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제주도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관광자원으로 국내는 물론 중국에 이르기까지 관광과 휴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 자연유산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로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조명도 받고 있다.
이번 제주 답사기행은 현재의 화려한 조명 뒤에 숨어 있었던 과거를 되짚어 보며 시대별로 답사지를 엮어보고자 하였다.
# 선사시대 제주...삼성혈
삼성혈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34호이다. 지금부터 약 4,300여년 전 제주도의 개벽시조 삼을나 삼신인[三神人, 高乙那, 良乙那, 夫乙那)이 이곳에서 동시에 태어나 수렵생활을 하다가 우마와 오곡 종자를 가지고 온 벽랑국(碧浪國) 삼공주를 맞이하면서부터 농경생활이 비롯되었다. 이때부터 탐라왕국(耽羅王國)이 시작되었다.
# 삼국시대... 성주청 터
성주청(星主廳)은 탐라국의 지배자였던 성주가 집무를 보던 관청이다. 탐라국은 삼국시대 탐라라는 고대국가를 형성, 통일신라 때부터 신라의 간섭을 받는다. 탐라의 왕후에게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봉직을 세습하게 하였다. 1403년(태종 3년) 성주제도가 폐지되어 조선시대에는 진무청으로 존속했다. 일제시대에 제주우편국 청사가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고려시대...굵직한 사건들이 넘쳐나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별동대이다. 고려가 1259년 몽골과의 강화를 맺자 무신정권은 몰락하게 된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삼별초 해산 명령에 불복한 삼별초는 배중손을 중심으로 반기를 들고 강화도에서 왕족 왕온(王溫)을 왕으로 내세우고 봉기한다. 배중손은 1천 여 함선을 징발하고 고려 정부 재화를 약탈하여 진도 용장사에 행궁을 짓고 용장산성을 쌓고 저항한다.
1271년 음력 5월 여몽연합군이 용장산성을 함락시키고 배중손이 사망하자 김통정이 이끄는 잔존 세력은 제주로 건너가 자리잡은 거점이 항파두리이다. 둘레 6km, 도성 성안에 750m 석성을 쌓아 명월포(明月浦)로 들어오는 토벌대와 대치한 곳이다.
원종 14년(1273년) 음력 4월 김통정이 투신함으로써 삼별초는 전멸하고 난이 평정된다.
1273년 원종 14년 원나라가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설치하고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제주를 직접 통치하는 100년의 역사가 시작됨으써 탐라인들이 겪는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로부터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1374년 최영 장군이 목호(牧胡)의 난을 토벌함으로써 탐라는 다시 고려로 환원된다.
- 고려시대 3대 사찰... 원당사, 법화사, 수정사
불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의 말사이다. 옛 원당사(元堂寺)는 원의 지배시절 제주의 3대 사찰 중 하나이다.
13세기 말엽 원나라의 고려 공녀출신 기황후(奇皇后)가 명당자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법화사(法華寺)는 서기 840년 경 후기 신라시대 중국과 일본을 무대로 활동했던 해상왕 장보고가 건립했다는 설이 있는 사찰이다. 고려 충렬왕 때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명문 기와편을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고려시대 대찰이었던 수정사는 고려 충렬왕 26년(1300년) 원나라 황후의 명에 따라 세워진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1376년 중수했던 기와 명문을 비롯하여 초석, 기와, 청동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 복신미륵(서자복)
제주민속문화재 제 1-2호(1호는 동자복) 서자복은 재물과 복의 신으로 불린다. '자복미륵',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돌하르방과 같은 형태의 돌모자(발립)를 쓰고 있다. 그러나 모자의 모양이 돌하르방과는 다른 고려말, 원나라 복식에 의한 모자로 추정되는 바, 고려말의 시기로 추측하고 있다. 고을 수호와 득남을 기원하고 민간신앙과 불교의 형태가 결합된 형식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동한두기 마을 용화사(옛 해륜사)에 위치하고 있다.
# 조선시대로 가다...
관덕정은 현재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남아 있는 곳이다. 1448년(세종 30)에 군사훈련 목적으로, 관 주도의 활을 쏘는 공간으로 세워졌다. <예기>, (射義)편, 射者所以觀盛德也(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2002년 12월에 관아지를 복원한 제주목 관아이다.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로서 일제 때 크게 훼철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 곳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5현)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이들의 위패를 모시던 귤림서원의 옛 터에 마련되어 있다.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을 모시고 있다.
제주지정 기념물 제3호 제주성은 제주시내의 중심지를 빙둘러 축조되었다. 1411년(태종 11) 정월 제주성을 정비토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제주성의 옛 자취는 대부분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약 150m 정도만 복원되어 있으며 성지 안에는 오현단과 귤림서원이 있다.
조선 정조 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거상이다. 어릴 때 기생수업을 받다 양인신분을 회복하여 물산객주를 운영하여 거상이 되었다. 1795년 (정조 19) 제주도에 흉년이 들어 기민구호를 한 공적으로 '의녀수반'의 여성최고 벼슬을 하사받고 금강산을 유람하고 임금을 알현하였다. 조선 인조 때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200년 정도의 제주인에 대한 '출륙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을 유람하고 제주로 귀향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 중에 그의 후손에게 그의 은덕을 기려 '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는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헌마 김만일(1550~1632)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22세 손이다.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출신인 김만일은 탁월한 목축기술과 위기극복 능력으로 수많은 양마를 길러 임진왜란 등 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수천 필의 전마 등을 도맡아 감당해내며 국난극복에 큰 공헌을 하였다. 헌마공신 김만일 묘역은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김정희(1786~1856)가 유배 생활을 하던 곳이다. 김정희는 이 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제주 기행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주의 속살을 아는 답사, '시대별로 엮어본 제주 답사 기행'이다. 얄팎한 지식을 동원하여 역사적인 사실이 왜곡되었거나, 아둔한 검색으로 허접한 답사기가 되지 않았는지 두럽다. 그래도 '카페의 허전함을 달랠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올려 본다.
첫댓글 허해원 회장님은 문화(관광)해설사로 취업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