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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32)】 ‘‘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 "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32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
어려운 점이 거기 있어요. 그런 심리가 있어. 그건 분명 진리를 더듬어 나가는데 왠고하니 밑진다, 얻는다는 여기 이 세계에 이 물질의 세계에 있는 거예요. 정신의 세계에서는 이 남는다는 것도 밑진다는 것도 없어요. 거긴 그건 없어요. 그건 딴 법칙이 다스리고 있는 딴 세계에요. 근데 거기대한 생각이 도무지 없기 때문에 종교에서까지도 밑져선 안 되지. 목사님이 왔다 새로 왔다. 참 좋은 목사다. 그래 좋은 목사라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일 하는 줄 알고 그 있는 정성을 다해 여러 가지로 도와 드렸다. 그 다음에 그 목사님 그렇지 않은 거 알려졌다. 아휴 속았다. 그놈한테 속았다. 그러면 그건 믿은 것 아니에요. 참 그가 그 종교적인 신앙 때문에 그 목사를 대접을 하고 그랬을진대 자기는 자기 한일에 대해서 그대로 만족을 느끼고 그것이 참된 것으로 알지 밑졌다고 손해 봤다고 생각은 안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알지 못하는 동안에 이 세상에 역시 신앙의 일이 아니고 세속적인 일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목사님을 후대를 해 주어서 그만치 나한테도 뭐 해주는 거 있겠지. 반드시 해준다는 거 도움을 준다는 것 아니겠지만 아유 뭐 나를 참 신자로 알아준다든지 뭐 해준다. 뭐 기대하는 것 있었다가 그렇게 못되니까 그렇지. 그건 비슷한 게 외형으로 보면 종교 살림이면 종교 살림, 신앙 살림이라 할 수 없어. 그렇게 정신세계에는 준다는 것도 없고 받는다는 것도 없어요. 근데 이런 말은 중 가운데하면 또 어려운 말이 되서 이해하기 곤란한 분도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신의 세계에는 그래요.
새삼스럽게 잃는다는 것도 얻는다는 것도, 그러나 하여간 그 기적을 구하는 심리의 밑을 보면 어떻게든지 이 현실에 있어서 밑지지 않으려고 밑지진 않고 튼튼히 실수 없는 요 실속 있는 살림을 하자고 하는 그 심리가 있기 때문에, 그래가지고는 그건 정신의 세계에 못 들어가요. 그렇게도 안하면 그 다음 그렇기 때문에 기적을 보여야만 해. 꼭, 그 우선 저사람 보통사람이 아니지.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보여야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실력에 잘 믿는다는 사람은 무슨 병을 고친다든지 그래야 그런 거라도 있어야 교회에 사람이 들끓지 않아요.
저 사람이 정말 참 아주 믿는다. 웬고하니 그 사람이 기도를 하면 병이 낫는다더라 해서 무슨 뭐 앞을 내다보고 며칠 있다가 될 일을 꼭 꼭 알아맞힌다더라 한다든지 그러는 것은 다 뭔고 하니 기적적인 그런 걸 추구하는 그런 심리가 있어 그러는데, 사실은 기적을 추구하는 그 심리는 영의 세계에 대해서는 충실치 못한 거예요. 불충실한 일이에요. 이제 얘기대로만 영의 세계를 정말 참 간절히 땅의 있는 것 보다 하늘 위에 것을 더 생각하라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만 땅에 있는 것 보다 정말 저기를, 현실보다 이상의 세계를 더 존중해 생각하는 그 마음이 있었다, 그런다면 반드시 기적을 그렇게 왜 어쩝니까?기적이라는 거 결국은 뭐냐? 사실 기적의 의미는 다른 거 아니고, 정신의 힘은 물질의 힘보다는 더 강하다. 그런 걸 나타내는 건데 그런 걸 무슨 그런 증거 조건을 나타나는 이런걸 보고야 안다고 하는 게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뭔지 그 간략하게도 모르는 사람이야. 거기대해서 충실치 못한 태도야. 심지어는 그 기적적인 것을 바라는 것은 지금은 현 있는 기독교에서 그건 그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현 있는 기독교에 있는 제일 위험하게 생각이 되는 것은 그것이 십자가 신앙에까지 들어가 있다고 하는 거, 십자가를 일종의 기적으로 알아요.
