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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슬픔계량사전☆]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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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계량사전]
김수목 시집 / 천년의 시 062 / 천년의 시작(2016.09.19)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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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계량사전
김수목
질문 유속을 구하는 공식을 부탁합니다
답변 유속은 배관이 구경으로부터 얻어집니다.
질문 유속의 속도는 물론이고 유량율과 유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면 손실수두를 구할 수 있나요?
답변 유동하는 유체에너지가 마찰, 충격, 기타에 의해 상실되는 양을 수두의 길이로 나타냅니다.
참조 토목공사사전
질문 그러면 내 몸속을 헤매는 슬픔의 에너지를 계량하자면 타인인과 조우하는 동안의 마찰,
말을 섞는 순간의 충격, 또 밤새 달리며 떠든 대가에 의해 상실되는 양을 길이로 나타내보낼
수 있나요?
참조 슬픔계량사전
경어를 쓰고 싶은 아침
김수목
사소한 일이란 게 없지요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일도 실로 위대한 일이지요
오른손을 짚고 서서히 일어나거나
두 발을 동시에 힘을 주고 발딱 일어서는 일도 예삿일은 아니지요
칫솔을 물고 눈을 감을까 아니면
불멸의 얼굴을 마주쳐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요
밥을 먼저 먹을까 콩나물국을 먹을까 생각하는 일도 번민에 속하는 거지요
밥상에 둘러붙은 밥풀때기를 손으로 뗄까 휴지로 뗄까
망설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
현관 앞에 흩어진 신발 중에서
오늘을 실어 나를 신발을 고르는 건 경이로운 일이지요
모든 사물들에게 경어를 쓰고 싶어요
목례로 끝낼 일이 아니지요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청순한 아침이네요
안부를 묻습니다
김수목
유령거미가 독사를 죽이는 다큐 사진이 배경화면입니다
밤은 거미줄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곳과 대척인 그곳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이곳의 안부는 전혀 아니올시다
진창의 발밑보다 더 아래의
슬픔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발파라이소라고 힘겹게 발음해 보는 그곳이
그대가 있다는 이유로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날짜변경선을 넘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적도 아래로도 다가온 적이 없습니다
눈물이 흐를 정도의 슬픔도 다가온 적이 없습니다
슬픈 감정을 감정해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서 무조건 좋앗습니다
공원벤치에 누워 시체놀이를 하는 것조차 좋았습니다
슬픔의 허구에 대하여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대의 부존도 이해합니다
안부가 궁금한 건 슬픔의 시작입니다
그럼 이만 총총
어느 하루
김수목
폭설이 온다고
때 아닌 경칩 폭설이라고
일제히 지상의 것들은 떠들어댔지만
폭설,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더 움추렸고
조심스럽개 발을 내딛고 보폭을 좁혔다
어설픈 농가의 지상 시설물만
눈뭉치에 못 이겨 주저앉고
먼 산의 짐승들만 인기를 어슬렁거렸을 뿐이었다
폭의 난폭함을 실감하라는 듯
폭설은 쉴 새 없이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몰아쳐댔다
폭의 절박함에
잠시 이게 전부일까 의아했고 그 배후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으므로 금세 잊혀졌다
폭설이 내리는 동안
긴장한 전깃줄만 내내 팽팽했다
전깃줄에 앉을 수도 없게 눈이 쌓이자
새들은 나뭇가지를 처마 삼아
하릴 없이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던
폭폭한 눈보라는 하루도 못 가 사라져주었고
지상의 것들에게 영원한 것은 없다는 듯
벌써 기억에서 달아난 하루였다
폭설의 이유
김수목
눈이 내린다
물러설 틈도 없이 내리는 눈에 가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행인들은 둘의 싸움에 관심 없다는 듯 외투 깊숙이 목을 집어넣고 눈만 뻐끔거리며 종종갈음을 치며 거리를 지나쳤다 떠나는 가을쯤은 신경 쓸 일도 아니라는 듯 비애 같은 눈은 내리고 또 내렸다
눈은 세상을 다 덮은 기세로 내린다
오지랖 넓은 아이의 주머니 속이라도 된 듯
저렇게 퍼붓는 눈의 정체는 무엇일까
서둘러 내리는 폼을 보니 맨날 지각이나 해대는 아이이거나, 뭘 잊고 안 가져와 다시 집으로 달음질치는 아이이겠지 그 어느 쪽이라도 오늘 같은 날은 다 용서될 수 있겠지
눈이 쏟아진다
허공에서는 난분분 난분분 흩날리다가도 땅에 가까워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앙다물고 가볍게 착지하는 자세란…… 마치 땅에 닿기 위해 내렸던 것처럼
눈 내리는 거리에 선다
