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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노을빛 치마에 새기다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 또는 일명 매조도(梅鳥圖)라고도 불리는 이 시화(詩畵)는 어버이가 딸애에게 줄 요량으로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려 넣고 그에 알맞은 시를 지어 반듯하게 만든 작은 가리개에 쓰인 것으로 넘치는 사랑의 가르침이 그득하게 담겨있다. 그림을 대하면서, 눈으로 보고 읽는 데에 그치지 않고 느꺼움이 일어나 가슴으로 안다면, 동진(東晋)사람 고개지(顧愷之, AD 344∼406)의 필치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얽힌 안견(安堅, AD 1418∼?)의 예지를 얻으려는 간절함이 구체적인 사실을 경험적인 감정으로 표현하였음에서 읽을 수 있으며 삶의 진정성과 시대의 아픔을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구도에다 소재도 평범하여 보통의 그림처럼 여겨지지만, 그 속에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AD 1762∼1836)이라는 태산만큼이나 거대한 인물에 감추어진 그에 못지않은 솔직하고도 담백한 인간적인 냄새가 숨겨져 있으며, 그 가운데에 다산이 자신을 진솔하게 표현한 속내의 깊고 정미(精美)한 것까지도 읽어낼 수가 있다. 그림 앞에 마주하고 서면, 오랜 동안의 유배생활로 지친 외로움을 달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더해서 끝없는 부성애(父性愛)를 함께 담아 마음이 가는대로 붓이 따라가며 안타까움을 여과 없이 토해내고 있는 심경을 대하는듯하여 보는 이를 더 한층 애달프게 한다. 몇 줄의 글귀를 읊조리며 음미하다보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무한한 사랑의 애틋함이 아직도 줄지 않고 진하게 다가와 눈시울을 젖게 한다. 이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시공을 초월하여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것은 모두가 지극한 인정(仁情)의 발현 때문일 터이다.
먹빛도 선연하게 한 획 한 획 정성껏 그림과 시(畵題)를 마무리하고 줄을 바꾸어 여백에 작은 글씨로 다시 발문을 꼼꼼히 썼다. 연호(年號)와 간기(干紀)를 쓰고 관서(款署)에 이어서 간략한 문장으로 애끓는 부성을 함께 넣어 적었다. 그렇게 마음으로 채우고 애간장을 녹여서 완성한 그림이다. 아쉬움의 크기야 태산보다 높았을 것이고 바다를 채우고도 남았겠지만, 더 이상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눈을 감아보라. 그림을 손에 받아들고 어릴 적 기억 밖의 저편의 어버이를 생각하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을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떠올려지지 않는가. 어찌 처연해지지 않겠는가. 그리움이 느꺼워 아쉬움 속에 있으면서 꿈속을 회상하는 만큼이나 쓰라린 것이 없다 해도 어버이와 자식으로 천륜인 것을, 오늘도 그리워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서로를 향해서 하늘만을 바라보고 눈물짓고 있었을 그 광경을 떠올려보라. 송곳이 뼈 속까지 찌르듯 아픔을 느끼지 않겠는가. 하릴없는 바람인줄 알면서도 갈망의 소리는 하늘 향해 끝없이 날아오른다. 아직도 팔팔뛰고 있는 살아있는 어버이와 자식 간의 끝없는 사랑의 잔영들을 허공에 가득히 띄워놓고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좌절의 어둠에 빠져 방황할 때에도 그랬다. 체념의 허방다리에서 허우적이며 헤맬 때에도 똑같았다. 결코 잃지 않았던 희망의 끈을 붙잡고 애쓸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해와 달을 다스리는 하늘이 가없는 은혜를 베풀어 왜곡된 세상을 되돌리고 삭막한 광야로부터 이끌어 소생할 새 길을 다시금 열어 줄 그날이 오기를 손꼽고 있다. 끝없는 기다림으로.
翩翩飛鳥 훠얼 훨 날아 온 새가
息我庭梅 내 집 뜰 매화나무에서 쉬는구나.
有列其芳 그윽한 그 향기가 짙기도 하여
惠然其來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구나.
爰止爰棲 여기에 머물러 깃들어 지내며
樂爾家室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華之旣榮 꽃이 이제 활짝 다 피었으니
有蕡其實 열매도 주렁주렁 많이 달리겠네.
'嘉慶 十八年 癸酉 七月十四日 洌水翁書于茶山東菴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가경 18년 계유(1813년) 7월 14일에 열수(洌水, 다산의 호) 늙은이는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내가 강진서 귀양산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 홍부인이 낡아 헤진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다.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이를 잘라 네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었다. 그 나머지를 이용하여 작은 가리개를 만들어 딸에게 보낸다.)'
전체적인 배치나 형태는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한 필치로 처리하였다. 윗부분에는 조화를 맞추어 매조(梅鳥)를 단순하게 대구로 그려 넣고 그 아래에 큰 글씨로 시(詩)를 써서 주안을 두었으며, 옆에다 발문(跋文)을 배치하였다. 비록 묵(墨)의 농담(濃淡)을 주기에도 획(劃)과 선(線)을 내기에도 쉽지 않았지만 심혈을 기울였음이 충분히 엿보인다. 시와 그림이 한데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문인화(文人畵)이다. 그리고 행초서체(行草書體)로 쓰인 사언시(四言詩)가 《시경(詩經)》풍의 고체시(古體詩)의 형식을 그대로 취한 점에는 같은 형상화 방식을 통하여 《시경》이 지니고 있는 본원적인 의미와 기능이라 할 수 있는 미자권징(美刺勸懲=선을 찬미하고 권면하며, 악을 풍자하고 징벌)의 시정신(詩精神)을 환기하려는 의미도 들어 있다. - 《시경》은 군주가 민의(民意)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하여 채시관(采詩官)을 두어 각 지방의 시가를 수집한 것이며, 수천 년 전인 당시로서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의 일부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그러나 이는 그가 지은 16수(首)의 사언시 중에 '채호(采蒿=쑥을 캐다)'처럼 아픔으로 종 나타내듯이 무기력한 유배자의 신분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처절한 호소의 대신일 것이다.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어쩌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마음의 한편으로 나타낸 것으로 미루어 짐작이 되기도 하고, 풀 수없는 난감한 짐을 지고 있는 절실한 심경의 고백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렬하게 주는 인상은 자식을 향한 무한한 어버이의 굵은 사랑의 표현이며, 그림이 눈을 붙잡기보다는 마음을 붙잡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조(正祖 22代, AD 1777∼1800 재위)가 갑자기 승하한 후 정권장악에 성공한 벽파(僻派)는 정적인 시파(時派)를 제거하기 위해 순조(純祖 23代, AD 1800∼1834 재위) 1년인 1801년에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킨다. 그해 2월에 천주교인으로 체포된 이복형인 정약종(丁若鍾)은 옥사했고, 이승훈(李承薰; 최초의 세례교인) 등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으며, 둘째형인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형제는 천주교와는 무관함이 밝혀졌으나 정치적인 박해를 받고 숙청되었다. 정약용은 처음에 경상도 장기(長垢)로 유배되었다가 그해에 다시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移配)되었으며, 형은 흑산도 외딴 섬으로 보내졌다. 다산이 인생 황금기의 대부분을 한으로 보내야했던 유배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강진 땅에 와서 벌써 십삼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조가 대쪽과 같은 선비라고 하지만, 가족이 그립다는 마음을 삭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어찌 어버이의 애틋한 마음까지 지울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귀양살이하는 처지에서 몸으로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딸에게 보낸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라 불리는 이 그림에는 애잔한 어버이의 마음만은 고스란히 녹아있다. 어느 날 가구랄 것도 없는 임시변통으로 만들었음직한 서안과 반닫이에 보잘 것 없는 사방탁자가 전부인 방을 정리하다보니 부인이 시집올 때 입었던 다 헤진 홍치마를 자르고 남은 자투리가 가지런히 쌓아놓은 책 더미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색이 다 바래여 바탕색이 노을빛으로 변하였다.
