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가을 축령산 방장산 백양사
2016. 10. 금계
저녁 식사 얼추 끝나고 보조요리사와 요리사의 티타임.
즐거운 삥똥보기 시간.
지금은 돌아가신 어떤 선배 교사가 옛날에 새벽까지 화투를 치고 푸시시한 얼굴로 출근했다. 교장이 불러서 교장실로 갔더니 서랍에서 화투 한 몫을 꺼냈다. 그 선생한테 ‘오이쪼’ 네 표 중 한 군데를 찍어보라 했다. 여기저기 찍었는데 연거푸 다섯 판을 그 선생이 졌다. 화투를 서랍에 쓸어 담으며 교장이,
“화투 너무 좋아하지 마소. 나도 이것 때문에 망했다네.”
방구들이 따끈따끈, 참 잘 잤다. 12일 아침이 밝았다. 지난 밤 달빛이 곱던 자리에 햇빛이 눈부시다.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된다고 했던가. 우리는 늘 신화와 역사 사이를 넘나들며 살고 있는 셈이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서 ‘느낌 좋은 날’이라는 광고를 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느낌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피톤치드를 무지막지하게 내뿜는 자연휴양림에서 밤을 새운 덕분에 저 아가씨보다 느낌이 훨씬 좋은 날이다.
아침은 전복죽. 목포에서 사온 전복을 전 선생이 숟가락으로 떼어내고 잘 들지 않은 숙소 식칼로 미끌미끌한 몸뚱이를 겨우겨우 썰어서 쑤었다. 예전에는 보통 사람이 구경하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우리는 겨우 시래기죽이라도 배불리 먹으면 감지덕지할 지경이었다. 맛이 아주 좋아서 한 그릇 먹고 더 먹었다.
입심 좋은 나 선생이 또 해학적으로 떠들었다.
“옛날에는 쌀에다 전복을 넣었는데 요놈은 전복에다 쌀을 넣었소, 잉?”
백양사 가는 길. 누군가 수고를 많이 해서 길가에 빨갛고 노란 꽃들이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밝혀준다. 우리는 왜 꽃만 보면 마음이 환해질까.
-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
우리 삼대할머니와 작은할아버지는 나주 금성산에 초가를 짓고 사셨다. 방학 때면 그 산가에서 일주일, 보름씩 머무르면서 나는 산 냄새에 푹 빠졌다. 요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지만 그 사람들 살림살이를 보면 애들 장난 같아서 코웃음이 나온다. 금성산 산가는 자연인들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본격적인 살림터였다.
요즘 사람들은 흡연자를 범죄인 취급하지만 나는 코웃음을 친다. 담배에도 유전적인 요소가 작용하는 것일까. 우리 삼대할머니와 작은할아버지는 산가에서 하루 종일 긴 담뱃대를 물고 사셨다. 공기 맑은 산속에서는 담배 맛이 훨씬 좋다.
그나저나 올 안에 끊기는 끊어야 쓰겄는디.
점심은 백양사 입구의 ‘단풍 두부’ 식당. 단풍나무 수액을 넣은 손 두부란다.
식당 이름 탓일까. 다른 곳은 다 조용한데 ‘단풍 두부’ 식당 언저리의 부지런한 단풍나무는 벌써부터 발갛게 단풍이 들었다.
해마다 단풍철이면 우리들은 으레 버스를 타고 백양사로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손쉽게 단풍놀이하기에는 백양사, 내장사가 가장 가깝고 좋았다.
예부터 장성은 감으로 유명했다. 백양사 어귀에도 치렁치렁 매달린 감이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며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드디어 백양사 산문에 도착했다. 매표소 앞을 지키고 있던 아저씨가 우리들더러 그냥 들어가라고 손짓을 한다. 원래는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 하지만 우리 여섯 명은 이미 얼굴에 65세 이상이라고 쓰여 있다.
아직 65세 이하인 네 명은 아직도 단풍 두부 식당에 주저앉아서 느낌 좋은 날의 정취를 소주로 즐기고 있었다.
절에 당도하기 전 백양사 숲길은 예전부터 나그네의 마음을 아늑하고 현묘한 곳으로 이끌기 마련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숲길 나무들은 훨씬 무성해졌고 20대의 젊었던 나그네는 70대의 꼬부랑 노인으로 변했다. 오호라!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든 것이 덧없고 또 덧없도다.
이 숲길 촬영을 마지막으로 내 디카도 배터리가 떨어져 스르르 가능을 멈추고 말았다.
길가 안내판에 들어 있는 사진. 백양사에서 가장 멋진 풍경.
모든 형태와 빛깔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그 형태와 빛깔을 잃을지니 저 백암산(白巖山) 백양사 어여쁜 단풍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고 말리라. 절까지도.......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All that glliters is not gold.)
우리 일행이 백양사로 향하는 숲길의 인도를 걷고 있는데 등 뒤에서 유 선생이 큰소리로 외친다.
“여기 뒤에 세단 나가니까 앞에 있는 똥차들 비켜서시오.”
우리 일행이 한 쪽으로 비키니까 젊은 남녀 한 쌍이 빙그레 웃으며 우리를 지나쳐 잽싸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 언젠가는 너희들도 우리처럼 똥차 신세를 면하기 어려우리라.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모든 형체 있는 것들은 이윽고 텅 빔 속으로 사라지리로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형상(육체)은 비어있는 것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는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으니, 형상은 곧 비어있는 것이요, 비어있는 것은 곧 형상이니, 나머지 감정, 생각, 반응, 의식 또한 마찬가지니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삼가테 보디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넘어가자, 영원한 깨달음이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