눈이 내릴 곳은 어디나 설원이다 설원의 어디건 끝 간 데는 있겠지만 설원에서의 끝은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한다 다만 눈 위에 눈이 내리고 쌓여 덮을 뿐 상처도 덮고 덮어 용서라는 이름의 설원만 남을 뿐
망각
김수목
잊어간다는 건
사막의 사막이라는 고비를
하염없이 양관고성에서 바라보는 일이지요
백양나무의 메마른 육질이 서툴게 몸피를 줄이는 것이나
누군가 저 멀리서 신기루처럼 나타나기를,
아물거리다가 결국은 사라져버리는 것을 기다리는 것도
양관고성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기다린 건 나만이 아니었다는 걸
누란의 미라 공주를 보고 알게 되었지요
박물관의 유리관 안에서 그녀는
나처럼 왼쪽 눈을 찡그리고 있었거든요
속눈썹에 말라붙은 눈물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반짝거릴 정도면 말 다한 거지요
몇 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고비에서
모래 틈새로 몸을 밀어 넣고 사라지는 도마뱀은
비를 잊고 살아가는 거지요
모래에 맺힌 이슬을 삹아
새벽녘에야 겨우 입술에 물을 바르는
기억만으로
한낮의 열기를 견디겠지요
잊어간다는 건
육탈한 석류의 껍질을 만지는 일이지요
까맣게 쪼글쪼글해져 도무지 알 수 없고
석류나무에 붙어 있어 석류라는 이름으로만 남은
그를
전언
김수목
깜빡 눈이 떠졌는데 밝은 바깥에 동트는지 의아했습니다 아직 덜 깬 잠이, 잡아 둔 약속이, 아침이 늦게 오기를 빌었습니다 덜컹거리는 문을 열고 나가니 달빛 교교한 마당이 보였습니다 달빛이 엄습했습니다 달빛 아래 모두들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사방이 적막입니다 이때는 풀벌레도 소리를 죽이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적막 너머에는 정수리를 치고 가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부디 그대로 두라는 당신의 전언이었습니다
동행
김수목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미장원 거울 위에 걸린 글 귀 하나 때문에 속고 속았지
한순간도 가만 두지 않는 시간이
마지막 잎새를 떨어뜨렸지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흙에게 온 생을 맡기는 서러운 순간이라는 거
모든 나뭇잎의 운명도 여전히 같은 생각으로
말없이 한 곳으로 돌아가지
칠 벗겨진 나무 의자에 사뿐히 내려앉아
더 갈 곳 없는 한 잎의 흔들림
여행을 다녀왔다면 반드시 증거라도 남기듯이
풍토병 하나쯤은 몸에 담고 와야지
너에게 다가갔다면
팔뚝에 긁은 타투 정도는 남겨 왔어야지
어디에거나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려는 것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지
초콜릿의 역사
김수목
당국자는 초콜릿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일상이라고 했다 모르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거라고 말미에 독백처럼 짧게 말했다 공교롭게도 그 말을 하는 사이에 마이크가 꺼지고 미처 다물지 못한 입술 사이로 진실이 터져 나왔다 바로 앞에 있던 사람들은 다 들었다 저게 초콜릿의 진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콜릿의 진실은 대충 외면해 보리는 게 상책이라고 그게 더욱 진실하게 사는 일이라고 했다
겨울을 지나 한여름에 땅속 깊이 묻어둔 묵은지 꺼내듯 먼 훗날 역사학자들이 말했다
그 실상은 이렇지요
그러면 끝나는 게 초콜릿의 역사였다
예언
김수목
사람이 죽는 순간 순간적으로 살짝 몸무게가 줄어든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보고서는 영과 혼이 몸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누군가 죽은 사람의 혼이 코로 빠져나가는 걸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혼이 빠져나갈 수 있는 코가 그럼 창문이 되는 걸까
창문이 그리 쉽게 어디서나 열리나
코와 입과 눈과 귀가 다 통해 있으니 코가 창문이라면 혼을 갑자기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몸속에 주저앉아 환생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코가 꽉 막힌 감기증세의 나날이 계속되고 목젖이 부어올라 목구멍을 막는 날에 겨우 일으킨 몸 대신의 생각이다
과학자의 말을 신의 말씀보다 신봉하게 되었다는 예언가의 말을 믿는다
한때는 가난한 연인의 흉내를 내기도 했지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고 공동묘지 사이에 나란히 누워
흐린 눈빛으로 서로의 코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했지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신의 예언보다 확실한 건 사랑이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
김수목
물고기 꼬리라는 마차푸차레 봉은 꼬리지느러미의 긴 그림자를 내 발밑에 던져주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서 만지고 싶었지만 만년설을 보고 있었다 거울을 보았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얼핏 내 얼굴이 얼비치는 것도 보였다 내가 딛고 서야 하는 것이기에 더 현실적이었다 아직은 해발 사천 미터.
