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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운동
서론 I: 운동의 시대
Introduction I: The Age of Motion
우리는 움직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과 사물은 역사상 과거 어떤 시대보다도 더 멀리, 더 자주, 더 빨리 움직인다.
오래 전에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져서 이제는 폭풍에 표류하는 민들레 씨앗처럼 세계 전역을
순환하고 있다.
21세기 초에 우리는 인간 활동의 모든 주요 영역이 점점 더 운동으로 규정되는 세계에 처해 있다.
사회적으로 생명은 점점 더 이주적인 것이 되고 있다.
기록된 역사에서 과거 어떤 시기보다도 금세기 초에 지역적 및 국제적 이주민이 더 많이 존재한다.
오늘날 10억 명 이상의 이주민이 존재한다. 매 십년 마다 전체 인구에서 이주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계속
해서 증가하고, 게다가 다음 20년 후에는 이주민 비율이 지난 25년보다 더 높을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환경적 불안정과 경제적 불안정,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사람들이 이주하는 일이
필연적인 사태가 되었다.
특히 기후변화로 인해 다음 40년에 걸쳐 국제적 이주가 두 배까지 증가할 것이다.
2050년 경에는 20억 이상의 사람이 세계 전역의 도심지로 더 이주할 것이라고 예측된다.
많은 사람이 지역적 경계나 국제적 경계를 건너지 못할 것이지만, 사람들은 직업을 더 자주 바꾸고, 출퇴
근을 더 멀리 그리고 더 오래 할 것이고, 거주지를 반복적으로 바꿀 것이며,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국제 여행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인간 이동과 추방의 일반적 증가 현상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이제는 우리 시대를 규정짓는 특질로 널리 인식된다.
또한 이런 지구적 움직임은 인간의 움직임을 관리하고 회람하기 위한 경계 기법의 급증을 낳았다.
1990년대 중엽 이래로, 특히 9/11 이래로, 세계 전역에서 수백 개의 새로운 경계―수백 마일의 새로운
철조망, 수 톤의 새로운 콘크리트 장벽, 수많은 역외 수용소, 생물측정 여권 데이터베이스, 세계 전역의
학교와 공항 및 다양한 도로에 설치된 모든 종류의 보안 검문소―가 출현했는데, 이것은 모두 사회적
운동을 통제하는 것과 관련된 사회적 불안의 증가를 증언한다.
현대 정치는 정적 국가와 고정된 경계, 정주 시민이라는 패러다임을 통해서 더 이상 적절히 이해될 수
없다.
이런 이론적 틀은 지구적 이동과 변동하는 국경, 끊임없는 이주의 현실에 더 이상 맞지 않다.
다양한 분과학문에 걸쳐 사회적 이동과 움직임의 수위성을 인식하게 되는 학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동체의 세계가 국가와 경계, 정치적 행동에 대한 정적 모형에 부합할 것이라는 기대는 세계 전역에서
수백 만 명의 사람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현대의 사회적 현실을 이해하여서 그것에 적절히 대응하고 싶다면, 운동의 수위성에 의거하는 새로운
일단의 개념적 도구가 필요하다.
21세기의 과학적 지식 역시 우리가 연속적인 운동의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드러낸다.
거시적 층위에서, 21세기에 접어들기 직전에 우주론자들은 우주가 모든 방향으로 팽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팽창 속도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음을 알아내었다.
우리는 물리학자들이 "가속하는 우주"라고 부르는 것에서 살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고정적이고 유한한 우주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상 모든 방향으로 증가하는 움직임으로
규정된다.
이제 시공간의 바로 그 얼개는 끊임없이 팽창적인 움직임의 수위성으로 규정된다.
중시적 층위에서는 20세기 말 무렵에 발달한 비선형 동역학이 고전물리학의 예측 가능한 입자들도 에너
지의 비가역적인 열역학적 흐름과 운동학적 흐름을 겪게 됨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흔히 20세기의 "제3차" 과학혁명으로 선전되는 혼돈 이론은 에너지의 흐름과 난류, 움직임이 고전적
물체의 상대적이거나 준안정적인 고정성보다 더 기본적인 것임을 보여주었다.
미시적 층위에서는 시공간과 중력이 실재의 선재적이고 근본적인 양상이 아니라 사실상 더 기본적인 양자
운동들의 산물이라는 것도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우리가 고체, 기본 입자, 배경 매개변수로 간주하곤 하는 것은 사실상 비국소적이고 진동하는 양자장들의
산물이다.
중력적 시공간의 거시 이론(일반 상대성)과 양자장의 미시 이론을 통합하는 것이 오늘날 물리학의 주요
과제다.
20세기가 끝날 무렵에 두 가지 주요한 이론적 체계, 즉 고리 양자중력과 끈 이론이 중력 이론과 양자론을
통합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이제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장의 운동학적 진동을 통해서 근본적인 실재 전부를 설명할 양자 중력 이론을
열렬히 탐색하고 있다.
두 가지 경쟁 이론의 과학적 합의나 통일은 현재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양자중력 이론가들은 공간과
시간이 존재론적으로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요동하는 장들의 창발적 특질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정적 우주와 선형적 인과성, 기본 입자, 고전적 시공간의 낡은 패러다임은 우주의 가속 팽창과 난류, 끊임
없이 진동하는 장의 21세기 실재에 더 이상 맞지 않다.
20세기 말에 중대한 국면을 맞은 이 세 가지 혁명은 오늘날 기초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혁명으로 널리
인정받는다.
요약하면, 우리가 운동을 주어진 존재자가 지점 A에서 지점 B로 움직이고 있을 때에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게다가 존재자 자체와 그런 지점들로 근본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간주한다면,
비국소성과 얽힘, 터널링, 양자중력 같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현상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에서 관측되는 이런 종류의 사건들과 다양한 다른 사건들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런
과학적 혁명들 각각이 드러내는 대로, 즉 운동의 수위성으로 철학을 시작해야 한다.
영상 역시 점점 더 이동적인 것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영상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
이 사태가 초래된 부분적인 이유는 20세기 후반 동안 기계적 복제 기술과 지구적 수송 방법, 분배 회로가
전세계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군가가 지금까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도 더 많은 문자 영상과 연설 영상, 시각적 영상이
세계 전역에서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움직이고 있다.