그 치마는 몇 년 전에 서책(書冊)을 보내왔을 때에 보자기 대신으로 책을 쌌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두 자식에게 보낸 하피첩서(霞帔帖書)가 생각났다. 부인이 보낸 치마를 받고는 많은 생각을 하였다. 초로(初老)의 부인은 천리나 멀리 떨어진 강진까지 이제는 색이 다 바래여 붉고 선명하던 색이 노을빛이 된 치마를 왜 보낸 것일까? 무슨 마음으로 시집 올 때 입었던 활옷(闊衣=혼례복)치마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옷에 책을 싸서 보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다산의 머릿속에 휘돌아 나가던 상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색한 살림살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보자기 대용으로 귀한 옷으로 대신하여 싼 것은 아닐 터이고, 부인의 성행(性行)과 가문의 법도가 또한 그렇게 천박하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고 신혼초의 굳은 다짐을 잊지 말자는 뜻도 가상한 뜻이 담겨 있기는 한데, 그는 조금 못 미치는 것이고, 무엇일까? 그렇게 몇날 며칠을 골똘히 궁리하다 뭣인가에 생각에 미치자, 어느 날 치마를 일정한 크기로 여러 장이 되도록 잘라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훈계와 당부의 글을 치마조각 하나마다 빼곡하게 써넣었다. 풍비박산(風飛雹散)된 집안과 아비 없이 자라는 애들에게는 무언가가 특별하고 확실한 것이 있어야함을 부인이 넌지시 일러주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원색에 가깝던 치마의 붉은 색이나 노란색이 더없이 엷어져 글쓰기에 안성마침으로 알맞게 변해 버렸다. 다산은 그 조각들을 배접을 해서 제책을 하듯 단단히 끈으로 묶고, 표지에는 치마 색을 빗대어 '하피첩(霞帔帖)'이라고 이름을 붙인 가계(家誡)를 두 아들에게 주었다. 하피(霞帔)는 '노을치마'를 일컫는다. 그래, 그 옛날 주노공(周魯公)과 같은 현자도 자식훈육에 노심초사하지 않았는가. - 주공삼태(周公三笞) - 후─ 큰 숨을 쉬었을 것이다. 아무리 다산이라 한들 세상일을 송두리째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준 부인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서책으로 하나 가득한 송풍암(松風庵)에 모처럼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그 후로 몇 해가 지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그 일도 잊고 지냈다. 그러다 우연히 집안 정리를 하면서 그 당시 쓰고 남았던 치마가 눈에 뜨였던 것이다. 부인이 처음에 치마 6폭을 보내왔는데 다산은 그것을 오려 4개의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남겨두었던 것이다. 뒤 늦게 남은 것을 찾고 보니 근년에 시집간 딸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지만, 몹쓸 병으로 4남 2녀를 잃고 이제 2남 1녀만 남았다. 그런데도 어찌하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 탈 없이 잘 살고는 있을까? 아버지 걱정하느라 맘 편히 지내기는 할까? 여린 딸의 모습이 끝도 없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옛날 어린 딸애가 무릎에 앉아 재롱을 피우던 귀여운 모습도 눈앞에서 사라질 줄 모른다. 딸애에게 그림을 하나 그려주자. 좋은 글도 써서 보내주자. 마지막 남은 치마조각에 글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일전에 두 아들에게 보내려고 썼던 마음에 더 보탠 사랑으로 줄줄이 이어갔다.
오늘 따라 그윽한 차 향기가 초당(草堂)으로 오르는 어귀부터 뒷산 오르막까지 한 무더기처럼 감싸며 흐른다. 바람 한 점이 휭 하고 매화나무 위를 흩고 지나자 청향(淸香)의 맑은 정기가 실리어 온다. 흩어지듯 어지러운 바람 속에서도 가지런한 매화향이 다산사경(茶山四景)에 베인 차향(茶香)과 어울려 주위를 향긋하게 달구어준다. 초가(草家) -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지금은 와가(瓦家)이지만 당시는 이름 그대로 초가(草家)였다. - 의 용마루는 한겨울의 모진 바람을 든든히 이겨낸 장한 모습으로 그것마저 주인을 닮아간다. 만감이 교차하던 다산은 봄을 그리기로 작정하였다. 음침한 어둠의 골짜기를 벗어나고픈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생동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활기찬 모습으로 길게 뻗어 내린 매화나무가지를 그리고 만발한 꽃을 그려 넣었다. 앞으로 빗겨 나온 가지에는 멀리서 훨훨 날아온 새 두 마리를 가지런하게 얹혀놓았다. 보기에도 너무 좋은 모습이 아니겠나. 하지만 그것이 다이다. 그 속에다 뭔 뜻인들 못 집어넣겠는가마는 여기까지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표현의 끝이 되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새는 있으나 아직 둥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그곳에다 제집을 꾸미고 가꾸라는 의미를 두었다. 딸애의 처지를 생각하며 안타까운 아비의 심정을 그렇게 그렸다. 새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붉은 색 부리를 가진 꾀꼬리다. 두 마리 꾀꼬리는 몸을 포개고 한 가지에 앉아있다. 한 녀석은 먼 데를 보고 있고, 한 녀석은 고개를 돌려 제 짝과 눈길을 맞추려고 한다. 사랑이 듬뿍 담긴 눈길을 주는듯하다. 다산의 심정일래라.
"아가야! 네가 보고 싶구나. 오늘따라 더욱 눈앞에서 아른 거리는 네 모습에 아쉬움만 커지는구나. 그렇지만 아비는 너와 함께 지낼 수가 없는 처지가 되어 너무나 안타깝고 미안하구나. 아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려마. 하지만 매화나무를 찾아온 저 새들처럼 함께 지내고 싶은 소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지 않겠느냐. 힘들지만 어려움을 이겨내자꾸나."
보고 싶은 마음과 앞날의 희망을 말하고, 당부하고 싶은 말을 그렇게 건넸다.
"너도 지금은 한사람의 아내이자,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가 되었다. 매사에 앞서 형제간에 우애를 먼저 생각하고, 가족 간에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림위에 예쁜 매화꽃을 많이 피웠다.
그 자리에서 알찬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리듯 네 집안에 기쁘고 즐거운 일이 언제나 가득할 것이라고 끝을 맺어 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딸에게 그림을 그려주며 다산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여느 어버이와 다름없는 진솔한 마음으로 꽃이 만발한 매화나무와 꾀꼬리 두 마리를 그려내고, 그 아래에 아버지의 애잔한 마음을 담아 낸 시(詩)를 써 넣었다.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樂爾家室)'는 글귀에도 자식에 대한 걱정은 물론이고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히 배어있다. 이것이 매조도(梅鳥圖) 속에 담겨있는 다산의 애틋한 부성애의 모습이다. 어떤 명화가 이보다 더 감동을 주겠는가? 농익은 솜씨로 그려진 것이 아니면 어떠한가. 부모자식 간의 정이다. 뭇 생물들은 삶에 필요한 근본조건들만 채운다면 이미 있는 것들이 그저 반응하는 대신 스스로 자유롭게 자기세계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이것은 진화를 생명의 무기로 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그보다 더 특별한 것이 있다. 문화와 사회체계라는 독특한 인간만의 질서를 세우고 스스로를 깨닫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이 독특한 인간의 연(緣)과 정(情)을 만들었을 것이다. 부모 되고 자식 되는 것이 일만 겁의 인연이다.
다산은 1801년부터 귀양살이를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겨우 40세 때였다. 한 참 무르익은 경륜이 세상을 향해 날개를 활짝 펴고 나가려 할 때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57세가 되던 해인 1818년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겨우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한 많은 18년간의 유배생활은 참으로 모질고 험한 긴 세월이 아닐 수 없다. 자유의사대로 행동할 수 없는 영어(囹圄)의 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아픔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레 행해야 할 당연하고 평범한 일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상실감과 무력감이다. 가정의 대소사를 눈앞에 두고도 손 놓고 하늘만 쳐다봐야하는 심정이란 수없이 겪었던 어떠한 고통보다도 가슴을 저리게 하는 아픔을 주었을 것이다. 무엇하나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기막힌 현실은 그를 더욱 괴롭혔을 것이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너무나 큰 인간적인 괴로움이었다. 매조도는 어버이의 가없는 사랑의 마음과 못다 한 자괴지심(自愧之心)을 한데 묶어 붓으로 표현한 것이다. '붓의 쓰임새가 단조롭고 먹빛과 채색의 변화도 구사하지 못했건만 화면 전체에 감도는 눈물겨운 애잔함이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고 한 어느 평론가의 감상은 인간적인 진솔함에 높은 가치를 둔 상찬(賞讚)의 평(評)이 아닐까 한다. 참고로 두 아들에게 하피첩(霞帔帖)을 만들어 보낸 해가 1810년이고, 위 매조도(梅鳥圖)는 그 보다 3년 후인 1813년에 그렸다.
