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29. 창조절 다섯째주일
예배 시편 / 시편 128편 1-2절
찬송 / 517장 · 생명 진리 은혜 되신
성서 / 이사야 65장 17-25절, 마가복음 4장 26-29절
말씀 /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김윤식 목사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한때 유행처럼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질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정의란 무엇일까요?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일까요? 참 어려운 질문이지요. 단순하게 옛 방식대로 ‘정의사회구현’이란 슬로건을 크게 걸고 나쁜 사람을 혼내준다면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겠지요. 문제는 그 나쁜 사람을 혼내준다는 사람들이 뒤에서 몰래 더 나쁜 짓을 하니 그들을 혼내줄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특권을 견고하게 지켜주는 공정, 약한 이들을 마음껏 소외시키고 혐오하는 자유를 뜻하는 저들의 정의를 진정한 의미의 정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요? 정의가 구현된 사회는 어떤 세상이어야 할까요? 오늘 우리에겐 과거의 이해보다 더 넓은 정의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잘 알려진 책은 아니지만, 정의에 대한 논의 가운데 중요한 책으로 〈차이의 정치와 정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란 이름의 학자가 저술한 책입니다. 이 책은 지금은 의원이 된 조국 교수가 서울대 법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번역 숙제를 내주고 함께 읽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번역이 미진했는지, 선생님들이 다시 번역을 해서 책으로 출간되었고, 많은 사람이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이제까지 사람들이 정의의 문제를 다룰 때 특히 물질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들을 나누는 문제, 즉 공정한 분배의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해서 정의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나치게 축소되었다고 말합니다. 공정에 대한 공허한 외침이 오히려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억압과 지배를 공고하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정의를 한 마디로 ‘지배’와 ‘억압’이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억압이란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개발하거나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의미하고, 지배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의가 사라진 오늘날 사회에서 부유한 노인일지라도 젊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억압을 경험할 수 있고, 노동력이 충분한 젊은 청년이라고 해도 경제적인 것을 이유로 성장하고 자기 개발할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억압은 장애인과 소수자들과 같이 사회의 약한 이들을 혐오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민자와 같은 계층을 착취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답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정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정과 같은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다양한 연령과 계층과 인종과 같이 여러 조건이 다르더라도 누구나 스스로 성장할 수 있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보다 넓은 의미의 정의입니다.
이사야의 꿈
성서에서 예언서를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희망이겠지요. 막연할지라도 희망이 없는 삶, 꿈이 없는 삶은 죽음과도 같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사야서를 읽을 때마다, 전쟁터에서 발견되었다는 한 농부의 주검을 떠올립니다. 전쟁이 지나간 한 시골 마을에서 노년의 농부가 발견되었는데, 이상하게도 한쪽 손이 도무지 펴지지 않았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무언가를 쥔 쪽의 손을 꽉 쥐었기 때문이었지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씨앗이었답니다. 전쟁의 상황에서도, 죽음을 눈앞에 둔 그 순간에도 농부는 씨앗을, 아니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사라진 현실에서, 전쟁과 폭력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전쟁 포로로 끌려간 포로지에서도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폭력도 전쟁도 죽음의 위협도 이사야의 마음속에 있는 꿈과 희망의 씨앗을 빼앗을 수 없었지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새롭게 구원하실 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 말씀으로 받아 읽은 이사야서 65장 말씀에는 방대한 이사야서의 결론이며, 요약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이사야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의 꿈입니다.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는 백성,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이사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사야 65장 21절의 말씀입니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참으로 소박한 꿈이지요.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고,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꿈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렇게 소박한 꿈을 애절하게 노래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집을 지어놓고도 거기서 살지 못했고, 자기가 심은 것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전쟁이 있기 전에는 부패한 지도층과 사회의 불의로 인해 그래야 했고, 전쟁 후에는 포로지로 끌려가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래야 했던 것입니다. 지배와 억압으로 인한 불안과 위협이 언제나 사람들을 휩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힘 있는 사람들의 지배와 억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꿈과 희망을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는 세상”에 대한 노래입니다. 나는 “사자다, 표범이다, 곰이다” 하고 저마다 힘을 자랑하고 특권을 자랑하는 세상이 아니지요. “나는 감히 토끼나, 염소나 양이나 어린애 같은 너희들하고는 다르다”고 권세가들이 으쓱하는 세상도 아닙니다. 이리도 자기의 힘을 내려놓는 세상, 사자와 같은 이도 다른 이를 해치지 않고, 뱀과 같은 이들도 누군가를 상하게 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누구든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자기의 집을 세워갈 수 있는 세상이 이사야가 꿈꾸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세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만들어 가시는 정의로운 세상입니다.
스스로 자라는 씨
오늘 복음서의 말씀으로 저절로 자라는 씨에 대한 비유를 읽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새번역 성서는 “스스로 자라는 씨”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습니다. 어쨌든,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자라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씨를 뿌려놓은 농부가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는 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의 강조점은 농부의 역할은 없으니 그저 수수방관하며 지내라는 것은 아닐 겁니다. 농부가 밤낮 자고 깨는 사이에, 씨앗이 열매가 된 신비에 강조점이 있지요. 비록, 농부가 모든 것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씨앗이 열매가 되는 것은 분명하고 당연한 농부의 꿈이지요. 농부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소망입니다. 농부는 밤낮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 사이에 언제나 잠을 자고, 꿈을 꿀 것입니다. 씨앗이 마침내 열매가 되리라는 소박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꿈입니다. 그러나 씨앗에서 싹이 자라나, 이삭이 나오고, 알찬 낟알이 맺히는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반복되는 낮과 밤의 긴 시간을 지나야 하지요. 씨앗에 싹이 날 때까지, 비도 머금어야 하고, 햇살도 견뎌야만 합니다. 바람도 견디며 흔들려야만 줄기도 튼튼해지겠지요. 때로 그렇게 의미 없는 것 같은, 변하는 것이 없는 것만 같은, 우리가 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을 지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씨앗은 스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 열매를 맺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참으로 신비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땅에서 싹이 나고, 싹에서 이삭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이 아닌 자연의 법이지요. 하나님의 섭리이고, 모든 자연과 그 섭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한 알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빗대서 설명하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지요. 로마는 언제나 평화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번영과 평화는 언제나 변방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지배와 억압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지배와 억압에 기반한 평화였지요. 제국은 황제의 나라였고, 로마의 평화 뒤에는 로마의 군대가 서 있었지요. 독점과 계급과 차별이 당연시되는 정의와 평화였습니다. 착취와 폭력과 억압과 지배가 당연한 권리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부르신 제자들을 통해서, 작고 연약한 이들을 통해서 세워져 가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안에서 작고 약한 이들이 스스로 당당하게 믿음으로 일어나서 걸어가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알의 씨알이 열매 맺기까지 섭리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를 마음에 품은 사람들,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심어가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섭리와 역사로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땅에 뿌려진 씨처럼 우리의 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 반복되는 일상이 의미 없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셨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역사로, 당신의 섭리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는 일이 작은 일이지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동안,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할 때에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과 방식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자라나게 힘과 용기를 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를 통해,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 가운데 지배와 억압이 없는, 자연스럽게 섭리에 따라 성장하는 나라, 바로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만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꿈꾸며 살아갈 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마음에 씨앗처럼 품고 살아갈 때, 그 하늘의 씨앗을 놀랍고 신비롭게 성장하게 하시고, 심은 대로 그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다만 우리가 섭리에 따라 자라는 씨앗처럼, 마침내 알찬 열매를 맺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일꾼으로서 하루하루를 하늘의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