그렇지만 영상들이 이처럼 대규모로 유통되는 사태을 일으킨 단일한 최대의 원천은 디지털 영상이 출현한
점일 것이다.
21세기에 접어들기 바로 직전에 일단의 디지털 매체 기술(컴퓨터, 인터넷, 비디오 게임, 이동기기 등)
덕분에 디지털적으로 복제된 낱말과 영상, 음성의 흐름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큰 규모로 세계에 배포
되었다.
어쩌면 어떤 다른 종류의 미학적 매체나 기계적 복제 방법도 이 시기 동안 디지털 매체가 영상에 행한
일에 비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영상은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결코 나타난 적이 없는 규모로 영상에 이동성을 부여했다.
20세기에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출현함으로써 영상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것들은 영상 혁명 초기의 전자기 및 이동 형식을 낳았다.
그렇지만 또한 그것들은 영상 혁명을 상대적으로 중앙집중적이고 균일하며 일방적인 "프로그래밍" 형태
들에 한정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에는 디지털 매체의 상호작용적이고 쌍방향적인 새로운 특질 덕분에 영상의
이동성과 변경성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21세기 초에 인터넷과 이동기기―휴대전화와 스마트폰, 태블릿, 랩톱―가 대중화되면서 영상은 편재하는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휴대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2014년의 경우에 지구에는 사람보다 더 많은 이동기기가 작동했다.
이동전화는 지금까지 제작된 인간의 감각 기술들 가운데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단일한 기술일 것인데,
단 30년 만에 무에서 72억 대로 증가했다.
더욱이 디지털 영상은 출판과 언론, 오락, 교육, 통상, 정치에서 거대한 혁명, 즉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비견
할 수 없는 지구적 전환을 촉발했다.
디지털 영상은 아날로그 매체를 통합했을 뿐 아니라 진척시켰는데, 도중에 전적으로 새로운 디지털화된
산업이 생겨났다.
산업 공장과 노동자는 점점 더 인터넷 서버와 자동화된 점검 소프트웨어로 대체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미학적 체체에 진입했는데, 즉 이제 우리는 영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누구나 지구의 거의 어떤 장소에서도 단일한 기기로 다른 누군가와 음성이나 문자로 소통하고,
지금까지 기록된 거의 어떤 음성도 듣고, 지금까지 제작된 거의 어떤 영상도 보며, 지금까지 작성된 거의
어떤 텍스트도 읽을 수 있다.
현재 이것은 모두 이동 중에 이루어질 수 있고, 게다가 그 자체가 전기적 흐름의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
영상은 결코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 영상이 출현하여 지배적인 것이 됨으로써 가능해진 오늘날 영상의 이동성은 복제 영상의 수량적
증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디지털 매체와 디지털 영상은 영상 자체의 정성적 구조를 변형시켰다.
이제는 무엇이나 단일한 휴대기기를 통해서 디지털화되고, 이동되며, 비선형적으로 검색될 수 있다.
이제는 무엇이나 디지털 소프트웨어의 사용과 전류의 끊임없는 흐름을 통해서 보는 사람에 반응하고 그와
상호작용하도록 만들 수 있다.
디지털 영상이 출현함으로써 변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은 감각은 전혀 없는데, 현재 미각 영상과 후각
영상도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합성될 수 있다.
물론, 연속적인 전기적 흐름이 디지털적으로 이산적인 1과 0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전송 중에 항상 무언가
가 상실되지만, 그와 무관하게 영상은 이동하면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영상이 이동하는 그런 세계에서 미학은 더 이상 낡은 표상의 패러다임으로 적절히 이해될 수 없다.
최근 예술과 미학의 학술적 성과는 이런 인식을 점점 더 증언하고 있다.
영상은 연속적인 되먹임 고리에서 그것을 변환하고 변조하는 객체와 주체, 사본과 모형 사이를 오고가
면서 이동성이 점점 더 증가하게 된다.
낡은 이론적 틀은 상호작용적인 전기의 순환과 연속적으로 변조되는 영상의 21세기 현실에 더 이상 맞지
않다.
존재론
이 책의 주요한 주제인 존재론적 실천도 이동성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이 사태가 초래된 부분적인 이유는 (앞에서 서술했듯이) 우리 시대의 사회적 사건과 과학적 사건, 미학적
사건의 이동성이 점점 더 증가하기 때문인데, 존재론은 그런 사건들의 존재를 서술하고자 한다.
세계의 이동성이 점점 더 증가함에 따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존재론적 서술은 이 사태를 반영하려고 노력
했다.
더욱이 결국 존재론은 자신이 서술하는 현대의 정치적 조건과 과학적 조건, 미학적 조건에 의해 적극적
이고 실제적으로 형성된다.
예를 들면, 존재론적 서술을 작성하는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멀리 그리고 더 자주 여행하는데,
그러므로 방대한 지구적 이주 체제에 어느 정도 참여한다.
오늘날 그들의 디지털 텍스트와 인쇄본 텍스트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빨리, 더 많은 매체 형태로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배포된다.
철학자가 글을 적는 수단인 컴퓨터를 구성하는 양자장 이론의 방정식 때문에 문자 영상 및 그것의 배포와
관련된 기술적 조건도 이제 더 빠르고 더 역동적이다.
요약하면, 오늘날 존재론의 이동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증가한 이유는 이동성이 점점 더 증가하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건과 존재론이 사실상 얽혀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존재론은 자체적으로 그런 것으로서의 존재(즉,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보편적 서술로
정의되었다.
오늘날에는 이런 정의가 더 이상 고수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감각과 독립적인 실재가 전혀 없다고 알아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수행적 실천
으로서의 존재론적 서술을 형성하고 존재론적 서술 자체에 의해 형성되는 다양하고 명백히 유동적인
물질적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를 서술하는 방식은 우리가 사용하는 서술 장치에 의해 형성되는데, 게다가 결국 세계는
어쨌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서술에 의해 실재적이고 물질적으로 형성된다.
존재론이 중요하다.
