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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이 맺게 하시는 열매들6-양선의 열매
성령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여러분들을 통하여 맺는 열매의 여섯 번째 열매는 양선의 열매입니다. 우리 우선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양선의 뜻은 글자 그대로 풀면 ”어질 양“에 ”착할 선“입니다.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설명하면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어질다는 것은 너그럽고 덕행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너그럽다는 것은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 19장 6절을 보면 너그러운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씁합니다.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여러분들이 너그럽다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구하면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되면서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양선의 열매를 맺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압살롬이 아버지인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켜 사람들을 모으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에게 붙었습니다. 그 기세를 몰아 압살롬은 단숨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군대를 추적했습니다. 이 때 다윗의 신복들은 압살롬과 싸우기 위해 무장을 하고 출정식을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군사들에게 말합니다. 사무엘하 18장 5절입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왕은 자신에게 반역을 일으킨 아들인 압살롬을 위해 자신의 신복인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기를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하지만 요압은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자신의 밭에 불을 지른 압살롬을 죽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미 누군가를 미워하고 보복할 기회를 찾는 사람에게는 너그러움이 없어집니다. 요압은 너그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을 때 창을 들고가서 찔러 죽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양선의 열매를 맺고자 하신다면 여러분 안에 미움이 없어야 합니다. 미워하면 양선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아닌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들을 너그러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너그러우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4편 1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하나님은 곤란 중에서 다윗을 너그럽게 대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심을 알수 있었고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그러우신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너그러움을 통해 찾을 수 있는 마음은 관대함입니다. 넓게 보고 크게 보면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양선의 표현을 하나님에게서 찾으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선하시며 인자하신 성품에서 찾을 수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시며 인자하신 성품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6장 34절을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하고 있고, 시편 106편 1절에서도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감사의 이유가 된다는 것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하나님의 어지심과 너그러우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양선의 ”양“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하고 양선의 ”선“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인자하심에 대하여 성경 로마서 2장 4절에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여러분들을 인도하셔서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 볼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도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여러분들이 죄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 이런 수고를 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의해 굳이 아들까지 보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그 깊이를 아시겠습니까?
다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또다른 설명은 로마서 11장 22절에 나와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은 대상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인자하심으로 대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준엄하게 대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는 인자하시고 누구에게는 준업하십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인자하심으로 대하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준엄함으로 찍어 던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이것을 언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오랫 동안 참으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시면 용서가 없습니다. 그때는 후회하고 회개를 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질고 너그러우신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촉구하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증거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다음이 아닌 지금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은혜 베푸실 때에 여러분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니실 때 자기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사람과 자신의 약함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입고자 몰려들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을 보면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데리고 오는 사람들, 그리고 스스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온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구원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을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여기에 예수님의 양선의 참 모습이 있습니다. 양선은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가이 맞으면서 고쳐줄 뿐 아니라 두루 다니면서 자신이 도와야 할 사람을 돕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지양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아닙니까? 복음 전도부터 시작해서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선한 일들이 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선한 일들입니다.
우리 나라 조선 말에 선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경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 말씀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했습니다. 그당시 우리 나라는 수많은 굷주림과 질병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정치가들도 손을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소수의 선교사들이 왕의 허락을 받아 병원을 짖고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로인해 질병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은 병만 치료한 것이 아니라 병에 걸리지 않는 위생적인 삶의 방식도 가르쳤습니다. 그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의 문을 열고자 학교를 세웠습니다. 우리 나라 오래된 대학교들은 모두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입니다. 연세대, 경희대, 이화여대, 고려대학교를 세웠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학들 아닙니까? 그 학교들을 통해 많은 인재들이 키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해외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들이 몇 년 후에 우리 나라를 복된 미래로 이끌어 가게 한 것입니다.
그 선교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우리 나라 사람들을 위해 살다가 죽었습니다. 양선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지금 양화진이라고 하는 선교사들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언제 시간을 내어서 우리 교회가 서울 마포에 있는 양화진에 함께 갈 수있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성령의 열매인 양선은 그냥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힘써 선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시는 곳에 가서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 선한 일로 인해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도 아십니다. 인간적으로 선한 일을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선한 일을 행하도록 이끄시면 그 결과는 놀랍도록 좋은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나라들을 복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선한 역사 자체가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이 단순히 그 당시의 빈궁함을 채워주거나 질병을 고쳐주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0절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에서 가르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여러분들을 택하신 이유는 바로 이 죄악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만드시고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 바로 성령의 열매인 양선의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결국 양선은 그리스도인들이 새 계명인 사랑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위한 복만을 구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자기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심판을 받은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 이해가 됩니까? 뭐가 아쉬워서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구하시기 위해 하늘보좌를 떠나 이 땅위에 내려오셨는데 다른 좋은 자리 다 내버려두고 하필이면 마굿간에서 어린 아이로 태어나면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셨는지 이해가 됩니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약한 자들,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하늘의 의와 기쁨과 평강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이 경험했고 또한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 양선을 완성시키시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순종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아셨습니다. 다음주에 종려주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증거하신 하나님의 희생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지키고 있는 행사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부활절이 있습니다. 이 부활절 고난의 마지막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은 고난의 진통과 죽음을 겪은 모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승리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가 만나주시고 소명을 주신 사람들이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받아 자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그리고 자신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갔던 모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사람들과 나라들을 찾아가 헌신하여 섬긴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나라에 와서 헌신하며 섬겼던 선교사들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 선교사들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섬길 수 있도록 도왔던 그들 나라의 선교부와 그 선교부에 헌금을 했던 수많은 보이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다른 나라의 성도들의 이름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이름이 하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고 후에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양선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하늘이 하늘에게 말하고 땅이 땅에게 말하듯이, 또 날은 날에게 말하듯이 가슴과 가슴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져서 계속이어지는 역사입니다. 이 양선의 열매는 여러분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이어서 계속하는 지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선하시며 인자하신 역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데리러 오시는 그 날까지 양선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선교사들의 삶이 증거가 되어 우리 나라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그 교회들을 통해 양선의 역사는 복음과 더불어 계속되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구원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에서 시작하여 먼나라에 있는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이웃들을 위해 선교의 손을 펼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양선이 바로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이셨던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기도하시면서 부활주일에 해외선교사로 활동하는 선교사님들에게 보낼 선교헌금을 준비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서 이번 부활주일에 모아진 헌금의 전액을 베트남에 있는 한 선교사님 부부에게 보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양선을 행하는 일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직접 선교현장에 가보지는 못하지만 그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전하고 현지인들을 훈련시켜서 그곳에 파송을 했는데 부흥해서 이제는 교회 건물을 지을 준비를 하며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의 다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약간은 모자라다고 합니다. 그 약간의 일부라도 우리 교회가 채운다면 이것 역시 성령이 맺으시는 양선의 열매를 맺는 것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주일의 헌금의 일부는 제가 군산에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나누는 일을 하도록 주선하고 수많은 노숙자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사닥다리 선교회에게도 일부의 헌금을 하도록 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노숙자들과 팔고 남는 음식을 매일 밤마다 쉬지도 못하면서 사명감을 가지고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된 사역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이번 부활주일 헌금의 전액 가운데 절반은 베트남 선교지에 절반은 사닥다리 선교회에 헌금이 많든 적든 보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이 양선의 열매맺는 사역에 참여합시다. 또한 이제부터 성령이 인도하시는 바를 따라 양선을 행하는 우리 제석교회가 됩시다. 베드로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3절을 통해 말씀합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들이 시작할 때입니다.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성령의 성령의 열매 가운데 어질고 너그러우며 착한 양선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우리 제석교회가 되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