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8대 임금 예종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장남인 인성대군, 차남인 제안대군이지요. 이중 인성대군은 3살 때 일찍 죽어서 원래대로면 제안대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을 겁니다.
그런데 또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급사합니다. 예종이 승하했을 때 제안대군의 나이는 4살에 불과했지요. 왕위를 물려받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단종의 예도 있고) 당시 왕실의 웃어른이었던 정희왕후는 제안대군 대신 그의 사촌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립니다. 바로 성종이지요.
물론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성종이 당대 최강의 권신인 한명회의 사위였다는 점도 작용했을 겁니다. 한명회 정도 되는 권세가가 장인라면 어린 성종(즉위 당시 12세)이라도 왕위를 위협받지 않을 거라 판단한 것이지요.
여하튼 성종이 왕이 되니 제안대군의 입지가 참 애매해집니다. 예종의 직계인 만큼 그는 성종 이상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고 언제 왕이 되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제 명에 살기란 하늘에 별따기처럼 힘든 일이지요.
예를 들어 훗날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였고, 소현세자의 아들들 역시 삼형제 중 둘이 유배지에서 죽었습니다. 본인들이 왕위를 원치 않는다 해도 주변에서 무슨 바람을 넣을지 모를 일이니까요. 심지어 제안대군의 정통성은 이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제안대군은 천수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제안대군이 왕위에 오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대에 바보로 유명했거든요.
제안대군은 10대 때 스캔들을 거하게 터뜨린 일이 있습니다. 그는 14세에 첫 번째 부인인 김씨를 들였는데 그녀에게는 간질 질환이 있었지요. 다리도 절고 정신도 오락가락 했다고 합니다.
제안대군은 이런 부인이 맘에 안 들었나 봅니다. 그런데 유교가 국시인 나라에서 왕족이나 되는 사람이 함부로 이혼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덩달아 성종은 도학군주라 불릴 정도로 이 문제에 있어서 확고했고요.
그래서 제안대군은 엄마(안순왕후)한테 이혼 좀 시켜달라고 바락바락 떼를 씁니다. 아들의 성화에 못이겨 결국 안순왕후는 성종에게 이혼 좀 허락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지요. 성종은 제안대군을 밀어놓고 왕위에 오른 처지라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습니다. 결국 안순왕후의 청을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두 번째 부인인 박씨를 들였는데... 제안대군이 또 맘에 안 든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전 부인인 김씨의 병세가 나아졌다는 소문이 들리고.......
제안대군은 또 이혼시켜 달라고 땡깡을 부립니다. 아니 전 부인 내치고 재혼한 게 얼마 전인데 또 이러니 안순왕후도 작작 좀 하라고 화를 냅니다.
결국 제안대군은 이혼을 위한 음모를 꾸밉니다. 박씨를 레즈비언이라고 모함한 것이지요. 이를 위해 여종들을 시켜서 마누라를 건드리게도 하고, 심하게는 한 여종을 잠자리로 부른 뒤 다른 여종이 이 사실을 고발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박씨는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완강히 주장하고 국문까지 연 끝에 제안대군의 음모가 밝혀졌지요. 덕분에 애꿎은 여종들만 매를 맞고 쫓겨나야 했습니다. 제안대군은 별다른 벌을 받지 않았다고 하네요.
제안대군의 열정은 (매를 안 맞아서 정신을 못 차렸는지) 식지 않아서 다시 엄마한테 징징 짜기 시작합니다. 아들의 성화를 못이긴 안순왕후는 한숨 푹푹 쉬며 다시 성종에게 이혼을 청하고, 성종은 죄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쫓아내냐고 반박하고, 결국 박씨는 없는 죄를 뒤집어 쓴 뒤 쫓겨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소박맞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제 홀몸이 된 제안대군. 다시 재혼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성종이 친히 새색시를 얻어 주겠다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제안대군의 반응이 가관입니다. 첫 번째 부인인 김씨가 아니면 결혼을 안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이지요.
참고로 과부의 재혼을 금지하는 ‘과부재가금지법’을 만든 게 성종입니다. 뭐 김씨는 과부가 아니긴 하지만 지가 내친 부인을 다시 데려온다는 제안대군의 주장에 성종은 기가 차서 왜 제안대군이 김씨와 이어질 수 없는 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지요.
그러나 상식이 통용되는 상대가 아닙니다. 제안대군은 ‘아몰랑’으로 일관하고 허락 안 해주면 평생 혼자 살 거라고 바락바락 대들기까지 합니다. 결국 성종은 박씨가 죽고 3년 뒤에 김씨와의 재결합을 허락하지요.
제안대군은 자손도 없었습니다. 어숙권의 수필집 에 따르면 그가 워낙 멍청해서 잠자리를 갖는 법을 몰랐다고 합니다.
에는 제안대군의 어리석음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더 나오는데, 거지를 보고 “쌀이 없으면 꿀떡의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 했다든가, 무소뿔로 된 허리띠를 선물 받은 뒤 그걸 찬 채로 왕에게 달려가서 “이 띠를 신에게 하사하소서.”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지요.
재밌는 건 이렇게 바보스런 모습을 자주 보인 제안대군이 정작 복잡한 유교 예법을 따라야 할 때는 틀림이 없었다는 겁니다. 게다가 둘째 부인 박씨를 내치려던 조작 사건은 어설프긴 했으나 단순히 바보가 계획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더군다나 연산군의 악녀로 이름 높은 장녹수는 원래 제안대군의 종으로 제안대군이 직접 연산군에게 바친 겁니다. 덕분에 제안대군은 서슬퍼런 연산군 시대에도 아무런 화를 입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안대군이 사실은 바보가 아니라, 멍청한 척을 해서 목숨을 보존하려 한 것 아니었을까란 설도 있습니다. 이게 딱히 현대에 처음 제기된 문제도 아니고 당대에도 이런 의문이 존재했습니다. 제안대군의 졸기에도 바보인척 한 게 아닐까 하는 사관의 논평이 달려있고 100년 뒤 유몽인의 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지요.
진실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째든 제안대군은 위의 스캔들 건 외에는 남에게 큰 피해도 주지 않았고 ‘멍청해서 왕위를 위협하지 않을 왕실어른’으로서 잘 대접받으면서 60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진짜 바보인지 연기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연기라면 정말 대단한 자기관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5분 한국사 이야기]
https://story.kakao.com/ch/kistory
첫댓글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ㅋㅋ
바보일수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일부러 바보짓을 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