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아르메니아의 힘 2023.10.26
코카서스 3국이 한국인들의 새로운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나도 10월 3~12일 두바이를 거쳐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순으로 세 나라를 돌아보고 왔습니다. 험준한 산야의 풍광과 오래된 성당, 수도원이 인상적인 여행이었습니다.
우리가 코카서스 3국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세 나라의 관계는 복잡다단하며 종교나 언어, 문화에서 상당히 이질적입니다. 모두 유럽의 빈국이지만 그중에서도 아르메니아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하고 고난의 역사로 점철된 약소국입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숱하게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으며 북으로 조지아(예전 그루지야), 동으로 아제르바이잔, 남으로 이란, 서로는 튀르키예와 국경이 맞닿아 포위된 형국입니다.
특히 기독교국 아르메니아와 이슬람국 아제르바이잔은 원수 같은 관계입니다. 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도 두 나라의 충돌이 빚어져 불안했습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인 1991~1993년, 그리고 2020년 두 번에 걸쳐 두 나라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아제르바이잔 서쪽 영토인 나고르노 카라바흐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소련이 붕괴되자 이들이 아르메니아와의 합병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자 아제르바이잔은 학살로 대응했고, 1991년 8월 아르메니아가 합병을 선언함에 따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1994년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한 뒤, 아르메니아가 이곳을 점령해 실효 지배하자 아제르바이잔은 2020년 9월, 평화협정을 어기고 공격해 2차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6주 만에 종료된 이 전쟁으로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요충지를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입니다.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과 형제국인 튀르키예에 대해서도 원한이 깊습니다. 1894~1896년과 1915~1918년 두 차례 튀르키예의 전신 오스만제국에 의해 자행된 제노사이드(집단학살) 때문입니다. 제2차 학살 때 150만~2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되고, 1915년 이후 아르메니아 영토의 80%가 튀르키예에 넘어갔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걸렸다는 전설의 아라랏산(해발 5,137m)도 빼앗겨 그 땅의 수복이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한 맺힌 비원이 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국장(國章)에는 ‘민족의 영산’ 아라랏산이 들어 있는데, 튀르키예가 “너희 땅도 아닌데 왜 넣었느냐?”고 따지면
아라랏산을 새겨 넣은 국장(國章)
“너희 국기에 그린 초승달과 별은 니 거냐?”라고 맞받아친답니다. 수도 예레반의 빅토리공원에 세워진 아르메니아 어머니상이 들고 있는 칼끝은 튀르키예를 겨누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1991년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지금도 군사적 정치적으로 러시아에 일정 부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지정학적 고립무원과 빈곤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13.5% 크기에 불과한 국토는 90%가 고도 1,000m 이상의 산악지대입니다. 인구는 300만 조금 넘는데 해외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인구가 800만을 헤아리는 비운의 민족입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는 로마보다 36년 먼저 AD 301년에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405년에 고유의 문자를 창제해 사용해온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어머니상. 칼과 함께 와인을 든
조지아 어머니상과 사뭇 다르다.
민족의 단일성, 수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역사, 그리고 높은 문화예술 애호, 이 세 가지 점에서 아르메니아는 한국인들에게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나라입니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몰려 사는 예레반은 문화의 향취가 높은 천년고도입니다. 맨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석회암 동산에 계단을 조성해 만든 캐스케이드(작은 폭포) 콤플렉스입니다. 예레반의 설계자 알렉산더 타마니안(1878~1936)과 제자들에 의해 조성된 이 세계적 랜드마크는 대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가 성공한 사업가 제라드 카페지안(1925~2013)의 기부로 2009년부터 조성됐지만 아직도 미완성입니다. 그가 기증한 조각작품이 이곳을 명소로 만들었습니다. 콜롬비아의 ‘행복한 뚱보들의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1932~2023)의 ‘담배 피우는 여인’, 우리나라 작가 지영호가 폐타이어로 만든 ‘라이언 2’, 웃는 남자로 유명한 중국 웨민쥔(岳敏君)의 작품 등이 눈길을 끕니다. 캐스케이드에 올라서면 예레반 시내는 물론 맑은 날엔 저 멀리 만년설을 이고 있는 아라랏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레반 지도를 펴놓고 도시계획을
고심하고 있는 타마니안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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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케이드(사진 왼쪽)와 그곳에 올라가 찍은 예레반 시내.
저 멀리 아라랏산은 구름이 끼어 잘 보이지 않는다.
시내에는 조각품과 세계적 문화예술인들의 동상이 많습니다. ‘인간희극’으로 유명한 윌리엄 사로얀(1908~1981)은 아르메니아계 이민자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미국 작가인데, 퓰리처상 수상을 거부한 사람답게 꼬장꼬장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프랑스광장에는 프랑스가 보내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조각이 있습니다. 프랑스는 중세의 십자군 원정 때부터 아르메니아와 가까웠고, 제노사이드를 국제적으로 처음 인정해 튀르키예와 대립해온 나라입니다. 프랑스 샹송의 전설 샤를 아즈나부르(1924~2018), 프랑스 총리를 지낸 에두아르 발라뒤르도 아르메니아계입니다.
아르메니아 지도를 들여다보면 숨통이 막힙니다. 코카서스에서 가장 넓은 호수(세반호수)가 자랑이지만 바다도 없고 사방 어디로도 출구가 없는 것처럼 답답합니다. 이런 나라가 역경을 헤치고 살아가는 길은 결국 문화예술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소프트파워를 기르는 것 아닐까요?
오보에와 비슷한 전통 관악기 두둑은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제법 알려졌고, 두둑의 명인인 작곡가 지반 가스파리안(1928~2021)은 아르메니아의 전통 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린 사람입니다.
이 나라가 아끼는 오페라 하우스 앞에는 작곡가 겸 지휘자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의 좌상이 있습니다. 발레곡 ‘스파르타쿠스’ 등으로 유명한 그의 악보와 영화음악 자료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지폐에도 등장했던 그는 러시아,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등의 순으로 4개국 모두에서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사람입니다.
또 프랑스광장 옆의 사야트 노바 애비뉴는 음유시인 사야트 노바(1712~1795)의 이름을 딴 거리입니다. 그의 삶을 다룬 영화 ‘석류의 빛깔’이 2012년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는 아르메니아인이지만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에서도 존경을 받는 시인이자 음악가입니다.
예레반 오페라 하우스와
아람 하차투리안 동상
아무리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싸운다 해도 문화예술은 증오와 적대를 넘어서게 할 수 있는 공존과 공감의 원천입니다. 아르메니아의 앞날이 문화의 힘을 통해 밝고 맑아지기를 기대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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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데일리임팩트 주필,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 ‘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노래도 늙는구나’,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