다산 정약용이 아무리 강직한 성품과 곧은 의지를 지녔다고 해도 그도 인간인 이상에는 좌절과 시름은 언제나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신유사옥과 같은 정변에 연류 되었다면 이만저만한 큰 일이 아니다. 다산은 친인척 대부분과 동문 선후배를 비롯하여 많은 벗까지도 거의 잃는 비극을 당하였으며, 그들 중에는 기껏 몇 사람만이 겨우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가 있었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처음 한 동안은 세상을 원망하며 자포자기나 다름없는 자학(自虐)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허송세월하던 다산에게 조그마한 골방을 내주며 기거케 해주었던 밥집노파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부모의 은혜는 같은데 왜 아버지만 소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그렇지 아니한가?' 생의 뿌리를 묻는 노파의 물음에 세상을 기피하려고 했던 다산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지극히 정밀하고 미묘한 뜻이 밥을 팔면서 세상을 살아온 밥집 주인노파에 의해서 겉으로 들어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크게 깨닫고는 흐트러졌던 그 동안의 자신을 크게 탓하며 이후부터는 매사를 경계하며 흐트러짐이 없도록 살았다. 물론 백성에 대한 애휼(愛恤=불쌍히 여기어 은혜를 베풂)한 마음이 가득한 그의 품성(天稟)으로 보아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오묘한 하늘의 섭리를 누구라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무지렁이 밥집노파를 그곳에 두어 다산을 다그쳐 일깨우게 하여 이 민족이 큰 복을 받게 만들 줄이야.
매조(梅鳥)나 시구(詩句)를 부분적으로 이해하다보면 애잔한 어버이의 사랑을 듬뿍 담고 있는 시상(詩想)에 깊이 젖어들게 되지만, 전체적으로는 현실을 인정하고 주어진 여건에 맞추면서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른 감을 느낄 수가 있다. 다산이 황량한 강진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지 얼마간은 그 동안 벌어진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에 넋을 잃고 살았으며, 때때로 사무친 원한에 견디기 힘들 때도 있었다. 더구나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앞일의 불확실성은 또 다른 두려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변에 의해 한 때의 불리함으로 곤궁한 처지까지 빠졌지만, 외부에서 누군가가 틀림없이 자신을 돌이켜 세워줄 것으로 믿었으며, 확신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빨리 풀려나기만을 기다렸다. 그것이 또한 세상의 바른 이치이니 오래지 않아 반드시 바로잡힐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세월이 유수같이 흐르면서 모두 다 부질없다는 것임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세상인심 여반장에 안절부절 못하고 못내 아쉬움뿐이다. '길게 뻗은 난초줄기 / 저 산비탈에 자라는데 / 아름답다 우리 벗아' 그렇게 읊다가도, '길게 뻗은 난초줄기 / 저 언덕에 자라는데 / 지금 세상 보통사람'만 남았으니 옛날을 생각한들 안타까울 뿐이다.
두보(杜甫)의 시름처럼 변해가는 인정머리에 '손을 뒤집으면 구름이 되고 다시 뒤집으면 비가 되니, 어지럽고 경박한 세상인심 헤아릴 길 없구나.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관중과 포숙의 어렸을 적 사귐을! 요즘 사람들은 우정을 저버리기를 흙 버리듯 하네.(飜手作雲覆手雨 / 紛紛輕薄何須手 / 君不見管鮑貧時交 / 此道今人棄如土 / 「貧交行」)'하고 한탄한들 무엇 하나? 그렇게 세상을 탓하던 와중에 만난 인연이 모든 것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유난히 사이가 돈독했던 백련사(白蓮社) 주지인 혜장선사(惠藏禪師)⒁와 《주역(周易)》을 놓고 사람의 운명에 대하여 밤을 새며 논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다담(茶談)을 나누며 한잔의 차로 심신을 달래며 달관의 삶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터득하게 되었다. 이태동잠(異苔同岑) - 지취(志趣=추구하는 목표)가 서로 같고, 의견이 일치하는 경지를 실천하자는 의미 - 에 산 하나를 경계로 두었지만 그것이 대수더냐. 복받친 기쁨으로 서로 얼싸안고 울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비로소 자연인이 되었다. 이제 와서 깨닫게 된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 후로 성급하게 굴지 말고 하늘이 진정으로 주는 때를 기다렸다.
시파와 남인을 송두리째 내치는데 성공한 벽파가 휘어잡은 조정은 언제나처럼 백성은 뒷전이었다. 또다시 당파 싸움으로 날을 새니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쑥을 캐네, 쑥을 캐네(采蒿采蒿) / 쑥이 아니라 그저 약초라네(匪蒿伊莪) / … / '
겨울이 끝나고 태산보다 높은 보릿고개가 앞을 가로막았다. 헐벗고 굶주린 아낙네가 어린애를 등에 업고 들에 난 쑥이라도 캐서 연명하려한다. 초근목피마저 동이 나고 오직하나 기대야 하는 한 길 뿐인 땅은 메말라 비틀어져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길에도 들에도 넘쳐나지만, 무심한 것은 하늘만이 아니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는 무엇인들 마다하지 않는다. 귀양 사는 처지에 가슴만이 메워질 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채호(采蒿)'라는 사언시를 지어 실상을 읊어보지만 무슨 소용이 닿겠는가. 보기에 참혹해서 살고픈 마음마저 없어진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어찌하여야 다스리는 자들이 비민보세(裨民補世=백성의 삶에 도움을 주고 세상을 바로잡는데 보탬이 된다는 뜻이다)의 길에 눈을 뜨게 만들 수 있을까? 그에게 주어진 시공(時空)은 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다.
'동생 울며 젖 찾아도(兒啼索乳) / 젖은 벌써 말랐어요(乳則枯萎) / 엄마가 제 손 잡고(母携我手) / 이 젖먹이와 함께(及此乳兒) / 저 산촌을 찾아가서(適彼山村) / 구걸해서 먹였지요(丐而飼之) / … / '
긴 여운만이 귓가를 멍하게 울릴 뿐으로 다시 읊어보는 속은 지독한 아픔만을 남겼다. 백성에게 이로움을 주는 책을 쓰자. 분노를 삭이며 백성을 위하여 머리끈을 동여매었다. 다산의 저술(著述)은 그렇게 백성을 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옛날 한(漢)나라의 사마천(司馬遷)이 유교의 지나친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화식열전(貨殖列傳)》을 통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익을 보여주고 《맹산군 열전(孟嘗君列傳)》에서 올바르게 부(富)를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듯이 실학(實學=實事求是之學)의 집대성에 온 힘을 쏟았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에 달하는 저술삼매경에 빠진 것이다. 인생의 험조(險阻=험하고 막혀 있음)를 바르게 보고 깨달은 이가 다산이다. 우리의 근기(根器)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우러르고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다산이 추구하려던 나라에는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하였을까? 그는 정치가로서는 입지를 세우지도 이상을 펴지도 못하였지만, 시대정신을 잃지 않은 개혁자로서는 큰 줄기를 세웠음에 틀림이 없다. 그가 태어난 18세기중엽은 오로지 신만이 존재하는 신적세계에 갇혔던 암흑시대를 완전히 걷어내고 진정한 하늘의 광명을 되찾아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개개인의 권리가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자유시대로 향하여 나아가려는 투쟁의 시기였으며, 바야흐로 과학의 혁명적 발전에 힘입은 산업혁명(産業革命,Industrial Revolution)이 시작되며 제 2의 물결이 기치를 올리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 산업혁명은 아놀드 J.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AD 1889∼1975)가 1760∼1840년의 영국경제발전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 그 시대는 전 세계에 걸쳐 거대한 개혁의 물결이 창도(漲濤)처럼 일어나 각지로 전파되고 있을 때이다. 비록 동방의 한쪽 구석에 자리한 작은 나라이지만, 온 바다가 크게 요동을 칠 때에 그 파도가 닿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다만 시대조류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게끔 한 인순(因循)과 고식(姑息)을 탓할 뿐이다. 다산은 시대를 앞서가는 깨인 사람이었다. 인간 하나하나가 지니고 있는 존재의 가치와 당위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천부의 권리임을 인지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빼어난 기운(秀氣)을 가진 우수한 능력자의 등용에 신분이란 굴레에 구애되지 않아야 한다는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모든 패악은 특정신분의 권력을 무한이 인정하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직시하고 특권층에 대한 적절한 통제를 통하여 이를 바로 잡아야함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 관념론인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만을 제일로 추구하는 주자학파와는 대별되는 주장으로 새로운 질서가 지닌 혁신정책은 기득권 세력과 융합할 수 없었으며, 이는 정책적 충돌로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실용주의는 정치적 실험에서 패배로 끝나며 빛을 잃고 말았다.
