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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부터 예년 기온을 회복한답니다. 옷도 이미 바꾸어 정리하였으니 이제는 여름이어야만 합니다. 젊은이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요즘 청년들이 노인들만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서 코로나19라도 물러가고 자유롭게 활동하면 좋겠습니다. 그 때는 나아지겠지요. 그런 희망이라도 가져야 합니다. 시간이 간다는 것이 그런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주니까요. 또 한 주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새 달이 보입니다. 나아지리라 기대하면서 한 장을 넘길 것입니다.
이 여름에는 무엇을 꿈꿀 수 있을지 ---- 아무튼 건강해야 꿈도 꿉니다.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1년 5월 22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5-16주일설교(하나님의 소원)
성경 신명기 28 : 1 - 6 2021년 5월 16일
설교 : 하나님의 소원 김종우 목사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혹시 우리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도들이 대부분 생소한 질문으로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여태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었지만 우리 아버지의 소원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소원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소원이 없을까요? 좀 더 쉽게 풀기 위하여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되면 여러 가지가 떠오릅니다. 특히 그 모든 것을 요약하면 이 말씀이 대변하리라 믿습니다. 딤전 2 :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사실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소원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아버지의 소원인 것입니다. 아비의 소원은 다른 것이 아니지요. 자식이 잘 되는 겁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인들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아비를 등지고 아비를 대적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압살롬은 형제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자입니다. 이복남매 사이에 불미한 일이 생겨서 이복형을 살해하고 도망가기는 했지만 아비는 그 아들을 잊지 못합니다. 삼하 13 : 39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그래서 결국은 돌아오게 하지요. 그러나 돌아온 그 아들이 무슨 짓을 합니까? 이번에는 아비를 대적합니다. 아비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 합니다. 부자지간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압살롬은 그 죄 값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그는 마땅히 죽을 자입니다. 그 누구도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식입니다.
성경에는 자식에 대하여 엄하게 대하라는 부분도 있습니다. 신 21 : 18 - 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아무리 패역해도 자기 자식이 죽는 모습은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가 죽이지 못합니다.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대장 부리바’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아비가 직접 아들을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나라를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남의 손을 빌리기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은 아플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악을 결코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죄악의 근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쉽게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약속하신 바요 그 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창 2 :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과가 대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죄로 인하여 계속 우리 자신이 죄를 지며 살아갑니다. 우리 스스로 짊어졌어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가운데 보내주셨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 : 29) 우리로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이로써 해결하는 길을 얻은 것이지요. 오로지 믿음으로 값없이 얻는 복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마땅히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엉뚱한 자가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또한 다 그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가 사망이요 멸망임을 알지 못하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이 땅이 다시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펼쳐 나가십니다. 처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그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없이 진행됩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약속하면서 진행하십니다. 결국 때가 되어 그 아들 메시야가 세상에 오십니다. 그런데 다시 엉뚱한 결과가 생깁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멘! 하나님 백성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 그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새롭게 진행됩니다.
하나님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벧전 1 :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이고 말씀으로 계속 살아야 하며 그래서 계속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먹거리가 종종 말썽을 핍니다. 부정식품이나 불량식품들이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먹어야 할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장난질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마 13 : 24 - 25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주님은 좋은 씨를 뿌리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립니다. 어디에요? 바로 그 밭입니다. 곧 주님의 밭이지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양식을 먹으려고 교회에 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자기 밭에 뿌리는 ‘좋은 씨’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 말씀으로 우리가 거듭나고 우리의 영혼이 삽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다른 씨가 뿌려진답니다.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여 자기 사람들로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세력을 만들고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니 하나님 백성을 붙잡으려 어디에 나타나겠습니까?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하나님의 원수, 마귀가 어디에 나타나서 활동한다고요?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입니다. 그러니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뵐 수도 없고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오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왜 말씀(성경)을 주셨습니까? 우리는 왜 성경을 읽습니까? 그 이유와 목적은 분명합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아멘! 그렇습니다. 이 성경은 바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고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길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고 진리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에 있고 성경이 또한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성경을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을 뿐만 아니라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멘!
