은 의지적인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지적으로 충성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주님으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내 육신에 충성을 요구하시면 나는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두려워서 피했지만 성령을 받고나서는 거꾸로 매달려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충성은 주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주님, 충성된 마음을 내게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받을 수 없지만 주님은 믿고 사랑하는 자에게 이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충성된 마음을 받은 사람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충성하고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게 됩니다.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채플이라는 교회당의 천장벽화를 손수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정은 까마득히 높았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사실 천정의 그림이 한눈에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 천정의 벽에 가까이 붙어서 선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보게, 여기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그냥 적당히 해두고 내려오게나.”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천정에서 그 친구를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다. “여보게, 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이 그림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자네겠지.” “맞네.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최선 이하로 일할 수는 없네.” 그는 이 작업을 4년에 걸쳐서 완성하였는데 매일 몇시간씩 고개를 뒤로 꺽은채 올려다보며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물감과 석고 가루가 눈으로 떨어져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었고, 관절염, 관절 통증, 척추 변형, 목과 어깨의 극심한 근육통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가 쓴 시(Sonnet)에는 "내 고환은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붓에서 떨어지는 물감 때문에 내 얼굴은 화려한 묘비처럼 변했다"*라며 고통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런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충성된 마음이 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충성된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시스틴 성당을 찾으며 감동을 받고 있습니까? 교회도 일터에도 어디서든지 보면 이런 충성된 자가 있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어떻게 충성하는가 잘 몰랐습니다. 1:1을 많이 해야 하는지? 전도를 많이 해서 교인수를 늘려야 하는지? 목사님께 잘 보여야 하는가? 이렇게 충성하고 자 할 때 문제는 경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비교의식과 상처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충성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더욱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충성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나에 맡겨주신 일에 마음과 열정을 다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충성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내 생활 공간에서 내게 맡겨진 직책이나 직분에 맡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명남 집사님이 매일 캠퍼스에 나와서 전도하라고 하면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자로서의 일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믿고 일터에서 정직하게 성의를 다해서 사람을 만나고 기사를 작성하면서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는가운데 구원받을 영혼도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분은 일터에서 “이 일이 주님의 주신 일이다”. 하고 진실 되이 거짓 없이 최선을 다하면 돕니다.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단지 직업상의 일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맡겨주셨구나” 주께 대하듯 하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며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면 그것이 충성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베전서 4:11). 그럴 때 일에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하나님께서 생명의 복음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내 일에 충성하는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새벽 큐티 말씀 섬기는 일, 독서모임을 섬기는 일, 주일 말씀과 예배 섬기는 세가지 일이 내가 충성되이 해야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시여기며 즐거움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각자 내가 주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나의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인식하고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며 좋은 결과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해서 어떤 큰 댓가를 얻지 못해도 무엇인가 집중해서 충성할 수 있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사람이 가장 불행한 것은 마음을 다해 해야할 일이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내가 새벽부터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크던 작던 내 일을 통해서 생명의 복음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대박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충성된 자가 되라.” 하시고 마지막 11절로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충성은 단지 헌신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럴때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약속이 있는 명령입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알고 마침내는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과 함께 둘째 사망의 해도 받지 않고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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