다산의 행적을 들여다볼수록 여러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역사 속에 진심으로 백성을 위하여 '한 끼 식사에 열 번 일어선다.(一饋十起)'는 우(禹)임금의 덕망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와 버금가는 지도자가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그와는 반대로 만물은 극(極)에 달하면 쇠퇴하게 된다는 물극즉반(物極則反)이란 하늘의 이치조차 모르고 주어진 영광을 지워진 굴레로 만든 어리석은 지도자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혹시나 그들의 탐욕 때문에 받들어져야할 백성이 오히려 끼니마저 걱정해야했던 기막힌 적은 없었을까? 그리고 묵묵히 당할 수밖에 없었던 백성으로서는 어느 곳을 쳐다봐야만 했었을까? 우리는 복 받은 백성일까? 다산이 유배생활 18년 동안에 뼈저리도록 보았던 현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혹시나 아닐까? 사마천은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 《老子》「道德經 第80章」)의 의미를 인용하여 다스리는 자를 논하며 백성을 대하는 몇 가지를 말했는데, 그 첫째가 백성의 마음을 읽고 그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며, 이익을 얻게끔 하여 다스리는 것이 다음이고, 그 다음은 가르쳐서 깨우쳐 주는 것이고, 아래로는 법을 내세워 강제로 규제하는 것이고, 가장 못나게 하는 정치는 백성들과 싸우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 시대의 어느 위정자들도 비켜갈 수 없는 난제이지만, 최소한 백성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권한을 위임받은 자의 기본자세가 아닐까.(17) '백성은 가까이 할지언정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18)'고 한 민본(民本)사상이나 '백성이 제일 귀하고, 나라가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19)'고 하는 민위귀(民爲貴)사상도, 그것이 베푼다는 시혜(施惠)의 의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한은 다산의 평등주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진정한 가치가 된다.
후황이 아름다운 나무에 덕성(德性)을 내리니
하늘과 땅의 정기를 흠뻑 받은 경사스러운 나무이어라.
촘촘한 이파리는 싸락눈과 싸우면서 겨우내 푸르고
백설이 휘날리는 산중(山中)의 바위골짜기에 서있는
꿋꿋한 절조(節操)를 어찌 아끼지 않겠는가. 뜻이 굳고
마음은 너그럽고, 욕심이 없어 바라는 것이 없으니
세태에 굴하지 않는 청빈(淸貧)이 누리에 빛난다.
오늘도 청향(淸香)은 언제나처럼 유유히 산야를 덮는다.
세상의 온갖 잡스런 냄새를 섞어내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차향은 앞서거니 하면서 매화향과 더불어
초당을 감싸며 백련사 가는 길까지 온 산을 감돌아 흐른다.
옛날의 한 각에 그곳에 머물렀던 의인이 간절히 바라봤던
앞마당 매화가지에는 올해도 꽃망울이 주렁주렁 맺었으니
그때의 종다리 울음소리 들을 날도 그리 머지않았구려.
* 후황(后皇) : 황천후토(皇天后土)의 줄인 말로 천신과 토신
* ⑶
* ⑷ 흑산도로 유배된 형 정약전(丁若銓, AD 1758∼1816)을 향한 안타까움은 끝이 없었다. 다산이 후일에 천일각(天一閣) -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에서 따왔다. - 이란 정자가 세워진 만덕산(萬德山) 한 자락 비탈진 기슭에 홀로서서 눈앞으로 흐르는 구강포(九江浦) 강물에다 그리움을 수도 없이 실어 보냈다. 굽이굽이 아홉 구비 돌고 도는 강물이 너무나 느린 것 같아 저 멀리 탐진강 하구에 들고나는 갈매기가 부럽기까지 했다. 그동안 실어 보낸 그리움은 어찌 되었을까? 강진만을 내려다보며 눈물짓던 그때 일이 떠올려져 이슬지게 한다. 더구나 유배에서 풀리기 2년 전에 돌아간 형에 - 모진 유배생활 16년째 되던 해인 1816년에 흑산도 외진 곳에서 사망했다. - 대한 절절함은 무엇을 가져온들 매울 수가 있었겠는가.
* ⑸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 :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난다.'는 고사성어이다. 《사기(史記)》에는 위(魏)나라의 문후(文侯)가 재상을 임명하기 위해 이극(李克)에게 자문을 구하는 내용이 있다. 문후가 이극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과인에게 '집안이 빈한하면 어진 아내를 그리게 되고, 나라가 혼란하면 훌륭한 재상을 그리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자(成子)와 적황(翟璜) 둘 중에 누가 적합하겠습니까?①"
이극은 다섯 가지를 살펴 이를 짚어보면 적임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충언한다.
"평소에 지낼 때는 그의 가까운 사람을 살피고, 부귀할 때에는 그와 왕래가 있는 사람을 살피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그가 천거한 사람을 살피고, 곤궁할 때에는 그가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어려울 때에는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살피십시오.②"
위나라의 재상으로 임명된 사람은 비록 문후의 동생이었지만 어진 마음을 가진 성자(成子)였다. 그는 평소에도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잘 살피고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자신의 소득 중에 자신의 식솔들을 위한 극히 작은 일부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보탰을 만큼 백성들을 살폈다. 피폐해진 나라살림과 백성의 궁핍한 삶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편이냐 아니냐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저돌적인 인물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 가려 쓸 줄 알고, 공(功)을 내세우기보다는 험한 곳과 힘든 것을 마다않고 백성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줄 아는 어질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 필요하다. 물론 어려운 가정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막중함이다. 그러므로 힘들수록 내자가 현명하여야 흔들리지 않는다.
- ① 《史記》「魏世家」, "先生嘗敎寡人曰 '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 今所置非成則璜, 二子何如?"
논자 註: 굴원(屈原)의 시(詩)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집이 그리워 맑은 밤에는 서성이며(思家淸宵立) / 형제생각에 낮에도 졸고 있네(憶弟白日眠) / 집이 가난하면 현명한 아내가 생각나고(家貧思賢妻) /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이 생각나네(國亂思良相)'의 시구의 한 부분과 동일하다.
- ② 《史記》「魏世家」, '居視其所親, 富視其所與, 達視其所擧, 窮視其所不爲, 貧視其所不取, 五者足以定之矣, 何待克哉!'
* ⑹ 하피(霞帔=노을치마) : 하피는 조선시대 왕실의 비(妃)나 빈(嬪)들이 입던 옷이다. 아내 홍씨가 보낸 치마가 붉은색이 노랗게 변한 것을 빗대어 귀한 상징인 하피라고 했다. 이를 잘라 가계첩(家誡帖)을 만들고 안개 하(霞)자에 치마 피(帔)자를 써서 하피첩(霞帔帖)이라 했다. 다산은 한 살 연상의 홍씨와 15세에 성례한 이후에 아홉의 자녀를 두었으나 2남 1녀만을 남기고 가슴에 묻어야 했다. 그러니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귀양 온 처지에 직접 훈육할 기회조차 갖지를 못했으니 얼마나 애가 탔겠는가. 아마도 부인에게는 그것이 크게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하피첩에는 '너희에게 평생을 살아가는데 재물보다 소중한 두 글자를 주겠다. 한 자는 勤이요, 또 한 자는 儉이다. 무엇을 근이라 하고 무었을 검이라 하는가?' 이러한 내용으로 시작하여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새겨야 할 많은 글들을 절절한 문장과 시로 썼다. 앞부분에 나오는 오언시(五言詩) 한 수(首)이다.
病妻寄敝裙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보내오니
千里託心素 천 리 먼 길 애틋한 정을 담았네
歲久紅已褪 오랜 세월에 붉은 빛이 다 바래어
悵然念衰暮 만년에 서글픔 가눌 길이 없구나
裁成小書帖 마름질로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
聯寫戒字句 자식을 일깨우는 글을 적는다
庶幾念二親 부디 어버이 마음을 잘 헤아려서
終身鐫肺腑 평생토록 가슴깊이 새기려무나
* ⑺ 정찬주 著, 2006, 《정찬주의 茶人기행)》
다산사경(茶山四景) : 다산초당에는 일경인 초당 왼편 뒤쪽으로 다산이 정석(丁石)이란 글자를 직접 쓰고 새겼다는 바위와 초당 뒤쪽에 이 또한 다산이 직접 팠다는 샘인 이경인 약천(藥泉)과 초당 바로 앞뜰에 놓여있는 삼경인 넓적하게 생긴 다조(茶竈, 차부뚜막)와 제자들과 작고 큰 돌을 공들여 다듬어 간결하게 쌓아 만든 초당 옆의 연지(蓮池)를 합해서 사경이라 부른다. 이에는 각각마다 다산이 지은 시가 전해온다. 정석(丁石,石屛), 약천(藥泉), 다조(茶竈),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연지석가산은 연못 가운데에 있는 작게 만든 인공 섬이다. 돌은 다산이 귀양 온 이듬해에 주위사람들과 농어 낚시에 갔다가 그곳에 바닷물에 침식한 기이하고 이상스런 돌이 많아 배에 실어왔다. 뒤에 그것으로 석가산을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정석(丁石)
竹閣西頭石作屛 죽각 서편바위가 병풍 같으니
蓉城花主己歸丁 부용성 꽃 주인은 벌써 정씨에게 돌아왔네
鶴飛影落苔紋綠 학이 날아와 그림자 지듯 이끼무늬 푸르고
鴻爪痕深字跡靑 기러기 발톱 흔적처럼 그자는 이끼 속에 뚜렷하다
米老拜時徵傲物 미로처럼 바위를 경배하니 외물을 천시한 증거요
陶潛醉處憶忘形 도잠처럼 바위에 취했으니 제 몸 잊은 거을 알리라
傅巖禹穴都蕪沒 부암과 우혈도 흔적조차 없어졌는데
何用區區又勒銘 무엇하러 구구하게 명을 새기리오
* 부용성(芙蓉城) : 신선이 산다는 성(城). 석만경(石曼卿), 정도(丁度), 왕자고(王子高)의 고사(故事)가 있다.
