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24 10여년만의 공사를 마치고 드디어 남한산성행궁 낙성연이 있는 날, 냉큼 남한산성행궁으로 달려갔지요^^.
회전로타리가 요로코롬 바뀌었습니다.
복잡하다고 바쁘다고 핸들 못 꺾는다고 설마 가로질러 가시지는 않겠지요?
덕분에 종각이며 남한산성행궁길이 잘 보입니다.
행궁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종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앞으로 연말에 이곳에서 타종식도 한다고 하더군요.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민고민하지마, 침괘정으로 곧장올라갈까 하다가 먼저 행궁으로 향합니다.
침괘정은 행궁을 내려오는 길에 만나볼까 합니다.
행궁이란 왕이 도성 궁궐을 떠나 지방으로 행차할 때 머물었던 별궁을 말합니다.
안산행궁, 온양행궁, 과천행궁 등 여러 행궁이 있었지만 남한산성행궁은 북한산성행궁, 수원화성행궁과 함께 조선 왕조를 대표하는 행궁입니다.
백제 온조왕의 축성 이래 병자호란의 처절했던 항전과 삼전도의 굴욕을 안은 남한산성행궁은 일제 수난을 피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가 100여년이 지나 마침내 그 모습이 복원되었습니다.
10여년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행궁앞 외삼문 상루인 한남루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한남루는 한강 남쪽의 누대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각을 바치고 있는 긴 주춧돌 2개는 폐허로 남겨진 행궁을 뒹굴다가 인근 남한산초교 정문으로 쓰이던 것을 복원사업으로 제자리를 찾았다고 합니다.
옛 모습 그대로인 것 같지 않나요?
한남루 현판식이 있는 오늘, 빛 바래고 오래된 한남루 사진 한장이 남다르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1892~1893년 사이로 추정되며 프랑스 제 2대 공사관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촬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중한 사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퉁이 돌아 쪽문 앞에는 토끼풀이 소복하게 꽃을 피워냈습니다. 하얀 토기 두어마리 풀어놓고 싶습니다. 토끼들이 얼마나 좋아할까요. ㅎㅎ.
장옷으로 한껏 얼굴을 가린 나인이 몰래 심부름 가기 위해 쪽문을 열고 빼꼼히 망을 살필 것만 같은 곳.
총총총 잰걸음으로 사뿐사뿐 내려올 것만 같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질 않네요... ㅠ...
행궁 서쪽 바깥 담장과 안쪽 담장 사이에서 초기 백제 때의 토기조각이 발견되고, 2개의 저장용 구덩이 시설이 확인됨으로써 남한산성이 백제 영토였음이 증명되었다는데...
통일신라시대 기와를 묻은 와적지입니다. 당연 발굴 당시 출토된 것일 테지요? 그렇다면 백제 영토였는데 통일신라시대의 기와가 발굴되었단 말이 되는 거지요? 조선시대 기와는 비교하기 위해서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외행전 앞마당에도 발굴 현장을 재연해 둔 통일신라시대건물지가 있습니다.
구중궁궐 처마자락이라더니... 상궐, 하궐, 후원, 행각, 좌승당, 재덕당, 일장각, 이위정..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이도령과 춘향이가 될 첩첩담장들입니다.
왕의 거쳐임을 알 수 있는 소품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나도 궁금하고 너도 궁금하고 마주선 너와 내가 어색하구나~. 엇, 험!
궁금한 이는 하나둘이 아니었으니...
후원으로 이르는 돌계단은 곧장 오르지 않고 담장으로 살짝 가리어 옆으로 계단이 나 있습니다.
처음 이곳을 오는 이들은 계단을 단번에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그냥 지나쳤더랬지요^^.
살짝 옆으로 돌아 돌계단을 오르니 운치를 더하는군요. 하지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깊은 뜻을 담고 계단이 보이지 않게 배치했다고 하니 조상의 작은 지혜를 엿보게 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름드리 큰 키를 자랑하는 나무들을 바라보매, 지나간 역사야 어떻던들 앞으로의 역사의 푸르름이 느껴집니다.
행궁안 외행전 앞마당에서 복원에 앞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이때 출토된 통일신라유적을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외삼문 안 담벼락 전시회에서도 남한산성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는데, 흑백 사진속에서 역사를 읽고 저편 너머 아스라한 기억들을 들춰볼 수 있었습니다.
"맞다. 이 사람이 그사람이다. 그래~, 앞집 옆에 살던 *씨고 이게 그 너머 저~기 살던 #씨다."
"아니지, 벌써 죽었지. 우리 나이가 몇이고?"
한 패의 늙수레한 아주머니들께서 아련한 기억을 곱씹고 계셨습니다. 선명한 사진 속 그들은 산성리부락 마을 청년들입니다. 1959년의 일이라니 까마득히 지난 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행궁도 우리들의 기억속에 그리고 후대에 언제나 기억될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이제부터는 잘 보존되고 아름답게 지켜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남한산성에 유사시 임금이 피난할 수 있도록 행궁시설을 건립하였고 후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해 좌전을 세웠으며 우측에 사직을 함께 두었습니다. 다른 행궁에서는 볼 수 없는 종묘와 사직입니다.
