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해안에 위치한 안흥성은 왜적과 해적을 지키는 중요한 성곽이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올라는 진상품이나 곡식을 지키는 요새이지만 울산에서 가려면 상당한 먼 거리이다.
그렇지만 갈일이 생기면 가여 한다.
답사는 먼 길이라도 가야 될 일 반드시 생긱 마련이다.
서산 대산에 있는 완당의 어사 선정비를 보고나서 가져온 답사 자료를 보니 안흥성에 영의정 선정비가 보인다.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어 50km 넘는 거리를 차로 달려 보러 갔다.
도착하자 마자 비석은 보이지 않고 하여 안흥성 해설사에거 비석의 위치를 물으니 다사 나가서 찾으라 한다.
다시 나가서 비석을 보고 안흥성이 어떤가 하여 차를 달려 정상에 오르니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흥성(안흥진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1,568m 높이 3.5m에 이른다.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의 뒷산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 효종 6년(1655)에 축성된 것이다. 진성은 조선시대 지방의 군사적 중요지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벽을 뜻한다. 안흥성에는 충청도 유일의 수군 방어영이 배치되어 왜구와 해적으로부터 선박을 보호하고 유사시에 강화도를 지원하기 위한 곡식을 관리하는 군사적인 기능을 해왔다. 이와 동시에 한양으로 가는 곡식을 실은 선박이 침몰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기도 했다. 원래 안흥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수성루, 서문은 수홍루, 남문은 복파루, 북문은 감성루라 불리었으며 현재는 서문만 문루를 복원한 상태이다. 성곽과 성문은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어 성벽 구조와 축성 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다음 백과사전에 발췌
태안 안흥진성(안흥성)은 조선 태안 앞바다를 지키기 위한 수군이 주둔하던 진성(鎭城)으로 충청수영 속하던 군사기지에 해당한다,
여름이라 풀이 많아 자세히 보지 못하고 사진 만 찍었다.
안흥항이 있는 곳과 신진도 사이를 안흥량이라 부르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곶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서해는 조수 의 차가 많아 깊지는 않아 왜구나 해적의 무리가 쉽게 들어 올수 있기에 안흥성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된다.
. 이 곳은 뱃길로 한양의 입구인 강화도까지 하루이면 갈 정도라 충남이나 조정에서는 아주 중요한 해안의 주요 요충지이다.
이곳에 있는 영의정 선정비는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한 김흥근의 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며
필자의책 독특하고 재미 있는 문화유산이야기 나오는 가행건의 선정비가 있는 곳이다.
비석보고 성곽을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멀리 울산까지 가려먼 갈길이 먼데...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갈길은 먼데 노을이 놓아주지 않네
돌아 갈길은 구만리 인데
갈매기 목 놓아 울면 헤어짐을 아쉬워 하네
멀고 먼 울산 땅 바람같이 가고 싶구나--옥산 이희득
조선 초기 수군영진의 해상방어는 고려의 해상방어론을 계승하여 선상수어(船上守禦) 원칙에 의하여 만호의 지휘하에 병기와 양식을 병선에 적재하고 선상에서 대기 근무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수군의 선상수어 원칙에 의하여 성보(城堡)를 축조하지 못하다가 성종 15년에 경상도와 전라도에 한정하여 병기와 육물(陸物)을 저장할 작은 규모의 석보(石堡)를 축조할 것을 건의하게 되었으며, 각 포에 성보를 축조하면 만호의 거처가 된다는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성종은 “일이 이미 거행되었으니, 멈출 수 없다. 뒤에 만약에 변고가 있으면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여 축성을 강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종 17년 10월 제포에 축성한 것을 시작으로 중종17년(1522) 까지는 서해안과 동해안의 수군진도 성보를 축조하게 되었다. 