* 귀정(歸丁) : 소동파(蘇東坡)의 시(詩)에 부용성은 석씨(石氏)도 주인이고, 정씨(丁氏)도 주인이라 했다. 다산(茶山)이 이것을 인용해 정석(丁石)이라 바위에 새겨놓고, 이제는 부용성 같은 이곳에 다산이 와 있으니 정씨인 자기에게 주인의 권한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 학비(鶴飛) : 중국 한나라 때 요동사람 정령위(丁令威)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가 천 년 뒤에 학이 되어 고향인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 위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는데, 마침 한 소년이 학을 쏘려고 하였다. 이에 학은 공중을 배회하며 시 한 수를 읊조리고 높이 날아 사라졌다. '새야! 새야! 정령위야! 집 떠난 지 천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옛날 그대로이나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 어찌 선도를 배우지 않아 빈 무덤만 총총한가!(有鳥有鳥丁令威, 離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塚累累)' 도연명(陶淵明)의 《수신후기(搜神后記)》에 실려 있다. 화표주는 궁성이나 성곽 등의 출입구나 무덤 앞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팔각기둥을 세우고 꼭대기에 둥근모양의 머리를 얹혀 놓는다.
* 홍조(鴻爪) : 눈과 진흙에 기러기의 발톱을 찍어놓고 다시 올 때의 목표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 인적(印跡)이 소멸되어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바위에다 丁石이라고 새겨놓았으니 흔적이 깊이 남아있다는 뜻으로 다산이 쓴 뜻이다.
* 미로(米老) : 미원장(米元章; 중국 宋의 명필)이 바위에 절을 하고 장인(丈人)이라고 불렀다.
* 외물(外物) : 내 밖에 있는 사물(事物)
* 도잠(陶潛) : 도연명이 살았던 율정(栗呈)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항상 취하여 그 위에서 잠이 들었기에 취석(醉石)이라 이름 했다.
* 부암(傅巖) : 우(虞)나라와 괵(虢)나라 사이에 있는 땅이름. 은(殷)나라의 현상(賢相) 부열(傅說)이 암중(巖中)에 은거하여 서마형인(胥靡刑人)과 함께 도로를 수축(修築)했다고 한다. 《孟子》「告子 下 / 第 15(天將降大任於是人)章」에 '부열(傅說)은 성벽 쌓는 틈에서 등용되었다.(傅說擧於版築之間)'고 그때 일을 언급하고 있다.
* 우혈(禹穴) : 대우(大禹)가 바위에 굴을 파고 살았던 곳.
다산은 글을 새긴 후에 그날의 소회를 적었다. '다산의 서쪽에 바위 병풍이 우뚝 솟아있다. 석정(丁石)이란 두 글자를 새기고 이름을 짓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름을 짓더라도 마멸하고 이름을 짓지 않더라도 오히려 크게 울리기도 한다. 이름을 지어도 마멸되는 것이라면 비록 이름을 짓는다 하더라도 홀로 특별히 남아 있겠는가? 이름을 짓는 것과 이름을 짓지 않는 것은 차이가 없다.(茶山之西石屛蒼然 刻丁石二字反不名何 名之天湮雖不名猶轟 名之旣湮雖名能獨秀乎 名與天名无與也.)'
약천(藥泉)
玉井無泥只刮沙 옥 같은 우물에 개흙은 없고 다만 모래만 깔렸으니
一瓢㪺取爽餐霞 한바가지 떠 마시면 찬하인 듯 상쾌하다오
初尋石裏承漿穴 처음엔 돌 틈의 승장혈을 찾았는데
遂作山中煉藥家 도리어 산중에서 약 달이는 집이 되었네
弱柳蔭蹊斜汎葉 여린 버들 길을 덮어 빗긴 잎이 물에 떠 있고
小桃當頂倒開花 이마에 닿은 작은 복숭아 거꾸로 꽃을 달고 있네
消痰破癖功堪錄 담 삭히고 묵은 병 낫게 하는 약효가 기록할 만하니
餘事兼宜碧磵茶 틈날 때에 길어다 벽간차 끓이기에 알맞다오
* 㪺 : 뜰 구
* 찬하(餐霞) : 《남사(南史)》에 신선은 밥을 먹지 않고 안개를 먹고산다고 했다. 《남사》는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남조(南朝)인 남송(南宋)∙제(齊)∙양(梁)∙진(陳) 4왕조(王朝)의 역사서로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을 시작하여 17년간의 각고 끝에 《북사(北史)》를 더해 아들이 유지를 완수하였다.
* 승장혈(承漿穴) : 아래 입술 밑 가운데 움푹 팬 곳. 《옥선겸소보(王先謙疏補)》에 입아래(口下)가 승장(承漿)이니 승수장지(承水漿地)라고 했다.
* 석간차(石磵茶) : 《국사보(國史補)》에 '검남(劒南)에 몽호정석화(蒙豪丁石花)가 있고, 호주(湖州)에 고저자순(顧渚紫筍)이 있고 협주(峽州)에 벽간명월(碧磵明月)이 있다'고 했다. 차(茶)의 이름이다. 중국 다도의 개조(開祖)로서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육우(陸羽, AD 733∼804)는 《다경(茶經)》「八之出」에서, 전국의 중요한 차산지를 산남(山南), 회남(淮南), 절서(浙西), 절동(浙東), 검남(劍南), 검중(黔中), 강남(江南), 영남(嶺南)의 8개 차구(茶區)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또한 각 산지에서 생산되는 차의 품질을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빼자니 아깝고 넣자니 계륵(鷄肋) 같았는지 더없이 낮다는 뜻으로 우하(又下)를 하나 더 두어 네 등급으로 분류하였으며, 각기 상세한 품평까지 곁들여 설명하였다.
호주(湖州)는 지금의 절강성 호주시 근방이며, 고저산(顧渚山)은 호주의 장흥현에 있다. 절서(浙西)차구에 속했다. 협주(峽州)는 지금의 호북성 의창시 근방이다. 명월에 대해서는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명월산(明月山)은 파동현의 서북쪽 40리쯤에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차 이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보(茶譜)》에 따르면 '협주에 있는 소강원∙명월∙벽간료(碧磵寮)∙수유에서는 모두 차가 난다.'고 소개하였으며, 그중에서는 벽간차가 가장 좋다고 품평을 올렸다. 협주는 산남(山南)차구에 속했다. 검남차구(劍南茶區)는 사천성(四川省)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성도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사방에 산재되어 있다. 육우는 성도 북쪽의 팽주(彭州)의 것을 상품으로, 면주(綿州)와 촉주(蜀州)의 것을 차품으로, 공주(邛州)와 아주(雅州)와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노주(瀘州)의 차를 하품으로, 미주(眉州)와 한주(漢州)의 차를 우하품으로 평하였다. 8대 차구(茶區)는 당시의 행정구역을 참조하여 나눴다.
다조(茶竈, 차부뚜막)
靑石磨平赤字鐫 푸른 돌 평평히 갈아 붉은 글자 새겼으니
烹茶小竈草堂前 차 끓이는 조그만 부뚜막 초당 앞에 있구나
魚喉半翕深包火 반쯤 다문 고기 목 같은 아궁이엔 불길 깊이 들고
獸耳雙穿細出煙 짐승 귀 같은 두 굴뚝에 가는 연기 피어나네
松子拾來新替炭 솔방울 주어다 숯 새로 갈고
梅花拂去晩調泉 매화꽃잎 걷어내고 샘물 떠다 더 붓네
侵精瘠氣終須戒 차 많이 마셔 정기에 침해됨을 끝내 경계하여
且作丹爐學做煽 앞으로는 단로를 만들어 신선 되는 길 배워야겠네
* 어후(魚喉) : 차 끓이는 부엌모양을 비유한 것
* 수이(獸耳) : 차 끓이는 부뚜막의 굴뚝 모양을 비유한 것
* 침정척기(侵精瘠氣) : 《다음서(茶飮序)》에는 체증을 풀어주고 막힌 것을 터주는 것은 차의 이로움이고, 정신을 쇠하고 기운을 파리하게 하는 것은 차의 해라고 했다.