왕조국가에서 종묘와 사직만큼 중요한 건 없습니다. 종묘사직은 곧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종묘사직을 모셨다는 건 임시수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종묘사직이 위태롭사옵니다." 즉, 국가가 위태롭다는 말입니다.
관리되고 있나요? 종묘사직에는 잡초가 무성하오이다.
석상을 세운 전통공원길을 따라 내려옵니다.
차차 자리를 잡고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해지면 전통공원으로서의 아름다운 면모를 보여주겠지요^^.
전통공원 돌담길에는 한뫼골미술인회의 남한산성 (圖解圖)도해도 - 행궁 '길, 사람들'이란 제목하에 매주 토, 일요일에 한해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잠시 여유로운 문화산책을 즐기셔도 좋겠습니다.
종각 뒤 돌계단을 오르면, 세월도 흐르고 침괘정도 변하고... 지금의 모습입니다.
침괘정은, 건조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1624년(인조 2년) 수어사(守禦使)로 남한산성을 수축하던 이서(李曙)가 발견하였고 1751년(영조 27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다시 지은 후에 침괘정이라 이름지었으며 1972년 5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나 이를 고증할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중국 명(明)의 사신 부총병(副摠兵) 정룡(程龍)이 총융무고(摠戎武庫)라 이름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침괘정의 오른쪽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나 무기를 만들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바 무기고나 무기제작소의 집무실로 쓰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안쪽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데 발견 당시 주춧돌이 견고하고, 방의 온돌이 상하지 않았으며 방 하나의 온돌 높이가 수척에 달하였다고 전해지며 시험삼아 방에 불을 때보니 따뜻해졌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이랬다지요~. 마당에 배추밭도 보이고 뒤편 돌담 너머 또다른 건물의 지붕도 보입니다. 사진으로 보아도 침괘정 한 채만 있었던 건 아닌가 봅니다.
침괘정에서 수어장대로 올라 ?남한산성을 한 바퀴 둘러보고픈 마음 굴뚝같지만 오늘은 축하연으로 베푸는 낙성연을 봐야겠습니다.
정치를 잘하셨나요? 도민을 잘 보살피셨나요? 공덕비가 세워질 수 있도록 우리 도지사님도, ~^.^*."잘 부탁드립니다."
100년의 기다림 끝에 행궁이 복원되면서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다시 탈바꿈하려 합니다.
현재 남한산성행궁이 있는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위하여 애쓰고 있는 가운데 2010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있으며,
(참고로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이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하기 위하여 유네스코에 제출하려는 후보명단을 말합니다. 중부내륙산성군이나 외암마을, 낙안읍성 등이 함께 잠정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내 13곳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중 우선등재 추진 대상으로 선정되어 있으며 2013년 1월 유네스코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며 2014년 6월에는 최종 판가름날 것입니다.
남한산성행궁은 전통문화를 느끼고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우리 곁에 다가서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둘러보는 주말 체험학습이나 성곽 둘레길을 걸으며 건강과 휴식을 찾는 휴식처가 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문화재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잘 이용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淸)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발생배경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후금은 조선침략의 다음해에 내몽골의 챠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베이징[北京]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또한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이때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인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귀국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국서에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태종은 그해 11월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청의 침입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청태종은 명나라가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을 못하게 하기 위해 별군(別軍)으로 랴오허[遼河] 방면을 지키게 하고, 12월 2일에 만주족·몽골족·한인(漢人)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때 청은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問罪)하는 것이 침략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선봉인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은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게 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정하여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을 배호하여 강화로 향하게 했다. 또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정했다.
그날 밤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坪:마포대안으로 추정)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최명길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다시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산성을 떠나서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얼어 미끄러웠으므로 산성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만 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이때 성 안에는 군량이 도합 2만 3,800여 석이 있었는데, 이 분량은 군병과 백관을 합하여 1만 4,000여 명이 있었으므로 약 50일분에 해당하는 양식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성 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 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감에 따라,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도원수·부원수, 감사(監使)·병사(兵使)의 군사는 대개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흩어졌다. 그중에서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역습을 당하여 후퇴했다. 민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적은 수를 보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 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청태종은 이듬해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2일에 인조는 청군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청의 진영에 보냈는데, 청은 조선이 청과 개전할 준비를 하는 등 맹약을 깨뜨렸으므로 출정한 것이라는 등의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냈다.
그뒤 20일에 청나라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의 주모자 2~3명을 가두어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해 있었고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 등이 방비를 맡고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항복과 강화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椵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은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전후의 대청관계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 가 심각했다(→ 색인 : 속환문제).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 북벌론 , 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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