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不條理, 영어: absurdism)”는 ‘불합리·배리(背理)·모순·불가해(不可解) 등을 뜻하는 단어로서, 철학에서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뜻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원래는 조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논리적 의미만을 표시하는 말이었으나, 합리주의 철학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 실존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용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의미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고, 모든 일을 완전히 해낼 수도 없으며, 반드시 죽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거나, 다가올 내일에 대해서 희망을 품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치부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미래를 위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결국 미래는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이나 세계가 그 자체로서 부조리한 것은 아니다. 모순되는 두 대립항의 공존 상태, 즉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부조리한 상태이다. 코스모스가 카오스의 부분집합이듯 합리는 부조리의 부분집합이다. 부분이 전체를 다 설명할 수 없는 까닭에, 부조리의 합리적 추론이란 애당초 과욕인 것이다. 요컨대 부조리란 논리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으로써 느낄 수 있을 뿐이다"라고 부조리를 규정하면서 인간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하여 좌절을 각오하고 인간적인 노력을 거듭하여 가치를 복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승산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에겐 비장미가 있다.
알베르 카뮈가 수필 ‘시시포스 신화’에서 조명한 부조리의 철학이다. 그러나 국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정당이 무망한 싸움을 반복한다면 어떨까. 자신들의 정치 철학을 과시하고 지지 기반을 넓히는 효용이 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상대에 가할 타격만 생각하면서 자기가 입는 내상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해의 셈법이라면. 이건 비장미도 뭣도 아니다. 그냥 부조리일 뿐이다.
“이 법에 정부와 여당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입법부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5월 24일 민주당 소속 전해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노란봉투법의 본회의 부의 요구안 표결을 강행하면서 한 말이다. “옳든 그르든 답이 있어야 책임지는 것이 입법부의 역할”이라는 언급도 덧붙였다.
무슨 말일까. ‘그른 답’이라도 일단 내놓으면 책임을 다했다는 이야기인가. 이거야말로 ‘면피 정치’ ‘알리바이 정치’ 아닌가. 파업 장려법이라는 이 법이 용산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곤 전 위원장도 생각지 않았을 터다. 굴러 내릴 줄 알면서도 밀어 올린 시시포스의 바위인가. 비장미는커녕 자기 합리화만 보인다.
21대 국회 후반기 들어 법사위 심사를 건너뛰고 본회의에 직회부된 법안은 모두 11건이다. 역대 가장 많은 숫자다. 이미 양곡법, 간호법은 대통령 거부권 문턱에서 폐기됐다.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 방송법, 화물자동차법(안전운임제) 개정안도 비슷한 길을 밟을 공산이 크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들 논란의 법안에 서명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임기가 끝나도 당장 사정이 바뀌기는 어렵다. 내년 총선 결과가 야당에 유리하게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툭하면 국회 일을 법대(法臺)로 가져가는 ‘정치의 사법화’가 문제지만, 사법 환경도 야당에 녹록지 않다. 윤 대통령 임기 중 대법관과 재판관 상당수가 교체될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점점 보수적 색채가 짙어질 게 뻔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타협을 통해 차선이라도 모색하는 게 원내 1당의 책임 정치 아닌가. 베버식 표현대로라면 ‘신념 윤리’를 위해 ‘책임 윤리’를 저버린 꼴이 됐다. 당 대표 안위에 매달리는 당 상황을 생각하면 그 ‘신념’조차 의심스럽지만.
민주당은 특정 직역의 표도 겨냥하면서 대통령은 정치적 궁지로 몰아넣는 ‘일석이조’를 노렸다. 효과가 있을까. 간호법은 의사 표보다 간호사 표가 더 많다는 계산에서 강행됐지만, 간호사 숫자의 두 배 가까운 간호조무사들을 돌아서게 했다. 물리치료사·응급치료사 등의 다른 직역 의료단체가 민주당을 보는 눈도 싸늘해졌다. 벼농사 농업인, 노조, 간호사 등 특정 직역 편을 드는 과정에서 균형과 보편성을 잃어버린 모습이 과연 중도층에 어떻게 비칠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우락부락 입법 과정에서 대안 정당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이 민주당으로선 더 큰 손실이다.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양이원영 의원은 “통치세력으로서 유능함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대통령 거부권 앞에서 소리 나지 않는 도돌이 연주만 거듭하는 정당에 썩 어울리는 발언은 아닌 듯하다. 신화에 따르면 시시포스를 쉼 없는 도로(徒勞)로 내모는 것은 복수와 징벌의 여신 에리니에스의 채찍질이라고 한다. 민주당을 끝없이 부조리로 모는 세력은 누구인가.
대통령의 거부권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견제와 균형을 위한 장치다. 1787년 미국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참가한 독립 13개 주 대표들은 인류 사상 새로운 정치 체제인 대통령제에 합의하면서 거부권이란 무기를 그 자리에 부여했다. 군주제 회귀에 대한 강한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행정 수반에게 강력한 헌법상 권리를 인정했다.
의회가 민중의 대의기구임은 분명하지만, 무소불위 입법부가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행정 수반이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의 암호해독자’(제임스 매디슨의 표현) 역할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장치라고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목숨을 걸고 침을 쏘는 벌처럼 거부권은 신중하게 행사되는 것이 맞다. 헌법기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자제할 줄 알아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법이다(대니얼 지블랫 하버드대 교수).
경위야 어떻든, 대의 기구인 국회의 결론을 국민의 또 다른 대표인 대통령이 거부하는 장면은 보통 상황이 아니다. 그 자체로 집권 세력의 부담이다.
미 제헌회의 13개 주 대표들이 결국 대통령제에 합의한 것은 그 자리의 첫 번째 주인공이 조지 워싱턴이란 ‘덕성의 정치인’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으로서는 야당이 쳐놓은 거부권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제와 인내, 대화와 타협이라는 ‘덕성’을 발휘해야 한다. 야당의 불모(不毛) 정치와 차별화하는 길이기도 하다.>중앙일보. 이현상 논설실장
출처 : 중앙일보. 오피니언 중앙시평. 거부권에 갇힌 민주당의 부조리 정치
대통령이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대해 재의를 요구하는 행위가 반복이 되면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국회를 억압한다는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이 항상 옳을 거라고 생각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왜 인식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이미 문재인 정권 때에 다 논의가 되었던 법안들인데 그때는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까봐 국회에서 논의만 하고는 넘어갔던 일들을 이제 윤석열 정권으로 바뀌니까 그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법안을 다수의 횡포로 통과시켜 대통령에게 재가를 하라고 협박하는 것을 보면서 대한민국 국회의 현 시점을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온갖 비리를 감추기 위해 어거지로 법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에게 내미는 것이 부조리 철학이 아니라 부조리 정치라는 지적이 정말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