* 단로(丹爐) : 도홍경(陶弘景)이 단약(丹藥)을 화로에 달여 만들었는데 색(色)이 서리와 눈 같고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져 신선이 된다는 고사(故事)속의 화로
* 육우가 지은 최초의 다서인 《다경(茶經)》「二之具」에 다조(茶竈)에 대해 간단한 삽화를 그리고 '부뚜막은 굴뚝이 없어도 된다(竈 : 無用突者)'고 간략하게 소개했다. 만당(晩唐, AD 836∼907)의 시인이었던 육구몽(陸龜蒙)은 이런 모습을 보고 '굴뚝도 없이 가벼운 안개를 품은 듯(无突抱輕嵐)'하다고도 감상을 말하기도 했다. 같은 시대의 피육(皮陸) 2대 시인이라 불린 피일휴(皮日休)도 다조(茶竈)라는 시에서 '부뚜막을 바위 곁에 새우고, 불쏘시개를 피우니 송진 냄새 그윽하다.(竈起岩根芳, 薪燃松脂香)'고 임시로 만든 부뚜막을 보고 읊기도 했으며 연료로는 솔가지를 썼음을 설명하고 있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沙湾怪石聚爲峯 갯가의 괴석 모아 산을 만드니
眞面還輸飾假容 진짜 산보다 만든 산이 더 멋있구나
巀嶭巧安三級塔 가파르고 묘하게 앉힌 삼층탑 산
谽谺因揷一枝松 오목한 곳 모양 따라 한 가지 소나무 심었네
蟠廻譎態蹲芝鳳 서리고 휘감긴 묘한 모습 돌을 쭈그리고 앉힌 듯
尖處斑文聳籜龍 뽀족한 곳 얼룩무늬 죽순이 치솟은 듯
復引山泉環作沼 그 위에 산 샘물을 끌어다 빙 둘러 만든 연못
靜看水底翠重重 물 밑 고요히 바라보니 푸른 산 빛이 어렸구나
* 지봉(芝鳳) : 돌
* 탁용(籜龍) : 죽순
* ⑻ 매화의 가지를 갈필(渴筆; 붓에 먹물을 슬쩍 스친 듯이 묻혀서 쓰거나 그리는 기법)로 처리한 것은 겨우내 북풍한설을 견뎌낸 꺼칠함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나, 가지에 몽우리가 더 많고 꽃이 듬성듬성 피어난 것으로 봐서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만개한 꽃잎임에도 핍진(乏盡)함이 느껴지는 것에는 아직은 표현력에 솜씨가 서툰 것을 숨길 수는 없다. 물론 흉까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인여기화가(文人餘技畵家)일 뿐이다. 다산의 산수화가 여러 점이 보이는 데, 그곳에서도 같은 필법임을 봐서는 조선중기 이후의 주된 흐름이었던 남종화(南宗畫)의 화풍처럼 학문과 교양을 두루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으로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현이라는 새로운 시도에 열중하였는데, 물론 경지에까지 오르지는 못했어도 그런 영향을 충분히 받았을 것이다.
* ⑼ 《詩經,小雅》에 「상체(常棣=아가위나무)」란 제목의 노래가 있다.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잔치하면서 덕담을 주고받으며 부르던 아름다운 노래다. 8章에 章4句로하여 총32句로 구성되었으며, 마지막 장 일, 이구에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그대 처자를 즐겁게 해주어라.(宜爾室家 樂爾妻帑)'에서 용사(用事; 한시를 지을 때, 옛날의 뛰어난 글들에서 표현을 이끌어 쓰는 일)했다. 이 시는 《중용 15장》에도 인용되었으며, 중용의 도는 노래의 내용처럼 반드시 일상생활의 가까운 데서부터 지켜 나가야함을 밝히고 있다. '도(道)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다.(道不遠人 / 《중용 13장》)'고 하여, 도덕의 근본원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멀리 갈 곳도 없으며, 가까운 일상생활을 돌아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하였음을 상기한다.
* ⑽ 움베르또 마뚜라나 / 프란시스코 바렐라 共著 / 최호영 譯, 2007, 《앎의 나무(Der Baum der Erkenntnis)》
* ⑾ 안진호 著, 1931, 《釋門儀範》下
* ⑿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함은 자신에게 엄격함이다. 다산은 극(極)에 달하기보다는 아(亞)를 취함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살았다. 첨(尖)이 아닌 아쉬움이 남는 위치이지만 둔(鈍)에도 머물 줄 아는 홍연(洪淵)의 도량이야말로 화란(禍亂)을 물리는 지혜로서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다. 인간이 머무를 때 머무르고, 겸양하게 살면서 자족(自足)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아주 평범하지만 삶의 진정성을 찾게 하는 바른길이다. 그런데 강직함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지조(志操)일 것이다. 불의한 형편을 보고도 나서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님에도 시련에 맞설 인내와 용기가 없다면 신념이 결여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과 융화되어 살면서도 세속 탁류에 결연하고(和而不流)',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고, 털끝만큼의 사심도 없는 공평무사(中立而不倚)'할 수 있는 용기도 신념의 표출이며, 자신을 향한 강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자신의 이름을 바로 세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용기를 행하는 방법에는 처한 상황이나 가치에 달렸음은 불문가지이다. 역사의 예를 보더라도 충신∙현자라도 그렇다.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인 원수지간임에도 불구하고 대도(大道)를 위하여 주(周) 무왕(武王)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깨닫게 해준 은(殷)나라의 기자(箕子)는 천하를 생각하여 자신의 욕됨을 가벼이 보았던 인물이다.① 나라의 존망이 풍전등화임에도 들리는 소문에는 사욕에만 급급한 간신들만 들끓을 뿐이니, 어찌할 수 없는 강남의 유배지에서 비통한 마음으로 방황하다 기원전 278년 5월 5일 호남(湖南) 장사(長沙) 부근 멱라수(汨羅水, 湖南 湘水의 지류)에 투신하여 장강어(葬江漁)가 되어 66세로 일생의 한을 끝낸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은 그것으로 자신을 밖으로 내보인 것이다.② 비록 화(禍)를 자초하는 불공(不恭)처럼 보였지만, 오로지 진불은현(進不隱賢)의 자세로 최선을 다해 국사를 보았던 노(魯)나라의 유하혜(柳下惠)는 끝까지 속으로 삭이기만 했다.③ 이것이 모두 자신에게 엄격함에서 나온 것이다.
- ① 《尚書》「洪範」
- 기자(箕子) : 성은 子氏, 휘(諱)는 수유(須臾), 서여(胥餘)이다. 은(殷)의 14대왕 무을(武乙)의 손자로 17대 주왕(紂王)의 숙부다. 기(箕)땅에 식읍(食邑)을 봉(封)하여 기자라 칭했다. 주왕이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날로 포악해지자 간하다가 오히려 노예 신분이 되기도 했다. 왕을 버리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신하의 도리로서 그럴 수 없다하며 거짓 광인이 되어 갖은 모욕을 다 받았다. 기자가 54세 되던 해에 주(周) 무왕(武王)이 주왕을 토멸하고 기자에게 천도를 물었을 때에 대도가 장차 암혼(暗昏)에 빠질까 염려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 상서의 홍범에 있는 대우(大禹)가 정한 정치∙도덕의 아홉 가지 원칙)를 전수하였다고 후대의 기록에서 전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면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은 극악무도한 군주였다. 그러나 역사를 이해할 때에는 기록의 이면에 감춰진 내용까지도 올바르게 보고 판단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처지가 못 된다. 주왕이 패배자가 되고 나라마저 잃었다고 해서 악한 군주의 표본이 되는 것은 다르다. 역사는 오로지 이긴 자만이 쓰는 기록일 뿐으로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왕조를 바꾸는 역세혁명(易世革命)은 신하된 자가 자신의 군주를 배역(背逆)하는 반란임으로 대의명분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상서(尙書)》「탕서편(湯誓篇)」에서 성탕(成湯)이 하(夏)왕조의 걸왕(桀王)을 멸하고 상(商)을 개국할 때에 '내가 걸(桀)을 멸하려는 것은 천명(天命)에 의한 것이다.'고 만천하에 선언하고 주벌(誅伐)에 나선 것과 같이 그것이 대세를 얻는 길이기 때문이며 패배자를 더욱 구렁텅이로 몰아넣어야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명이란 덕(德)을 갖춤으로서 천명을 얻는 것으로 걸왕이 덕을 잃었으니 천명도 옮겨졌다는 논리다. 그것이 천명을 얻어 실덕(失德)을 방벌(放伐)하는 명분인 것이다. 실덕이란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로 그만큼 살기가 힘들어 원성이 높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때를 모른다던지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내란이 된다. 《주역(周易)》의 「혁괘(革卦)」에서도 이를 두고 혁명과 반란의 구별은 백성들의 신임 여부에 달렸으며, 따라서 중요한 점은 성공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라, 혁명이기에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정의한다. '혁명은 이미 때가 도래하고 뜻이 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후회가 없는 것이다.(革 己日 乃孚 元亨利貞 悔亡)'고 하여 당위를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때를 맞추는 것도 하늘의 뜻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은을 멸하고 주왕을 주살한 무왕의 행위는 정당하였을까?
