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오는 바다를 찾아라.'
1번 퍼시픽 하이웨이 해변도로를 타고 북상하면서 비치마다 기웃거렸다. 몸과 맘을 풀어놓을 아늑한 공간이 필요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천둥벼락 같은 일들을 몇 차례 겪고난 참이다.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리셋이 필요하다. '나는 나다.'라는 확인 작업이다. 벤추라 비치 표지판 너머로 한적한 해변이 보이는 순간, 반사적으로 운전대를 꺾어 출구로 빠져나왔다. 바다는 불시에 찾아온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밀물이었다. 모래톱은 파도가 길게 펼쳐질 만큼 넓었다. 방파제 가까운 곳에 파라솔을 펴고 매트를 펼친 다음 그대로 누워버렸다. 이른 오후의 햇살을 가려주는 한 점 그늘이 고마웠다. 무엇을 더 바라는가. 나는 살아 있다. 몸은 가장 편한 자세이고 오관은 건강하게 깨어 있다. 파도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은빛 햇살이 보인다. 피부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도 느낀다. 몸을 바닥에 눕히니 마음이 덩달아 눕는다. 눈도 감긴다.
열 살 때 살인적인 무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여름날이 생각난다. 산달이라서 배가 부를 대로 불러 가쁘게 숨을 쉬던 서른세 살의 엄마가 보인다. 엄마는 무슨 재미로 살까. 내가 엄마 나이가 되면 무슨 낙이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서른세 살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궁리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땀을 몹시 흘리며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엉뚱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열 살 먹은 내가 행복하다거나 재미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여자 아이가 아니었다. 손과 몸을 움직여 무엇을 하기보다 멍하게 앉아있는 때가 많았다. 그때 엄마 나이를 훌쩍 넘긴 나는 세상을 사는 이유가 재미니 낙이라는 가벼운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진즉 알게 되었다.
눈을 뜨니 하늘이 보인다. 벤추라 비치에서는 하늘과 바다가 하나다. 송순태 시인의 시, 《지우개》가 하늘을 배경으로 시화처럼 펼쳐진다.
"잘못 써내려간 문장이 있듯이 잘못 살아온 세월도 있다."고,
"고쳐 쓰는 문장이 있듯이 다시 출발하고 싶은 세월도 있다."고 한다. 급기야 '땅에서 잘못 살아온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온 이유'를 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가 문장을 고쳐 쓰듯 잘못 살아온 세월을 되돌려서 다시 출발하고 싶어서라는 말인가? 아닌 것 같다. 바다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바다는 사람의 과거나 미래에 무연하다. 바다에서 느낀 만큼 성숙해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갈등이나 고뇌를 파도는 해결해주지 않는다.
파라솔의 그림자가 뒤로 옮겨갔다. 햇살이 어느새 순하다. 밀물이 빠른 속도로 모래톱을 점령해 온다. 유유함과 도도함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바닷물이 방파제까지 밀려오기 전에 걷자. 시선이 닿는 저쪽 끝까지, 그리고 이쪽 끝까지.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접경을 따라 걸었다. 물은 따뜻했고 물가 모래 바닥은 단단했다. 걸음은 겅증겅증, 보폭은 자유분방, 밀려 올라오고 밀려 내려가는 파도의 폭은 높기도 하고 얕기도 했다.
언젠가 이렇게 파도가 오가는 물속을 오랫동안 걸었던 적이 있다. 끝없이 걸은 것 같은, 그렇게 걷다가 지구 바깥으로 그렇게 걸어나가 버리고 싶었다. 내가 아닌 것 같은, 마치 다른 사람이나 된 것처럼 낯선 내가 이상한 별에 내려온 느낌이었다. 그 별에 사는 어느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던 적이 있다. 바다는 설명이 불가한 힘을 주고, 신비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걷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후회도, 추억도, 계획도 하지 않았다. 있어야 할 일이 있었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다. 말과 생각이 사라지게 하는 사건들. 예전에 잔혀 겪지 않았던 일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사람은 왜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어려울까. 지난 몇 달 동안 힘들었던 이유는 원활하지 않은 소통과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 아쉬움을 달래느라 과외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아니다. 이제 와서 뒤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밀물과 썰물이다.
석양빛이 담백한 회색 톤으로 바뀌었다. 바다는 암청색, 모래톱이 허전하다. 해가 지면 사람들은 왜 바다를 떠나는 걸까? 돌아갈 둥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게 다가와 마음을 적신다. 나도 어서 돌아가야지.
눈을 들어 걸어온 거리를 가늠했다. 시야가 탁 트인 해변에 독특한 자세로 앉아 있는 한 여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모래 구덩이를 깊이 파고 그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 모래 속에 가려 허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등을 바다로 돌리고 얼굴은 방파제 쪽을 향하고 있었다. 파도나 수평선, 하늘이 아니라 자동차들이 오가는 해변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술병을 입술에서 떼지 않는 그녀 옆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외로움의 실체를 보아버렸다. 외로움이란 저런 것이구나.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싶었다. 친구하자,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녀를 향하여 빠르게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절실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핑계다. 외로움에게 다가가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타인의 외로움을 껴안기 위해서는 희생과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다. 나의 외로움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외로운 그녀는 앉아 있고 외로운 나는 걷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루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나의 외로움은 보다 근원적이다. 술로 속을 데우지 않아도, 강아지가 없어도, 내 안에는 따뜻한 생각이 흐른다. 정겨운 사람들이 있다. 풍요롭고 의미 있는 추억이 가득하다. 하고 싶은 일들이 있고 가고 싶은 곳이 많다. 때때로 힘들고 외롭지만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도록 그 감정들을 담담하게 대면할 힘이 있다. 나는 적어도 바닷가에서는 자동차가 달리는 산 쪽을 바라보지 않는다. 난만한 파도 속에서 삶에 대한 위로와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그녀는 바다에게 등을 돌리고 어떻게 외로움을 견디고 이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일까? 그녀는 혹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건넬 사람을 기다린 것일까? 그래서 방파제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오, 미안.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녀의 외로움이 내게 약이 되었다. 그냥 이렇게 살자, 마음 먹는다. 저 파도처럼 밀려가듯 밀려오며, 밀려오듯 밀려가며, 잘못 살았다 한들, 그래서 세월을 되돌린다 한들, 어찌할 건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우개로 지우고 싶지도 않다. 아니 지운다 한들, 뭐가 달라질 것인가.
조르바가 그랬다. "내가 콩을 먹으면 나는 콩 같은 말을 합니다. 나는 조르바이니 조르바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죠." 나는 나이니 여전히 나처럼 살 것이다.
슬프든 기쁘든 지난 시간의 추억들이 지금 나를 살게 하지 않는가. 그냥 이대로 걷겠다.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을 기꺼이 감당하겠다. 오늘 벤추라 비치에서 얻은 리셋의 결론이다.
첫댓글 Ventura(벤추라)
https://ko.m.wikipedia.org/wiki/%ED%8C%8C%EC%9D%BC:Ventura_aerial.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