아이가 학교를 성실하게 열심히 잘 다닙니다. 가방에는 배워야 할 교과서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가지고 다닐 뿐 읽지도 않고 배울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뭣 때문에 학교를 다니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진학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성실하게 열심히 잘 다닙니다. 성경책도 잘 가지고 다니지요. 그런데 정작 그 성경책은 읽지도 않습니다. 읽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지고만 다닙니다. 성경을 아십니까? 물어보면 안다고 합니까, 모른다고 합니까? 5년을 다녀도 10년을 다녀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알고나 기도하는 것일까요? 무엇을 기도합니까? 그야 당연히 자기 소원이나 부르짖고 있겠지요. 잠 28 : 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하나님 말씀은 듣지도 않고, 다시 말해서 알지도 못하고 기도하면 그 기도는 가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살전 5 : 17) 하셨으니 기도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먼저 마음에 하나님 말씀을 담고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덮어놓고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이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그것을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 : 10) 우리가 주기도문은 주문 외우듯이 잘 외워도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고나 합니까? 누구 나라가 어디로 임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죄악으로 가득차고 죄인들로 가득 차있는데 오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보면 어떻게 된답니까? 죽습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바로 죽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고 싶어도 못 오십니다. 모두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래서 오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려고 오신 것입니다.(요 1 : 29) 히 9 :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아멘! 그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죄의 문제는 그렇게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옛날 하나님이 세상 만민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제사장 나라로 세워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아멘!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가운데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고 그들을 제사장 곧 왕으로 세워서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키도록 하십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 놀라운 사명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크나큰 복이고 영광이지요. 아무나 선택받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가 다 받는 것이라면 구태여 선택이란 말을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민’이란 특별한 은혜인 줄 믿습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은 누가 누구에게 말씀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세상 인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태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 할지라도 이 말은 누구에게 고하라고 하십니까?(출 19 : 5 - 6) 하나님 백성 곧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녀 곧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들이 생겨납니다. 점점 세상이 정복되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처음 아담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됩니다.(창 1 : 28)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사해지고 마귀가 쫓겨나고 과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늘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올 것입니다. 할!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고 기도하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 그 날을 소망하며 살고 있는 줄 믿습니다.
실제로 그런 날이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오지도 않는데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까? 영원히 기도만 하다 끝나라고 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때마다 기도하는데 결코 응답이 없다고 한다면 기도하겠습니까? 기도하는 것은 그 기도대로 이루는 때가 있을 것을 확신하기에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라면 뭐하려 기도합니까?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루어지는 때가 있으니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 그런 날이 오리라고 예수님이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언제입니까? 성경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 곧 마지막 때입니다.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계 21 :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곧 천국이 내려옵니다. 어디로 내려옵니까? 그야 이 세상으로 내려오지요.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 백성이 복을 받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망하는 것을 보고자 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자녀로 삼으셨다면 어찌 저주 받고 망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 백성에게 누누이 복을 약속하십니다. 문제는 복을 받아야 할 그 백성에게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창 1 : 27 -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복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복을 받지도 누리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요? 한 마디로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그 복은 항상 조건부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신 28장입니다. 1 - 2절을 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아멘! 조건은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듣고 싶지 않고 읽고 싶지 않다면 그 불순종의 결과에 대하여 그 뒤에 길게 말씀하십니다. 15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이 저주에 대해서는 16절부터 68절까지 말씀하십니다. 복의 말씀에 비하면 몇 배나 길게 나오지요.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순종합니까? 그렇게 무섭게 경고해도 하나님을 떠나는데 얼마나 용감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망하는 것은 저 세상에 앞서 바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앞서 당신 백성을 먼저 심판하십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당하는 일입니다. 나라가 외적에게 침략을 당하고 멸망에 달합니다. 그런 때는 사실 힘이 모자라서 망하기도 하겠지만 우리 안에 배반자가 있어서 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더 밉습니까? 어느 쪽을 먼저 때려주고 싶습니까? 침략해 들어온 원수 외적입니까, 그 외적에게 빌붙어 정보를 제공해준 반역자입니까? 우리 속담에도 있습니다. 핍박하는 시어머니보다 편을 드는 시누가 더 밉다고 하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입장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원수 사단 마귀보다 마귀에게 붙어 이간질하는 반역자를 먼저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실제 그러지 아닌지는 마지막 때, 계시록이 이루어지는 때의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암 3 :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래서 마지막 때의 일도 사도 요한을 통해서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가서 보고 배우면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혈통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과는 구별이 되지요. 요 1 : 12 - 13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다시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 우리 곧 영적인 이스라엘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같은 복을 주시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벧전 2 :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은 변함없이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여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지요. 문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선 알아야 하지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덮어놓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까?
