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비법은 / 문소영
"어, 얼굴이 바뀌었어요." 거의 1년 만에 만난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바뀌었느냐고 물어보니. "좀 잘생겨 보이고 권위가 있다고나 할까, 좀 근엄해 보인다."고 했다. 예쁜 게 아니라 잘생겨졌다니! 관상이 좋아진 것이냐 하며 좋아할 뻔하다 '잘생겨졌다'는 진짜 의미를 잡아냈다. 그건 내 기준으로는 인상이 나빠진 것이다.
신문사 정치부장과 논설실장으로 살아낸 지난 1년은 웃을 일이 거의 없었다. 무표정하게 데스크 일을 하면서 얼굴 근육이 굳어버렸나 보다. 2월 설날을 앞두고는 다리 골절이 있었고, 2017년 말 전쟁 직전까지 갔던 북미관계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비핵화를 고리로 개선되면서, 남북 정상회담이 4월과 5월, 9월에,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6월에 열리는 등 외교안보 문제로 정부가 바빴던 것만큼 나도 바빴다. 숨 쉬는 대부분의 시간은 업무용 대화가 쌓여갈 뿐이니, 외롭게 늙어가며 일에 몰두한 독짓는 늙은이처럼 표정이 과묵하고 어둡게 바뀐 것이리라.
그러나 내 노년의 꿈은 '귀여운 표정의 할머니'가 아닌가. 그림동화 작가인 타샤 튜터와 같이 꽃과 나무를 돌보며 동화를 쓰고 그림도 그리는, 온화하고 평화로운 할머니가 되어 꼬맹이들에게 사랑받겠다는 야심찬 계획 말이다. 그리하여 잊고 있었던 과거의 비법을 꺼내기로 했다.
10여 년 전 속상한 일이 있거나, 기분이 나빠지면 억지로 양 입 꼬리를 귀까지 쭉 끌어올려 활짝 웃는 얼굴 표정을 짓고는 했다. 직장생활은 기분 나쁜 일의 연속이기 십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서너 번 짓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곤 했다. 몇 분 뒤에는 진짜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자세가 된다. 우울이나 분노도 휘발성 물질인 것처럼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미국 연수생활에서 생긴 버릇인데, 한국이라면 화가 날 때 하소연할 대상을 찾아 수다로 날려버릴 수도 있었지만, 낯선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견디며 그 나름대로 잘 살아보자며 생존의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뇌는 다소 바보 같아서 '가짜 웃음'을 지을 때 얼굴 근육들이 움직이면 진짜 웃는다고 판단해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엔도르핀이나 도파민 같은 호르몬을 뇌에 분사해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또웃는 표정의 근육은 뇌의 혈류량과 귀로 들어가는 공기의 양을 늘려 뇌의 온도를 낮추는데, 이때 기분이 좋아진다.
이와 비슷한 이론으로 심리학에 '제임스-랑게(James-Lange)이론'이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니까 슬프고, 웃으니까 기쁘다.'이다. 상식적으로는 '슬프니까 울고, 기쁘니까 웃는다.'인데, 이런 상식에 반해 이 이론은 인간의 어떤 행위 자체가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독일의 티체 박사에 따르면 웃음은 스트레스를 진정시키고 혈압을 떨어뜨리며 혈액순환을 개선시키고, 면역체계와 소화기관을 안정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반면 화가 나지 않아도 화내는 표정을 하면 심장 박동 수와 피부 온도가 올라간다고 한다. 생체리듬이 불쾌한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스타일로 웃을 것인가. 낯선 이들에게도 잘 웃기로 유명한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남부 사람들의 웃음을 따라갈 만한 지역이 없다고 한다. 미국 동부인들은 유럽인과 비교하면 비교적 친절하지만, 낯선사람들에게까지 웃으며 인사하지 않는다는 게 미국인 지인의 설명이다.
미국 남부인은 한국식으로는 마음이 푸근한 시골사람들 같다. 우선 햇빛이 많은 곳에 사는 사람들답게 밝고 활기차고 상냥하다. 낯선 사람들에게 생끗 웃으며 "안녕하세요!"를 다반사로 건네는 미국인들은 대체적으로 남부출신으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남부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누구이냐면, 미드 《클로저》(CLOSER)에 나오는 금발의 여자 형사부장이나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드라마《어페어》(THE AFFAIR)의 여주인공인 앨리스와 같은 인물이다. 잘 웃고 상냥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도 잘 개입하는 참견쟁이들이다.
돌아보니 기자 초년병 때 조직생활이 익숙하지 못해 잘 웃지 못했다. 그때는 젊은 덕분에 그 쌩한 표정을 무마하며 돌아다닌 것 같다. 이런 나를 다독인 것은 부장이나 동료들을 같이 험담한 선배나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막상 뒷담화를 하는 인물이 나타나면 나와 달리 웃고 농담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그때 어린 마음에 이중적인 인격이라고 생각하고 선배 등에게 혐오감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조직생활의 연차가 쌓이다 보니 싫으면 싫은 대로 표시하고, 좋으면 좋은 대로 얼굴이 드러내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도 너스레를 떨며 잘 웃었어야 했다. 상대방도 내가 좋아서 내 앞에서 웃어준 것이 아니라, 어른스럽게 감정을 처리해서 내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인상 좋은 노년'을 생각한다면, 친절하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하고, 무엇보다 많이 웃어 표정 자체가 화회탈처럼 웃는 얼굴로 변하는 것이 좋겠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했다. 잔뜩 골난 얼굴이나 권위적인 표정이 가면처럼 내려앉은 얼굴이라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썩 만족스럽지 않게 삶을 살아왔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아침저녁으로 이를 닦을 때 거울을 보면서 활짝 웃는 연습을 하겠다. 햇빛이 찬란한 해변에서 '나 잡아봐라' 하며 뛰어다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 웃음에 더 생기가 있어질지도 모르겠다. 혼자가 되면 사무실에서, 화장실에서, 호젓할 때도 입술 끝을 잔뜩 올리며 웃는 연습도 하고 소리를 내서 '하하하' 하고 웃는 연습도 해보려고 한다. 사무실에서 팔굽혀 펴기를 하거나, 기마자세로 엉거주춤 스쿼트 자세를 취해 육체 건강을 챙기듯이, 웃을 일이 많지 않은 지위에 있다면 웃는 연습으로 정신건강을 챙겨야 한다. 마침 중년이라 더욱 그래야만 한다.
올해 경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난해 연말부터 이어지고 있다. 북미관계의 교착상태도 올해 이른 시기에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야만 해소될 수 있다.집과 회사, 사회생활에서 속상하고 어려운 일이 많을 수 있다. 암울한 기사들이 많이 올라오면 마음은 괴로워질 것이고, 엄숙한 얼굴로 데스크 보는 일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올해는 지난해와 달리 많이 웃어보리라 하고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