존재론은 독자적인 일단의 이동 도구와 연결망을 갖춘 물질화의 실재적 행위나 과정이다.
존재론은 중립적 표상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존재론은 역사적인 것이 되고, 실천적인 것이 되며, 자신이 서술하는 당대적 조건과 얽히게
된다.
존재론은 동일한 역사적 과정의 한 양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낡은 매체 기술과 새로운 매체 기술의 방대한 번성과 혼합, 지구적 순환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존재론적 실천이 얼마나 믿을 수 없게도 매개화되어서 얼마나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되어버
렸는지(그리고 얼마나 그런 것이었는지) 점점 더 대면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이론가들은 이 상황을 점점 더 인식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에 따르면, "존재론은 애초부터 물리적인 것이든 기술적인 것이든
간에 매체에 적대적이었다.
여타의 이론가보다도 철학자들은 어느 매체가 자신의 바로 그 실천을 뒷받침하는가라는 물음을 더 잘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목표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이동성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조건에 더 적절하게 대응하는 당대에 대한 새로운 운동의 존재론을 제공하는 것이고, 둘째는 더
구체적이게도 이 새로운 존재론적 틀을 존재론적 실천 자체의 물질적 역사에 적용함으로써 이 책을 비롯
하여 현재의 존재론적 실천 자체에 대한 운동학적 조건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운동』은 적어도 세 가지 참신하고 서로 얽힌 개입을 실행하는데, 요컨대 그것은
(1)독창적이고 체계적인 운동의 존재론과 더불어
(2)서양 전통에서 기입의 물질적 및 실천적 조건의 역사와 관련지어
(3)서양 전통에서 나타난 운동의 철학에 대한 최초의 역사를 제공한다.
이십일 세기
위에서 서술된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21세기 초에 일어나고 있는 더 큰 변화, 즉 운동의 중요성이 점점
더 증가하는 추세를 향한 변화의 일부다.
과거에 구상된 정적 패러다임들의 규칙에서 벗어난 예외 사례들은 이제 전적으로 새로운 운동학적 패러
다임의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지구적 이주와 기후변화, 국경 정치는 더 이상 하찮은 쟁점이 아니라 국민국가 체계 자체를 점점 더 불안정
하게 만들고 있다.
서양에서 이동기기와 이동영상은 더 이상 특권적 소수을 위한 사치품이 아니라 인간 뇌 자체를 비롯하여
일상 생활의 모든 양상을 변환시켰다.
양자장 이론은 고전물리학의 규칙에 어긋나는 거시적 예외 사례들―비국소성과 얽힘, 터널링―에 대한
과학적 사변의 모호한 영역이 더 이상 아니라 현재 물리학자들이 "표준 모형"으로 부르는 것이 되었는데,
지금 그 모형은 범지구적 위치결정 체계(GPS)에서 컴퓨터 처리 기법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새로운
현대 기술의 기반을 이룬다.
그렇지만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고, 오히려 정도의 차이인데, 이를테면
고체에서 액체로의 전이다.
그 전이는 극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또한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21세기가 되어서야 위에서 서술된 사건들이 더 이상 일탈적 사례나 신흥 추세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토대적인 사건이 되어버렸다.
그것들은 운동으로 규정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다.
이 새로운 운동학적 패러다임의 정치적 결과와 과학적 결과, 미학적 결과는 어마어마해서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이 책에서 제시되는 운동의 존재론을 정위하고 고무하는 중요한 당대적 조건이다.
21세기에 이런 영역들(정치와 과학, 예술, 존재론) 각각에서 일어난 변환은 함께 고찰되어야 하는데,
각각의 변환은 나름의 전면적인 고찰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 변환들은 본 저자의 책 『이주민의 상징(The Figure of the Migrant)』와 『경계 이론(Theory of
Border)』에서 개시되었고 이제 『존재와 운동』에서 지속되는 단일한 기획의 상호연결된 부분들이다.
이런 다른 영역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건화되더라도 본서의 초점은 이 새로운 운동학적 패러다임의 엄밀히
존재론적인 양상들에 집중되는데, 이 패러다임의 세부 내용은 다음 몇 장에서 소개될 것이다.
이 서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은데, 나는 우리가 움직임과 이동의 수위성으로 대체로 규정되는 새로운 역사
시대에 진입했기에 이제 우리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존재론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는 점점 심화되는 "액체" 근대성과 "이동" 근대성으로 특징지워지는 시기라는
주장은 이제 학술 문헌에서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렇게 공표된 전환의 이면에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상황은 1970년대에 시작된 탈근대에의 전환과 중대하게 다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물음은 새로운 것인데, 요컨대 용해되어 버린 것들을 모두 다시
새로운 것으로 접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새롭고 다른 일단의 이론적 도구가 필요하다.
오늘날 이론에 대한 난제는 우리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이 우리에게 펼치는 시각과 문제, 가능성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주요한 사건들은 오늘날 우리에 대해서 그런 것으로서의 존재의 본성에 관하여
무엇을 드러내는가?
역사상 어느 시점에서도 존재자들이 오늘날 만큼 이동성이 높았던 적이 결코 없었는데, 그래서 이 사태는
이런 정도의 이동성을 갖출 수 있는 실재의 본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날 존재는 운동의 역사적 수위성으로 규정되지만 현존하는 존재론들은 그렇지 않다면, 현재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존재론이 필요하다.
이것이 『존재와 운동』이 제공하는 것이다.
운동의 존재론
The ontology of Motion
여기서 제시된 운동의 존재론은 철학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선행 이론이 있을 뿐 아니라 현대 철학의
관련 경쟁 이론도 몇 가지 있다.
이런 전통에 대한 『존재와 운동』의 연속성과 진정한 참신성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그것이 선행 이론 및 동시대 이론과 유사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지 주의 깊게 고찰할 가치가 있다.
역사적 선구자들
여기서는 다만 내가 세 명의 주요한 운동의 철학자들이 구상한 주요 관념들과 그들이 기여한 공헌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할 이유는 다른 곳에서 그것들 각각을 훨씬 더 철저히 고찰한 책 1권 분량의 논고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간략한 역사에서 나는 다른 철학자들이 이 명단에 없는 정확한 이유을 제시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런 주장들 대부분이 제2권의 도처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
운동의 존재론에서 역사상 최초의 선구자는 로마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대략 서기전 99-대략
서기전 55)다.