교회를 10년 20년을 다녀도 공부는 하지 않고 책가방만 가지고 다닌 학생처럼 아는 것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대학을 들어가려고 해도 몇 년을 고생하는데 영생을 보장하는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는 그렇게도 무심합니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도 싸구려입니까? 얼마나 무식하고 무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아직도 젖먹이가 되어 땅을 기고 있는 줄 깨달아야 합니다. 대학에도 못 들어갈 실력 가지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무식하였다고요? 대신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24시간 예수님 따라다니며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과 저주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물론 우리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겔 18 :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찌니라” 아멘! 지식이 없어 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호 4 : 6)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그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말씀 배우는 일이 우선입니다. 말씀이신 그 분을 만나면 길이 열립니다. 할!
<비와 당신의 이야기>
반세기 전, 복사기가 없던 때입니다. 영자 타이프도 사용하는 곳이 많지 않으니 그것도 쉽게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한글 타이프는 나왔던가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편지라는 것이 쉬운 통신 수단이기는 하지만 편지를 쓴다는 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언제 무엇을 보냈는지 알 수 있도록 복사를 해두면 좋았겠지만 복사기가 없으니 같은 내용을 사본으로 또 기록해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튼 편지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면서도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 손으로 쓰는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컴퓨터나 노트북이 매우 흔하니까요. 그래서 빨간 우체통을 보는 것도 이제는 신기하기도 합니다.
손으로 기록하는 일이 이제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해보고 싶어집니다. 어느덧 버릇이 되어버려 써서 편지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내용을 보관하려니 따로 복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감내해야 합니다. 컴퓨터로 하면 프린트해서 보관하든지 그냥 컴퓨터 안에 저장해두어도 됩니다. 아주 편리하지요. 그래서 구태여 손으로 쓰지 않고 글자판을 칩니다. 여러 가지로 편리하고 유용합니다. 때로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왠지 정성이 덜 들어가는 듯한 기분 말이지요. 하지만 키보드자판을 두드린다고 해서 생각 없이 치는 것도 아니니 정성이 빠질 리는 없습니다. 더구나 하지 않는 것보다 그렇게 해서 편지를 하는 것도 정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때 일이 떠오릅니다. 운동회 때 다친 자기를 찾아와 손수건을 건네준 아이, 이름까지 떠오릅니다. ‘공소연.’ 이제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다 큰 청년입니다. 나는 서울 올라와 아직 삼수생이지만 소연이는 아직 거기 살고 있을까? 그 때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냅니다. 주인을 찾아갈까? 답장이 올까? 아마도 긴가민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답장이 왔습니다. 놀랍고도 반갑지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10년도 넘는 세월의 공백이 있는데,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적을 당하니 더욱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를 담아 자신의 재주로 강아지 인형을 만들어 보내줍니다. 화답이라도 하듯 이제는 답장을 재미있게 만들어서 보냅니다.
