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만공 월면스님 - "참선통해 마음 깨닫는 것이 佛敎"
근대의 고승인 만공(滿空)의 본관은 여산(礪山)송씨(宋氏)이고, 속명은 도암(道巖)이다. 법호는 만공이고 법명이 월면(月面)인데, 수산(山)이라는 도호를 쓰기도 했다. 그는 1871년(고종 8년) 3월 7일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통(神通)이고,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신령한 용이 구슬을 토하자 황홀한 광명을 발하는 태몽을 꾸고 그를 잉태했다고 한다.
1883년 13세 때 겨울 김제 모악산 금산사에 가서 과세(過歲)하면 오래 산다는 말을 전해들은 부모를 따라 금산사에 갔을 때,처음 불상과 스님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며칠을 절에서 지내고 돌아온 그는 출가해 스님이 될 뜻이 간절하였다. 이듬해 출가하기 위해 야반에 몰래 집을 나와 전주 봉서사와 송광사,논산 쌍계사를 거쳐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의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였다. 그해 10월 초순 동학사를 찾아온 경허(鏡虛)선사를 따라 서산 천장사(天藏寺)에 가서 공양주를 맡아보다가, 12월 8일 태허(泰虛)를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삼아 사미계를 받고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만공이 23세 되던 1893년 11월 1일 천장사에 와서 하룻밤 동숙하던 어떤 소년이 던진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만 알면 생사에 해탈하고 만사에 막히는 것이 없다 하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이에 깊이 발심해 이 화두를 들고 열심히 참구하였다. 가끔씩 의심이 절로 일어나 며칠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진하다 자리를 옮겨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더욱 수행에 전력하였다.
2년동안의 정진 끝에 1895년 7월 25일 새벽에 바라보던 벽에 홀연히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고, 범종을 치면서 "만일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요달해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해야 한다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네"(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화엄경' 제1게송을 읊다가 문득 깨달아 일체의 의심덩어리가 무너졌다.
그 뒤 만공은 공주 마곡사로 옮겨 보경(普鏡)스님이 지은 토굴에서 밭을 일구면서 1년여 동안 정진을 계속했다. 이듬해인 1896년 7월 15일 무렵 경허가 이 토굴로 방문해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를 가지고 다시 정진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내리자 이를 따라 더욱 정진하였다. 이후 1898년 경허를 모시고 서산 도비산 부석사와 부산 범어사의 계명암 등지에서 수행하였다.
1901년 여름 31세 때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에 들러 며칠 머무는 동안 만공은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같은 어둠을 모두 밝히게 하소서"(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범종 치는 게송을 듣고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그해 7월말 자신의 본사인 서산 천장사로 돌아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飢來喫飯)/ 피곤하면 잠을 자고(困來打眠)/ 홀로 거닐며 자재하는(逍遙自在)" 법열을 즐겼다.
마침내 1904년 2월 34세 때 그는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고 만공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이후 만공은 한해동안 전국의 선방을 돌며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나누다, 1905년 4월에 예산 덕숭산 수덕사 뒤편에 작은 초암을 짓고 금선대(金仙臺)라 이름 붙이고 이 곳에서 보임(保任) 공부를 했다. 사방에서 모여 든 스님들이 그에게 설법하기를 간청하자 여러 번 사양하다 마침내 법좌에 올라 설하고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을 지도했다. 1913년 7월에는 사형인 혜월과 함께 갑산에 가서 스승 경허의 시신을 다비하고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뒤 만공은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견성암,서산 안면도의 간월암 등을 크게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1922년 3월에는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주도한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모임이었던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창립운동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선학원에 깊은 관심을 가져 1924년에는 논 6,000여평을 헌납해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만공은 1930년 1월부터 약 3년여 동안 금강산 유점사와 마하연사에서 조실(祖室)로 있으면서 선을 지도했을 때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능인선원(能仁禪院)과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見性庵)을 열어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근대 한국불교계의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64세 되던 1934년 12월에도 선학원에 논과 밭을 기증하고,선학원이 조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개편하자 이사장이 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선학원에서 개최한 조선불교 수좌대회에서 조선불교 선종의 종정으로 혜월과 한암과 함께 추대되었고 그해 10월에는 마곡사의 주지가 되었다.
1936년 12월에는 설산(雪山) 최광익(崔光益)에 의뢰해 스승 경허선사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직접 영찬(影贊)을 써서 금선대 진영각에 모셨다. 이후에도 만공은 스승의 유고를 모아 편찬하는 일을 주도하여 마침내 1942년 '경허집'이 발간되어 한국불교 전통의 계승과 선의 대중화를 진작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한편 만공이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인 1937년 3월 11일 당시의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가 주재한 13도 도지사가 동석한 31본사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그 요지는 미나미가 "이전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사찰령을 제정하는 등 조선불교 진흥에 공이 크다"고 하자,만공이 단상에 나아가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를 본받아 대처,식육,음주 등 파계하도록 하였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라고 질책한 뒤, 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불교가 일본불교로 변질되어 계율이 문란해지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종교적 순수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이는 당시 불교계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사건이다.
1942년 여름에는 서산 간월도(看月島)의 간월암을 복원하고 기도했는데,이때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읊은 "깨끗한 반야 난초(淸淨般若蘭)/ 때때로 깨달음의 향기 토하네(時時吐般若)/ 사람도 이와 같으면(若人如是解)/ 비로자나 부처님이구려(頭頭毘盧師)"라는 게송이 전한다.
마침내 만공은 1946년 10월 20일 목욕 단좌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인연이 다해 이별하게 되었네 그려"하고는 껄껄 웃고 문득 입적했다. 세수 76세였으며 법랍은 62세였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을 모신 부도인 만공탑을 금선대 근처에 세웠다.
그의 사상과 선 지도방법은 문도 혜암,벽초,원명 등이 1983년에 편찬한 '만공법어'(滿空法語)를 통해 알 수 있다. 권두에는 혜암이 쓴 봉향송(奉香頌)과 경봉이 쓴 서사(序辭),원담의 간행사가 있다. 본문은 상당법어(上堂法語) 42편,당시의 여러 선사들과 선지(禪旨)를 문답한 거량(擧場) 57편,서문 3편,발원문 3편,참선곡,화두드는 법,훈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권말에 자세한 행장이 있다. 이 가운데 상당법어에는 불교와 선의 주요 문제에 대한 법문을 독자적인 경지에서 설파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우주와 만물의 본체를 뜻하는 마음을 깨닫는데 불교의 진수가 있다고 보았으며,인간의 가치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깨닫기 위한 수행법으로는 참선을 으뜸으로 보았다.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였고,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가르쳤다. 참선의 보조여건으로는 선지식(善知識 : 스승)과 수도에 적절한 도량(道場)과 함께 수도하는 좋은 도반(道伴)의 세 가지를 중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스승을 가장 중요한 여건으로 보았다. 진정한 스승은 수행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이며,수행자가 스승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라 참선의 수도가 좌우된다고 가르쳤다.
수도승들에 대한 지도방법은 매우 다양했으며 침묵 또는 방망이질,할(喝) 등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격외(格外)의 대화와 동그라미 등 상대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여러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한 만공은 자신을 임제(臨濟)의 32대손으로 인식했다.
우리나라 선맥의 우뚝한 거봉으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덕숭문중'(德崇門中)은 만공의 법맥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의 제자로는 비구 보월,용음,고봉,서경,혜암,전강,금오,춘성 등과 비구니 법희,만성,일엽 등이 있다.[출처] 만공(滿空)선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