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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게시판 스크랩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문
flower 추천 0 조회 338 10.08.19 16: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노동자의 힘 기관지 '세상야사' 코너에 2004년 7월 연재했던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원문 携手하여)
끊임없는(원문 : 不絶하는) 폭력 -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원문 : 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1923년 1월, 신채호,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마지막 부분.
요근래 이리저리 얼굴을 보는 사람들에게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아는지 물어봤습니다. 대다수는 제목만 겨우 들어봤을 뿐이고, 아예 그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여러 사람을 만나봐도 아직 <조선혁명선언>의 전문을 읽어보았다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딱 한 명만 영화 <아나키스트>에 나오는 구절이 기억난다고 하더군요. 그 피끓는 문장을 아무도,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니! 이 땅의 근현대사는 도대체 뭘 가르치는 겨...
조선혁명선언과 신채호


기미년 3월 1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낭독되었다고 배웠던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문>을 아직도 외우고 있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근현대사를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던 분이라면 이 독립선언이
초기에는 일본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건의'하기 위한 논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나중에 건의서가 아닌 독립의지를 담은 선언서 형태로 계획이 바뀌기는 했지만,
민중들의 투쟁의지를 두려워한 자칭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대중들과 함께 선언문을 낭독하는 계획을 폐기합니다 소위 대표라는 자들은 '대중들의 폭동'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인사동 태화관이라는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끼리끼리 낭독을 하고, 아무도 안 듣는 만세를 외칩니다.
그리고 미리 연락을 해 둔 일본 순사들에게 순순히 잡혀갔습니다.
논의가 시작된 1919년 2월초부터 3월 1일 집행 당일까지 비민중적이고, 대리주의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투항주의를 선택했던 이들은 그 후에도
그 선언문을 기초했던 최남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들의 선언문조차 배신하는 작태를 보여줍니다.
그 뒤 1년여간 진행된 민중들의 시위는 일제하 해방투쟁의 한 획을 긋는 크나큰 역사가 되었지만,
그 출발을 이들의 공으로 돌리거나, 이 선언문으로 대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수년전부터 각 단위에서 준비해온 투쟁 계획을 무시하고,
민중들의 자발적인 투쟁과 끝까지 단절하려고 했던 이 독립선언은,
아직도 교과서 한편을 차지하고 앉아서,
마치 일제 시대 당시 해방 투쟁의 정신을 대표하는 양 버티고 있습니다.
(아.. 이거 쓰다보니까 또 열 받네)
지금까지도 혹시 그 선언문을 외우고 있는 분이 있다면 빨리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기 바랍니다.
작은 머리통에 집어넣어야 할 것이 넘쳐흘러서
매일 채워넣기도 어려운 판에 그따위 선언에 공간을 빼앗겨서야 되겠습니까!
1919년 민중들의 만세시위는 그간 진행되어오던 독립운동의 물길을 확 돌려놓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서 계몽의 대상이었던 민중이 운동의 주체로 떠오른 것입니다.
3.1운동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계몽주의적인 민족노선이 주도하였으나,
만세시위를 거치면서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계열 등이 급부상하며 격렬한 노선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1919년 만세운동이 한반도를 휘감고 돌 즈음,
이에 고무된 독립운동가들은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4월 11일 밤샘 회의를 통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국무총리가 이끄는 내각책임제하의 내각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정되자, 단재 신채호는 격분해서 회의장을 박차고 퇴장합니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1919년 2월에 이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조선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 '한성 임시정부', 러시아령의 '국민회의'를 통합한 통합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11일 출범하면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신채호는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합니다.
신채호
단재 신채호는 1909년 안중근 등과 함께 신민회에서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한 이래로,
전투적 민족주의 노선을 통한 '완전독립', '절대독립'을 추구해왔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이승만의 굴욕적인 외교노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매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 맞서서 <신대한(新大韓)>과 <천고(天鼓)>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이승만의 탄핵과 임시정부의 재조직을 요구하며,
무장투쟁 노선을 따르는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합니다.
약 3년여간 치열한 노선투쟁을 통해 이승만 세력을 무력화시킨 신채호는
1922년 '국민대표회의'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새롭게 구성하려고 합니다.
의열단 의백 김원봉
바로 이런 때에 단재는
의열단(義烈團)의 의백(義伯, 대표)인 김원봉의 요청으로 의열단의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게 됩니다.
(단재 신채호가 의열단 대표라고 알고 있는 분이 많은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의열단은 소수의 비밀결사체로서
구축왜노(驅逐倭奴), 광복조국, 타파계급, 평균지권(平均地權)을 기본 강령으로 삼고,
그들의 10개 공약 중 첫 번째인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키로 함'에서
'정의'와 '맹렬' 각각 한 글자씩 떼어서 만든 이름입니다.
이들이 말하던 정의는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이며,
맹렬은 '암살, 파괴 폭동' 등 폭력투쟁을 일컫는 것입니다.
의열단은 흔히 '무정부주의자 단체'라고 알려져 있는데(<아나키스트>라는 영화가 그 오해를 더 키웠습니다),
폭력노선에 찬성하던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섞여 있었습니다.
의열단은 그들의 폭력노선에 대한 비판이 내외에서 거세지던 시점에서
그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채호에게 선언문을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 3.1운동을 통해 민중들의 자발적인 투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직접 투쟁만이 이 상황을 깨치고 나갈 것이라고 믿게된 신채호는 의열단의 폭탄공장들을 돌아본 후
흔쾌히 요청을 수락하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게 됩니다.
조선혁명선언'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異族)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합니다.
2장은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문화운동자 등 각종 타협주의 노선에 대해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합니다.

3장에서는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비판하며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특수세력의 타도를 위해 민중의 직접 폭력 혁명만이 대안이며, 이를 위해 선도투를 내세웁니다.
그리고 암살, 폭력, 파괴의 대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부에 해당하는 5장은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할 것을 선언하고,
이를 위해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가장 앞에 있는 문장들을 끝으로 선언문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문을 집필하던 당시 신채호는 전투적 민족주의자에서 무정부주의자로 바뀌어가던 시기였는데,
이 선언문 속에서 당시 신채호의 변화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후 의열단은 이 선언문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각종 집회뿐 아니라, 암살이나 폭탄을 투척할 때마다 선언문을 뿌렸고,
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호응하며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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