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8/8 오전 8:00)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글을 검색하다가 아래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
"전통적으로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줄여서 아카데미는 전쟁, 사랑 그리고
휴머니즘을 테마로 다루는 영화에 대해서 후한 평점을 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4개 부문 중 9개 부문에서 수상하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표면적인 스토리만 본다면,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불륜의 사랑을 하고 또 동료를 배신하고서 이적행위를 한 어느 남자의
기구한 사연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재기(才氣)넘치는 지리학자 알마시(Almasy)는
영국 정보부 소속 요원의 아내 캐서린(Katherine)과 정(情)을 통하다
남편에게 발각됩니다.
그러자 캐서린의 남편은 캐서린을 경비행기에 태우고서 알마시에게 돌진하는
동반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 결과 캐서린은 사막의 오지에서 치명상을 입게 되고, 알마시는 연인을 후송할
비행기의 기름을 얻기 위해 독일군에게 기밀서류를 넘기게 됩니다.
결국 알마시가 넘긴 기밀은 수많은 동료들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알마시가 캐서린을 홀로 두고 온 동굴로
되돌아갔을 때, 이미 캐서린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연인을 눈부시게 하얀 천에 감싸안고서 눈물조차 말라버린 사막을 절망스럽게
걸어가던 알마시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전신에 화상을 입고서 그 자신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 첫째, 이처럼 스토리로만 본다면,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간통죄와
이적행위로 인해 아마도 법정에 선다면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처한 사내에 관한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처럼 배덕한 행적을 보인 사람에 대한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9개씩이나 수상하게 된 것일까요?
사실상 인간의 부도덕한 행실을 다룬 작품으로서 이보다 더 많은 수상을 기록한
영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카데미 수상작에 관한 글을 쓰면서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첫작품으로
낙점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 반사회적인 삶의 행로를 보인 인물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심각한 반감을
갖습니다.
아니, 극도로 터부시하는 감정을 갖습니다.
인류의 성현이라고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도 바로 그러한 터부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요?
아카데미 위원회에서 “잉글리쉬 페이션트”에 상을 9개 부문씩이나 몰아준 것에
대해서 수상쩍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던져준
삶의 화두(話頭)에 대해 서구인들이 갖고 있는 남다른 시각을 조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소크라테스는 모함을 받아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해석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일순간에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려야만 성립할 수 있는 주장이라는 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둘러싼 또다른 해석은 소크라테스가 죽을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자, 소크라테스는 왜 죽어야 했을까요?
소크라테스가 죽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가 다이몬(daimon)을 섬겼다는
점입니다.
다이몬이라는 것은 데몬(demon)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 요즘으로 따지면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수호령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스어에서 다이몬은 한 개인의 운명적인 사건을 주관하는 신적인 존재에
해당됩니다.
그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행복을 에우다이몬(eudaimon)이라 했고
불행을 카코다이몬(kakodaimon)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다이몬이라는 것 그 자체는 선한 존재도 아니고
악한 존재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러한 다이몬을 두려워하며 악한 존재인
데몬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다이몬에 뿌리를 두고 있는 “demon”이라는 단어의 대표적인
의미가 악령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demon”이라는 단어가 수호신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지나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Xenophon)은 “소크라테스의 회상”이라는 책의
첫장에서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첫 번째 이유로 바로 그가 다이몬을 섬겼던 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플라톤(Platon)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이라는 책에서도 소크라테스의
기소장 내용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신격인
다이몬을 섬기고 있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 중에 델포이(Delphi) 신전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信託)을 받았다고 소개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바로 자기 내면의 다이몬이 사악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즉, 델포이에 모셔진 공인된 그리스의 신인 아폴론(Apollon)의 신탁내용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다이몬이 사악한 존재가 아님을 밝히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라기 보다는,
자신의 몸주신을 숭배하는 오늘날의 무당의 모습과 닮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사람들은 왜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위험한
존재라고 판단하게 되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기존의 상식이나 사회적인 율법보다는 때로는 내면의
목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듣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에서 자기는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다.”라고 할 때의 자기와는 의미가 다른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너 자신의 다이몬(수호령)에 대해 눈뜨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그리고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제기하는 삶의 문제를
보다 피부에 와닿게 전달하기 위해서 “메디슨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소설 얘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그 역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지만 동시에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불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는 살면서 한 번 쯤은 꿈꿔 볼 수 있는
사랑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 볼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실행에 옮기면 사회 전체가 콩가루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식과 사회의 도덕은 가슴이 아닌 머리로써 행동할 것을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자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우리들 가슴 속에 잠들어 있는 다이몬은
그러한 문제상황에서 우리들에게 어떤 신탁을 내릴까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사람들은
다이몬을 데몬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사람들은 데몬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정신과정에 대해서 학문적인 탐구를 한 이론가들에게 다이몬과 같은
존재는 그다지 낯선 존재가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프로이드(Freud)는 다이몬에 대해서 에고(Ego) 라고 불렀고
융(Jung)은 셀프(Self)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있어 이들은 결코 친숙한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이 글의 전체 제목 “누구도 아닌 자의 초대”도 그러한 점에
착안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이러한 힘에 대해서 잘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딱히 “누구”라 칭하지도 않고서 생활합니다.
