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중독성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말이 험악해서 그렇지 '흥미'라고 해도 좋고 '미친다'는 표현도 나쁘지 않아요. 서양철학을 한 1년 가지고 놀다보니 들여다 보고 정리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뜻입니다. 하이데거도 독일 놈입니다. 헤겔 땜에 놈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존재와 시간'이 뭔가 하고 들여다보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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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이 1927년에 나왔으니 내가 아는 구라꾼 중 중 하이데거가 가장 막내 일 것입니다. 쉬운 철학이 어딨겠습니까만 여기까지 오는 중에 '하이데거'가 가장 난해한 것 같아요. 헤겔의 경우는 내용이 방대해서 그렇다치고, 하이데거는 몇 개 되지도 않는데 용어가 어려워서 그런가? 안 언더스텐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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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철학자이면서 무신론주의자는 니체-사르트르 그리고 하이데거입니다. 니기미, 사르트르는 또 왜 튀어 나오는 것이여? '존재와 시간'은 한마디로 삶의 문법을 과학의 논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삶을 과학의 족쇄에서부터 해방시켜주어 삶이 간직하고 있는 다양한 차원과 그 풍부한 논리를 되살려주자는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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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하여 '시간 속에서' 현성하는 존재의 생기와 사건에 주목한 하이데거는 그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 지를 사유해요. 놈은 2,000년 서양철학의 역사가 ‘존재’가 아닌, ‘존재자’에 치중함으로써 본질로부터 멀어졌다고 비판한 인물입니다. 존재(Sein )란 과연 무엇인가? 단어 풀이가 필요할 것 같아요.'존재'와 '존재자'는 무슨 뜻인가? 김효석은 '존재자'이고 내가 사는 방식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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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자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들로 가령 책상이나 고양이 사람 등등 고유명사입니다. 반면에 존재는 존재자들이 있는 그 상태로 존재자들이 존재자라고 불릴 수 있게 만드는 근거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따라서 '존재'는 언제나 어떤 '존재자의 존재'일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하이데거와 이전 철학들의 확연한 차이같아요. 하이데거는 이전 형님들이 이 같은 구분을 제대로 못하고 존재 탐구에 있어서 허우적 댔다고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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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 같은 것이 있는데 이를 '존재론적 차이'라고 불러요. "현존재"의 현은 '거기에' 뿐만 아니라, "존재가 드러나 있다."는 의미도 있는데 이것은 현존재인 인간이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있는 존재자라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의 존재이해는 막연하고 피상적이기 때문에, 올바른 존재물음이 제기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차이를 주시하는 일이 먼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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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어요. 만물은 ‘서로를 지시하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고유한 가치를 지닌 존재자로 존재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하나의 대상을 받아들일 때, 지각하고 인식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선험적으로 이해하고 내 삶의 존재양식 안에 포함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존재란 은닉해 있지만, 비밀스럽게 다가와 이러한 우주의 조화로운 공속을 열어젖히고 감추어져 있던 본질을 ‘탈은폐’시키는 ‘환한 터’인데 인간이란, 존재가 밝혀지는 바로 이 ‘열린 터’ 안에 있다는 것 같아요. 무시기? 산 넘어 산이지만 일단 넘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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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 중에 '존재의 이유'라는 곡이 떠오르는데 설마 하이데거를 텍스트로 곡을 뽑은 걸까요? 하여튼 존재는 존재자와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 물음에 있어서 존재는 존재자가 밝혀지는 방식하고는 다른 방식으로만 밝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현존재(Dasein)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진공상태에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적인 배경 속에서 그 속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Let's not forget that. 그걸 잊지 말자고.
2024.1.13.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