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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시라소니 사이트에서 퍼온겁니다..
가장 신빙성있는 자료입니다..믿거나 말거나 댁들 맘이지만..^^
그리고 밑에 나오는 싸움은 일부로서 이름있는 사람들만 나열한겁니다..
본명: 이성순
키: 175cm
몸무게:75kg
특기: 박치기,무릎치기.
출생지: 신의주 미륵동.
출생년도: 1916년 2월 29일.
사망년도: 1983년 1월 25일.
별명: 시라소니.
본적:전주이씨.[조선시대같으면 왕족?]
종교: 기독교.
교회최종직책:성복교회 집사.
가족관계: 1남 5녀.
부인: 이진옥 여사.
주요싸움전적:
이북최고주먹인 박두성과의 대결승리.[1936년]
[박두성은 힘이 엄청나게 장사로 박치기가 주특기였
으며 박치기의 위력은 말을 넘어뜨릴 정도였다고 함.
이북에서는 이화룡과 아오끼를 능가하는 이상대와 더
불어 이북최고의 주먹이었음.]
신마적과의 대결승리[1938년 8월]
김두한이 말했듯이 우리나라 최고주먹중 하나인 신마
적과 북경에서 만나서 대결끝에 승리.
흔히 기존의 시라소니 소설,영화등에서 신마적이 시라
소니와의 싸움을 피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시라소니 본인
이 생전에 신마적과의 친분관계를 고려해 그냥 결투신청
을 피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음.
북경최고의 주먹보스인 십팔기의 달인인 마오와의 대결승리.
[1938년]
상해카페에서 헌병대장 요시무라와의 대결승리.[1939년]
시라소니의 박치기 공격에 요시무라는 병원에 실려가 3일만
에 깨어난 일화는 유명.
새끼손가락 사건[1939년]
무장한 중국깡패 30명과 술집안에서 깨진 맥주병 하나를 들고
싸워서 승리했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
치자 새끼손가락을 조금 짤라 보이며 내일 출두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다음날 찾아가고 몇일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시라소
니는 비명한 번 안지르고 의연히 대처하자 감동한 일본 헌병대
대장이 석방시켜줌. 그후 병원에 가서 반쯤 잘려진 왼쪽 새끼
손가락을 절단하는 것이 치료가 빠르겠다고 의사가 말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새끼 손가락을 손으로 잡아 찢음.
그 이후 외출할 때 항상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님.
봉천호랑이라고 불린 이북최고의 주먹중 하나인 이상대와의
대결승리.[1939년]
이것 역시 신마적과의 경우와 같음.
중국무장마적단 20명과 쌍단검을 가지고 대결승리
[1941년]
일본 고꾸라 형무소에서 수감중 당시 일본 최고 주먹으로 알
려진 이즈마와의 대결에서 승리.
이 결투에서 진 이즈마가 앙심을 품고 후에 고의적인 전기감
전 사고를 일으켜 시라소니에게 부상을 입힘.[1943년]
한국계 일본깡패 카네미야 패거리 40명과 천진의 한 공장지대
마을의 넓은 마당에서 맨주먹으로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일본깡패들과 대결해 승리. 싸움원인은 카네미야 패거리에게
집단린치를 당한 친구의 복수를 위해서였음.
거의 대부분을 쓰러뜨리고 항복을 받았고 사전에 칼을 가지고
갔었음. 그리고 상당히 힘든 접전이었음.
[1945년 7월. 31일]
총을 든 러시아 대장을 맨몸의 박치기로 제압함.
[1945년]
1946년 2월 우미관에서 조선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마주쳐서
김두한이 싸움을 피하고 형님으로 모심.
1946년 3월 인천으로 자리를 옮겨 인천 정복에 나섬.
이때 시라소니 싸움역사상 최고기록인 300:1의 대결에서 승리.
시라소니가 인천의 주요지역을 접수해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인
천부두가의 이권을 장악하고 있던 자유노조의 위원장 유계현이
주먹패 300명에게 무장을 시켜 시라소니가 있던 일민공사 사무
실을 포위했고 시라소니도 몇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양손에 쌍단검을 들고 대치했으나 시라소니의 결사적인 항전의지에
기가 죽은 자유노조 주먹패300명이 자진해서 물러감으로 사건해결.
1949년 서북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의 충돌로 다시 김두한과
마주치게 되자 이때도 김두한이 대결을 피해서 사태가 수습.
1951년 봄. 부산에서 토박이 깡패 10명에게 몰매를 맞던 이정
재를 구해줌. 이때 부산토박이 깡패10명은 맨주먹인 상태로
이정재를 일방적으로 구타하고 있었다고 함.