삼천 미터쯤에서 달라붙었던 거머리는 오버 트라우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만년설은 내 방의 거울보다 더 선명하게 나를 보여주었다 내가 가진 거울은 나를 꼼꼼하게 스캔하고 있었지만 내가 필요할 때라야 다가갔다 하지만 만년설은 내가 꼼짝없이 마주봐야 하는 것이었다
구차스러웠다 내가 저토록 몰두해본 적이 있었는가 거울은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고 이 순간 누가 말해도 믿을 것이었다 왼쪽으로 빙벽을 끼고 돌았다 발밑은 의외로 순순했지만 만년설은 요철 많은 볼록거울로 다가왔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가까운 곳도 분간할 수 없었다 손톱은 파랗게 질려갔다 열 손가락 끝은 모두 풍성처럼 부풀어 올랐다 두개골을 떠난 생각들은 자꾸만 뒤로 도망갔다 잡아아라, 잡아아……
풍경
김수목
해가 혀를 불쑥 내밀었다 바람은 말랑거리며 관자놀이를 스쳤다 땅에 납작 엎드린 낙엽은 몸을 뒤척이며 몸을 말렸다 햇살은 그들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잎맥들은 끈적한 미소를 날렸다 신문지를 접어 얼굴 위에 그늘을 만든 사내는 해솔 공원을 지나간다 톡톡 밤송이 벌어지는 소리로 멀어졌다
모두의 그림자가 짙어지기 시작한다 해는 조각배처럼 떠오른다 둥둥 건물은 유리창마다 난반사다 무수한 방울들이 순식간에 피어난다 쳐다볼 수도 없는 해가 입을 다문다 바람은부비강까지 들이닥칠 기세다 이번에는 태양모를 쓰고 복면의 아낙이 두 팔을 힘차게 저으며 간다
새털구름 이 피어나려 한다 햇살은 입에 가득 물을 품었다가 품어내는 물 조각처럼 쏟아진다 산비둘기가 활강을 한다 허공에 직선 하나 그어내며 건물 숲 사이로 사라진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두 아이가 셔틀콕을 엇박자로 친다 한 아니는 서 있고 한 아니는 뛰어다닌다 타악, 탁 리듬까지 어긋난 배드민턴은 끝이 없다
게으른 가을
김수목
밖은 무더운데
서늘한 바람은 창을 넘어와
내가 바란 건
따스한 햇살 한 줌인데
손바닥에는 바람만 가득해
낮잠을 자는 고양이를 툭 건드려 봐
문 좀 닫아줘
쿨렁 뱃가죽만 들어갔다 나올 뿐
나만큼 무력해
일어서는 건 싫고
닫는 건 더욱 싫고
게으름이 나를 먹여 살리지
게으름 때문에 한 송이 쑥부쟁이꽃이 피었고
게으른 소 때문에
송아지는 태어났지
게으른 보리는 더디 자라
햇수로는 두 해를 자라야
햇보리가 되지
게으른 가을이 그래서 가나 봐
저녁이라는 말
김수목
내게는 평안이라는 말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는 그때,
지는 해를 보는 것조차도 사치스러웠던 그때,
저녁을 만나기 위해
학교를 때려치웠다면 믿을 수 있겠니?
늘 아르바이트로 바빠야 했던 저녁을 다시 찾아온 거야
햇살이 길게 날개를 내려
그림자인지 그늘인지 아리송할 무렵
선선한 바람도 서서히 불기 시작하면
바로 그때 저녁은
숨겨둔 애인처럼 찾아왔지
부드럽게 머리칼을 만지며 스치는 바람과
라벤더빛으로 변해가는 노을
거리에 나와 노천카페의 목재 의자에 앉아
행인들을 바라보면 저녁을 기다렸지
으스름 저녁은 그때에 오자마자
어둠이 재빨리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지
매일 저녁은 그렇게 왔다 갔지
뜨네기
김수목
지붕부터 그린 게 아닌
집을 짓듯이 주춧돌부터 그리다 만 아이의 그림이
펼쳐져 있다
책상 위 스탠드 불만 켜고 책을 읽는다
내 뒤의 전부는 어둠
어둠은 다가오지 못하고 서성거린다
뜨내기의 아픔도 거기 머문다
너무 오래 죽은 척 살아와서
나이테만 도드라져 있는 기둥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면
얼굴에는 나이테가 또렷했다
늦게까지 혼자 남아 설거지를 하는 아이가 있다
흘러가듯 사람들은 멀리 떠나기도 아이는
떠나지 못한다
아이는 신발을 신지 못한다
어제와 오늘 사이
김수목
어제 지나간 길을 오늘고도 지나간다 시민공원 운동장에는 인조 잔디가 깔려 있고 어제의 사람이 아닌 오늘의 사람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어제의 풀을 깎는 조경사의 제초기 톱날 소리는 날카롭다 예사롭게 어제의 풀잎이 베어져 나간다 다른 조경사는 베어진 풀잎들을 쓸어 모아 포대에 담는 다 어제가 포대에 담겨 나간다 잘린 오늘의 풀에서 풀냄새가 피어난다
오늘의 나는 천천히 원형 트랙을 돌아나간다 마라톤 결승점에 도달한 선수의 지친 몸처럼 나를 끌고 간다 트랙 밖으로 나갈 때도 쓰러지지 않으려 한다 격려해주는 관중도, 한 통의 생수병을 들려줄 코치도 없다
제 빛깔을 잃어가는 가을 나뭇잎 곁에 어제 집을 짓던 거미가 들어앉아 있다 방사형의 정점에 오롯이 앉아 있다 잠자리 날개가 하나가 거미줄에 달려 대롱거린다 잠자리는 탈출했을까, 거미의 하루치 식량이 되었을까 어제와 오늘 사이 잠자리의 행방만이 온전한 존재이다.