안흥진성의 초축시기는 문헌상으로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며, 효종 4년(1653)에 화정도로 이설(移設)한 후 효종 6년부터 축성하기 시작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화정도로 이설하여 축성한 기록이 수록된 『대동지지』를 인용하여 안흥성 조사보고서에는 안흥진성이 효종 6년(1655)에 축성되었다고 하였고, 문화재청 문화유산 검색창에서도 안흥성이 효종대에 축조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대동지지』에는 현종 10년에 안흥진을 화정도 신진(新鎭)에서 본진(本鎭)으로 다시 이설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에는 구진(舊鎭)과 신진(新鎭)과의 이설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분명히 초축시기의 안흥진 본진(本鎭)과 화정도 신진(新鎭)의 성곽이 축조되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문헌상에 누락된 안흥진성 초축시기를 밝혀줄 수 있는 각자성석(刻字城石)이 1993년 공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안흥성 조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각자성석의 명문은 「萬曆十一年癸未閏二月…」로 시작하는 내용으로 만력(萬曆) 11년은 선조 16년(1583)에 해당되어 이 때를 안흥진성 본진의 초축시기로 파악하게 되었다. 또한, 안흥진성 체성에 대한 2차례의 발굴조사 결과를 통하여 두 시기의 축조기법이 확인되어 초축시기 및 수축시기로 판단하게 되었다. 최근에 이루어진 안흥진성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많은 연구성과가 있었음에도 신진(新鎭)과 구진(舊鎭)의 축성 및 수축사실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이와같은 오류를 야기한 것은 효종 4년에 안흥진을 화정도로 이설하여 현종 10년 본진(本鎭)으로 다시 이설하기까지 16년간 안흥진이 화정도의 신진(新鎭)에 있었다는 것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정도의 신진(新鎭)에는 축성되지 않았고, 본진이었던 구진(舊鎭)의 수축공역은 신진의 축성 사실과 구진의 수축 사실을 혼합하여 효종 7년 3월 이전에 시작하여 효종 7년 10월에 완공되었다는 오류를 낳게 되었다. 이는 숙종 1년 기록인 『비변사등록』, <안흥방어사사목(安興防禦使事目)>에서 구진(舊鎭)에 수축공역이 8월에 시작되어 10월에 완공되었다는 3개월간의 수축공역을 왜곡한 것이다. 문헌기록에 본진(本鎭)과 구진(舊鎭)으로 수록된 현재의 안흥진성은 선조 16년(1583)에 초축되었고, 신진(新鎭)의 축성 도중인 효종 6년 8월에서 10월까지 수축공역이 완공되었다. 『비변사등록』, <안흥방어사사목(安興防禦使事目)>에서 구진(舊鎭)의 수축년도가 적시되지 않아 혼동을 주고 있지만 총감독관인 충청도 감사 권우(權堣)의 재임시기를 적용하여 대비하면 효종 6년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이 수축공역에는 충청도의 5진영 중 좌영(左營) 속오군 2,200여명을 선발하고 승군(僧軍)으로 돕도록 하여 축조하였다.
효종 4년에 화정도로 이설한 안흥진 신진(新鎭)에 대한 축성은 효종 6년에 축성공역이 시작되어 효종 7년에 성곽축조는 완공되었으며, 이때는 축성공역으로 도내가 소요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충청도 전 고을에서 축성군을 동원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효종 8년에는 안흥 신진(新鎭)의 물 부족 문제로 존치문제가 거론되었으나 대신들과 비변사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신진(新鎭) 안흥진성을 계속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종 10년 2월 4일 예조판서 김좌명이 ‘안흥의 구진(舊鎭)이 형세가 매우 좋았는데, 신진(新鎭)으로 이주한 이후 불편한 일이 많고, 토병(土兵)들도 원망하며 괴롭게 여기고 있다’고 하자, 좌의정 허적이 안흥첨사진을 구진(舊鎭)으로 옮기고 별장(別將)도 혁파하여 신진(新鎭)에서는 수군을 모두 철수하는 겻으로 건의하였으며 이를 현종이 재가하고 있다. 그리하여 효종 4년(1653)에 화정도로 이설(移設)하였던 안흥진은 현종 10년(1669)에 구진(舊鎭)인 현재의 안흥진성으로 다시 이설하게 되었다.--- 안흥진성의 축조와 이설 심정보 논문
성안은 조그만마을이 있고 정상에는 사찰이 있다.
이곳 저곳 보고 있으니 스님이 차 한잔 하시란다....쭉 한잔하고 성곽과 사찰에 대한이야기를 듣고 다시 울산으로
옥산 이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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