《주역(周易)》「소과괘(小過卦)」의 육오효(六五爻)는 그에 대해 엄히 말한다. 무왕의 행위에 대하여 제후의 신분으로 천자의 신하였던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것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칭송하지는 않았다. 이는 주왕이 덕을 잃어 이미 구덩이 속에 빠져있음에도 때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힘으로 은을 정벌하고 주왕을 참살하였기 때문으로 이는 중용의 도를 벗어난 행위로 본 것이다. 그것은 과(過)한 것이 아니라 조금 모자란 것(小)이라는 의미로 무왕의 주(周)나라 태동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후대의 역사는 오로지 승자의 것이며, 언제나 과거의 잘못을 침소붕대 해서 기록해 놓음으로서 그렇게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주왕과 달기(妲己)에 얽힌 이야기도 틀리지 않는다. 주왕의 공적은 모두 지워지고 지나치게 음탕한 쪽으로만 과장하여 기록되었다. 춘추시대초기에 자공(子貢)은 공자와 주왕에 대해 토론하면서 후세사람들이 고의로 주왕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고 불평을 하기도 했다. 역사의 이치가 그렇다 이기면 왕이요, 지면 도적이 되는 것이 역사의 철칙이다. 숙부인 비간(比干)의 심장을 끄집어내어 구멍이 몇 개나 있었는지 보았다는 투의 허무맹랑한 얘기도 그렇다. 춘추시대 초에는 그저 '간언하는 비간을 죽였다.'는 정도였다. 그것이 시대가 흐르면서 살이 붙었다.
굴원은 비간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했고, 여불위의 문객은 심장을 도려내 죽였다고 했다. 사마천조차도 《사기(史記)》를 쓰면서 한 술 더 떠 주왕이 비간의 심장을 도려낸 것은 달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했다고 확대하여 썼다. 주왕하면 따라붙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나 포락지법(炮烙之法)은 주나라 문헌이나 춘추시대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전국시대에 들어오자 한비자(韓非子)가 느닷없이 '상아 젓가락' 얘기를 주왕과 접합시키면서 계속해서 나쁜 쪽으로만 커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의 대부분의 기록들도 이에 뒤질세라 그런 식으로 살을 붙이면서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그러나 주왕은 상당히 능력이 있었던 군주였다. 다만, 지나치게 주관만을 고집하고 당시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너무 소홀히 다루다가 실기하였을 뿐이다. 특히 미자(微子; 주왕의 형)를 너무 믿은 것도 대세를 그르친 원인이 되었다. 누가 형인 미자가 적국인 주의 무왕과 내통하고 그를 끌어들일 줄을 꿈에라도 생각이나 했겠는가. - 수없는 역사가 말하듯이 밖의 적보다는 안의 적이 더욱 치명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결과적으로는 후대에 오면서 좋은 소재꺼리가 되었을 뿐으로 문인들이 온갖 악행을 덧씌운 결과이며, 대부분은 초유의 억측과 상상력까지 동원하여 꾸민 것에 불과하다. 사직(社稷)을 끊어버린 자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언제나 냉혹하다. 그것은 승자의 기록만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 ② 《史記》「卷八十四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 굴원(屈原, BC 343∼278) : 이름이 평(平), 자가 원(原)이다.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 북방 50리쯤에 위치한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詩)에도 뛰어나 남방문학을 대표하는 초사(楚辭)의 대가로 그의 작품은 후에 한부(漢賦)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의 문학사에서는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유배지에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날이 5월 5일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날을 기리는 풍습으로 인해 단오절(端午節)이 생겼다. 중국의 문인들은 이 날을 시인절(詩人節)로 기념하여 그의 높은 시(詩)정신 또한 기리고 있다.
- ③ 《孟子》「公孫丑章句上 第九(伯夷柳下惠)章」
- 유하혜(柳下惠) : 춘추시대 초기에 노(魯)나라의 대부(大夫)로써 성은 전(展)에 이름은 획(獲)이고 자는 자금(子禽) 혹은 계(季)이다. 녹(祿)으로 받은 식읍(食邑)이 유하(柳下)이고 시호(諡號)가 혜(惠)다. 유하(柳下)에서 산다고 이를 호로 삼았으며, 문인들이 혜(惠)라는 시호를 올릴 만큼 현자로 추앙받았다. 유하혜는 《논어》「미자편(微子篇) 第2章」에서는 벼슬길에 초연한 사람으로, 8章에서는 일민(逸民=벼슬을 놓고 낙향했거나 은거하고 있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 기술되어 있다. 노희공(魯僖公) 26년(BC 634)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그는 사람을 제나라 진영으로 보내 그 군사들을 물러나게 했다. 능란한 변설과 밝은 예절로 이름이 높아 공자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또한 직도(直道)를 지켜 임금을 섬기고 진정한 화(和)를 이룬 사람이라고 해서 맹자에 의해 이윤(伊尹), 백이(伯夷), 공자와 함께 4대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 ⒀ 시류를 안타까워하는 노래이다. 의란(猗蘭)은 예쁜 난초이니, 진정한 벗을 찬미한다.(美友人也) 금란지교(金蘭之交)에서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其臭如蘭)'고 한 의미가 말하듯 난(蘭)은 좋은 친구를 말한다. 다산의 16수(首)의 사언시 중에 하나다. 三章 章六句로 구성되었다.
의란(猗蘭)
길게 뻗은 난초줄기 / 저 산비탈에 자라는데 / 아름답다 우리 벗아 / 덕을 지켜 반듯하다 / 다른 벗이 어찌 없겠냐만 / 그대 생각 간절할 뿐(蘭兮猗兮 / 生彼中陂 / 友兮洵美 / 秉德不頗 / 豈無他好 / 念子實多)
길게 뻗은 난초줄기 / 저 언덕에 자라는데 / 지금 세상 보통사람 / 지조 너무 빨리 변해 / 그대 생각 잊지 못해 / 이 내 가슴 안절부절(蘭兮猗兮 / 生彼中丘 / 凡今之人 / 不其疾渝 / 念子不忘 / 中心是猶)
길게 뻗은 난초줄기 / 저 쑥밭에 자라는데 / 메마르고 거친 포기 / 어느 누가 손질 할꼬 / 그대 생각 잊지 못해 / 이 내 가슴 애탄다오.(蘭兮猗兮 / 生彼蓬蒿 / 萎兮蓊兮 / 誰其薅兮 / 念子不忘 / 中心是勞)
다산이 인정의 덧없음을 빗대어 의란(猗蘭)이라 시제(詩題)를 붙이고 한탄하였음을 봤을 때에 당시의 시류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이(李珥) 이율곡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정공묘지명(文正公墓志銘)을 쓰며, '우러러 선생을 생각하건대 도덕적 업적은 이미 나라의 사서(史書)에 밝게 기록되어 있고, 퇴계(退溪) 선생께서 행장(行狀)을 쓰셨고, 재상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공(公)께서는 비문을 쓰셨거늘, 무슨 더 할 말이 있어 군더더기를 더할 것인가? 돌이켜 보건대 묘지명(墓志銘)을 이미 쓰기로 한 마당에 아무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선생의 세계(世系)와 경력, 자질, 학행, 업적, 후사(後嗣)를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선악과 화복(禍福), 운명의 성패를 논술하고자 하는데 묘지명(墓志銘)으로는 이것으로 족할 것이다.'고 하며, 그 지명(誌銘) 가운데에 다산이 애통해 하던 의란(猗蘭)을 거론하니, 화씨벽(和氏璧)은 박옥(璞玉=구슬의 원석) 속에 숨겨져 있어도 빛나고 있음이다. '動用周旋 規圓矩方 吾斯未信 韞櫝而藏. 猗蘭播芬 欲掩彌彰 觀國之光 乃賓于王.(요리 조리 살피며 기구 사용해 , 법도 맞춰 원과 네모 그리셨거늘 우린 믿지 못 하겠으니, 등용되지 못했어도 자신 감춘 이유를. 예쁜 난초 향 저 멀리 퍼지는데, 그 뚜렷함 감추려 애쓰셨지만 나라의 빛으로 환히 드러나, 마침내 임금 부름 받았더이다.)'