나의 멍
김수목
누군가의 평생을 베끼고 싶은 날에
무심코 본 나의 온몸이 멍투성이네
푸르딩딩한 저 멍들의 기원부터 따져보아야겠네
처음에는 내 바깥의 불가피한 타격이었을 것이고
다음에는 내 내부의 치열한 호응이 있었겠네
살갗 아래에 살이 지그시 눌리고
실핏줄의 핏줄기가 돌기를 그만 둔 곳
눈에 꼭 보이도록
누르면 반드시 아프도록
모든 아픔에 초감각적으로 맞서주는 내 살이 지겨워ㅏ지네
이 말은 내 몸이 듣지 않게 침묵으로 속삭이네
무책임한 해안의 아침
김수목
어촌 풍경의 외벽이 단단하다
무채색의 아침이 좀처럼 일어날 줄 모른다
수평선은 등뼈를 빳빳하게 펴고 있다
출항했던 오징어 배가 돌아온다
선미에는 빨간 깃발이 흔들리고 있다
해사가 수평선에서 멀리 물러섰을 때야
안개가 물러선다
무채색이 채색을 하는 시간이다
삐걱거리며 노 젓는 소리로
파도가 서로의 말을 대신한다
방파제의 끝이 손쉽게 다가온다
바다의 자물쇠가 견고하다
쉽게 열러 보여주질 않는다
열쇠는 눈알 맑은 심해어가 갖고 있다는 풍문뿐
가장 처량한 신파가
가장 위대한 법문이라며
해안이 출렁거린다
범박한 오후
김수목
허탈한 만큼, 허전한 만큼
꼭 그만큼만 몸을 누였다.
바깥은 온통 사육 중이었으므로,
차라리 방 안에서 사육당하는 편이 나았다.
현관 앞의 CCTV도 검은 안대를 끼고 있으므로,
전신주 끝이나 교통신호등 위의 그것도 어김없이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이므로,
바깥의 것들은 쉽게 잡혔다.
올가미가 씌워진 오후,
오후가 되면 몸은 더 쓸모가 없어졌다.
꽝 맞은 경품행사만큼,
껌 종이 하나 찾지 못한 야유화의 보물찾기만큼,
허허실실, 허무했다.
햇살 한 줄이 방 안에 비집고 들어오려고 할 때
젖빛 유리로 비쳐든 태양의 표면은
어릴 적 그대로다.
젖빛 유리로는
더 많은 바깥을 볼 수 있다.
두레박소리
김수목
외딴 집에 살던 외할머니 처녀 적 이야기지. 저녁상을 치우고 우물로 물 길러 가면 누가 먼저 와서 물을 푸고 있었다는 거야. 두레박 던지는 소리, 물 푸는 소리, 철벅철벅, 두레박 들어 올리는 소리, 물동이에 쏴 물 붓는 소리. 반가운 마음에 발길을 재촉하여 우물가에 다다르면 머리 푼 소복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대숲 사이로 사라지곤 했단 거야. 우물 속을 들여다보면 우물은 출렁거림도, 물 흘림도 없는 고요한 거울이었대. 보름달이라도 떠 있는 날이면 달도 일그러뜨리지 않고 동그랗게 입 다물고 있는 거였대.
적막한 밤하늘에 보름달이라도 뜬 날이면
지금도 두레박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
유독 나만 이뻐하셨던 외할머니는
가시면서 두레박 소리만 네게 두고 가신 겨
화진포
김수목
밤이라면 어둠은 들키지 않는 게 좋다
체낚이 어선의 집어들이 수다스럽다
조금쯤 삐뚤거려도 거기서 멈춰 서
해무는 집어등 주변을 서성거린다
너무 멀었구나 너무 멀리 떠나왔구나
잔잔한 바다의 조잡한 물결을 가져와
생의 중간쯤 길게 써진 문장에
밑줄을 긋는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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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끝없이 걸었다.
걸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여기가 세상의 어디쯤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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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목 詩集 [※슬픔계량사전※]
[ 해설 ] -
위악僞惡, 게으름, 사랑의 하모니
-김수목의 시
권 온(문학평론가)
1.
김수목은 2000년에 등단한 이후『나이테의 향기』,『브레히트의 객석』,『바그다드 카페』등의 시집을 지속적으로 간행하면서 자신의 시 세계를 활달하게 확장시키고 심화시켜 온 중견 시인이다. 그가 이제 오십여 편의 시편이 담긴 신간新刊을 새롭게 선보인다. 김수목 시의 스펙트럼은 넓고도 깊게 분포되어 있다. 한두 마디로 요약하기 힘든 다채로운 시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이 글은 11편의 시를 특별히 엄선하였다. 밝은 눈으로 함께 살필 일이다.
2.
방 안의 공기는 방 안의 자세를 용서해요
세발가락나무늘보 보다 더 늘어져 있는 나도 용서해줘요
유칼리나무 책장의 변함없는 직립도 기꺼이 받아드리지요. 들쑥날쑥 책의 크기는 물론이고요 깜박이다 서서히 빛을 읽어가는 전등의 필라멘트도 다 묵인하지요
앉기만 하면 빙글 도는 회전의자를 가까스로 정지시켜요
모니터의 카르멘은 아직도 집시 춤을 추지요
나는 이 생을 능숙하게 살아낼 자신이 없다는 말만 동영사의 버퍼링처럼 반복해요
-「오늘은 긴 날이에요」부분
독자로서는 이 시의 화자 ‘나’의 발언 곧 “나는 이 생을 능숙하게 살아낼 자신이 없다”에 우선적으로 주목할 일이다. ‘나’는 ‘이 생’또는 ‘현실’을 살아가는 일이 힘겹다. 그가 ‘상상’이나 ‘환상’의 구현으로서의 ‘시’에 몰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터이다. 더불어 ‘용서하다’,‘받아주다’,‘묵인하다’등 일련의 서술어에 눈길이 간다. 이들 서술어는 삶의 갈등국면에 노출된 ‘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될 거예요
인어공주는 왕자님을 잊을 거예요
인어공주는 수많은 물거품을 거느리고 있을 거다
겹친 듯 겹쳐진 물거품들은 파문이 생기기도 전에 사라질 것이다
잊어버릴 거예요
피라미가 그랬던 것처럼
빗물이 그런 것처럼
지문이 닳아 없어진 것처럼
-「인어공주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부분
이 시가 집중하려는 대목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일련의 ‘말’ 또는 ‘언어’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물음이나 추측을 의미하는 ‘누군가’를 거론하는 까닭은 ‘말’또는 ‘언어’의 주체가 하나로 수렴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목이 드러나듯이 이 작품에서 입을 연 것은 ‘인어공주’이지만 4연과 5연에 제시되는 “물거품이 될 거예요”, “잊을 거예요”, “사라질 것이다” “잊어버릴 거예요” 등의 목소리는 시인의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소멸과 망각을 지향하는 비움의 언어는 김수목 시의 개성이 된다.
