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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함의 역설
누가복음 12:13-2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8주일이다. 무더위가 절정이다. 8.15가 지나면 한 풀 꺾이니 조금 더 참고 인내해야 하겠다. 어느새 오는 8월 8일은 입추를 맞는다.
지난 주간에는 일본의 수출규제와 잇따른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온 국민이 화가 나있다.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게다가 8월에 싸움을 걸어온 일본은 아직도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베 내각이 화이트리스트를 발표한 그날, 마침 10일 동안 산길을 헤매던 조은누리(14)가 극적으로 발견되어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온 국민이 내일처럼 기뻐하였다. 극적이란 표현은 이런데 사용한다. 나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이틀마다 걸러 내린 장마비 때문에 살았다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 어떤 생명의 징조 같아서 더욱 반가웠다.
이제 시원한 가을이 오면 ‘그물짜기 제자반’ 8기를 시작한다. 그물짜기는 성경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읽도록 훈련한다. 성경을 편식하면 안 된다. 그동안 쓴 약을 달콤하게 당의(糖衣)정으로 만들어 먹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성숙하려면 성경의 쓴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1)
오늘 본문은 가장 하기 어려운 설교이다. 듣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 부자도 듣기 싫어하고, 없이 살아도 듣기 싫어한다.
우리는 잠언에서 아굴의 기도를 사랑한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
그러나 내가 그 말씀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약간의 미련이 남는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를 더 좋아한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누구나 부유함을 원한다. 첫돌을 맞은 아기의 돌잡이 상에 놓은 물건들만 보아도 안다. 다 부귀영화, 입신양명와 관련이 있다. 영국의 동요 ‘팅커 테일러 솔저...’는 그래도 공평하다. 아이들이 하나 둘 셋 셀 때 숫자 대신 부르는 동요인데, 이 노래는 아이들이 자신의 장래를 점치기 위해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팅커(땜장이), 테일러(재단사), 솔저(군인), 세일러(선원), 리치맨(부자), 푸어맨(가난뱅이), 베거맨(거지), 시프(도둑)...’ 이렇게 다양한 선택을 제시한다.
누군들 부자를 거부할까? 요즘 최고의 직업은 건물주라고 한다. 돈이 되면 뭐든지 하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젊은 시절만 해도 경제적인 기준은 이슈가 아니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에는 염치와 체면이 있었다. 그런데 먹고 사는 일에 최소한 배고픔이 사라진 지금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다투게 되었다.
성경은 말한다. 과연 누가 부요한 사람인가? 그 기준은 세상에 대하여,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다르지 않다. 진짜 부자는 이 세상에서도 부요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똑같이 부요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형과 갈등하였다. 그는 부모의 재산 상속문제로 불만이 많았고, 동생 입장에서 불리하자 예수님께 공정한 해결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 사람이 찾은 해결책은 단 한 가지였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
예수님은 한 마디 말로 거절하신다. 남의 재산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14).
오히려 예수님은 더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말씀하신다. 문제의 근원을 치유하시려는 것이다.
유산다툼이나 재산분쟁처럼 경제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에 법적으로 분명한 기준이 있지만 사람의 이기심이 초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공정한 룰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정의의 기준으로 다루기는 더 어렵다. 제3자가 그 이기심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러분인들 재산문제에 관한 한 예수님의 해법을 들으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결론부터 던지신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
2)
예수님은 재산이 문제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인 탐심을 주목하신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런 탐심이 사람의 영혼과 생명에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핵심은 물질의 넉넉함과 부족함 이전에, 정의와 공정함 이전에, 사람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탐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절제할 수 없는 탐심이야말로 사람을 얼마나 어리석게 하는지, 형제간에 갈등하게 하는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정직한지,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청부론이나 청빈론은 논쟁거리가 아니다. 많으면 많은 대로 자비를 베풀고 넉넉히 구제에 힘쓰며,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될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다만 ‘사람의 재물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 소유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역대하에서 솔로몬의 이야기를 보라.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였다. 왕의 치세 40년 동안 황금시대를 누렸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라고 말씀하신다. 솔로몬 역시 값없이 은혜를 입은 존재일 뿐이다.
예수님은 한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 목적은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소유와 재물에 대한 네 생각을 바꾸라는 뜻이다. 비유에 등장하는 그 사람은 평생 재산을 불리는 일에만 몰두한 사람이다. 해마다 밭에 소출이 넘쳐나서 곡식 쌓아둘 방법 때문에 고민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실 그런 ‘돈 쌓아둘 곳’이란 고민을 한 번만이라도 해봤으면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오늘 설교는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 비자금을 조성하고, 차명계좌를 만들고, 해외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편법 증여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가 찾은 유일한 해결방식도 더 큰 창고를 짓고, 더 많은 재산을 불리는 것이었다. 부자는 창고에 곡식을 쌓아두었다가 매점매석을 통해 시장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다.
