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툭하면 날 걷어찼고, 난 강가에 앉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도종환 시인
인포리 - 도 종 환 - 십 리를 걸어 인포리에 도착했으나 마음을 누일 봉놋방은 없었다 오리를 더 걸어 강가에 이르렀으나 거기도 물소리뿐이었다 거친 붓자국이 선명한 하늘은 먹물빛이었다 귀퉁이에 남은 하늘색도 회색에 가려 희미했다 붓질을 한 이는 보이지 않고 먹물만 흘러내려 산허리를 덮었다 툭 툭 던져 놓은 육중한 고독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산자락 끝에 아주 작고 흐릿하게 나는 서 있었다 오는 동안 벌판에는 가등 하나 없었다 이십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여서 나도 서툴기 짝이 없었으나 세상은 툭하면 발길로 나를 걷어차곤 했다 그때마다 이젠 끝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등불도 노새도 없이 넘어야 할 벼룻길만 앞에 있었다 안주 없는 찬 소주를 혼자 마시곤 빈 병을 강물에 던질 때면 강물이 잠깐 몇 방울의 눈길을 내 쪽으로 던져주곤 했다 오늘도 어둠이 내리는 광막한 하늘 아래 혼자 눅눅하게 젖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어디엔가 있으리라 홀로 찬 술을 마시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이 있으리라 입술이 팽팽하게 모여 건너야 할 강 쪽을 향해 마음보다 먼저 돌출해 있는 걸 자신도 모른 채 오래 강가에 앉아 있는 이 있으리라
세상은 툭하면 날 걷어찼고, 난 강가에 앉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연재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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