밤이라면 어둠은 들키지 않는 게 좋다
체낚이 어선의 집어들이 수다스럽다
조금쯤 삐뚤거려도 거기서 멈춰 서
해무는 집어등 주변을 서성거린다
너무 멀었구나 너무 멀리 떠나왔구나
잔잔한 바다의 조잡한 물결을 가져와
생의 중간쯤 길게 써진 문장에
밑줄을 긋는 밤
-「화진포」전문
화진포花津浦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에 있는 호수인데 인근의 해수욕장이 유명하다. 이 시의 1연과 2연은 화진포의 ‘밤바다’에 집중한다. ‘어둠’과 ‘집어등’과 ‘해무’는 밤바다의 그윽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밤이 선생이다’라는 비평가 황현산의 담백한 표현에 담긴 어떤 진실은 이 작품을 이해하려는 우리에게도 도움이 된다. 시인이 3연에서 “너무 멀었구나 너무 멀리 떠나왔구나”라는 자각自覺에 도달할 수 있는 까닭은 ‘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수목이 발견한 “생의 중간쯤 길게 써진 문장에/밑줄을 긋는 밤”은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다. 이제 ‘바다’와 ‘문장’은 한 몸이 되고, ‘자연’과 ‘언어’는 조화를 이룬다. 체험과 기억의 물결을 건넌 진정한 인간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저녁 들판을 걷다 보면 수시로 각시꽃게거미의 거미줄이 얼굴을 감는다 태어나 가장 진지한 자세로 바람의 방향과 날씨를 가늠하면서 각시꽃게거미가 하늘에 없는 길을 만드는 중이다
유사비행이다
시공을 헤매는 것은 저나 나나 마찬가지겠지만 날개도 없이 날아가는 것들이 무슨 길을 만든다고 버틸 가구도 없이 기댈 벽도 없이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는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했다. 시급 육천 원이라고, 최저 시급보다는 높다고, 가는 허리를 가진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살아낼 길을 만드는 중이었다
웃는 사이 유통기한이 지난 불고기 삼각김밥이 입 밖으로 삐죽이 튀어 나왔다
-「비행거미」전문
이 시는 세 겹의 삶 곧 시의 화자 ‘나’와 ‘각시꽃게거미’와 ‘그녀’의 삶을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세 겹의 삶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얼굴을 감는 ‘거미’의 행위 곧 ‘유사비행’에 주목한다. 거미가 허공에 거미줄을 치는 행위는 진짜 비행은 아니다. ‘나’는 비행을 닮은 거미의 행위를 “시공을 헤매는 것”으로 규정한다. ‘나’는 날개 없는 존재이지만 날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거미의 안쓰러운 모습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거미가 “하늘에 없는 길을 만드는 중”이라면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시급 육천 원’으로 “살아낼 길을 만드는 중”이다. 김수목은 “최저 시급보다는 높다”고 말하며 웃는 그녀에게서, “유통기한이 지난 불고기 삼각김밥이 입 밖으로 삐죽이 튀어 나왔”던 그녀에게서,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한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생生이란 희미한 웃음으로 견뎌야 하는 위태로운 비행飛行임을 적확하게 전달한다.
식물학자는 아까시나무가 맞는 말이라 했지만 나에게는 아카시아가 분명 맞는 말이지요
“아까시”라고 부르면 급하게 닫힌 입술 사이로 꽃향기가 들어갈 틈이 없어요, 하지만 “아카시아”하고 불러주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무한정으로 꽃향기가 넘어와요 덤으로 방정맞게도 찔레꽃의 향기까지
-「너와 나의 이름」부분
주지하다시피 김춘수 시인은 언젠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서 ‘몸짓’과 ‘꽃’의 차이는 ‘이름’의 적절성과 관련된다. 김춘수의 시「꽃」이 대중적 명성을 얻게 된 까닭은 진정한 ‘관계’를 열망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목의 시「너와 나의 이름」역시 ‘이름’에 집중한다. 식물학자에게는 ‘아까시’ 나무가 맞는 말이지만 시의 화자 ‘나’에게는 ‘아카시아’나무가 제격이다. ‘아까시’라는 이름을 발음하다 보면 입술이 급하게 닫히고 꽃향기가 들어갈 틈이 없다. 반면 ‘아카시아’라는 발음을 시도하다 보면 입술이 벌어지고 꽃향기가 풍성하게 유입된다. 적절한 이름을 선택하고 발음하는 일은 개체個體의 본질에 다가서는 일이다. 남들은 ‘아까시’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아카시아’가 맞는 말이라는 인식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개성적인 눈과 다른 말이 아니다.