루크레티우스는 서기전 5세기 무렵부터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를 비롯하여 길게 이어진
일련의 그리스 원자론 철학자들의 뒤에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데모크리토스와 레우키포스에게 원자론의 주요한 존재론적 신조들 가운데
하나는 "항상 운동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파르메니데스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끊임없는 운동이라는 논제를
수용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이 운동이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인 것이라는 점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다만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만이 정적이거나 영원한 최초의 기원이 없는 운동의
존재론적 수위성을 확언했다.
"원자들은 언제나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에피쿠로스는 적는다.
원자들의 움직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신도 없고 불멸의 영혼도 없다. 운동 중인 물질이 있을 뿐이다.
어떤 안정된 관찰자에게 나타날 정적인 현상(페노메나)은 전혀 없고, 오히려 키노메나(kinomena), 즉
운동 중인 신체가 있을 뿐이다.
존재자는 모두 이산적인 고형 물질로 나타나는 일련의 나선형 소용돌이을 생성하는 이런 운동 흐름의
굴곡으로 산출된다.
그러므로 안정성과 정지 상태는 더 근원적인 소용돌이 운동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루크레티우스와 이전의 그리스 원자론자들 사이의 차이점은 바로 원자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의 경우에는 원자가 항상 움직이고 있지만, 원자 자체는 여전히
근본적으로 불변적이고 불가분적인 것이어서 내적으로 정적인 것이다.
오히려 루크레티우스는 고대 그리스 이론들과 더 나중의 근대 이론들처럼 이산적인 원자를 존재론적
으로 일차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대신에 물질의 움직임이나 흐름을 일차적인 것으로 상정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신의 시에서 아토무스(atomus)라는 라틴어 낱말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물질을
서술하는 데 그 낱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파르티쿨라(particula, 입자)라는 라틴어 낱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atom(원자)"과 "particle(입자)" 등의 영어 번역어들은 모두 어떤 그리스적 편견과 근대적 편견에 의거
하여 텍스트에 첨가되었다.
그러므로 루크레티우스가 원자로 불리는 이산적인 입자들의 세계를 지지한다는 생각은 아토모스(atomos)
라는 그리스 낱말을 사용한 에피쿠로스주의의 투영물인 동시에 근대의 과학적 기계주의 이론들을 『사물
의 본성에 관하여』에 소급적으로 적용한 결과다.
오히려 루크레티우스는 정지도 없고 공간과 시간도 없는 운동의 연속적이고 격동적인 흐름(플룩스, flux)
을 서술하는 데 마테리아(materia, 물질)라는 낱말을 사용하였다.
루크레티우스 이전에 운동에 그런 직접적이고 명료한 존재론적 수위성을 부여했던 철학자는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루크레티우스는 운동의 군주다.
이런 존재론적 입장에 의거하여 루크레티우스는 물리학과 인식론, 미학, 역사, 부분전체론(mereology)에
관한 놀랍도록 현대적인 이론들을 많이 제시한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남은 그의 얇은 저서 한 권으로는 전면적인 존재론을 거의 구성하지 못한다.
마르크스.
운동의 존재론에서 역사상 두 번째 선구자는 독일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다. 청년 철학자
로서의 마르크스는 헤겔의 글은 전혀 읽지 않은 채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를 읽었었다.
물론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지만, 또한 그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적이고 역사결정론
적인 특질에 대하여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헤겔을 극복하여 독자적인 유물론적 철학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마르크스의 시도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시작되었다.
마르크스의 노트를 살펴보면 이 논문이 헤겔의 『자연철학』과 포이어바흐에서 나타난 물질의 본성에
대한 그의 사유를 따라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그리스 원자론에 빠져듦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받치는 철학적 및 존재론적 토대를 다른 지형
위에 세울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밝혀낸 중요한 것은,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경우에는
데모크리토스와 대조적으로 물질 자체가 독창적이고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방향을 바꾼다는 점이었다.
이 발견은 존재자가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것, 논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자유
로운 것임을 뜻한다.
역사는 헤겔적 상태를 넘어서는 혁명적 코뮤니즘의 지평에 열려 있었다.
이런 독법으로 마르크스는 루크레티우스에 이어 원자론의 단단하고 정적인 원자의 존재를 부인한 두 번째
철학자이기도 했는데, 오히려 마르크스는 원자의 운동이 그것의 고형성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근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므로 원자뿐 아니라 모나드에 대한 이것[물질의 흐름의 수위성]의 결과는, 모나드와 원자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모나드도 원자도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직선으로 사라진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원자가 직선으로 낙하하는 것으로만 간주되는 한 원자의 고형성은 고려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운동의 수위성에 대한 초기의 방법론적 확신에 의거한 마르크스의 작업은 단호히 역사적이고
물질적-운동학적 특질을 띠게 되는데, 요컨대 노동의 유동성과 자본의 순환에 집중한다.
마르크스는 노동(그리고 사회)를 정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 "흐름"이나 "운동"으로 간주하는데, 이러하여
노동은 상품으로 "응고"되거나 "결정화"되며 상품은 결국 흐르고 순환하여 더욱더 거대한 사회적 물질
대사 구조로 응고된다.
마르크스는 운동이나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이나 순수한 존재론을 제시하지 않기에 『자연
변증법』에서 엥겔스가 표명한 더 형이상적인 진술과 융합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서 운동의 역사적 존재론이 실제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는 대로 적절히
살펴봄으로써 그것을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베르그송.
운동의 존재론에서 역사적으로 세 번째 선구자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이다.
베르그송은 1884년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대한 주해서를 자신의 첫 번째 책으로 출판함으로써
루크레티우스의 유산을 이어갔다.
베르그송에 대한 루크레티우스의 영향은 베르그송이 운동의 존재론적 수위성을 단언했을 뿐 아니라
원자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유물론을 거부한 데서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고정된 상태 대신에 "움직이는 구역"에 있는 "유체 덩어리"를 서술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규정된 상태는 별개의 요소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들은 끝없는 흐름 속에서 서로 이어진다." 자연은 "물질 위를 흐르는 단일한 대규모의 물결"이다.