구원은 사상적 윤리적으로
사람으로서는 능치 못하지만 십자가를 믿으면 기적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든지 그렇게 생각해 그건 제법 좋은 일인 거 같아 옳은 일인 거 같으면서도 거기 대단히 위험이 있어. 어째 그러냐 그러면 구원이라는 건 지금은 옛날보다는 구원이라고 하는데 대한 생각이 훨씬 나아갔어요. 옛날사람은 구원이라고 그럴 때에는 앓던 병이 낫는다든지,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다든지, 무슨 그런 거지 현실적인 의미로 그런 의미로 많이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사실 말이 장생불사(長生不死)와 많은 관련이 됐어요.
옛날엔 죽는 거 제일 문제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죽지 않을 수 있겠나, 죽지 않는 방법 그런 걸 논한다면 도 닦는다는 건 그런 의미로, 옛날엔 도 닦았어요. 근데 기독교에서 뭐 불교도 그런 줄 압니다만 이 높은 우리 종교에서 오는 말에 구원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하는 거. 우리가 출발을 할 때에는 종교사에 옛날에 보면 그런데서 출발을 했는지 몰라요. 왜 그런고 하니 그땐 그건 그렇게 밖에 안 배워요. 하지만 차차 차차 이렇게 가까이 가고 보면 그 내용이 좀 더 자세히 알려지게 되면 모습이 달라져요. 그럼 지금 우리가 알건 뭐냐 그러면 인간이 만일 구원이 된다면, 인간이 구원이 된다 그럽시다. 구원이 뭐냐 말하기 어려운 거지만, 그러나 구원이 된다면 뭐냐 그러면 적어도 그것이 사상적으로 윤리적으로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웬고하니 인간이 인간된 그 본질이 생각한다고 하는데 있고 윤리적으로 행동한다고 하는데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구원 됐다고 구원의 상태가 어떤 거냐 말하기 물론 어려운거지만 구원되야 된다고 할 땐 윤리적으로도 사상적으로 안 되고 다른 말로 내가 깨달아서 되는 거. 사람인 내가 깨달아 내가 자진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그 내가 이해를 되고 되는 일, 또 그다음 그 윤리적으로 되는 일, 그렇지 않고 내가 실지 이 윤리적인 행동으로 돼서 나오는 그런 게 아니고는 구원이 아닌, 여기 있던 사람을 여기 있던 사람을 말야 내 이제 산에 올라간다, 나는 실례를 듭니다만 산에 올라간다. 그러면 이 사람 자기 아파서 다리를 못 써 못 올라가는 사람을 누가 이 교군에다, 안락의자에다 태워가지고 넷이서 매고 삼각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 사람이 등산을 한 거냐? 그건 등산이 아니에요. 등산을 지리적으로 지정적으로 생각해서 산만 올라가면 등산이라 한다면 그럴는지 모르지만 지금 적어도 등산의 의미는 옛날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등산의 의미라면 그런 거 아니에요.
산이 무엇이 산이냐? 땅으로 높기만 하면 산이 아니에요. 지금 그렇지 않아요? 그래 그러니까 산은 반드시 내가 내 걸음으로 걸어서 올라가서만 그게 거기 힘이 들었는데 이렇게 추어 올라가고, 여러 가지 모험을 하고, 뭐 텐트에서 자보고, 물을 건너보고, 그 산에 공기를 마셔보고, 여러 가지 뭐 그게 다 종합을 해 산이 됩니다만 그런 걸 내가 체험하지 않으면 산에 올라갔다 할 수가 없지 않아요? 그런데 누가 호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걷기 싫어서 말이야 아 저 안락의자에다 하고 나무로 메고 네 사람 메고 올라가자 하고 올라가면 겉으로 하면 올라갔다 할는지 모르지만 그런다면 뭐 시체를 담아다 올려다 놓아도 글쎄 시체가 산에 등산했다고 그러겠어요? 그건 극단의 예입니다만 그런데도 그런데, 하물며 인간의 영이 구원이라 그런다면 그게 뭐이 깨달아서 마음에 깨닫는 것이 있지 않고는 안 되는 것, 또 그 행동이 실천하는 것이 옛날과 다른 무슨, 쉽게 말해서 모든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죄악을 이긴 그런 상태가 아니고는 구원이라고 그럴 수가 없을 거예요.