* ⒁ 다산초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흥사 경내에는 대종사(大宗師)이자 다성(茶聖)으로 칭송받는 초의선사(艸衣禪師)①가 거처했던 일지암(一枝菴)인 초옥이 있고, 서산대사의 부도를 가운데에 두고 초의선사와 혜장선사의 부도가 나란히 서있다. 유배생활 기간에 그렇게도 가까이 지내면서 시와 차를 이야기하고 불경과 유교의 경전을 깊숙이 토론했던 혜장선사의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은 다산이 지었다. 비문에는 처음 백련사에서 혜장을 만난 일화도 함께 적혀 있다. 지금까지 다산이 지은 비문이야 많지만, 별 탈 없이 세워져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혜장(惠藏, AD 1772∼1811)은 본디 해남출신으로 속성은 김씨이고, 법명이 혜장이다. 본디 호를 연파(蓮波)로 불렀으나 타협할 줄 모르고 자존심이 너무 강한 혜장에게 다산이 '자네도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 하고 충고하자, 혜장은 그때부터 호를 아암(兒菴)이라고 지어 불렀다. 혜장이 다산을 처음 만나 밤새 차를 마시며 서로가 《주역》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혜장은 입에서 구슬이 구르듯 물이 도도하게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다산의 깊이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밤이 늦어서야 혜장은 처량하게 탄식하였다. '산승(山僧)이 20년 동안 《주역》을 배웠지만 모두가 헛된 거품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구리요, 술 단지 안의 초파리 격이니 스스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이때 혜장은 34세, 다산은 44세였다. 강진으로 귀향을 온지 5년이다. - 혜장은 곡주를 무척 좋아했다. 40살이라는 짧은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술병이 도져 죽었다. - 혜장은 18년의 강진 유배생활에서 다산에게 큰 은혜를 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다산초당으로 옮기기 전에는 한때나마 강진읍내의 뒷산에 있는 고성사(高聖寺)에다 다산이 거처할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주었고, 차를 보급해주며 다산을 다인(茶人)의 길로 이끌어도 주었다. 혜장은 다산을 만나는 순간부터 지동도합(志同道合), 뜻이 같고 도가 합해진 듯, 참으로 다정한 학문적 동지가 되고 시를 논하며 《주역》을 토론하였고 술을 마시며 평생의 벗이자 사제처럼 지냈다.
- ① 초의의순(艸衣意洵, AD 1786∼1866년)은 조선말의 고승으로 한국 차문화(茶文化)의 중흥조(中興祖)이다. 선사는 AD 1786년 조선 정조(正祖) 10년 병오(丙午) 4월 5일에 전남 무안군(務安郡) 삼향면(三鄕面) 왕산리(旺山里)에서 태어났다. 속성(俗姓)은 장(張)씨고, 본은 흥성(興城)이다. 자는 중부(中孚), 법명은 의순(意洵), 초의(艸衣)는 염화지호(捻花之號)이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열반했다. 삼절(三絶)이라 일컬을 만큼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일지암시고(一枝庵詩槁)》,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선문사변만어(선문사변漫語)》, 《초의선과(艸衣禪課)》등이 있다.
* ⒂ 《周易》「習坎卦」 '九五 坎不盈 祗旣平 无咎.(구오는 구덩이가 아직 차지 않았을 때, 세상이 바른 기운으로 돌아온다면, 허물이 없다.)'
无는 無의 古語이다. 자고이래로 사람의 교활함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만 그물을 펼치고 함정을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아도 모두가 타인을 속이기 위해 사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잘난 사람은 잘나서 시기에 잡히고, 못난 사람은 어설퍼서 속임을 당한다. 그러니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한 적은 다름 아닌 인간일 것이다. 습감괘(習坎卦)는 그와 같은 인간의 속악(俗惡)한 심성을 꿰뚫어 본 말씀으로, 그렇게 어려운 처지에 닥쳤을 때에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되는지를 일깨워 준다. 구오효(九五爻)에서는 비록 한순간의 실수이거나 모함으로 구덩이에 빠진 처지가 되었더라도 냉정하게 사태를 돌아보고, 더욱 차분하게 앞날을 생각하며 조신(操身)하여야함을 말한다. '함정은 악을 가두기 위해 마련한 감옥이 아니라, 바르지 못한 자가 바른 자를 해치기 위하여 준비한 함정이다.' 그러니 '세상이 바르게 돌아온다면 바르지 못한 자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구덩이가 차지 않았다면 곧 빠져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고 하는 주역(周易)의 말씀을 온당히 이해해야한다. 대유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이를 간과 했겠는가. 그냥 때만 기다리며 사람의 할 도리를 다해야하는 하는 것이 된 사람의 바른 처신임을 알았다. 저 울울창창한 숙명의 숲을 건너뛰는 지름길은 없을까하고 찾으려고 하는 짓이야말로 가장 용렬하고 미련한 짓이다. 그러니 나머지는 하늘의 뜻일 뿐이다.
초육효(初六爻)에서도 그를 우려하여 입우감담(入于坎窞, 감(坎)도 구덩이이고 담(窞)도 구덩이다)을 더욱 경계하라고 했다. 구덩이에 빠지고 또 그 안의 구덩이에 다시 빠지니 이는 설상가상이다. 종종 타락한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육체가 구덩이에 빠지고, 나중에는 그 구덩이에 마음까지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마음까지 함정에 빠지지 마라.'고 경계하고 있다. 인간이 똑똑한 척 하지만, 제 꾀에 제가 넘어가기가 십상이다. 만고의 매국노 이완용이가 못 배워서 그랬겠나. 옛말에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지혜롭다고 과신하지만, 몰아다가 그물과 덫이나 함정 속에 넣어져도 이를 피할 줄 모른다.(人皆曰予知, 驅而納諸罟擭陷阱之中, 而莫之知辟也.) / 《中庸 7章》'고 하여 인간의 나약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산이 비록 18년이란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지만, 천수를 누리고 많은 저작을 할 수 있었던 배경도 그와 같이 하늘이 주는 때를 도리를 다하며 기다렸음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하늘이 주신 때일 것이다. 소인들이나 어려움에 처할수록 예전의 화려함만 기억해낼 뿐으로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옛날에 내가 벼슬을 하였네 하며 거들먹거리고,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았었네 하며 아쉬워하지만, 그것이 정작 위험한 것인 줄을 모른다. 군자는 자신의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것에마저 만족할 줄 안다.
* (16) 《淮南子》「卷13 氾論訓」, '敎寡人以道者擊鼓 諭寡人以義者擊鐘 告寡人以事者振鐸 語寡人以憂者擊磬 有獄訟者搖鞀. 當此之時 一饋而十起 一沐而三捉髮 以勞天下之民. 此而不能達善效忠者 則才不足也.(자신에게 도(道)로써 가르칠 사람은 와서 북을 울리고, 의(義)로써 깨우치려는 자는 와서 종을 치며, 어떤 일을 고하고자 하는 자는 방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와서 경쇠를 치며, 소송할 일이 있는 자는 와서 작은 북을 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우임금은 어진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 번 식사하는 동안에 열 번이나 일어났으며(一饋而十起),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와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럴 때 선(善)을 다하거나 충(忠)을 나타내지 못한 자는 그 자질이 부족한 자이다.)'
일궤십기(一饋十起)란 오로지 백성을 위하여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가를 이르는 것으로 지도자의 각별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 (17) 《史記》「卷一百三十貨殖列傳第七十」, 太史公曰, "夫神農以前 吾不知已 至若詩書所述虞夏以來 耳目欲極聲色之好 口欲窮芻豢之味. 身安逸樂 而心誇矜埶能之榮使 俗之漸民久矣. 雖戶說以眇論 終不能化. 故善者因之 其次利道之, 其次教誨之, 其次整齊之, 最下者與之爭."
태사공이 말했다. "신농씨 이전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지만 《시경》이나 《서경(書經=尚書)》에 기록된 우(虞)나 하(夏)나라 이래로 눈과 귀는 아름다운 소리와 모습을 무척 좋아하고, 입은 고기 맛을 보려고 했다. 몸은 편안과 쾌락을 좋아하고, 마음은 권력과 재능의 영광스러움을 자랑하려고 했으니 백성들이 이러한 풍속에 물든지 오래 되었다. 비록 오묘한 이론을 가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설명을 해도 교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를) 잘 하는 자는 이치에 따라 하고, 그 다음은 (백성을) 이롭게 하여 이끌어주며, 그 다음은 (백성을) 가르쳐 깨우치며, 그 다음은 (백성을) 획일적으로 다스리며, 가장 못하는 자는 (백성과) 다투는 것이다."
* (18) 《尙書》「五子之歌」, '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
* (19) 《孟子》「盡心 下」, 孟子曰 :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是故 得乎丘民而爲天子, 得乎天子爲諸侯, 得乎諸侯爲大
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