부자는 자신의 탐심은 적당하게 제어할 수 없다. 그는 자비를 베풀기는커녕, 이웃과 하나님께 대해 더욱 인색해 진다. 더 많은 돈을 벌려는 부자의 욕망의 눈은 부모도, 형제도, 친구에게도 맹목(盲目)이 된다. 로마 격언에 “돈은 바닷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느낀다”는 말과 이치가 같다.
비유에 등장하는 그 부자는 모든 것을 손에 쥔듯하지만, 단 한 가지 자기 생명만은 제 소유가 아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향해 호방하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
예수님은 그 부자를 가리켜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신다. 그 어리석음은 자기 영혼과 생명의 소유자라고 착각하는데서 온다. 만약 하나님이 오늘 밤에 그에게서 생명을 취해 가시면 과연 쌓아둘 곳 없던 그의 부, 하나님께 인색했던 그의 부, 가난한 사람에게 눈물을 뿌리게 한 그의 부는 어찌할까?
그런데 하늘의 섭리는 그 부자의 계획과 의지대로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부자라도 그 생명은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나 중산층에게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가르침이다. 네 영혼과 생명의 주인은 네 소유나 재물이 아니다. 자기 자신도 아니다. 그러기에 돈벌이에만 몰두하는 이기적인 삶은 얼마나 가련한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탐심, 욕망, 오만, 이기심의 포로가 되지 말고, 참된 행복을 추구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네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하신다.
3)
외과의사 장기려는 흔히 한국판 슈바이처라고 불린다. 암 절제 수술에 가장 처음 성공한 의료인이요,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 선각자였다. 그는 부산 복음병원(고신의료원)과 청십자병원을 만들어 그늘진 곳에 인술을 베풀었다.
의술로만 성공한 것이 아니다. 은퇴 후 집 한 채가 없어 고신의료원 병원 옥상의 20여 평 관사에 살면서도 영세 환자를 돌보는 무료진료를 하였다. 이런 일화가 있다. 병원 사무장은 이제 공짜환자는 더 이상 안 된다고 장기려를 말렸다. 그럴 때에 장기려는 치료비를 낼 수 없는 처지의 환자에게 “도망가! 도망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북에 두고 온 아내와 다섯 자녀를 그리워하는 실향민으로 45년을 홀로 살았다. 장기려는 유언하길 “비문에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의 삶과 안식은 우리 민족의 아픔의 증거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김의 여유를 살았던 지혜로운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다. 탐심은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을 범하는 일이며, 바울도 골로새서에서 탐심을 죽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사람들은 우상을 금과 은으로 만들었다. 물질을 숭배하는 맘몬이즘이 대표적이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현대판 우상을 곧 물질을 생명처럼 따른다. 그리스도교 대교리문답(1592년)에 따르면 “지금 네 마음을 두고 네가 의지하는 것이 바로 네 하나님이다”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중산층에 대한 생각이 나라마다 다르다. 대체로 유럽의 경우 가치추구란 점에서 비슷하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제시한 중산층 기준을 보자. 1. 페어플레이를 할 것, 2.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3.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4.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5.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이다.
한국에서 중산층의 기준이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경우 중산층의 기준이 경제적이어서 5가지 모두 숫자로 기준을 삼고 있다. 그동안 일본인을 가리켜 이코노믹 애니멀이라고 불렀다. 중국인은 돈에 대한 욕망이 더욱 심하다. 하물며 한국인의 경우는 우리가 더 잘 안다.
그리스도교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동양고전의 수사법을 빗대어 “신발이 맞을 때 발은 잊힌다. 허리띠가 맞을 때 배는 잊힌다. 마음이 바를 때 ‘옳음’과 ‘그름’은 잊힌다”고 하였다.
앨빈 토플러(A. Toffler)는 ‘부의 미래’란 책에서 미래사회는 “보이는 재산보다는 보이지 않는 재산이 더 크고 가치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부자는 물질과 부로서 축적된 화폐나 주식, 토지 등의 자산이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 의식적인 높은 가치가 진정한 부자임을” 예견하고 있다.
예수님은 곳간을 크게 짓고 자신을 위해 부를 쌓아 두는 부자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진짜 부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부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창고를 크게 짓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21).
부유함의 역설이다. 우리는 만족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를 배울 일이다. 진짜 부자는 바로 자족하고, 감사드리며, 자비를 베풀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물질의 규모에 상관없이 진짜 부자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가난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 세상에서나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나 진짜 부자로 산다.
예수님은 탐심을 억제하고, 끝내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내 삶의 영역을 하나님 나라에까지 확장하라고 하신다. 소유와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늘에 까지 이르는 자유를 누리라고 하신다. 재물을 나누고 잘 사용하면 할수록, 우리는 아주 가까이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부자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아직 진짜 부자가 못된다면,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과연 자신에 대해서 가난하고,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그런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지금 내가 가난하여 나눌 것이 없다고 방심할 것이 아니다. 부요함은 물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마음을 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가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과 생명을 축복하시어 세상과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유인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