거기 반드시 있는 조건이 뭔고 하니 내가 한다. 내가 한다, 내가 자진해서 스스로 해서 한다. 마음에 우러나서 한다고 하는, 그런데 이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 얻는다고 하는 걸 강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된다고 하는 걸 고맙게 하는 나머지 이제 그쪽 조건을 잊어버려. 그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데 거짓말인 말이에요. 그 물론 그래요. 그렇지만 그럴수록 이쪽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겠는데 그쪽으로 무시하기 때문에 어떻게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건 거저 아무 힘이 없는 사람들 버쩍 들어다가 이 지구 동이체 들어다가 어디 저기다 올려놓는 것 같은 그런 따위, 무슨 그 요술적인 마법적인 아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못할 것이 없다하는 그런 따위. 그런 의미가 하나님의 능력이 능력 중에서 제일 그 위대한 능력이 어디 나타나냐 하면 사람의 마음을 개조하는 게 정말 능력이지 말이야.
물질적인 높던 사람을 낮춘다든지 깊던 물을 옅게 만든다든지 바람을 거꾸로 불게 한다든지 그거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만 그 능력보다는 어떻게 하면 악하던 마음씨를 착하게 만들까? 이제 우리나라에도 말이야 아 요새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그랬습니다만 말이야. 그런걸 보고도 그 우리가 놀라운 위대를 느끼지만, 공화당사람의 마음을 오늘 저녁으로 회개를 시키는 일이 있다면 그야말로 참 기적일 거예요. 그건 어디 산이 무너졌다는 것보다도 그 더 놀랍지 않아요? 그런데 그 점은 그렇게 안 생각을 해. 그 십자가로 인해 구원을 얻는다하는 것이 그 마음에 그런 기적적인 변동이 일어나가지고 된다하는 건 아니고 그저 우리는 죄인이니까 죄인을 영 못 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됐다고 거저 된다고 하는 데가 거저라고 하는 말이 좋지만 그 말에 그 오해가 거기 있다고 이제 폐단이 현대 사람에게 참 이해하기 곤란한 점 종교가 무력해지는 까닭이 난 깊음은 거기 있다고 자꾸 늘 하는 말입니다.
기적을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은 기적을 많이 바란다하는 의미에서 정도 낮습니다. 확실히 우리의 영적 연령이 낮습니다. 그래 본래가 기적을 구하는 그 심리가 그래요. 그러면 기적을 구하는 심리가 있으면 기적을 뵈어주어서도 못 믿는 거예요. 그럴 거예요. 그래서 모세를 믿었더라면 네가 나를 믿었지. 모세처럼 모세 보다 더한 일 어디 한 사람 있겠어요? 홍해를 건넌다고 역사에 그런 일이 있고 없고 별개의 문제로 하고 사실 홍해를 건넜다고 그래 만나를 내렸다고 그래. 뭐 그 놀라운 게 얼마나 그렇지만 그 모세를 믿었나. 안 믿지 않았나 안 믿지 않았어요?
자라자는 걸 보자는 것이 역사의 목표
그래서 역사적으로 사실이 그런지 안 그런지 모르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둘밖에 없지 않아요? 그 60만 넘는 사람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도 못 믿고 광야에서 다 불신 가운데 죽어버리고 겨우 여호수아하고 갈렙하고 둘밖에 못 들어갔다고 역사에서 정말 둘이었나 아니었나 모릅니다마는, 그게 믿음이란 그렇게 어렵다 하는 거. 그 믿는다는 것 그렇다하는 거 증거 하는 말 아니겠어요. 그럼 기적을 본 사람 보기만하면 믿는다면 기적 뵈여 그 사람들이 다 기적을 본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여호수아나 갈렙이 들어갔다는 거하고 기적을 본고로 들어간 거 아니에요.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믿는 마음 때문에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기적이 인간인 다음엔 기적에 대한 마음이 없을 수 없어요. 인간이 약한 거니까. 이 자연법칙에 매여 있어서 자연법칙이 절대적인 것 아니에요. 적어도 인간이 정신적인 존재인 다음에 자연법칙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마치 어린애가 어릴 때에는 어리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달음질도 못하고 하는 모양으로 이 자연법칙 속에서 부자유를 느껴요. 그러는 가운데서 기적을 요구하는 그 마음이 생겨서.
