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430>콩닥콩닥 뛰면서 오두방정
9. 상견례 <1>
'허, 이 년의 팔자 욕되고도 욕되도다. 내 어찌 전생에 지은 죄가 없으까만, 나이 일곱에 철이 들고부터 허다못해 개미 한 마리 내 눈으로 보고는 쥑인 일이 없거늘, 어찌허여 만나는 사내마다 앞다투어 고태골로 가는고?'
꼴에 제가 쳐 먹을 푸성귀는 제 손으로 가꾸어 먹겠다고 마당 앞 텃밭에 괭이질을 하던 옹녀 년이 한숨을 푹 내쉬며 괭이자루를 내던지고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넉두리를 늘어 놓았다.
"꿩꿩꿩. 뻐꾹뻐꾹."
때는 바야흐로 앞산 암뻐꾸기는 뒷산 숫뻐꾸기를 찾아가고, 뒷산 까투리는 앞산 장끼놈을 찾아가느라 꿩꿩 뻑뻑 울어대는 봄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밤내내 흘레를 하느라 삼년 묵은 청상이 시어머니 눈치에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끙끙거리듯이 밤내내 앓는 소리를 내던 산봉우리들이, 대명천지 밝은 날에 가랑이 쩍 벌리고 감창소리도 요란하게 골짝물을 천방져 지방져 흘러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졸 때다, 졸 때구만. 까투리야. 너넌 좋겄다. 힘 좋은 장끼놈이 두 다리로 네 등짝 꽉 움켜잡고, 두 날개 활짝 편 채 야들야들헌 가운데 다리를 네 아랫녁 살집에 푹 꽂아 줄것이니, 하늘을 날겄구나, 구름을 타겄구나.'
산은 산끼리, 물은 물끼리, 날 것은 날 것끼리, 기는 것은 기는 것끼리, 밤이나 낮이나 흘레를 하느라 숨넘어가는 소리 요란한 봄의 자태에 옹녀 년은 나오느니, 한숨이요, 흐르느니 눈물이었다.
어찌어찌 아들 하나 낳아주고 그 그늘에서 날마다 새록새록 커가는 어린 것 재롱도 보면서, 먹새 걱정, 입새 걱정 없이 이부자의 그늘에서 남은 한 평생 살다가 나중에 늙어 허리가 굽으면, 씨받이로 낳은 자식일망정 자식은 자식이고 어미는 어미니까, 그 인연 나몰라라할까, 어미를 모른다고 지리산 깊디깊은 골짜기에 설마 고려장이야 시킬까. 아들 그늘, 그것 한 가지 바라고 이부자의 씨를 받던 날, 씨 한 알 채 떨구지도 못하고 가슴골짜기에 얼굴을 쳐박고 죽은 이부자 천수 놈이 생각할 수록 원망스러웠다.
'하이고, 징허고도 징헌 것들.'
옹녀 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씨받이 계집 하나 잘못 들여 하늘같은 지아비가 돌아가셨다고 입에 거품 물고 머리채 휘어잡는 안방 마님이야 그렇다고 치드래도, 문중의 일가부치들이 모두 모여들어 장사 치룰 생각은 않고, 천하의 잡년부터 때려 죽여야한다면서 몸둥이 들고 설치던 꼴이 떠오르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오두방정을 떨었다.
세상의 달고 쓰고 맵고 시고 짠 맛을 골고루 맛 본 옹녀 년도 살기 띤 눈빛에 푸들푸들 떠는 몸둥이 끝을 보자 오금이 저리면서 숨이 컥 막혀 할 말을 잃고 뒤로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가루지기 <431>또 사내 하나를 잡아 묵었구나
9. 상견례 <2>
그러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끝은 천길 벼랑이라는 것을 모를 옹년 년 또한 아니었다.
"성수씨, 우선 성님이 저 년한테 주었다는 논문서부텀 되찾읍시다."
이천수를 성님이라고 부른 호리낭창한 체격에 눈알을 슬슬 굴리는 폼이 막상 제 처지가 곤란하게 되면 제일 먼저 줄행랑을 놓을 것 같은 사내가 몸둥이를 빙빙 돌리면서 옹녀 년의 머리칼 한 움큼 뽑아들고 앉아 나는 못 살아, 나는 못 살아,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이천수의 마누라를 꼬드기고 나왔다.
"논문서 뿐이겄는가? 입고 있는 옷도 싹 벳겨 쫓아뿌러야허능구만."
다른 문중 사내가 한 마디 거들고 나왔다.
그 말에 옹녀가 정신을 퍼뜩 차려 헝클어진 머리부터 추스리고 마당의 문중 사내들을 내려다 보았다. 자기들하고는 손끝 한 번 스친 인연도 없었고, 쓰디 쓴 탁배기 한 잔 얻어 마신 일도 없건만, 어찌어찌 말품이라도 팔아주면 이천수의 마누라한테 논 한 마지기라도 더 소작 얻을까하여, 몸둥이 들고 설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사내들의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옹녀 년의 머리 속으로 내가 이럴 때가 아니제, 까딱 잘못허면 이부자가 죽은 덤테기를 꼼짝못허고 쓰고 말 것구만이,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천수 놈이 숨줄을 놓는 그 순간에야 내가 또 사내 하나를 잡아 묵었구나, 하는 경황중에 머리채도 잡혀주고 욕이란 욕은 다 받아 먹었지만, 자칫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 천길벼랑이라는 깨달음에 눈쌀이 먼저 알고 꼿꼿이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나마 선금으로 받은 논 열마지기 문서를 빼앗기고 몽둥이 찜질에 허리병신이 된 채 사내 잡아 묵은 년이라는 너울까지 쓰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옹년 년의 머리 속에 서리가 내렸다.
천하의 잡년 옹녀 년이 아닌가? 몸둥이 하나로 충청도에서 전라도 지리산골까지 흘러 온 옹녀 년이었다. 호락호락 당할 수는 없었다. 죽을 때 죽드래도 짹소리는 하고 죽어야 했다.
눈에 불을 켠 채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문중 사내들 앞에 옹녀 년이 죽을 각오로 눈 몇 번 감았다가 뚝 부릎 뜬 채 허리에 두 손 걸치고 당당하게 마주섰다.
"나를 쥑일라면 쥑여보씨요. 내 죄가 먼 죄요? 내가 죽어야헐 죄가 멋이요? 운봉 삼거리 주막의 주모헌테 물어보씨요. 싫다고 싫다고 허는 나를 억지로 들여앉힌 사람이 누군가 알아보씨요. 논문서 ?기고 가마보냄서 싫다는 이 년얼 이 집꺼정 데리고 온 것이 누군가 알아보씨요."
살기등등한 사내들이 무서웠지만, 에라이, 이놈의 인생, 한 번 죽제 두 번 죽냐, 하고 나서자 나중에는 옹녀 년의 목청이 집안을 크렁크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