이제 기다리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쓰고 받고, 그렇게 시간이 흐릅니다. 함께 공부하는 당돌한 여학생 ‘수진’이 당차게 밀어붙여도 밋밋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수진이 또한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하기야 처음부터 애인으로 다가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공부도 해야 하지만 그만한 나이에 스며든 이성에 대한 동경도 작용하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미는 없습니다. 그냥 동급생이고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재수생입니다. ‘영호’와 수진은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친구입니다. 영호의 마음 또한 편지와 소연이에게 향하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수진은 그런 사실을 알 턱이 없습니다. 그냥 영호는 아직 이성에 눈이 뜨지 않은 소년입니다.
소연이는 지병으로 입원 중이고 기한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몸은 거의 움직일 수 없고 의식만 있습니다. 그래서 동생 소희가 언니의 편지를 대신 읽어주고 대필하여 보냅니다. 죽음 앞에서 하루하루 시간과 싸우던 소연이는 어쩌면 그 편지로 인해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기쁨을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소희 또한 언니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기쁘게 중간 역할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때가 되어 언니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래도 편지가 이어집니다. 아마도 그래서 영호는 소연이를 찾아보려 했을 것입니다. 이미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니, 속으로는 놀랐겠지요. 그렇다면 편지의 주인공은 누구지?
편지를 주고받은 처음에 소연(소희)은 미리 약속을 청합니다. ‘질문하지 않기, 만나자고 하기 없기 그리고 찾아오지 않기.’ 시간이 지나 소연이는 보고 싶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만나지 못하고 떠납니다. 여태 편지를 실제로 주고받은 소희는 어떨까요? 사실 옛날 운동회 때 영호를 만난 아이는 언니의 옷을 빌려 입고 나간 소희였으니 말입니다. 보다 좋은 모습으로 한번 만나기를 청한 영호는 자신이 지키기 어려운 청을 합니다. 그래야 오히려 상대방이 응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12월 마지막 날 비가 오면 학교가 있던 그 자리(지금은 공원)에서 만나자고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이룰 수 없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매년 연말에 영호는 그 자리에 나가봅니다.
청년이 된 영호와 주변 인물들, 2천 년대 초반입니다. 그 후 약 십년의 기간을 영호는 그 자리에 나가지요. 현실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편단심 민들레가 있을까요? 아니면 팍팍한 현실을 깨뜨려보고 싶은 동화를 등장시키고 싶은 것일까요? 영호 아버지의 가죽공방과 소희 엄마의 헌 책방은 오랜 시간을 담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현실처럼 그리고 오늘처럼 ‘빨리 빨리’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이야기지요. 그 속에서 펼쳐지는 느리지만 생각하며 걸을 수 있는 예쁜 이야기랍니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Waiting For Rain)를 보았습니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어느 날 아침, 어제와 다른 아침입니다. 일어나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제와 딴판입니다. 엄마는? 오늘은 아빠와 아침을 먹어야 해. 학교는? 아빠가 데려다줄 거야. 여태 없었던 일이고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일입니다. 의례히 엄마가 챙겨주었고 엄마가 옆에서 해주었던 일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아침상도 다릅니다. 맛도 모양도 다릅니다.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기는 배가 고프다면 가릴 것도 없지만 기분도 마음도 상해 있는데 먹을 것이 맛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바쁜 아침, 후다닥 해치우고 부지런히 등교해야 하고 출근해야 합니다. 엄마라면 출근이 없으니 여유가 있을 텐데 아빠는 그렇지 못합니다.