물질과 운동의 연속체에 대한 수 많은 논평을 제시했음에도 베르그송은 흔히 "생기론적" 철학자나 시간과
지속의 철학자이지 운동 자체의 철학자는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서 운동에 대한 구절들은 모두 더 근본적인 어떤 다른 것―생명을 움직이게 하거나 그것의
운동을 설명하는 생기력, 즉 모든 생명의 내부에 있는 추량 불가능한 에너지―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흔히
해석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베르그송은 이런 "생기적 기동력"이나 "힘"의 정확한 정체가 갖는 존재론적 지위를
항상 분명히 하지는 않음으로써 대부분의 글에서 이런 종류의 독법이 흔히 가능할 수 있게 된다.
『물질과 기억』에 실린 다른 구절들은,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인 것이며 흐르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시간이나 "순수 지속"인 것처럼 여전히 생각하게 만든다.
이 모두에서 베르그송의 존재론을 생기력이나 시간의 존재론으로 오인하기 쉽다.
그렇지만 덜 알려져 있는 것은 베르그송이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이자 가장 결정적인 저서인 『사유와 운동
(Le Pensee et le mouvant)』(1934)―어떤 기묘한 이유 때문에 영어로는 『창조적 마음: 형이상학 입문
(The Creative Mind: An Introduction to Metaphysics)』으로 번역된 책―에서 이 모든 것을 깨끗히 정돈
한다.
"생기력"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생기력은 "공간에서 그것이 산출한다고 추정되는 운동으로만 알려지고
추산된다....[하지만 그것은] 이런 운동과 하나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생기력은 어떤 종류의 불가사의하거나 영원한 실체 또는 모호한 에너지가 아니다.
생기력은 다름 아닌 운동 자체일 뿐이다.
시간/지속이라는 쟁점에 관해서 베르그송은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매우 명료하게 "시간은 운동이다"
라고 적는다.
베르그송은 "운동 또는 달리 말해서 지속"은 생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생성은 사물이 통과하는 "고정된
매질"로서의 "생성 일반"이 아니다.
생성은 실재 자체의 연속적인 운동이다. "실재는 운동 자체다."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운동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때 베르그송은 더
이상 명료하고 분명할 수가 거의 없다.
베르그송이 이른바 생기력/기동력이나 시간/지속에 부여했었던 분명한 수위성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제는 다름 아닌 운동 자체의 수위성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멋진 책은 시간과 마음, 생기력에 관한 베르그송의 많은 전작들에 되돌아가서 운동의 절대적 수위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방식을 제공한다.
베르그송이 말년이 되어서야 지속과 생의 약동을 운동 자체와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일 따름이다.
한계.
이런 역사적 선구자들은 모두 나름의 한계가 있는데, 이를테면 루크레이우스는 한 권의 얇은 책만 있고,
마르크스는 역사적 존재론을 쓰지 않았으며, 베르그송은 늦게서야 운동의 존재론적 수위성을 명백히
표명했다.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훨씬 더 제한적인 이유는 그가 체계적인 역사적 존재론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제안하는 경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의미에서 루크레티우스와 베르그송이 훨씬 더 제한적인 이유는 그들의 존재론이 대체로
충분히 역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지역적 및 역사적 조건에서 명시적으로 발생하는 더 역사적인 마르크스의 방법
론과 달리 루크레티우스와 베르그송은 대체로 보편주의적인 듯한 설명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존재와 운동』은 역사적 존재론과 운동의 존재론적 역사를 제시함으로써 이 선구자들의
존재론적 한계뿐 아니라 역사적 한계도 극복하고자 하는 상당히 다른 기획이다.
이 기획은 이 선구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운동』은 이 인물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초월한다.
과정 존재론과 생성
앞에서 언급된 운동의 존재론에 대한 역사적 선구자들은 현대의 많은 과정 존재론 또는 생성의 존재론
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운동의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과정 존재론은 유출과 생성을 강조하지만 운동의 존재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시간의 유출, 공간의 유출, 힘의 유출 등 모든 종류의 유출이 존재할 수 있다.
운동의 존재론은 엄밀히 물질의 유출이다.
시간과 공간, 힘은 운동 중인 물질을 초월하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은 실재의 차원들인데, 운동의 존재론에서는 환원 불가능하게도 물질적-운동학적인 차원들
이다.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기는 쉬운데, 한편으로 그것들이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화이트헤드.
최초의 주요한 체계적 과정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인데,
헤라클레이토스,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 라이프니츠 등이 포함될 역사적 선구자들의 완전히 다른
집합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과정은 실재적이지만 변화와 운동은 실재적이지 않다.
예를 들면,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변화는 "어떤 확정된 사건에 포괄된 현실적 계기들 사이의 차이"일 뿐
이고, 그래서 "어떤 현실적 존재자에게도 '변화'를 귀속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적 존재자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데, 그것은 거기에 있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변화와 운동은 일련의 현실적 존재자들과 연관되고 그것들 사이의 차이들로 구성될 뿐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저 "그런 것"이어서 실재 전체가 일련의 다른 상태들에 돌입할 때 "생성되"는 것이지,
기술적으로 변화하거나 움직이는 존재자는 결코 없다.
이것은 운동학적 변화가 아니라, 화이트헤드가 함께 연구한 논리학자들의 학파 이름을 따서 "케임브리지
변화"로 알려지게 된 것인 순전히 논리적인 종류의 변화라고 적절히 주장한 학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다.
그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의 전이는 "실재적 전이가 아니고 흐름이나 유출도 아니어서 그렇게
이해된 변화는 일련의 상이한 불변적이고 정적인 현실적 존재자들의 순차적인 현존에서 귀결된 사실일
뿐이다.
변화라는 바로 그 개념은 구제할 수 없을 만큼 정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 문제에 대하여 여전히 어떤 의문이 있다면,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에서 화이트
헤드는 꽤 명료하게 이렇게 적는다.