그러나 애가 차차 자라서 열나무살 돼지. 된다면 그다음엔 그런 거 문제 삼지 않아, 아 뭐 업어다 주는 거 좋지 않아. 어릴 때 업어다 주는 거 좋아했지 말이야. 이제 내발로 돌아다니는데 제발 업자면 “아 나 업힌다. 일 없다” 그러지. 벌써 어린애가 그러지 않아요. 어렸을 때는 업혀, 처음에 업혀가는 것 쾌락이지만, 제 발로 걷게 된 다음엔 업히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요, 싫은 일이요. 그런 모양으로 인류의 정도가 낮을 때에는 이 자연법칙이 우리에게 대해서 절대적인 것 같아서 그걸 못 면해서 “아유 이거 이렇게 먹지 않고도 사는 재주가 없나, 뭐 탄 것 없이도 날아가는 재주가 없나, 뭐 바람이라도 거꾸로 불게 하는 재주가 없나.” 그런 걸 요구하고 해서 “아유 저사람 위대한 사람이다” 그랬지만 그건 마치 우리가 일어서지도 못하고 어린애 때의 일이고 과학이 발달이 돼서 상당히 그런 문제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됐는데 말이야. 이제 공중에 난다고해도 시원하게 들릴 것이 없고 뭐 기도하다 날지 않아도 비행기타면 나도 날아갈 수 있다. 상관없다. 돈만 내면 나도 날아갈 수 있다. 꼭 기도하다 날아야 되냐. 지금 세상에는 기도하다 누가 날았다 해도 누가 장하다 뭐 있을 거 아무도 없을 거예요. 돈이 있으면 나도 날수 있다. 물속에 들어갔다고 그래요 기도하여서 물속에 들어가는 거 아니다. 잠수복을 입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쉬 그렇게 되요.
그러니까 그건 이전에 우리 어렸을 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 어렸을 때의 버릇이 붙어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그보다는 좀 높은 것을 이렇게 높은 걸 요구하는 게 있어. 그러더니 거저하면 거저주기 때문에 고맙다하는 것도 어렸을 때의 그 버릇이 붙어 그런다고 그래요. 어린 마음에 거저 주는 거 좋았지 말이야. 커다란 게 나이 20살, 30살 되면 거저 준다고 하는데 줄줄 따라다니고 그건 뭐하러 사람 노릇을 못하고 그만 두지 않아요. 아 그럼 이제 내가 할 능력이 됐는데 내가 하렵니다.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끔 그건 그 자리에까지 자라자는 걸 보자는 것이 역사의 목표라면 목표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이겠지.
기적적인 걸 하는 건 없이 이상하게 뭔지 모르게 저절로 돼. 그런 게 아마 아닐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기적을 요구하는 마음 또 다른 말로 하면 아직도 어린상태에 있는 마음, 영적 그 연령이 아직도 자라질 못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기적을 보여 줘도 믿지 않을 겁니다. 믿지 못할 거다. 그건 실증만이 아니라 사실 역사상에 사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그렇게 했건만 안 믿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거 많이, 선인이라는 그래 하지만 그 사람의 일 믿지 않았다. 왜 기적이라고 하는 거 범위를 좀더 넓혀보여 증거를 요구하는 심리가 있는 한은 증거를 보여줘도 믿는다는 것은 증거의 요구 없이 증거를 하려도 할 수 없는 세계가 정신의 세계가 그러니까 그래. 그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되는 거니까 증거를 요구하는 심리가 있으면 결국은 못 믿고 만다.