밖은 무더운데
서늘한 바람은 창을 넘어와
내가 바란 건
따스한 햇살 한 줌인데
손바닥에는 바람만 가득해
낮잠을 자는 고양이를 툭 건드려봐
문 좀 닫아줘
쿨렁 뱃가죽만 들어갔다 나올 뿐
나만큼 무력해
일어서는 건 싫고
닫는 건 더욱 싫고
게으름이 나를 먹여 살리지
게으름 때문에 한 송이 쑥부쟁이 꽃이 피었고
게으른 소 울음 때문에
송아지는 태어났지
게으른 보리는 더디 자라
햇수로는 두 해를 자라야
햇보리가 되지
게으른 가을이 그래서 가나 봐
-「게으른 가을」전문
독자들 중 다수는 ‘멍 때리다’ 또는 ‘멍 때리기 대회’라는 말을 한두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다”를 의미하는 형용사 ‘멍하다’와 관련된 표현이다. 멍 때리는 대회의 등장은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부작용과 무관하지 않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그동안 ‘멍 때리는’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정글 같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긴장의 강도를 점점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위적으로 ‘멍한’ 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극도의 경쟁과 긴장의 시간을 잠시나마 내려놓으려는 몸부림이 바로 멍 때리기 대회이다.
독자들 중 다수는 ‘멍 때리다’ 또는 ‘멍 때리기 대회’라는 말을 한두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다”를 의미하는 형용사 ‘멍하다’와 관련된 표현이다. 멍 때리는 대회의 등장은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부작용과 무관하지 않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그동안 ‘멍 때리는’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정글 같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긴장의 강도를 점점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위적으로 ‘멍한’ 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극도의 경쟁과 긴장의 시간을 잠시나마 내려놓으려는 몸부림이 바로 멍 때리기 대회이다.
독자들로서는 김수목의 시「게으른 가을」을 이러한 오늘의 세태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겠다. 시의 화자 ‘나’는 “일어서는 건 싫고/닫는 건 더욱 싫고”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나’는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게으름 때문에 한송이 쑥부쟁이 꽃이 피었고/게으른 소 울음 때문에/송아지는 태어났지”라는 발언과 “게으름이 나를 먹여 살리지”라는 단언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제 ‘게으름’은 생산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메커니즘이 된다. 시인의 게으름 예찬은 피에르쌍소Pocrre Sansot가 일찍이 언급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와 맥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한다.
도서관에서 잠드는 건 내 삶의 이력인지라
언제 끼어들었는지도 모를
잠의 결에서 허적이는 나를 볼 때면
도서관은 낮잠의 또 다른 이름일 거야
아니지 관능의 다른 처소일지도 몰라
에페소의 셀수스 도서관에
유곽으로 통하는 지하통로가 있었다면
그것도 같은 뜻이잖아
몽매한 눈을 다시 떠서
읽던 책을 들여다본들
지식 하니 더 두껍게 얹어가는 의미 이상
더 뭐가 있겠어?
다시 현실로 돌아와
책과 잠 사이
그냥 희미한 소리들과 미세한 호흡들과
팔랑거리는 책장, 책장들
유난히 부스럭거리는 가을을 노려보며
잠의 노여움을 잠시 달래는
구겨진 서가 끝
형광 불빛만 요란하다
-「책과 잠」전문
‘잠’을 바라보는 김수목의 시각은 개성적이다. 이 시에서 ‘잠’은 두 개의 경향으로 등장한다. ‘책’으로 뒤덮인 ‘도서관’이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면, ‘관능’이 흘러넘치는 ‘유곽’은 다른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
시인이 주목하는 ‘잠’은 ‘낮잠’이다. 김수목에게 ‘도서관’은 ‘책’을 읽는 장소이자 ‘낮잠’을 실천하는 공간이다. ‘도서관’에서의 ‘낮잠’은 일종의 ‘일탈’일 수 있다. ‘낮잠’에 빠진 이는 ‘몽상夢想’의 세계로 나아간다. 창조적인 시인이나 작가에게는 ‘책’을 읽다가 ‘낮잠’으로 침잠한 후 ‘몽상’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필요하다. 김수목은 프로이트Freud나 바슐라르Bachelard가 탐색한 ‘시’와 ‘몽상’의 동거同居에 동의한다.
시「책과 잠」이 내세우는 ‘몽상의 시학’의 개성은 ‘유곽’과 ‘관능’으로 대표되는 감각의 향연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김수목은 전쟁 같은 ‘현실’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두 갈래 길에서 추출한다. ‘도서관’의 ‘책’이 눈에 잘 띄는 대로大路라면, ‘유곽’의 ‘관능’은 은밀하게 숨어 있는 소로小路이다. 우리가 창조적인 시인 김수목이 형상화하는 몽상의 시학에 주목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은 낯선 골목을 헤매는 것과 같았다
문장은 담벼락이 되고
해석은 늘 발밑에서 쿨렁거리는 보도블록이 되었다
걷는 일보다 주변의 것들에 눈을 돌려야 하는 책 속의 세상
자꾸만 눈은 책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고
귀는 세상으로만 열려 있었다
막다른 골목 같은 책 하나를 읽어 넘기면
꿈처럼 그가 다가왔다
또 다른 허기와 궁핍을 품고 사는 난독이라는 그
-「난독이라는 그」전문
김수목의 ‘책’을 향한 관심은 꾸준하다. 시인에게 ‘책을 읽는 것’ 또는 ‘독서’는 “낯선 골목을 헤매는 것”과 같다. 책 속의 ‘문장’은 ‘담벼락’이 되고, 글을 ‘해석’하는 행위는 ‘보도블록’이 된다. 책을 읽는 과정을 새로운 길을 걷는 경험으로 치환하는 시인의 시적 역량이 눈부시다.