"운동은 정지를 전제한다. 운동에 대한 이론과 정지에 대한 이론은 강조점이 바뀐 상이한 양상들에서
바라본 동일한 것이다."
"생성의 연속은 전혀 없"고, 오히려 "연속의 생성"이 있을 뿐이라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이 주장은, 부동은 운동을 전제하고 만물은 운동하고 있다는 베르그송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여기서 과정 존재론은 운동의 존재론과 상당히 다를 수 있으며 운동을 전적으로 제거하면서도 여전히
생성의 과정 존재론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들뢰즈.
질 들뢰즈(1925-1995)는 탁월한 과정과 생성의 철학자였다.
운동의 존재론자들(루크레티우스, 마르크스, 베르그송)뿐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 생성의 위대한 철학자들
(둔스 스코트스, 스피노자, 니체, 라이프니츠, 화이트헤드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은 들뢰즈는 이 두 가지
전통을 방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생성의 철학으로 통합한 최초의 철학자다.
들뢰즈는 존재를 가리키는 단일한 명칭(공간, 영원성, 힘, 시간, 운동 등)에 한정된 단일한 존재론을 전개
하는 대신에 동일한 존재에 대하여 존재의 거대한 이름들이 모두 대등하고 일의적으로 언급되는 포괄적
이고 다원론적인 존재론을 전개했는데, 그렇지만 이 단일한 존재가 순수한 생성이나 변별적 과정의
존재로 이해되는 엄격한 조건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생성의 존재론은 여타의 존재론들에 대한 소박하고 모순적인 긍정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존재론 자체를 과정, 생성으로 완전히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공간, 사유, 힘, 시간, 운동 등 수많은 영역에 걸쳐서 과정 이론들을 개발하여 적용한다.
이십 세기 말에 이루어진 이 엄청난 위업은 생성을 새로운 영역들에 확대하여 적용하려는 수많은 노력을
고무시켰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존재론을 물질성에 대한 물음들에 적용하려고 일치단결하여 노력한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 마누엘 데란다, 브라이언 마수미, 에린 매닝, 제인 베닛, 윌리엄 코널리, 로시 브라이도티
등의 들뢰즈주의자들이다.
레비 브라이언트와 스티븐 샤비로, 디디에 드바이스 같은 객체지향 존재론자들과 사변적 실재론자들도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에 명시적으로 기대어 객체와 사물의 과정 철학을 이론화했다. 요약하면, 생성의
존재론은 형이상학이 끝난 시대에 다수의 새로운 존재론을 위한 대단히 비옥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운동의 철학에 기여한 위대한 공헌은 존재에 대한 생성의 존재론적 수위성뿐 아니라
루크레티우스에서 화이트헤드까지 이르는 이 주변적인 역사적 전통의 정합성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에게 생성은 끊임없는 유출과 물질, 운동을 의미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차이와 사유, 정지
상태도 의미한다.
둘 다의 생성이 존재하는데, 그러므로 들뢰즈 작업의 다른 가닥에 의존하는, 현재 "새로운 유물론"으로
불리는 것과 "사변적 실재론"으로 불리는 것 사이에 분열과 모호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런 분할은 두 가지 생성을 서로 귀속시키지 않거나, 들뢰즈가 결국 하듯이, 그것들을 모두
가로지르는 세 번째 "순수 생성", 즉 힘을 도입하지 않은 채 대등하게 확언하기의 어려움과 어쩌면 불가능
성을 입증한다.
들뢰즈의 경우에는 "물질의 힘"이 존재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유의 힘"도 존재한다.
만물이 생성하는 이유는 만물이 생성의 힘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마르크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운동학적 유물론에 맞서 힘의 존재론적
수위성을 꽤 명시적으로 표명한다.
"원자론은 초기 역동주의를 가리는 가면일 것이다"라고 들뢰즈는 적는다. 들뢰즈의 입장은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한계가 있는데, 그것들을 대조하면 『존재와 운동』의 참신한 기여를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운동.
첫 번째 한계는 들뢰즈의 운동 이론이다.
모든 다른 유출과 마찬가지로 물질의 유출이 모든 다른 유출과 존재론적으로 대등하다면, 들뢰즈의 다원
론적인 생성의 존재론에서 정지 상태나 부동, 단절, 휴식이 없는 운동의 끊임없는 생성을 찾아내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주요 저작들 가운데 거의 모든 것에서 정반대의 사태를 보게 된다.
그는 언제나 결국에는 운동을 정의하는 데 정지 상태나 부동을 다시 도입하게 된다.
예를 들면,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명시적으로 운동을 시간에 종속시킨다.
"[세 번째] 종합이 필연적으로 정적인 이유는 시간이 더 이상 운동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인데, 시간이
변화의 가장 근본적인 형식이고, 게다가 변화의 형식은 변화하지 않는다."
『의미의 논리』에서 제시된 "모든 물질과 독립적인, 시간이라는 텅빈 형식"에 대한 들뢰즈의 이론에서
운동과 물질의 시간에의 종속은 명시적이다.
따라서 16장에서는 통째로 들뢰즈가 "정적인 존재론적 생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루어지고, 17장에
서는 "정적인 논리적 생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루어진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흔히 사회를 "부동의 모터"로 서술하고, 게다가 마르크스를
인용하면서 "흐름"이라는 개념을 연속적으로 "부숴지"거나 "중단되"거나 "단절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객체'는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고, 모든 흐름은 객체의 파편화를 전제한다."
『천 개의 고원』에서 그들은 심지어 이렇게 적는다.
"그러므로 속력과 운동을 구별짓는 것이 필요한데, 운동은 매우 빠를 수 있지만, 그 사태가 운동에 속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속력은 매우 느릴 수 있고, 심지어 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속력이다."
그러므로 유목민의 "운동 없는 항해."
이런 인용문들은 들뢰즈의 텍스트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일탈이 아니고, 그것들을 인용함으로써 나는
어떤 영리한 해석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는 운동을 정지 상태에 의거하여 명시적이고 일관되게 서술하는데, 이것은 화이트헤드를 떠올리게
한다.