1
952년 황병관을 살해한 마사이찌를 혼내줌.
1952년 조봉암의 경호원으로 활약.
1952년 HID부대장으로 활약.
1953년 8월. 시라소니 린치사건 터짐.
시라소니에게 앙심을 품은 이정재 사단 30여명이 손도끼,삽,쇠
파이프,칼,갈고리,아령,돌등을 가지고 시라소니를 동대문상인연합
회 사무실 안으로 유인한 뒤 기습해 일어난 사건.
시라소니는 처음 1차대결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승리후 사무실을
나가는 과정에서 방심한 탓에 무서워 벽에 기대고 있던 한 대원의
손도끼 공격에 오른발목을 찍히고 나서 전세가 역전이 되고 결정
적으로 전화줄에 걸려 넘어짐으로 집단린치를 당하게 됨.
이때 린치에 가담한 유명인으로는 이석재,김동진,박남수,김양수,
고일심등. 이정재,김사범,조열승은 체면상 린치에서 빠짐.
이정재는 이때 사무실에 없었다고 함.
시라소니는 이때 당한 린치로 두개골이 함몰되고 왼쪽 다리를 제
외한 전신의 뼈가 모두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6개월만에
회복되어서 백병원을 나섬.
병원 입원기간중에 이석재가 찾아와 왼쪽 다리를 부술려고 했으
나 너무나 방심하고 미그적거리는 바람에 눈치를 챈 시라소니가
사력을 다해 일어나 오른주먹을 날렸고 이석재는 코피가 터졌고
이런 소란때문에 의사,간호원,경찰이 달려오는 바람에 급히 자리
를 피해 도망갔다고 함.
1954년 초 백병원에서 퇴원. 팔당 산기슭으로 거처를 옮겨 혹독한
재활,무술훈련,사격,칼쓰기 연습을 통해 몸을 완전히 회복하고
이정재를 노림.
1955년 다시 인천으로 건너가 인천부두가를 평정.
1956년 신익희,장면씨의 경호원으로 활약. 이해 3월
민주당의 인천유세에서 자유당의 지시를 받은
3트럭분의 정양원생[상이군인]들이 유세장에 와
유세장을 망칠려고 했으나 시라소니를 보고 기가 죽
어 물러감.
1958년 조병옥씨의 경호원으로 활약.
대강 이상입니다.
기타 시라소니의 싸움,묘기일화.
중국,만주,평안도,서울을 주먹으로 주름잡음.
양반다리 자세에서 3M를 날아가 박치기를 먹임.
시속 140km로 달리던 아시아 특급열차에서 일본헌병대를
피해 뛰어내리고도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착지함.
왠만한 정자는 한 걸음에 끝까지 타고 오름.
스피드가 너무 빨라 상대를 치는 모습이 보이지가 않음.
HID시절 허리를 반쯤 숙인 성인남자6명을 백덤브링으로 뛰
어넘음.
오화전신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머리,손,발,무릎,팔꿈치.
신체의 9개 무기가 되는 부위를 모두 자유자재로 씀.
제자리에서 탁구대를 세로로 뛰어넘어 박치기를 먹임.
칼던지기의 명수로 40M밖의 바둑알만한 목표물을 백발백중
시키는 솜씨.
나무젓가락을 던져 문에 구멍을 냄.
쌀4가마를 든다는 황병관과 팔씨름을 해 무승부로 결말이
남.
김두한과 마찬가지로 주먹으로 담벼락에 구멍을 냄.
일대일 대결시 5초를 넘긴 일이 별로 없었음.
주먹만으로 주먹패 10명을 쓰러뜨림.
중국 마적패 20명을 혼자서 쓰러뜨림.
만주에서 일본군 검술교관을 2명을 때려눕힘.
하얼빈 주먹대장 만가희와의 대결때 시라소니의 박치기로
만가희의 얼굴이 함몰됨.
상해 헌병대장 요시무라와 가라데10단 이노우에와의 대결시
시라소니의 박치기로 3일만에 깨어남.
월남후 어느 다방에서 평소 대립하던 상대 주먹패의 한 대원
과 이야기를 하던 중 다른 한 대원이 욕을 퍼부으며 뒤에서
던진 재떨이를 허리를 돌려 잽싸게 잡아냄.
100m를 9초대에 주파함. 영국 육상선수와 달리기를 해서 이김.
[목사님의 증언]
과장된 면:
72:1의 결투에서 승리했다는 설이 있는데 허구임.
움직임이 너무 빨라 눈위를 달려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허구임.
중국에서 일본 가라데 고수 7명과 싸워 모두 불구를 만들었
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허구임.