누구에게나 낯선 길을 헤매는 일은 버겁듯이, “막다른 골목 같은 책 하나를 읽”는 일은 필연적으로 ‘난독難讀’을 동반한다. 김수목이 걷는 도중에 ‘주변’의 것들에 눈을 돌리고, 독서를 하다가도 ‘책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는 까닭은 ‘세상’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 읽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시인이 개성적인 시를 쓰기 위한 노력을 쉬이 멈추지 않을 것임을 믿는다.
사소한 일이란 게 없지요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일도 실로 위대한 일이지요
오른손을 짚고 서서히 일어나거나
두 발을 동시에 힘을 주고 발딱 일어서는 일도 예삿일은 아니지요
칫솔을 물고 눈을 감을까 아니면
불멸의 얼굴을 마주쳐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요
밥을 먼저 먹을까 콩나물국을 먹을까 생각하는 일도 번민에 속하는 거지요
밥상에 둘러붙은 밥풀때기를 손으로 뗄까 휴지로 뗄까
망설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
현관 앞에 흩어진 신발 중에서
오늘을 실어 나를 신발을 고르는 건 경이로운 일이지요
모든 사물들에게 경어를 쓰고 싶어요
목례로 끝낼 일이 아니지요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청순한 아침이네요
-「경어를 쓰고 싶은 아침」전문
변주變奏란 음악에서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선율․리듬․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하는 행위 또는 그런 연주를 가리킨다. 변주는 비단 음악에만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이는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에 긴요한 요건이다.
인간은 대개 단순한 반복의 누적 앞에서 피로감을 호소하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나날의 일상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고 때로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김수목의 시「경어를 쓰고 싶은 아침」은 우리의 삶과 예술에서 ‘변화’또는 ‘변주’의 능력이 더할 수 없이 소중한 덕목임을 입증하는 귀한 표본이다. 물론 여기에서 강조하는 변화나 변주의 기저에는 ‘반복’의 메커니즘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겠다. 시인은 ‘반복’과 ‘변주’를 결속하면서 시의 주제를 강화되는 동시에 음악성을 고향시킨다. 곧 “~없지요”, “~일이지요”, “~아니지요”, “~거지요”, “~싶어요”, “~아침이네요” 등으로 연결되는 김수목 시의 반복과 변주는 다양성의 힘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을 다 탕진한
돌아온 탕자가 되는 거
침통과 우울을 번갈아 씌우는
사채업자의 낯빛이 되는 일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을 거라고
그래서 사는 거라며 목 놓아 악 써보는 거
한 사내의 연보에
슬쩍 내 이력을 끼워 넣는 일
더 이상 갈 곳 없는 위태로움에
한나절이라도 늦추어 태양이 더디 뜨게 만들고
유약에서 위약까지 세상을 넓히는 일
-「내가 해야 할 일들」부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동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간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살기 위해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반면 인간에게는 하고 싶은 일들도 있다. 생존의 문제를 넘어선 곳에는 자신이 꿈꾸는 일, 자신이 지향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전자前者를 ‘현실’이라 부를 수 있다면, 후자後者를 ‘이상理想’으로 규정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김수목의 이 시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시인은 내심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연의 “시간을 다 탕진한/돌아온 탕자”, 5연의 “침통과 우울을 번갈아 씌우는/사채업자의 낯빛”, 6연의 “목 놓아 악 써보는 거”등은 유약한 성격의 시의 화자 ‘나’에게는 대단한 모험이다. ‘나’는 의식의 세계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무모한 일을 무의식의 세계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유약幼弱’이 아닌 ‘위악僞惡’을 권유한다. 위악은 삶이라는 정글을 견디는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청할 만한 제안이다.
사람이 죽는 순간 순간적으로 살짝 몸무게가 줄어든다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보고서는 영과 혼이 몸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누군가 죽은 사람의 혼이 코로 빠져나가는 걸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혼이 빠져나갈 수 있는 코가 그럼 창문이 되는 걸까
창문이 그리 쉽게 어디서나 열리나
코와 입과 눈과 귀가 다 통해 있으니 코가 창문이라면 혼을 갑자기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몸속에 주저앉아 환생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코가 꽉 막힌 감기증세의 나날이 계속되고 목젖이 부어올라 목구멍을 막는 날에 겨우 일으킨 몸 대신의 생각이다
과학자의 말을 신의 말씀보다 신봉하게 되었다는 예언가의 말을 믿는다
한때는 가난한 연인의 흉내를 내기도 했지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고 공동묘지 사이에 나란히 누워
흐린 눈빛으로 서로의 코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했지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신의 예언보다 확실한 건 사랑이었다
-「예언」전문
사람은 누구나 직접적으로 드러내느냐 아니면 암묵적으로 간직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의 고유한 ‘인생관’ 또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시「예언」은 김수목의 ‘인생관’ 또는 ‘세계관’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권력도 부富도 명예도 죽음의 길을 막아설 수는 없다.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인간은 겸손해지고 경건해진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세 개의 보기를 부여한다. 첫째, ‘신의 말씀’ 또는 ‘신의 예언’, 둘째 ‘과학자의 말’, 셋째, ‘사랑’이 보기의 구체적인 이름이다.
