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찬 예배와 가짜 예배 -
성도들의 최우선적인 의무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은 예배를 가장 소중히 여기신다. 첫계명이자 가장 으뜸되는 계명에서도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도 예배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출 34:14)”.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서 예배에 대한 상세한 교훈을 알려주었다. 거기에는 예배의식의 중심이 되는 성소와 짐승의 제물과 제사장직과 그리고 주의깊게 명시된 규례들이 있었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예배의식은 매우 정교했다.
그러나 구약시대와는 달리 신약인 교회시대에 들어와서는 예배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신약의 예배의식은 매우 단순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가르친대로 신자들이 함께 모여 주님을 기념하며 ‘떡을 떼는 것’ 곧 ‘주의 만찬’이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 20:7)” 이 말씀에서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안식후 첫날인 일요일에 주님을 기념하며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초기의 여러 지역교회에서 떡을 떼는 이 만찬예식은 신자들의 모임의 중심이 되었다.
이 ‘주의 만찬’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친히 분부하셨고, 또한 하늘로서 재차 사도바울에게 명하신 기념예식이다(고전 11:23). 신자들은 이러한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 그분의 고귀한 죽음에 대해 주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다. 바로 이 ‘경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이며, 이 ‘주의 만찬’이 신약 지역교회의 ‘공중 예배’였다. 따라서 신약 교회에서 ‘예배’라고 불리우는 집회는 ‘만찬 집회’밖에 없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나머지 정기적인 집회인 “말씀집회, 복음집회, 기도집회” 등은 예배가 아닌 사람을 위한 모임인 것이다. 그래서 만찬집회만 만찬예배라고 부를 수 있지만, 나머지는 말씀예배 복음예배 기도예배라고는 호칭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주의 만찬예배는 초기 사도시대와 교부시대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이어져 내려왔다. 로마 가톨릭은 4세기 이후 성직자들에 의해, 만찬예식 소위 ‘성찬식’을 집행해 왔다. 이 가톨릭의 성찬식은 유대주의와 이교도적인 요소가 가미된 비성경적인 의식행위로서, 예컨대 사제들의 화려한 복장, 의식용 향과 성수, 울리는 종, 불타는 촛대, 각종 십자가 등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것은 초대교회의 단순한 ‘주의 만찬예식’과는 거리가 멀다. 어쨌든 16세기 종교개혁 때까지 ‘주의 만찬’예식은 일요일마다 교회의 중심 예식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그러던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갑자기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개혁자였던 루터는 원래 가톨릭 사제였는데 그는 가톨릭의 ‘성찬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톨릭의 주교들을 상대로 성찬식의 ‘화체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한 행위”라고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톨릭의 화체설을 대신하여 성경의 지지를 갖지 못한 자신의 이론을 개발하여 ‘공재설’을 주장했으며, 나아가 ‘가톨릭 미사 전례’를 개정하여 새로운 개정판을 내놓게 되었다. 이 개정판의 핵심은 앞으로 “일요일 교회집회의 중심은 성찬식”이 아니라 “설교가 교회집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없다p45,프랭크 바이올라,대장간출판)
루터는 ‘이신칭의’라는 구원의 진리와 모든 신자는 ‘만인제사장’ 이란 진리를 발견했다. 이러한 진리의 회복에 대해서는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그는 ‘주의 만찬’에 관한 진리는 제대로 깨닫지 못해, 주의 만찬을 뒤로 제치고 설교를 앞세우는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러고 말았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인은 아무리 짧은 집회라 할지라도 설교 없이 모여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더욱이 그는 “신성한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고 말했다. 루터는 “설교가 예배의 간판이요 핵심”이라고 믿었다. 루터의 이러한 확신이 개신교에 뿌리를 내리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다른 주요 개혁자인 칼빈이나 쯔빙글리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교회집회에서 ‘설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가 없다p50)
이렇게 되어 개신교회의 집회에서 ‘설교가 우선시’ 되면서 ‘주의 만찬은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개혁 초기에는 매주 거행되었던 만찬예식이 차츰 등한시 되면서, 스위스의 개혁자 쯔빙글리는 ‘주의 만찬’을 석달마다 한번씩 거행하도록 권했다. 개혁자인 칼빈도 처음에는 매주 마다 거행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나중에 쯔빙글리의 주장에 밀려나 석달에 한번하는 것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일년에 한번만 성찬에 참여하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관습은 분명히 마귀의 짓이라고 책망했다.(기독교강요4권18장46) 어쨌든 이렇게 되어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파에서는 일년에 한번내지 두세번 정도로 ‘주의 만찬’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주의 만찬’의 중요성을 깨닫고 초기 교회시대와 같이 매주 ‘만찬예배’를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조나단 에드워드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는데, 그는 18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에 한사람이었고 저명한 신학자였으며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기도 했다. 그는 말하기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주 일요일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기념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선지자, 당대 복음주의 양심이라 불리는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 였던 A.W.토저도 이 만찬예배를 가리켜, 복음주의 교회의 “잃어버린 보석”이라고 불렀다.
