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도왔던 미국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후 아버님의 소형 철공소의 일손을 도우다가 군에 징집을 당했다.
운전교육대에서 운전을 배워서 면허증을 땄는데 군용차량의 우전을 하다가 사고가 나면
“시골고향의 자갈논을 팔아서 보상을 해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병38연대에 적을 두게 되었는데 어느날 수송관이 정비용공구 카탈로그를 가지고 와서
영어로 된 명칭을 물을적에 완전한 대답을 했더니 공구계를 맡아보라고 했다.
공구실에서 정비병들에게 공구를 내어주고 오후에는 받아드리게 되는데 가끔 분실이 따르게 마련이다.
1년후에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공구병을 면해보려고 독한술 한병을 사들고 수송관이그의 아내와 거주하는 셋방으로 가서 그녀에게 내가 정비를 하고 싶으니 남편에게 부탁좀 해달라고 했는데 익일날 수송관은 내게다가 정비를 하라고 말했다.
눈치를 팬 선임상사는 계통을 밟지않고 월권행위를 했다면서 까만 군화발로 조인트를 깠는데 무지 아팠다.
그날부터 나는 다른 고참동료들과 군용차량 정비를 하는데 사회에서
‘자’자도 모르는 다른 정비병보다는 기술이 월등이 뛰어나게 된다.
그 후 15사단 최잔방 ‘DMZ’로 전출을 가서 그곳에서 3년6개월5일에 만가재대를 했다.
그 당시 한국군에게 군용차에 필요한 적색의 휘발유, 브레이크 액, 그리스, 차량을 덮는 덮게,
자동차 부속 일체(一切:일절이지만 일체라고 읽는다), 겨울에는 체난유 디즐등을 무료로 공급을 받았다.
수송부에서는 드럼에 가득찬 55갤런의 난방용 채난유를 5갤런씩 빼고는 지피나 씨피에 배달을 할적에는 55갤런을 수령했다는 싸인을 벋아 왔는데 나는 정비사이니 나와는 무관했다.
그런데 사단 병참부에가서 연료를 타올적에 2.5톤(두돈반 이라불렀다)추럭에는 55겔런 드럼 20개면 꽉차는데 보급수령을 하는 군인은 2개를 현금으로 받아오게된다.
수송부에서는 통신을 위해서 차랑의 시동을 1시간 켜두었다고 기재를 하여 기름소모를 잡아버리는데 그 돈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는데 군복도 매 한가지 이었다.
작년에 미국에서 작고한 나의 친구는 육군 대령의 지프차 운전병이었는데 미군주유소에 가면 무조건 무료로 휘발유를 가득 채워주니 단골상인에게 빼돌리는데 들락날락하며 시내버스 2대를 살수가 있는 돈을 모아서 재대를 했단다.
전쟁 후 아바님께서 탈곡기를 만드셨는데 회전축 심봉(心棒)에는 6개의 6203번 베어륑이 들어가는데 그 당시 차량에는 발전기(generator)에 2개가 들어있었지만 대구시 북성로에가면 많이 살수가 있었으니 모두 미군부대를 통해서 들어온 것으로 나는 안다.
좌우간 한국군에서 사용하는 방독면, 물통, 탄띠, 실탄, 대검, 총기, 숟가락, 미식기, 철모, 무전기등 모두가 미국산 이었다.
한국전쟁당시 미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공산주의국가가 되어서 지금처럼 발전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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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부근의 웨이크섬에서의 트루맨대통령과 맼아더.
"ME NO CHOICE(내게는 선택권이 없다)"라는 글씨가 보인다.
내가 보관중인 아직도 개봉하지않은 1940년대의 잡지표지
첫댓글
나의 내면을 보며서 결정 하세요
바라 보는 시선이 아닌
마음으로 마음으로만 바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