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5(마태복음 20:1~16)22.04.03.주일낮설교
40대 중년 한 그리스도인이 노모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 가기가 싫어진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3가지입니다.
①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이 들고. ② 요즘 따라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서 짜증스럽고. ③ 목사님의 설교가 맘에 안 들어 교회 가기 싫다.
노모님이 회답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가야 한다. 그 이유는 3가지다. ① 주일 아침 예배드리는 것은 선택이 아니고 명령이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③ 그래도 네가 교회 담임목사인데 가야지 안가면 되겠느냐.
요즘 목사님들 만나 보면 목회에 많이 기가 죽어 있습니다.
기업가들도 많이 기가 죽어 있습니다. 어버이들도 기가 죽어 있고,
공부하는 청소년 자녀들도 많이 기가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포도원 품군의 비유입니다.
본문을 보면 커다란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나가서 포도원에 일할 사람을 구해 품삯을 정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2절).
그런데 본문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고 장터에 모여 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데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어느 포도원 주인이 우리나라 시간으로 아침 9시에 일꾼들을 구하려 장터로 나갔다가 놀고 있는 일꾼들에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그들을 자기 농장으로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3,4절).
이 주인은 또 12시에 장터에 가보니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자기 농장으로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5절).
그 후 오후 3시에 다시 나가보니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5절).
유대 시간으로 6시면 해가 지게 됨으로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시간인데 오후 5시쯤에 주인이 장터로 도 나가 보니 아직도 고용되지 못하고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데리고 와서 일을 시켰습니다(6,7절). 마지막으로 고용된 일군들은 고작 한 시간만 일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만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으니 이 사람은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아마도 죽도록 일했을 것입니다.
이제 6시가 되어 일을 그만 두고 품삯을 주인이 나누어주는데 제일 늦게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는데 한 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제일 일찍 온 일꾼들은 자기들이 얼마를 받을까 하고 큰 기대를 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먼저 일한 자기들에게는 많은 품삯을 줄 것이라고 잔뜩 기대를 했습니다(10절).
그런데 주인은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때 이들이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11,12절을 보겠습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우리는 아침부터 와서 온종일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오후 5시에 온 저들과 똑같이 대우를 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불공평한 처사입니다. 이렇게 원망 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먼저 와서 일을 한 일꾼의 불평입니다.
이 같은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부분에 결론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6절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그러면 먼저 온 일꾼들이 나중되리라는 책방을 받았는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까?
첫째는, 그들은 보상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9장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19장 27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는 예수님께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무엇을 얻게 됩니까?”
아무래도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주님! 주일날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몸 드려 봉사 했고,
십일조 생활 잘 했으면, 뭔가 눈에 보이는 복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잘되거나, 증권 투자한 것이 잘 되거나, 사업이 잘되거나,
아니면 로또라도 당첨시켜 줘야 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보상의식, 흥정의식입니다.
베드로에게 이런 흥정의식이 시작되자 믿음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상급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28-30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영생을 상속한다.”고 했습니다. 일단 확실한 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했습니다.
이런 보상의식 때문에 너는 이제 나중 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장터에서 놀고 서 있던 자들입니다(3,7절).
일이 없는 실업자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눈에 띄어 일이 주어진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주인이 베푼 은혜가 아니라 돈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를 불러 준 것에 대해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온 자온 자와 똑 같은 대우를 받으니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생활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봉사, 헌신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감사가 없이 봉사하고, 자기 이익과 보상의 동기로 일을 시작하면 결국 그 봉사는 쉽게 좌절되거나 중단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원망과 불평으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서 은혜라는 단어가 아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아멘
그러면 먼저 온 일꾼들이 나중되리라는 책방을 받았는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까?
첫째는, 그들은 보상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들은 비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과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일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하루 일당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11절을 보면 그들은 주인을 원망합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왜 원망하였습니까? 10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나중 온 자들과 비교한 것입니다.
이 비교가 원망을 낳은 것입니다. 불평을 낳은 것입니다.
먼저 온 자는 주인과 한 데나리에 계약을 하고 와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과 다른 사람의 손에 있는 것과 비교를 함으로서 불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먼저 온 자는 누구를 바라보고 일을 해야 합니까?
주인입니다. 자기를 일꾼으로 불러주신 주인만 보고 일하면 됩니다.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생각으로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약속한 것을 주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먼저 온 자들에 뭐라고 책망하십니까? 13, 14절입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하나님은 비교하지 말고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그리고 ‘내가 내 것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하셨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상급을 기대하며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새의 아름다운 전설적인 이야기를 아시지요?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전설의 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울음소리는 세상에 어떤 소리보다도 아름다운 소리였다고 합니다.
자기의 보금자리 둥지를 떠나간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새는 가시나무를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가장 길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가시를 발견하는 순간 이 가시나무 가시에 스스로 찔려 붉은 피를 흘리면서 죽어갑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 순간 그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새소리보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로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수한 것은 가장 처절한 고통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 새의 운명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심은 십자가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찔리기 위해서, 이 가시나무에 그가 부딪혀 찔려 피를 흘리기 위해서, 그러나 그가 부를 노래를 위해서, 십자가의 마지막순간에 그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마지막 한 순간에 그가 외치셨던 말, "다 이루었다!”
이 한마디의 노래를 위해서, 우리의 죄 사함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바로 그분, 그가 가시나무에 찔리므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옥 갈 존재가 주님의 은혜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가시나무새처럼,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보상의식과 비교의식을 갖고 일하면 나중 된 자들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5시에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나중 된 자로, 먼저 된 자가 되기 위해
남은 생애 죽도록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