속력과 시간, 정지 상태, 차이는 각각 운동에 대한 존재론적 우월성을 명시적으로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다원론적인 생성의 존재론에서 운동은 너무나 흔히 여타 종류들의 유출 옆에 대등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모든 상황에서 부동에 운동을 넘어서는 특권을 분명히 부여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끊임없는 운동과 생성의 "움직임"에 대하여 말함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존재론과 궁극적으로
양립하지 않는 정지와 중단과 부동 상태의 존재를 일관되게 포함시킨다.
운동의 평면에서는 만물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끊임없는 움직임을 분할하지 않으면 정지 상태는 도입될 수 없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운동 이론은 적어도 대단히 불균등하고 파열되어 있고, 게다가 최악의 경우에는
(운동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정지 상태, 시간, 부동의 속력, 생기력 등의 속성들에 명시적으로
종속된다.
이차 문헌에서, 특히 동일한 스피노자주의적 전통을 좇는 문헌에서 유사한 문제가 발생한다.
물질.
들뢰즈의 생성의 존재론이 갖는 두 번째 한계는 물질 이론이다.
운동이 물질의 유출이라면 들뢰즈의 다원론 역시 적어도 여타 유출들에 대한 물질의 존재론적 공(共)
수위성이나 내재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또 다시 이것은 들뢰즈가 행하지 않는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철학을 물질의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내재성의 평면"을 펼치고 "사유의 유한 운동"을 통한 개념들이 그 평면을 차지하게 하는 "사유의
무한 운동"으로 규정한다.
이런 다양한 사유의 운동은 물질적 존재자와 사물들이 아니라 "사물과 존재자들에서 추출된 사건들"로
규정되며 존재론적으로 존재를 "공간과 시간, 물질, 사유, 가능태"로 서술함으로써 규정되는 철학적 평면
들을 펼친다.
요약하면, 철학은 지금까지 항상 존재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내재성을 무언가=x에 넘겨주었"고, 그래서
초월적인 것의 발견과 유사했다.
그렇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생성의 존재론은 "내재성의 평면인데, 동시에 그것은 사유되어야 하는 것과
사유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유 속의 비사유다. 그것은 모든 평면의 기초인데,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모든 상상할 수
있는 평면에 내재적인 것이다."
내재성의 평면이 사유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여타의 평면들을 생각하는 사유의 무한 운동 자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이 평면은 "철학자들의 그리스도" 스피노자가 최초로 발견했다.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일자이지만 사유와 물질을 비롯하여 병렬적이고 존재론적으로 공수위적인 속성들이
무한히 많이 있다.
그렇지만 또한 스피노자는 사유가 자신의 평면과 여타의 평면들을 모두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속성이
라고 꽤 명시적으로 표명한다.
그러므로 사유와 물질을 존재론적으로 동등하고 서로 환원될 수 없게 만들고자 하는 스피노자의 시도는
급진적일지라도 그런 속성들 가운데 단 하나가 여타의 것들을 재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들 사이에는
여전히 근본적인 불평등이 남게 된다.
그렇지만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이 난처한 쟁점을 너무 빨리 건너뛰면서 "지성만이
그것이 파악하는 형식들의 본성을 객체적으로 재생산한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다른 주석가들에 맞서서 사유가 물질과 여타 속성들을 창조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데, 요컨대 사유는 그것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모두 객체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다.
그러므로 한 불평등(주관적 관념론)이 폐기되어서 다른 한 불평등(사변적 관념론)을 드러낼 뿐이다.
자신의 첫 저작에서 마지막 저작에 이르기까지 들뢰즈는 자신이 "사유의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에 유사한
존재론적 수위성을 부여한다.
스피노자를 좇는 들뢰즈에게 사유는 다수의 평면 가운데 생성의 한 평면일 뿐이지만, 더 중요하게도,
그것은 자신의 평면을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평면이면서 (물질, 공간, 시간, 가능성 등) "모든 평면의 기초"
이기도 하다.
또 다시 이것은 텍스트에 숨은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점에 대하여 명시적인데, "스피노자는 '최고의' 내재성의 평면, 즉 가장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그 다음에 기묘하게도, 철학적 실천을 정의하는 "사유의 무한 운동"에 대한 들뢰즈와 과타리의 서술은
물질 없는 일종의 순수 운동―마르크스가 서술할 표현대로 기묘하게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며 "순전히
형식적인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론적 실천이 물질성을 조금이라도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모든 평면을 생각하는, 사유되지 않은 전제
로서의 내재성의 평면에 대한 무한하고 객관적인 조사나 그 평면의 재생산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존재론적 실천은 생산적이고 전후 관계에 의존하며 운동기록학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역사.
들뢰즈가 구상한 생성의 존재론이 나타내는 세 번째 한계는 그것의 역사 이론이다.
존재는 생성이라는 들뢰즈의 논제는 역설적으로 들릴지라도 명시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주장이다.
내재성의 평면이 여타 평면들의 기초라는 주장은 이전에 발명된 모든 평면에 대한 국소적 주장이거나
역사적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평면에 대한 주장이다.
스피노자와 꼭 마찬가지로 들뢰즈에게 사유는 아무 한계도 없이 자신과 여타의 평면들을 가로질러 무한히
전개하면서 탐사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사유가 자신을 기입 행위와 연결시켜서 역사와 관련시킬 어떤 물질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들뢰즈에게 존재론적 실천, 즉 "사유"는 역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전체―과거와 현재,
미래―에 내재한다.
그러나 내재성의 평면이 항상 단일하고, 존재 자체가 항상 순수 변주라는 것이 참이라면, 어떤 무한
운동들이 유지되고 선택되는지에 따라서 역사 속에서 서로 계승하고 경쟁하는 다양하고 각기 다른
내재성의 평면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더욱더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사유만이 재생산할 수 있지만 역사적 환경과 지리적 환경에 다르게 의존하는 것으로 사유
되는 생성의 순수 평면은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역사"는 단지 "생성하려면, 말하자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외면하는 조건들의 집합"일 뿐이다.
