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완공한 충남 부여군 첫 고딕 건물물
나무 기둥 한줄로 세워 성당 내부 둘로 나눠
대전교구 금사리본당(주임 김기 신부)은 성당 건물이 둘이고
사제관 건물도 둘이다.
그 중 옛 성당은 충남 부여군의 첫 고딕 건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43호다.
1906년 완공된 건물이니 2년만 있으면 건립 100주년이 된다.
이 성당이 현재 한창 복원 공사 중에 있다. 작년 8월 본격 공사에
들어가 얼마전 외부 복원을 마쳤다. 올해 안에 다 마칠 예정이다.
"벽 전체를 헐어 다시 쌓고 새 성당을 건립하면서 없앴던 종탑도 복원했습니다.
벽돌은 원래 재료를 30% 이상 사용했고 지붕은 동판으로 했습니다."
지난 2월 금사리본당을 떠난 뒤에도 복원 공사 일을 계속 맡고 있는 김성헌 신부(둔포본당 주임)는
성당 복원을 위해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노인 신자들의 증언을 듣는 한편 설계도면을 다시 작성한
뒤 공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옛 성당 건물은 공주본당(현 공주 중동본당)에서 1901년 분리된 금사리본당이 그해 5월 착공해
1906년 완공했다. 당시 성당 건축을 위해 금사리본당 초대 주임인 공베르(공안세, 1901년~
1923년 재직)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했고, 신자들은 손수 건축일을 도왔다.
벽돌은 직접 황토를 구워 만들어 사용했다. 벽체는 윗부분은 붉은벽돌을, 아랫부분은 회색벽돌을
사용했으며 지붕엔 기와를 얹었다. 공 신부는 당시 안성본당 주임이던 공안국 신부의 동생.
한 · 양 절충의 고딕식인 이 성당 건물은 단층 55평으로, 내부 중앙에 나무 기둥을 일렬로 세워
전례공간을 둘로 나눈 2랑식(廊食)이 특징이다. 보통 다른 성당들이 세 개의 회랑으로 나뉘어진
3랑식(廊食)인 것과 틀린 점이다. 바로 그 점이 다른 성당에서 볼 수 없는, 이 성당만이 갖는
건축사적 의미다.
성당 완공 후 계속해서 25평 사제관과 30평 사랑채도 건립해 1913년 9월 2일 뮈텔 민 주교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성당 입구 성모상 앞에 놓여있는 돌제대 한쪽에 '1913년 9월 2일 민 주교 축성'이라고 써 있는 글씨가
그 역사를 말해준다. 이 돌제대는 본당이 새 성당을 건립한 후 1971년 규암성당으로 옮겨갔다가 얼마전
되돌아왔다. 옛 성당 복원이 다 끝나면 원래대로 제자리에 놓여지게 된다.
옛 성당은 원래 기와지붕이었으나 지붕 무게 때문에 한쪽 벽에 금이 가 1928년 기와를 함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성당이 비좁아지자 1960년에 지붕 트러스를 보강하고
중앙 기둥을 없앴다.
그러다가 외벽에 금이 가고 기울어지는 현상까지 나타나자 1968년 74평의 콘크리트 불록조
성당 건물을 옛 성당 옆에 새로 건립했다. 새 성당 건립 당시 본당을 지역사회 중심지인
태양리로 옮기려 했으나 서남부 지역 유서깊은 금사리의 특성을 감안해 현 위치에 그대로
두었다.
옛 사제관은 수리해 93년 축복식을 갖고 '대건의 집'으로 명명, 회합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성당은 이번 복원 공사에 앞서 1998년에도 부분 복원 공사를 했다. 그런데 부실공사 탓인지
새로 깐 마루바닥이 일어나고 양철 지붕이 2000년 2월 돌풍에 날라가 버렸다.
금사리본당 주임으로 막 부임하면서 이런 사고를 겪은 김성헌 신부가 그래서 전면 복원 공사에
착수하게 됐다.
금사리 옛 성당 건물은 이렇게 오랜 역사를 거치며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또다른 아픈 사연도
있다. 6.25때 공산군에 의해 점령돼 종교 집회가 금지된 것은 물론 성당과 성당 부속건물이
몰수돼 공산군 집회장소로 사용됐다.
그 때 본당 주임이던 모요셉 신부는 신자 집에 잠시
피신했다가 자칫 신자들이 피해볼까봐 성당으로 다시 돌아와 성당을 지키다 체포됐다.
그리고 대전 목동 작은형제회 수도원에 감금돼 학살당했다.
금사리성당은 오래된 성당들이 보통 언덕빼기에 있는 것과 달리 마을안에 있다. 마을 주민은
거의 신자다. 성당 보수 공사 진척 상황이 궁금한지 마을 어르신들이 내집처럼 드나든다.
"옛날에는 4부합창이 이뤄질만큼 성당이 활발했지. 공소도 신자가 많아 강당을 건립했고
1주일 내내 공소를 돌며 예비자 교리를 하느라 집 일은 뒷전이었는데, 지금은 노인들만
있고 아기 우는 소리가 그친 지 오래니 한심해."
과거 본당 회장을 역임했던 김학영(야고보, 82) 할아버지는 '밥만 먹으면 성당에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옛 시절을 회고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금사리본당은 1920년대엔 '계명여자학술강습회'라는 4년제 여학교를 세워 당시 등한시 했던
여성교육에 눈길을 돌렸으며 청년회도 조직했다. 이 학교를 세웠던 정규랑 신부는 순교자
신심이 남달라 본당 관할이던 보령 갈매못 성지를 답사하고 1927년 부지 20평을 다른 신부와
공동으로 구입해 천주교재단으로 귀속시켰으며, 갈매못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1950년대 중반엔 이 마을에 전기도 끌어들였다. 이후 전교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공소마다
교리반을 조직, 운영했으며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성가대 활동도 활발했다. 특히 성탄전야제
행사는 성가, 무용, 연극, 만담, 거지타령 등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꾸며져 미신자들까지 구경
하러 오는 등 문전성시를 이뤘다.
점점 신자들이 늘면서 성당건물이 비좁은데다 낡고 위험해지자 새성당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1968년 새성전 건립 당시 본당 신자수는 1473명에 공소는 12개에 달했다. 1979년에는 본당에
수녀원을 건립하고 전교수녀도 모시게 됐으며,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밤 농장도 운영해
본당 재정에도 보탰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 속에 충남 서남부지역 성소의 못자리로 성직자, 수도자도 다수 배출했다.
하지만 농촌이 쇠락해지면서 금사리본당도 그 영향을 받았다. 신자 수는 자꾸 줄고 노인 신자
들만 남게되자 본당 수녀원도 95년 철수했다. 지금은 주일미사 참례자가 많아야 150명 정도이
고 주일학교는 따로 없다.
수녀원 건물은 현재 본당 유물관으로 임시 사용되고 있다. 미사경본, 제구, 성물 등 전시된
유물들을 통해 본당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예전의 번성을 되찾기는 어렵지만, 그 역사적
가치와 믿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순례 문의 : 041-832-5355 금사리본당
[평화신문, 2004년 9월 5일, 글=이연숙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