그래 그러면 여기 이렇게 이 사람들이 기적을 많이 행했지만 믿지 않았다는 거 당연한 거예요. 그때 사람들이 기적을 요구하고 했으니까 이런 말 한 거예요.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왜 이것은 이사야가 벌써 예수 나기 전 8백 년 전 7백여 년 전 때에 이사야가 이건 깨달은 정도에요. 무엇이라 했느냐하니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그렇게 많이 전했건만 이날까지 예언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진리의 말씀을 해주었건만 이 세상은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왜 이것들은 현실의 인간이야. 인종을 가린다면 현실 인종이냐, 이상 인종이냐 뭐 정신에 있냐, 그렇게 또 가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사람도 두 요소가 다 있지만 현실에 살자는 사람도 있고 이상에 살자는 사람도 있고 지금의 인간은 현실 없이 이상에 사는 수도 없고 이상 없이 사는 수도 없지만, 적어도 목표로 겨누는 어느 현실에 그걸 목표로 삼는 한 아무리 말 해줘도, 그러니까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믿은 사람 없다. 믿은 사람 없다. 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으며 그렇게 능력 있는 일을 많이 했건만 믿은 놈 하나도 없습니다.
믿지 않데도 말씀은 줄곧 계속해 와
그 얘기는 예언자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말이 혹은 자기혼자 역사를 가만히 반성을 해보고 하는 역사가 무엇이냐. 이것이 역시 불신의 역사 아니냐. 말씀은 있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말씀은 계속해 내려오는 역사다 마는 말씀이 있건마는 인류가 믿었냐? 결국은 믿지 않아. 인간이란 도대체 믿지 않는 존재다. 또 이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네 이거 능력을 그렇게 그 증거를 보았건만 증거를 그렇게 보았으면 보았다고 그래 그걸 그대로 승인을 했냐? 안하는 거. 인간의 역사를 그런 면에서 봐. 인간은 그런 면에 이것은 뒤집을 수가 있어요. 뒤집어 물론 다른 면에서 믿지는 않았지만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은 줄곧 계속해 와.
믿지 않았으면 말씀이 죽어버릴 것 같은데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걸 통해서 말씀은 자꾸 자꾸 살아와요. 살아 올뿐만 아니라 말씀이 자꾸 높아가요. 정도가 높아가요. 세상에 언제 가서 의인이 세상이 다스려 본일 없어요. 그래 플라톤이 철학자가 임금이 되야 된다고 했지만 난 그래요. 플라톤이 기가 막혀서 한 거고 도저히 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소리일거다. 난 철학자가 왜 임금이 되겠소. 철학잔 정말 참 철학을 했으면 임금 같은 거 하려도 하지 않을 거예요. 철학자가 임금이 된다면 그것은 또 정치가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려면 어느 때가면 그대로 뭐 지금도 그러니까 우리가 어느 편 옳은 생각 아니 세상에 요새는 더구나 그렇소, 그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이지만은, 이세상은 옳지 않은 것이 왜 이렇게 판을 치냐? 이거 옳은 것이 좀 못 이겨보겠냐?
그럼 그러지만 말야 언제는 이 세상에서 옳은 일이 이겨본 일 있답디까? 그런 거 보면 인류의 역사가 이날까지 오는데 옳은 일이 못 견딘 역사지. 옳은 일이 이긴 역사라고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바꿔보면 정의라는 건 밤낮 실패 의해서 이기는 죽음으로 사는 거, 죽음에 의해 사는 실패 자꾸 억압을 당하는데서 의가 나오지 말이야. 의인이 나서서 세상 대통령도 하고 뭐도 되고 다됐다 그러면 그 다음에 의가 어디매 있을 데 있어요. 아무데도 없지. 무엇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건 그렇게만 마련이에요.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 그 점을 이제 말을 하는 거예요.