주특기로 알려진 공중걸이 박치기가 잘못이해 되고있음
김두한과의 대결때 젓가락으로 멀리 떨어진 귤의 한 지점을
4개 연속으로 던져 꽂았다는 이야기는 실제로는
단검을 썼음.
시라소니 린치당시 동원된 동대문패의 인원이 200명이라는 이야기
가 있는데 이것 역시 허구로 보임.
폄하된 면: 장호근의 소설에서 10대 1을 제대로 못 감당
한다는 것은 허구임.
1954년에 이석재가 50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시라소니님
을 납치해서 손을 자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허구임.
시라소니님이 건중친목회를 배신했다고 이석재가 오해를 해서 사
건이 벌어졌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님.
김동회,김춘삼과 싸워 비기고 졌다는 이야기역시 허구임.
김두한에게 상대가 안된다는 김영태의 증언역시 허구임.
시라소니님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고 여러명의 시라소
니님의 무용담이 종합해 시라소니라는 영웅이 탄생했다는 이야
기역시 허구임.
시라소니님의 활동무대가 만주뿐이였다는 이야기역시 허구임.
그리고 시라소니님이 만화에서 고여장,모일화에게 지고 겨우 이
긴 이야기역시 허구임.
장호근의 시라소니에서 구로야마와 그 무장부하 10여명에게 만리
향 카페에서 진 것도 허구임.
왼쪽 새끼 손가락 사건이 어떤 정부의 여자와 자다가 벌어진 사건
이라는 것도 허구임.
시라소니님도 함부로 못 대하는 사람이 고향친구 최원진과 홍영철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 역시 허구임.
박두성과의 1대1일 대결에서 고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 역시 허구임. 깨어난 박두성과 박두성의 무장부하 50명을
피해 달아났다는 이야기역시 허구임.
흑인거구주먹 존과의 대결이 가장 힘든 일대일 싸움이었다는
이야기역시 허구임. 그리고 존은 백인임.
1956년 민주당의 인천유세에서 트럭3대분의 정양원생[상이군
인]들을 물리친 것이 그 정양원생들의 리더인 박동필이 시라소
니와의 친분때문에 물러갔다는 장호근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님.
난적: 최고의 난적은 검도3단에 진검으로 덤빈 군부반장 하야시였음.
맨주먹끼리의 최고난적은 노지심으로 불린 한 중국인. 중국식당의
음식이 잔뜩있는 큰 식탁을 한 손으로 시라소니님에게 던짐.
기타 신상정보.
좋아하는 음식:냉면,삶은 돼지고기,빈대떡.
좋아하는 찬송:186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요한복음 3장
16절.
혈액형:B형.
수련방법: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100M를 전력을 다해 뛰다가
다시 50M를 적당한 속도로 뛰고 다시 100M를 전력을 다해
뛰어가는 것을 반복했다고 함.
그리고 기차나 자동차안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건물간판이나
달려가는 기차의 팻말을 정확히 읽는 훈련을 해 시력훈련을
함.
학력:중학교 2년 중퇴.
한국,중국,일본어. 3개 국어에 능통.
노래를 잘하는 편이었고 목소리도 미성이었다고 함.
술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고 함.
당구를 잘 치셨고 춤솜씨도 뛰어나셨다고 함.
린치사건후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을 앓거나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님.
양복입는 것을 싫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허구임.
인격: 자신과 가족은 제대로 못 먹어도 후배주먹이나 아는
사람,이북사람은 반드시 꼭 도운것은 그의 싸움실력만큼이나 유명한
사실.
목사님의 증언으로는 한번은 시라소니님집에 쌀이 떨어졌습니다.
마침 돈이 생겨서 이진옥 여사님과 함께 차를타고 집으로
들어오시고 있었습니다 차에서 후배를 만났는데 어려운 사정을 듣고
돈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진옥 여사님은 우리 쌀 살돈은 남겨
두었겠지라는 생각에 집에 오셔서 쌀 살돈을 달라고 하니까
시라소니님의 주머니에는 한 푼도 없었다고 합니다.
첫댓글 한마디로 파란만장
50년후에는 중국무협 영화의 주인공 처럼 묘사될듯.. 분명히 시라소니가 사람발로 찻는데 50미터 날라갔다고 할사람도 있고 천대1로 싸워서 이겼다고 할사람도 있을듯..
칼던지기 올림픽 나가면 금메달 따겠네요 40미터 밖의 바둑알만한 목표물을 -ㅁ-;;ㅋㅋ
100미터 9초 라는.. ㅎ ㅎ 어이가 하도 없어서 말이 안나오네요.. ㅎ ㅎ 시라소니 그냥 싸움 잘하는 깡패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