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해(湖海)란 관동8경중 하나인 경포호와 임영(臨瀛)을 말한다.
바닷가라는 뜻의 임영은 옛 강릉대도호부의 별호이기도 하니까.
호해의 고도(古都)답게 국보 제51호 객사문(客舍門:아래 그림1)을 들어서면
임영관(臨瀛館:아래 그림2)이 우뚝섰다.
사적 제388호인 임영관은 궐패(闕牌),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전문을 올리고
교서를 받거나 고하며 외관이 관찰사를 맞는 의식 등을 거행하던 곳이다.
도유형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七事堂:아래 그림3)은 호구,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비리 단속에 관한 일 등 일곱가지 정사(政事)를 보는 곳이라 하여
칠사당이라 했단다.
조감도(아래 그림4)처럼 옛 관아(官衙)를 복원한단다.
협소한 느낌이지만 도성에서 540리 떨어진 지방관아치고는 제법 의젓하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입구 삼거리(아래 그림)는 6번과 59번 양국도가 백두대간
진고개(泥峴)를 넘어와서 456번지방도와 잠시 합치는 지점이다.
청심대길은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남한강 상류로 유입되는 오대천을 건넌후(월정교)
59번국도를 타고 오대천과 나란히 간다.
오대산은 조계종 제4교구본찰 월정사를 비롯해 동.서.남.북 사대와 중대 등 오대(五
臺) 암자, 상원사, 적멸보궁 등이 있어 불교성산(聖山)으로 불리는 국립공원이다.

평해대로 청심대점(淸心臺店)은 청심대(아래 그림1, 2, 3)에서 비롯되었다.
청심대는 청심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대(臺)에 그녀의 이름을 붙인 것이고.
관기(官妓) 청심은 강릉대도호부사 양수(梁需)의 부실(副室)이었단다.
내직으로 영전되어 가는 부사를 따라 여기 마평리(馬坪)까지 왔으나 더는 동행할
수 없음을 비관해 높은 대(아래 그림3)에서 오대천에 투신, 산화했다는 것.
대(臺)는 동으로 오대산 제봉을 응시하며 우뚝한 남반도의 제5고봉 계방산(桂芳
1.577m)이 남으로 뻗어 만든 백적산(白積)의 여맥이 멈춘 지점이다.
한데, 강릉대도호부사는 정3품 당상관으로 고위관리다.
그러나, 임진(任辰)~무술(戊戌)간, 6년 봉직했다는 그의 행적이 묘연하다.
1418년은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해였으므로, 정상적이라면 승차(陞差)했을텐데
세종조의 기록들을 뒤져도 양수는 보이지 않는다.
미색 관기가 목숨을 걸었다면 범상한 사또는 아니었을 것인데.
청심대 미스테리(mystery)?
그보다, 진짜 미스테리가 방송을 탔단다.(2006년?:MBC-TV의 놀라운 세상)
문이 꽁꽁 잠기게 된 청심사당(祠堂:아래 그림4, 5)과 관련된 이야기다.
2001년 한 청년이 청심대를 다녀간 후 마을 청년들이 석연찮은 사고로 죽어갔다.
이 연쇄 사고들은 공교롭게도 젊은 남자들에 국한되었다.
온 마을에 공포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이장(里長)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청심사당 안에 있던 청심의 영정이 없어진 것.
마을은 그녀의 영정 도난에 원인이 있다고 믿고 2003년에 영정을 복원했다.
그 후, 사고는 잠잠해졌고 마을에서는 청심의 한(恨)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년 9월 28일 청심사당에서 청심제를 지내고 사당문을 잠그게 되었단다.
삼척시 원덕읍 신남리 해신당과 맥이 흡사한 사건이다.
청심대에 오르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소름이 끼쳤을까.
해당사항 없는 늙은이인데도?



1950년 민족동란때 일이다.
내 가족은 부르주아(bourgeois)로 몰려 집과 재산을 뺏기고 동가식서가숙 상태였다.
이렇듯 참담한 생활중에 내 모친은 아들을 낳으셨다.
조부께서 신생아의 이름을 지으셨는데 '喜基'(희기)다.
간난신고 중에 태어났으므로 기쁜 일만 있으라는 염원을 담으셨단다.
모릿재를 향해 부지런히 가다가 길가의 한 2층집 앞에서 발이 멎었다.
산골마을의 2층양옥은 그 희소성으로 관심을 끌만 하지만 그보다는 촌스럽게 지어진
집이지만 2층방문 위에 걸린 현판 '喜留堂'의 인력(引力)에.
집안에서 누군가 나오길 기다려 연유를 물었는데 어이없는 대답이 왔다.
허전한 것보다 낫겠기에 누가 써놓은 것을 특별한 뜻 없이 걸어놓았다나.
내 조부께서 손자 이름 지으실 때의 염원처럼 어떤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였건만.
하긴, 방안에, 집안에 기쁜 일이 늘 머물러 있기 바라지 않는 사람 있으랴.

모릿재는 진부면과 대화면을 가른다.
1.141m 백적산 안부인 899m모릿재를 넘을 일이 걱정됐는데(아래 그림1) 고생하지
말라고 미리 터널을 뚫어놓았나.(아래 그림2)
인도가 없는 터널 통과할 일이 옥계의 방재처럼 난감했는데 이번에도 한 쌍의 젊은
해결사(volunteer)가 나타났다.
조금 전에 청심대쪽으로 가다가 고개를 오르는 나를 보았다는 것.

4일, 9일의 대화장은 평창군 5일장중 꽤 중량감이 있었던가.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건재해 볼거리, 먹거리에 자신이 있나.(아래 그림)
그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평창人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문득 떠올랐다.
특히, 걸리는 대목은 동업자 허생원과 조선달의 대화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이 있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 . . . .
. . . . .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 . 그 어느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된다.>
재미 보지 못하면서도 거를 수도 없는 봉평장에서 한 몫 기대하고 밤길을 걸어야 할
대화장은 내일이 아니라 내내일이다.
옛부터 봉평장 다음 날은 진부장이고 다다음 날이 대화장, 그 다음 날이 평창장인데
이효석이 날짜를 착각했던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