실컷 전도했는데 전도 듣지 않았다. 사람인데 들을 것 같은데 인간성이 있은 다면 말을 하면 알아듣는 게 인간이에요. 그렇지만 말을 하면 알아듣는 게 인간이건만도 알아듣지 않은 거야 말로 인간이에요. 듣지 않는 게 인간. 듣는 이 듣는 거 들었다고 한다면 노아의 홍수 있을 리 없어요. 노아홍수 다음에 들었다면 오늘날이 있을 리 없어요. 제1차 세계대전 때 들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 있을 리 없어. 밤낮 안 들으니까 이 꼴이지. 그럼 이 앞으로도 그럼 어떡하나. 또 안 들을 거예요. 또 안들을 거니까 말하지 말자. 그건 모르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본래 들을 줄 알고 말하는 거 아니에요. 이게 참 어려운 모순되는 말입니다만. 만일 말하는 사람이 이거 이번에 삼선개헌 꼭 안 될 거다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을 안 해요. 삼선개헌 꼭 될 줄 알고 안 될 줄 아는 생각을 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또 삼선개헌 그대로 될 거다 그럴는지 모릅니다만 그런다고 하면 아주 뭐 우리나라에서 죄악의 씨가 없어지고 그다음 날로부터 데모크라시 완전한 정치가 나온답디까? 또 속는 거 누가 나와도 속기만 마련이에요. 그런 줄 알고 싸워가는 거지 그런 줄로만 몰랐다. 그러면 오늘부터 싸움을 그만두세요. 그건 뭐 아주 그 아무 때가서도 낙망하고야 마는 겁니다. 이치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 의인이야말로 그 사람이 이겼으면 그러지만 그이 의인이 못돼. 그러니까 내 저번에 인천 가서 강연하다가 호지명이 얘기했더니 “아 선생님 호지명이 얘기하면 어떻합니까. 위험합니다.” 그러다가 무슨 일 나면, 뭐 그래야 잡아가기밖에 더 하겠냐. 잡아가는 거 그다지 무서워 할 것 있냐. 뭐 그럼 호지명이, 호지명이 좀 말해줘야지 말이야. 우리와 적국사이, 적국은 적국이고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인거지. 그 사람이 월남민족을 위해 투쟁한 것만은 사실인데 뭐 그 사람이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럼 살려줄건 살려줘야지. 그런데 호지명이 생각하다가 좋은 건 그거에요. 호지명이 죽었다고 하는 데가 그 왜 호지명이 살아있어서 월남의 대통령이 되 보시오. 더럽고 더러운 거예요. 그다음에 욕이 얼마나 돌아가겠어요.
그렇지만 호지명이 저렇게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욕 하나도 안 먹게 됐거든. 욕먹을 욕도 안 먹게 됐어. 그러니 끝까지 내가 있어서 해 보련다 그건 참 어리석은 사람이야요. 그러나 난 죽은 다음에도 계속해 욕을 먹으련다. 잘하고도 욕을 먹어요. 그러니까 이건 꼭 의라는 건 죽음의 실패에 의해서만 살게 마련이에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세상의 법칙이 그래요. 고걸 꼭 알게 되는 데가 대단히 중요한, 그러기 때문에 뭔고하니 우리는 그러고 나면 말이야, 실패법이 없어. 본래부터 그렇게 실패 아무리 메 때려도 말이야 지는 법이 없어. 뭔지 나 그러면서도 동화 자주 봐 헤밍웨이의 말 디스트로이 벋나트디비트(destroyed but not defeated) 그랬나 파업은 했는지 모르지만 지진 않았다. 디스트로이(destroyed) 했는지 모르지만 네가 나 디스트로이 했는지 모르지만 나 디스트로이 진건 아냐. 승부를 본래 문제로 삼지 않는 사람한테 지는 게 있을 리가 없어. 근데 승부를 문제로 삼는 사람은 져도 지고 이겨도 지는 거예요. 지게만 마련이에요. 그런가 안 그런가 보세요.
그게 벌써 예수 나시기 전 8백여 년이나 되는 세월에 이래서 이사야 이런 말을 했지요.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은 누가 믿었으며, 믿을 놈 없습니다. 주의 팔을 그렇게 능력을 행했건만 하나도 그중에 받아들이는 놈 없습니다.” 그러는 이사야는 그럼 나는 다시 말 안할랍니다 그랬나. 그런 거 아니에요. 이사야가 봤었는지 모르지만 구약 중에 제일 많이 66장 쓴 사람은 이사야 아니에요? 그렇게 말 많이 했어요. 그럼 하늘을 둘러보고도 알면서도 뭐 제1 이사야, 제2 이사야, 제3 이사야까지 있다니까 뭐 그건 꼭 한사람이 한 거 아닐 겁니다만. 가령 다만 몇 장을 써도 하여간 이러면서도 말 많이 하지 않았어요?