엄마는, 아빠는, 자식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을까요? 결혼생활 7년, 엄마는 자신의 삶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점점 우울해지는 자신에게 날마다의 시간이 더욱 어두워지는 듯합니다. 이렇게 인생을 끝내야 하나? 남편 치다꺼리하다가, 아기를 갖고는 아이 뒷바라지하다가, 그렇게 그냥 늙어버리고 마는가? 그게 내 인생이아야 하나? 그 전에 혹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는 않을까? 견디기 힘든 나날을 생각, 또 생각하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를 찾아 나가자. 그래서 일곱 살 아들 ‘빌리’가 잠든 머리맡에서 작별을 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 남편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남편 ‘테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된 듯한 표정입니다. 과연 돌발 사태입니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 그 바쁜 아침을 어떻게 때웠는지도 모릅니다. 서둘러 빌리를 등교시켜 주고 사무실 출근을 했지만 지각입니다. 그 전날 창창한 앞길을 예고해주었는데 그 첫날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시간 되면 다시 빌리를 하교시키러 가야 합니다. 역시 늦습니다. 빌리는 화가 나있습니다. 지켜주던 학교 선생님도 짜증이 날 것입니다. 다들 데려갔는데 빌리 혼자 남았으니 언제까지 기다려주어야 하나, 황금 같은 시간이 그냥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백번을 사과해도 마음 편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마찬가지겠지요. 그렇게 몇 날을 지내야 합니까? 가끔은 빌리와 놀아주어야 합니다. 밤에는 책도 읽어주고, 잠자리도 챙겨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지요. 조금씩 익숙해집니다. 빌리도 적응해갑니다. 그런 대로 생활리듬을 회복합니다. 그러나 일과 육아는 병행하기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어린아이에게는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종종 사고도 당합니다. 그래서 회사 출근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고 근무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중요하고 바쁜 일도 건너뛰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개인사정이지요. 회사가 그런 것을 일일이 보살펴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날 두 해가 다 되도록 소식 없던 아내가 찾아와 빌리를 데려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좀 익숙해지고 빌리와도 한결 가까워지고 아이와 함께 하는 즐거움도 누리고 있는데 이제 와서 데려가겠다고? 무슨 권리로? 그야 엄마니까.
결국 양육권 소송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자니 부모 어느 쪽이든 양육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제일 우선입니다. 무직 상태에서는 승소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테드로서는 어찌 됐든 직장을 가져야 합니다. 여태의 경력을 무시당하고 보수가 대폭 삭감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직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모든 악조건을 감내하고서라도 직장을 얻습니다. 그리고 재판에 응합니다. 그래도 상황은 ‘엄마 우선’으로 진행되는 듯합니다. 더구나 아이를 돌보던 중 사고가 났던 일이 매우 불리한 증거로 제시됩니다. 남자가 아이를 돌보는 한계로 비추어집니다. 좀 더 세심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아이는 역시 여자가 맡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식이 지배합니다.
재판 과정을 보면 비단 여기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진행됩니다. 그것이 원고든 피고든, 고소인이든 피고소인이든 득이 될 수도 있고 손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어느 쪽이든 논점을 이끌어가는 변호사 또는 검사의 능력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일을 ‘가’나 ‘부’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어느 사건이든 그렇게 두부 자르듯 판명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보다 나타난 결과라는 것입니다. 과정이야 개인사정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벌어진 일, 나타난 일이 판가름을 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이지요. 그러나 결과가 그렇게 보여주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패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내인 ‘조안나’가 아이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법정투쟁까지 온 것도 사실은 자기 입장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혼법정에서 특히 양육권을 가지고 다툴 때 정말 고려해야 할 부분을 깨우치는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헤어질 때 당사자들도 아프겠지만 정작 가장 상처를 받는 사람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요? 자식이 어릴수록 상처는 깊고 오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어른들이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Kramer vs. Kramer)를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1979년 작인데 그 이야기는 지금도 현실적으로 유효하게 미칩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부모가 헤어지면 사실 아이들이 힘들 것입니다. 부모야 일단 자기네가 선택한 것이니 힘들어도 자기 부담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기네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당한 일입니다. 강제로 원하지 않는 환경에 내몰리는 것입니다. 아직 인생을 견딜 만한 경험도 지구력도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당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간이 해결하고 타고난 적응력이 작동을 하겠지만 한 동안 어려움을 견뎌야 합니다. 울고불고 야단해도 해결될 사항이 아닌 만큼 이상 반응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격상의 문제가 만들어질 수도 있고 정서적 이상 현상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자라면서 그리고 자라고 나서도 어쩌면 그 후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종종 양육권 다툼으로 재판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아이들 입장보다는 현실적인 환경이 판단을 이끌기 십상입니다.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먹고사는 일이 기본이니까요.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배가 고프면 그 다음 일이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양육할 경제적 능력이 있는가 따지는 것이 먼저입니다. 아이들의 정서적 입장은 차선의 문제일 뿐입니다. 경제력이 있는 쪽으로 아이들은 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부모가 함께 있어야 아이들에게는 최선의 환경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한편으로 가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아이들도 어쩌지 못하고 선택해야 한다면 감정이 기우는 쪽이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 한 쪽도 한 주에 몇 번 또는 한 달에 몇 번 만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니 기다리며 살 수 있습니다.
