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리샹란(1920~2014)은 만주국을 대표하는 스타였다. 영화배우와 가수로서 만주국을 넘어 중국과 조선,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각지에 명성을 떨쳤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사이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성 스타라면 조선의 최승희와 만주국의 리샹란을 꼽게 된다. 최승희 후원회에는 여운형과 마해송, 후일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유명인들도 속해 있었지만, 그래봐야 이들은 권력 없는 문인이었다. 그에 비해 리샹란의 후원자들은 만주국의 실세들이었다. 그녀를 키운 건 일본 제국주의였다. 마치 푸이가 그랬던 것처럼.
(31)
역사적 책임에 관한 오랜 고민들이 깃털처럼 가벼운 그 말들 속에서 증발했다. 리샹란, 아니 야마구치 요시코와 그의 동료들은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 수 없는 편법을 추진했다고 비판받았다.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손을 젓고 있다. (역사의) 전진이나 후퇴와 같은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써야만 한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43-44)
일본의 정치학자 쿠마가이 나오코는 일본인들이 전쟁에 대해 두 단계에 걸쳐 상이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후에는 한 가지만 선택적으로 기억되었다고 지적한다. 초기 단계의 전쟁 기억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는 대일본제국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최종 단계의 전쟁 기억은 일본인 개인들이 겪어야 했던 모든 고난과 고통들에 대한 일화들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서 전쟁 기억은 후자로 귀결됐다. 무조건항복과 도쿄전범재판으로 전쟁이 범죄화되자, 일본인들은 전쟁 전반부의 영광스러운 군사적 전진의 기억을 묻어버린 채 전쟁 후반부의 고통스러운 경험만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33-134)
<나비부인>은 예술의 이름을 빌려 동양 여성에 대한 서양 남성의 성적 환상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탈리아 사람 푸치니가 어쩌다 미국 장교와 일본 여성 사이의 사랑을 오페라 소재로 삼게 됐을까? 전기에 따르면 코벤트가든에서 <토스카> 초연을 보기 위해 런던에 머물던 1900년 6월 무렵, <나비부인, 일본의 비극>이라는 단막극을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미국 해군 장교가 일본에 파견 나와 게이샤를 아내로 두고 자식까지 낳지만, 곧 ‘진짜’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영어가 짧은 푸치니였지만 바로 이 이야기다 싶을 정도로 인상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푸치만 그랬던 게 아니다. “당시 서양 세계는 이 이야기에 미친 듯 열광했다.”
(141)
베트남전쟁은 20세기의 가장 부도덕한 전쟁 중 하나였다. 크리스처럼 잠시 베트남에 온 미국의 시각으로는 이 전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베트남전쟁은 30여 년에 걸친 두 차례의 인도차이나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만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오늘날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군이 진주한다. 나치의 괴뢰 비시프랑스 정부의 지시를 받은 프랑스군은 전투에 없이 일본군의 온순한 포로가 됐다. 종전 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베트남 남부에는 영국군이, 북부에는 중국군이 진주한다. 영국군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 프랑스군에게 다시 무기를 쥐여준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지배하겠다고 선언한다.
(144)
2012년 3월 29일,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50년 경과를 기념하는 연설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이렇게 전쟁을 미화했다. “베트남전쟁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피부색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지닌 채, 매우 힘겨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함께 의무를 다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사랑하는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 따뜻한 가족의 품을 떠나야 했던 미국인들의 이야기다.” 권투 영웅 무하마드 알리처럼 부도덕한 전쟁에 끌려가길 거부하며 감옥행을 택했던 수많은 이들, 반전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미국인 대중의 분노를 생략하는 화법이다. 미군의 총칼에 죽은 베트남인에 대해 침묵하는 화법이다.
(242)
방송은 끊겨도 신문은 쉬지 않았다. 베를린과 계속 통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로 손기정이 1위로 달리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 왔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새벽 1시께 다시 광화문에 사람이 모였다. 점점 더 많은 인파가 운집했다. 마침내 새벽 2시께, 동아일보 사옥 2층 창으로 여자 아나운서가 나타났다. “손기정 선수가 일착으로 골인해 우승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 멍했다. 이윽고 펄펄 뛰며 소리를 질렀다. “만세, 만세, 손기정 군 만세!” 잠시 후 제2보가 전해졌다. “다시 베를린에서 온 소식입니다. 손기정 군이 2시간 29분 12초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였고 남승룡 군도 3위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손기정 만세”, “남승룡 만세” 소리를 질렀다. 함성은 어느새 “조선 만세”로 바뀌고 있었다. 온 조선이 함께 환호하고 울었다.
(265)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의 모습,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고 책임지며, 그 역사를 학교에서 철저히 가르치고 숨은 나치를 끝까지 법의 심판대에 올리는 독일의 모습은 1970년대와 1980년를 거치며 우여곡절 끝에 성립한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아직 끝이 아니었다.
(274-275)
아카테는 뮤지컬을 보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도 속상해했다. 무대에 오른 냉정한 남자는 아빠가 아니었다. 뮤지컬과 영화는 아름다웠지만 진실은 아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우리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마리아는 가족 이야기의 판권을 9000달러라는 헐값에 독일 영화사에 팔았고, 영화사는 다시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제작사에 판권을 팔았다. 그리고 영화로 이어졌다. 가족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통제할 수 없게 됐고, 기억을 빼앗긴 느낌이었다고 90세가 다 된 아가테는 한탄한다.
(302)
님 웨일즈와의 인터뷰 말미에 장지락은 강경하기만 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도록 내버려두어라. 근본적인 질문으로 타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라.”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수였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그 걸음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