짐으로만 이기게 되는
그럼 이건 왜 지금 이 성경 쓰는 사람이 이 이사야의 말은 왜 끌어오나 그건 뭔고 하니 예수님도 그렇고 8백년의 7세기의 8세기에 7백여 년 전에 있던 이사야가 벌써 이랬지만 우리 선생님 예수 마찬가지다. 그래 그 아래켠에 예수의 영광을 보고 그랬다고 아주 말을 그렇게 했습니다만 역으로 우리 선생님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선생님 말씀 그렇게 많이 했건만 그 사람들 듣지 않았다. 기적을 그렇게 많이 행했건만 이 사람들 하나도 믿지 않았다. 벌써 나시기 전 7백 년 전 8백 년 전 세상도 그랬다. 역사란 본래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이글을 인용을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본래 그런 거. 이 인생이라는 인생의 원리가 본래 그런 거예요. 옳은 거라는 거, 이김으로 의인은 이김으로 이기는 거 아니라 짐으로만 이기게 되는 그런 거다. 도리는 들어서 들리는 거 아니라 듣지 않으므로 인해서 도리는 자꾸만 이루어져 올라가는 거.그 다음 그러는 가운데 있어서도 진리는 살아있었어. 그 진리는 살아 진리는 변함이 없다. 뭐 이사야 때도 그랬지. 예레미야 때도 그랬지. 예수님 때 지금 우리 예수님 때도 그렇지. 진리는 영원 변치 않는다하는 것을 사는 걸로 삶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신, 믿지 않는 현재에 있어서도 믿지 않음으로 믿지 않는 이 현대에 있어서도 진리는 산다. 그러기 때문에 그럭하므로 인해서 분명 이시대가 믿지 않는 걸 보지만 실패라면 실패이고 실패의 그 밑에서 그래도 오히려 실망을 안 해요. 구원의 가능성을 내버리지 않는 심리가 여기 들어있어요.
지금 예수님 이렇게 위대한 일 하셨지만 안 믿었다. 그 결론을 내리우면서도 그러면서도 조금 패배감에서 그러는구나 그거 아쉬워서 하는 말이에요. 아 그거는 이사야에 한 말대로 이루기 위해 그런 거다. 이루기 위해 그런다 그러는데 고런 거 이렇게 조그맣게 보면 유형을 요렇게 프로그램을 짜가지고 요대로 꼭 맞추어야지, 그렇게 해석을 할 수가 있지만 그런 것만이 아니고, 이건 옛날로부터 있는 진리다. 본래 이사야가 그런 말한 것이 잘못 말한 거 아니다. 그래 벌써 그때 진리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 예수님에게서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거 그대로 그것이 진리인 것을 진보라. 그렇게 해서 그때와 지금과의 시대는 달라도 일관해서 있는 그 뭐 있어요. 그게 진리에요.
이사야 때도 있고 지금도 그렇고 둘이 그 실패하면서도 그 둘이 연결을 했어. 이사야가 그때 그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이 오늘날 예수님 이럴 것을 미리 두고 말한 거다. 조그마할 때 사흘 전, 닷새 전, 몇 백 년 후에 될 것을 이제 미리 말한다고 고런 게 무슨 기적적인 재주만이 아니라 그런 게 아니다. 원리를 역사가 이런 거다. 그래서 그 둘이 그때 둘이서 하나이 돼. 8백 년 전에 있었던 이사야나 8백 년 후에 난 예수나 딴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의 한 진리 속에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실패를 했거나 성공을 했거나 간에 실패, 성공에 관계하지 말고 진리를 살리는 진리를 살릴려면 실패, 성공에 이게 붙잡혀 가지곤 못해요. 의는 성공에 해서도 의다 실패가 됐어도 의다 그래야지. 성공된 건만 의다 그러고 실패된 건 아니다, 그런다면 그건 진리를 살리는 도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잘 싸웠다. 그 사람이 훌륭한 군인이다. 이순신만 훌륭한 군인이 아니라 임경업이도 훌륭한 군인이다. 허나 이순신은 해서 성공이 됐고 임경업이는 성공이 못됐지만 나라를 사랑한 점에서 마찬가지다. 군인인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래야 그게 뭔지 알지. 이 못생긴 놈들이 이순신의 칭찬을 할 줄 알면서 임경업의 말을 하나도 할 줄 모르는 것… (녹음32, 3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