하지만 분명 삶의 어느 순간에 가선가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작용하는 다이몬
혹은 “누구도 아닌 자”로부터 초대를 받게 되는 순간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순간을 생텍쥐페리(Saint-Exup?y)는 “아득히 먼 곳에서 자석이
잡아당기는 것과 같은 신비한 힘이 작용한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참고로 이 글에 나오는 “누구도 아닌 자”라는 표현은 신적인 존재를
인간과 구분하기 위해서 시인 첼란(Celan)이 사용한“Niemand(아무도 아닌 자
혹은 누구도 아닌 자의 의미)”라는 단어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전통적으로 아카데미가 전쟁, 사랑
그리고 휴머니즘을 테마로 다루는 영화에 대해서 후한 점수를 주었던 것은
평상시에는 잠들어있는 것 같았던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 여전히 우리들 삶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우리들에게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삶의
화두를 떠올리게 해 줍니다.
내면의 다이몬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도덕에 순종할 것인지........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반길 수는 없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그리고
가슴저리지만 소중한 추억으로 되새길 수 있는 우리들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캐서린을 사막의 오지 어느 동굴에 안치시켜 놓은 알마시는 캐서린을
후송할 트럭을 구하러 떠납니다.
하지만 잠못자고 물 못마시며 사막을 헤맨 지 3일..... 간신히 만나게 된
영국군에게 알마시는 신원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첩자로 오인을 받아 압송당합니다.
애걸복걸하는 자신의 통사정이 이루어지지 않자, 알마시는 영국군을 죽이고,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립니다.
그 후 알마시는 동료가 알려준 곳에 가서 비행기를 찾고서 독일군에게 사막의
지도를 넘겨준 댓가로 넘겨받은 기름으로 연인을 향해 떠납니다.
하지만 동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연인이
남겨놓은 편지뿐이었습니다.
내 사랑,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얼마나 지났는지......하루? 일주일?
이제 불이 꺼져가고 있어요.
몹시 춥군요.
내 몸을 추스려서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태양이 나를 맞아주었을 텐데....
하지만 두렵군요.
내가 이 글을 쓰느라 남겨두었어야 할 불빛을 허비한 것은 아니었는지...
우리는 죽어요.
하지만 우리는 풍요롭게 죽을 수 있어요.
당신 때문에...
너무나 달콤했기에 삼킬 수 밖에 없었던 정신적 쾌락들...
영혼이 들어와 강물처럼 유영했던 육체들...
이 버려진 동굴처럼 숨겨왔던 두려움들.....
나는 이 모든 걸 내 몸에 새기고 싶어요.
우리는 진정한 국가들만큼이나 가치있는 존재죠.
단지 권력자의 이름으로 지도 위에 그려진
허울뿐인 경계가 아닌 진정한 국가말예요.
나는 알아요.
당신이 와서 나를 바람의 궁전으로...
그리고 물이 있다는 신기루같은 루머가 있는 곳으로 말이예요.
나는 지도가 없는 그 곳에서
당신과 그리고 친구들과 거닐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예요.
이제 불은 꺼지고
나는 어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
나는, 위의 글에서 "우리는 진정한 국가들만큼이나 가치있는 존재.
단지 권력자의 이름으로 지도 위에 그려진
허울뿐인 경계가 아닌 진정한 국가.." 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는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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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아닌자의 초대
티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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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5.23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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