"철학은 생성이지 역사가 아니고, 철학은 평면들의 공존이지 체계들의 연쇄가 아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올바르게도 역사적 존재론들의 단순한 연쇄나 변증법적 전개, 결정론적 진화를 거부
하지만, 이것이 모든 존재론적 서술이 언제나 공존함을 반드시 뜻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서술들이 인간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발명되기 전에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4억 년 전에는 영원에 대한 플라톤적 서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론적 실천은 역사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지 생성의 사변적 평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론적 실천들은 그것들이 역사 속에서 창조된 이후에야 오늘날에 그렇듯이 다른 존재론적 서술들과
공존하고 혼합될 수 있다.
사실상, 미래 평면들의 공존을 가정한다고 해서 철학적 분석에 추가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더욱이 사유(생성)가 물질(역사)로부터의 도피인 것이지 물질은 사유나 자신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고
왜 말하는가?
들뢰즈와 과타리는 올바르게도 역사는 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다음에 왜 생성은 사유가 역사가 아닌 다른 것이 되기를 요구하는가?
유출들의 존재론적 평등성이 정말 존재한다면, 역사와 물질은 자신의 유출, 즉 운동을 통해서 전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새로운 존재론적 서술과 기입을 창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 물질이다.
이 논점의 기미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가장 마르크스주의적인 책인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분명
한데, 그 책에서 그들은 기입의 역사적 조건과 물질적 조건을 서술한다.
그렇지만 『안티 오이티푸스』에서 이런 조건들은 단지 욕망의 사회적 조건으로 이해되기에, 나중에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분명해지듯이, 생성의 사유로 "무시당하게" 된다.
따라서 물질과 역사를 통한 그것의 운동의 평면은 무한한 사유가 횡단할 또 하나의 평면일 뿐이다.
한계.
그러므로 생성의 존재론의 역사적 선구자들은 몇 가지 한계점이 있는데,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은 완전히
정적이고 비역사적인 것이며, 들뢰즈의 존재론은 더 정교하지만 정지 상태와 사유, 생성에 대한 이론들에
의해 궁극적인 한계를 나타낸다.
두 철학자는 모두 탄탄한 생성 이론을 제공하지만, 운동의 존재론은 제공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유출들은 모두 존재론적으로 대등하지만 운동은 끊임없이 단절되어 정지상태와 뒤섞인다고
말한다.
조합되었을 때 어떤 모순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공간의 평면과 힘의 평면, 시간의 평면과는
달리 정지 상태의 평면과 운동의 평면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에 있는 명시적인 모순을 제기한다.
들뢰즈는 철학은 사유의 "운동"이라고 말하지만, 그 다음에 생성의 순수 평면이라는 스피노자주의적
사유로 철학에서 모든 물질을 정화시킴으로써 이 운동을 폐기한다.
그는 사유는 역사 바깥에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 다음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평면들이 모두 공존하고
오로지 역사를 무시함으로써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들도 지금까지 이런 비역사적 접근 방식을 선호했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가 제기한 주장들의 존재론적 본성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들뢰즈의 철학은 허블이 반증한 후에도 대중적으로 만연한 20세기의 아인슈타인적 패러다임―우주는
절대적으로는 정적이지만 내부적으로 그리고 시공간적으로는 역동적이라는 패러다임, 우주는 부동적이
지만 창조적이고 생성적이라는 패러다임, 우주는 존재론적으로 "운동 없는 항해"라는 패러다임―와 매우
잘 어울린다.
오늘날 우주론과 양자중력, 다른 분야들에서 이루어진 발견 결과는 그런 주장들의 낡고 역사적인 본성을
드러내지만, 철학으로 하여금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역사적 존재론을 강제로 창조하게 만드는 새로운
조건도 설정한다.
이런 견지에서 『존재와 운동』은 생성의 존재론을 완전히 전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헤겔의 전도나 루크레티우스의 플라톤의 전도처럼 이 전도 역시 전환이다.
『존재와 운동』은 운동과 물질의 끊임없는 생성을 차이와 정지 상태, 사유의 생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
이라고 상정할 뿐인 존재론적 전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운동의 수위성이 상대적 정지 상태와 사유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운동의 존재론은 땅 위에서 이동하면서 과정 철학을 뒤집고 모든 생성을 완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만든다.
정지 상태는 흐름들의 소용돌이가 된다.
사유는 자기정동적인 물질들, 즉 신체와 뇌, 도구, 모든 종류의 보철물의 조정된 리듬이 된다.
존재론은 당대의 물질적 및 운동학적 조건에 기반을 두고 있는 역사적 존재론이 된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사변 철학의 "신비주의적 껍질"에서 변증법의 "합리적 핵심"을 추출하여 새로운
역사적 유물론적 변증법을 낳은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운동의 존재론은 생성의 사변적 존재론에서 유출의
"합리적 핵심"을 추출하여 새로운 역사적 유물론적 운동의 존재론을 낳는다.
그러므로 운동의 방법론적 수위성은 존재로서의 존재나 심지어 생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엄격히 존재
론적인 주장이 아니고, 오히려 역사로서의 생성에 대한 역사적 존재론적 주장이다.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만물이 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과 화이트헤드, 들뢰즈가 어떤 의미에서 틀린 이유는 그들이 생성의 본성에 대하여 비역사적
주장들을 제기했기(그들은 제기했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들이 그들은 알 수 없었고 지금에서야
명백해진 어떤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논점에서는 『존재와 운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실이 바로 『존재와 운동』을 제대로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존재론으로 만드는 것이다.
존재와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키는 여타의 거대한 이름들은 순수 생성 속에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여태
까지 역사적으로 발명된 것들만이 공존하고 뒤섞이는데, 그것도 현재 국면의 물질적-운동학적 조건에
대해서만 그렇다.
더욱이 초월성에 대한 이전의 주장들이 모두, 들뢰즈가 말한 대로, 진정한 생성의 평면과 대조를 이루는
"환상"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각각의 운동학적 현재의 실재적 차원들이다.
이런 존재론적 역사의 기초를 형성하는 운동 이론을 다루기 전에 이 장에서 제기된 마지막 두 가지 방법
론적 쟁점, 즉 실재론과 유물론을 다음 장에서 다루어야 한다.
―― 토머스 나일(Thomas Nail), 『존재와 운동(Being and Motion)』(2019), pp. 3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