또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진 C.H.스펄전도 ‘주의 만찬’을 매주 거행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우리들 중에 누군가 생각하는 것처럼, 매주일 떡을 떼는 것이 만찬의 참다운 의미를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참 뜻을 깨닫게 한다. 만찬의 횟수를 줄인다는 것은 교회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매주 주의 날에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체험한 성도들은, 결코 일년에 두서너 번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교회사가들은 “초기 교회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신약교회의 진리들을 보존하고 계승해 온 지역교회가, 존재하지 않은 시대는 한 시대도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이 정하신 두가지 예식인 ‘침례와 주의 만찬’과 그리고 각 지역교회는 단 한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명의 장로들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다는 진리 등이 그것이다. 오늘날에도 전세계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복수장로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교회들은 침례를 실시하며 매주 일요일마다 만찬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교회사를 통해 살펴볼 수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 예배가 이처럼 혼돈을 초래했는지, 그리고 이러한 원인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그것이 사탄의 역사인 것을 알 수 있다. 사탄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예배’라는 사실을 알고, 최선을 다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를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저질러 왔다. 심지어 40일간 금식하신 예수님에게도 감히 나타나, 마귀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마 4:9)’고 하며 하나님의 영예를 가로채고자 하였다. 또한 간악한 사탄은 기독교 외의 종교를 믿는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은 물론이고, 기독교계안에서도 신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최선을 다해 방해를 하거나 가짜예배를 하게 만들었다.
둘째는 상술한 대로 종교개혁자들인 루터와 칼빈 등이 “설교가 예배의 간판이요, 핵심”이라고 오판하여 이런 그릇된 주장이 개신교에 뿌리를 내리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신교인들도 개혁자들 처럼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여 교회의 모든 집회나 행사를 예배인양 혼돈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각종 집회를 예배라 칭하며 심지어 각종 교회행사도 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던 것이다.
예컨데, 주일 오전예배 뿐만 아니라, 주일저녁예배, 수요기도회예배, 금요철야예배, 새벽예배, 교회학교예배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와 같이 교회절기를 만들어 사순절예배, 부활절예배 등을 거행해 왔다. 그 외에 각종 행사도 예배인 것처럼 조작하여 신년예배, 광복절기념예배, 혼인예배, 발인예배, 헌당예배, 개업예배, 창립예배, 박사학위취득예배, 장로장립예배, 출판기념예배 등등 수십가지 예배종류를 만들어 혼란케 했다. 이처럼 사탄의 예배혼란 공작과 전략은 성공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파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예배인양 착각하여 엉터리예배, 곧 가짜예배를 드려왔던 것이다.
오늘날 일반사람들도 예배를 “성가대의 찬양, 목사의 설교, 여러 가지 의식 등을 포함하는 교회의 주일오전 행사”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종종 ‘주일오전 대예배’라 부른다. 그래서 주일오전 예배를 드렸다는 말은, 곧 목사의 설교를 듣고 왔다는 뜻으로서, 예배가 설교를 주축으로한, 말씀사역이 설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학의 권위자 알프레드 깁스나 O.J.깁슨 등은 “설교를 듣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느냐이다” 라고 그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전도출판사).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예언, 즉 말씀사역인 설교의 목적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고전 14:3)”이라고 씌어 있다. 이 내용의 뜻은 설교자를 통해 ‘사람이 무엇을 얻는 것’이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성경말씀에서도 ‘설교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물론이고 목사들조차도 설교가 예배이며, 또한 예배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이 정하신 두가지 예식인 ‘침례와 주의 만찬’을 행하고 있으며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교회통치형태인 복수장로체제를 실행하고 있는 교회는 많지 않다. 그렇지만 전세계적으로 이러한 복수장로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설교를 예배’라고 착각하거나 혼돈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라고 분부하신 ‘주의 만찬’이 진정한 예배임을 알고 초기 교회시대 신자들 처럼 매주 일요일마다 만찬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탄은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 목사들을 미혹케하여 오랜세월 동안 설교가 예배인양 사람들을 속여 왔다. 이제는 더 이상 사탄과 거짓목자들에게 속지말고, 신자들은 ‘주의 만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예배가 무엇인지 살펴보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분부하셨고, 또한 하늘로서 재차 사도바울을 통해 모든 교회들에게 행할 것을 명하셨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누22:19)” 바로 이 만찬예배가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참 예배이며 지역교회의 공중예배인 것이다.
첫댓글 숭사리에서 펀글입니다..예배에 대해서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기에 퍼왔습니다..만찬예배에 대해서 깊은 묵상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극히 일부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전체요지와 전반적인 주장은,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