재능은 있어도 돈벌이에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사회적 여건이 형성되지 않은 경우일 테고 아니면 합당한 사용처를 찾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아무튼 기회가 되지 않으니 실생활에 유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배우자에게는 유명무실해집니다. 아직 남성이 전업주부 역할을 하지 않는 시대의 이야기이니 안타까운 면도 있습니다. 물론 아내가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전업주부다운 일과를 수행해야 하는데 가사는 제쳐두고 아이들과 지내는 것에만 골몰하는 것입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쉴 틈이 없습니다. 난장판 된 집안을 정리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 남편을 누가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한계에 부딪칩니다. 그래서 헤어집니다. 아이들도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에게로 돌아갑니다. 아이들은 아빠와 헤어지기 싫어도 강제집행 됩니다. 물론 아이들 없이는 못산다고 아우성쳐도 남편, 아이들의 아빠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아이들과의 만남은 주 1회로 그칩니다.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현실을 파악하여 문제 해결을 찾아 나섭니다. 우선 직장을 구해야 합니다. 기술이 있는가? 재능이 있기는 한데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다 아내가 가사도우미를 찾는 광고가 난 것을 봅니다. 아이들과 늘 같이 있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아이들과 지내며 돈도 벌 수 있는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직장입니다. 기지를 발휘하여 모든 경쟁자를 제치고 취업을 합니다.
오랜 경험을 지닌 유능하고 인품을 갖춘 고상한 할머니로 분장해서 취업에 성공하지요. 아이들과는 잘 지내지만 가사는 해보지 않은 새로운 직종입니다. 이런저런 사건을 일으키지만 능수능란한 임기응변으로 해결해 나갑니다. 아이들과도 사이는 좋으면서 좀 더 교육적으로 발전해갑니다. 사실 여태 깜깜했던 가사에 눈을 뜨게 됩니다. 집안은 깔끔해지고 음식도 멋지게 준비합니다. 주인도 아이들도 모두가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식구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여자가 혼자가 되니 은근히 다가오는 사내들이 있게 됩니다. 역시 은근히 그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했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그 사이 방송국 청소부로 소위 투잡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재능이 활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린 막내를 빼고는 화장실 사건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속았다고 당장 해고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송으로 히트를 칩니다. 더구나 가사도우미를 다시 찾던 아내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도무지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만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기야 부모만큼 아이들과 집안일을 잘 처리해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은 다시 맡기기로 합니다. 재결합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상호 이해하며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요즘은 결혼보다 흔한 일이 이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의 삶의 가치와 중요성에 눈을 떴다고 할까요? 한 번의 인생인데 죽어 살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내 인생, 내가 만든다는 의지로 자신만의 삶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문제는 자식을 가진 다음에 깨달은 시점입니다. 물론 이혼까지 많은 숙고를 합니다.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서기까지 고민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결단을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통해서도 보았습니다. 모두가 아픈 일입니다. 가능하면 어떤 방법을 구해서라도 함께 해로하는 길을 찾기를 소망합니다.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Mrs. Doubtfire)를 보았습니다. 1993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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