우리는 과연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순간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선 첫째 보기인 ‘신神’의 말씀이나 예언은 ‘종교’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다. 다음으로 둘째 보기인 과학자의 말은 ‘과학’이라는 보편적인 진리 또는 법칙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셋째 보기인 ‘사랑’은 ‘신’과 ‘과학’이라는 양 극단을 포괄하는 인간 고유의 마음일 것이다. 김수목이 삶의 궁극의 목표를 ‘사랑’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은 시인이 로맨티시스트임을 보여준다. 김수목은 이 시에서 ‘종교’에 무조건적으로 몰입하는 것도 위태롭고 그렇다고 ‘과학’을 맹신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시와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3.
이 글은 김수목의 신작 시집에 담긴 시편 중 11편을 취사선택하여 고찰하였다. 그는 삶 또는 현실의 갈등을 해소하는 적절한 방편으로써 시를 내세운다.
소멸과 망각을 지향하는 비움의 언어는 김수목 시의 빛나는 개성이다. 또한 시인이 발견한 문장은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다. 이제 ‘바다’와 ‘문장’은 한 몸이 되고, ‘자연’과 ‘언어’는 조화를 이룬다.
김수목은 독자들에게 생生이란 희미한 웃음으로 견뎌야 하는 위태로운 비행飛行임을 적확하게 전달한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유약幼弱’이 아닌 ‘위악僞惡’을 권유한다. 위악은 삶이라는 정글을 견디는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청할 만한 제안이다.
적절한 이름을 선택하고 발음하는 일은 개체個體의 본질에 다가서는 일이다. 남들은 ‘아까시’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아카시아’가 맞는 말이라는 표현을 세계를 바라보는 김수목의 개성적인 눈을 보여준다.
시인에 따르면 ‘게으름’은 생산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메커니즘이다. 김수목의 게으름 예찬은 피에로 쌍소Poerre Sansot가 일찍이 언급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와 맥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한다.
김수목의 프로이트Freud나 바슐라르Bachelard가 탐색한‘시’와 ‘몽상’의 동거同居에 동의한다. 그는 전쟁 같은 ‘현실’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두 갈래 길에서 추출한다. ‘도서관’의 ‘책’이 눈에 잘 띄는 대로大路라면, ‘유곽’의 ‘관능’은 은밀하게 숨어 있는 소로小路이다. 우리가 창조적인 시인 김수목이 형상화하는 몽상의 시학에 주목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김수목의 시「경어를 쓰고 싶은 아침」은 우리의 삶과 예술에서 ‘변화’ 또는 ‘변주’의 능력이 더할 수 없이 소중한 덕목임을 입증하는 귀한 표본이다. 물론 여기에서 강조하는 변화나 변주의 기저에는 ‘반복’의 메커니즘이 전제되어 있다. 시인은 ‘반복’과 ‘변주’를 결속하면서 시의 주제를 강화되는 동시에 음악성을 고양시킨다. 곧 “~없지요”,“ ~일이지요”,“~아니지요”,“~거지요”,“~싶어요”,“~아침이네요” 등으로 연결되는 김수목 시의 반복과 변주는 다양성의 힘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과연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순간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일까. 김수목이 삶의 궁극의 목표를 ‘사랑’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은 시인이 로맨티시스트임을 보여준다. 김수목은 ‘종교’에 무조건적으로 몰입하는 것도 위태롭고 그렇다고 ‘과학’을 맹신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시와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크고 넓고 깊은 시 세계의 형성으로 연결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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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상처 여행자의 시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수목의 노선을 따라가다 보면 진경이나 정경도 작은 상처에서 비롯되었음을 누구라도 알게 될 터. 문제는 상처를 단지 상처로만 보지 않는 시인의 긍정적 자세다. 세상을 다 덮어버릴 폭설 속에서 “상처도 덮고 덮어 용서라는 이름의 설원만 남을 뿐”(「폭설의 이유」)이라는 인식은 상처를 봉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그 봉합의 기술로 시인은 상처 위에 꽃을 피우고 향기를 피워 약자들을 어루만진다. “이곳과 대척인 그곳의 안부가 궁금합니다”(「안부를 묻습니다」)라는 ‘상처 여행자의 기록’이 내 손끝에서 숨을 쉰다. 격정적으로, 때론 아무도 들춰보지 않는 후일담처럼. 상처의 침묵은 무섭지만 그걸 해제하는 시인의 맑은 심성이 더 무섭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상처를 단지 상처로 보지 않는 힘, 그 긍정의 힘이 이 시집을 빠르게 읽게 한다. 그리곤 이내 빠져들게 한다.
― 고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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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목 시인∥
∙ 전남 강진 출생
∙ 2000년 『문학과창작』으로 등단
∙ 시집으로 『나이테의 향기』『브레히트의 객석』『바그다드 카페』
∙ 산문집으로『내 삶의 이삭줍기』『지중해를 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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