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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고대 민족들의 창조사상
서철원목사
고대 민족들에 창조설화가 널리 유포되어 있고, 고대 철학에도 창조논의가 나와도 성경의 종교들 곧 유대교와 기독교만이 무에서의 세상창조를 분명히 믿고 고백한다.
고대 동방에서 바벨론의 창조설화가 가장 유명하나, 이 창조설화는 완전히 신화적이다. 바벨론의 주신(主神)인 말둑(Marduk)이 자기의 대적인 신과 싸워 주도권을 겨루었는데, 자기의 대적을 이 기자, 그 쳐죽인 대적의 몸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였다. 고대 민족들은 빛과 어두움을 이원적(二元的)세력으로 보았고 어두움으로 대변된 혼돈과 공허를 형이상학적 실재로 여겼다. 바벨론 창조 신화는 이처럼 이원적 세력의 투쟁으로 창조가 발생하였는데, 무에서의 발생이 아니라 신의 시체 가 세상의 구성재료가 되었다. 이방인들은 무에서의 세상창조를 알지 못하였다.
철학도 무에서의 창조를 알지 못한다. 이제까지 나타난 최고의 철학이라 할 플라톤(Platon)의 철 학에서도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이미 있는 물질을 가지고 세상을 현상태로 조성한 것뿐이다. 플라톤이 자기의 우주론을 전개한 티마이오스(Timaios)편에 보면, 창조론이 전개되는데, 거기에는 성경에서처럼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하급신이 영원한 이데아들 을 따라, 그것을 모형으로하여 이미 있는 기존물질을 사용하여 현상 세계를 조성한다. 가령 시간 은 영원의 모형으로, 그림자로 조성되었다. 영원은 완전하므로 원형(圓形)의 형태로 존재한다. 따 라서 시간도 영원의 형상이므로 원형의 운동을 한다.
물질이 하나님처럼 영원하면, 동등 영원이 둘이므로 하나님이 물질보다 우위일 수가 없으므로 이 원론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란 성립하지 않는다. 불행하게 플라톤의 이 우주론이 초기 기독교신학 에 영향을 미쳐, 초기의 대신학자 오리겐(Origen)이 영원창조를 말하고, 영혼의 선재를 말하게 되 었다.
플라톤의 제자이고 로마 카톨릭교회의 철학자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는 창조 론이 없다. 왜냐하면 신은 부동(不動)의 원동자로서 우주의 운동을 시발한 자로 인정되나, 신은 자기 자신만 관심하고, 자기 밖의 사물들에는 아무 관심도 갖지 않는, 사고를 사고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신을 지향하나 신 자신은 더 이상 지향할 것이 없기 때문이 다.
그후 희랍 철학의 완성자라고 하는 플로티누스(Plotinus)가 우주의 발생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의 우주발생론은 천지의 창조가 아니라, 유출설이다. 풀로티누스가 신이라고 지칭한 일자(一者)는 충 만하고 완전한 존재여서, 그의 존재가 밖으로 흘러 넘쳐 신과 유사하나 그 다음 단계의 존재를 이룬다. 신에게서 유출되어 이룬 첫 단계가 영의 세계인데 이 영을 신자(神子)라고하여 신과 동일 하나 또 다른 면을 가진다. 즉 유출하여 나온 존재는 그 근거와 동일하면서도 다르다. 이 영을 플 라톤의 이데아 세계와 동일시한다. 또 이 영에서 다음 단계로의 운동이 생겨서 영과 일면 같으면 서 일면 다른 존재 곧 세계혼이 발생한다. 여기서 물질이 나오는데, 세계혼에서 물질에로의 운동 은 일자에게서 시작한 운동의 마지막 점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내려가는 운동이 가능하지 않으 니, 다시 일자에게로 회귀하는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회귀운동은 일면은 영혼을 갖고, 타면 물질 물질을 가진 인간에게서 자기보다 더 높은 존재이며 자기의 유래처럼 영과 그 이상의 신존재를 회상하고 회귀를 이루려고 한다. 그래 마침내 모든 것이 일자에게로 복귀하는 일이 이루어진 다.
이처럼 유출설은 인격적 존재가 자기의 권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존재 가 본질에서 흘러나는 것이니, 이것은 필연적 창조로서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구분이 없으니 범신 론이 된다. 이것은 창조라고 할 수가 없다. 피조물과 창조주간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 이교사상의 특색이다.
이들 희랍 사상가들보다 앞선 초기 희랍 철학자들, 소위 자연철학자들도 만물의 기원에 대해 관 심하고 관설하나 그들은 만상의 기원 아르헤(αρχη)를 말할 때, 그들은 그 만물들의 배후에 있 는 근본물질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래 탈레스(Thales)는 물을 아르헤로, 헤라클레이토스 (Herakleitos)는 물을,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공기를, 아낙시만더(Anaximander)는 무규정 자 아페이론(Apeiron)을 만물의 아르헤로, 근본으로, 통일원리(統一原理)로 보았으나 그 만물의 유 래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경이와 감탄을 하여 그 만상 배후에 있는 근본되는 것을 구하려고 하되, 그것을 넘어서서 그 만상을 지으신 이에 대해서는 눈 을 감아 버렸다.
언약의 파기자인 아담의 후손들인 희랍의 사상가들은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 인하려고 노력하였다. 보편운동론 혹은 만물유전론(萬物流轉論)을 편 헤라클레이토스는 만유를 운 동중에 두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모든 것이 항시 운동 중이면 시작이 없고 하나님의 섭리가 없어지게 된다. 또 그와 정반대의 주장을 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만 존재하고 비존재자 곧 운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하여 또한 창조를 부인하였다. 존재만 존재할 뿐 아니 라, 존재는 영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가 아니라 사고와 일치한다고 하므로 존재의 발생을 인간의 이성에 두는 결과를 이루었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다 아담의 후손답게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부인하고 망각하였다.
또 동방의 종교들, 가령 힌두교와 불교에도 창조신앙이 없는 것은 이것들이 이방종교일 뿐 아니 라 또 범신론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모체이고 또 동방종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교에 의하면 세계와 그 세계혼 브라만은 일치하고, 세계혼은 세계의 운동원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히 개괄적으로 살펴 볼 때 고대사상과 이방종교와 철학에는 성경적 창조신앙이 없다.
■ 창조신앙 - 성경종교에만
그러면 창조신앙은 성경종교에만 고유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성경의 종교 곧 유대교와 기독교만 이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으로 고백한다. 혹 이교세계에서 창조를 말하는 바 영원한 물질을 신이 조성하는 영원창조나, 신 자신의 본질이 흘러넘쳐 세상이 나오는 유출설은 바른 창조가 아니다. 영원창조는 하나님과 물질이 동등히 영원하므로 이원론이어서 하나님이 물질위에 하나님되지 못 하여 유출설은 신 자신의 흘러넘침이니 필연적 창조 혹은 범신론으로 창조일 수가 없다.
창조란 글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데서 이 만상을 처음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성경의 보도에 의 하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되 아무 수고없이 말씀으로만 천지를 창조하심이 성경이 보도하는 창조사역의 특징이요, 둘째는 신화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이 특이하다. 수고없이 말씀으로만 창조 하심은 하나님의 전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무한히 지혜로우신 이는 그 창조를 수행하심에 있어 서 그렇게 어렵게 일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가 자기의 경륜에서 창조시 수행될 모든 창조를 완 전무결하게 계획하시고, 작정하셨으며, 설계하셨으면 실제 사역에 있어서 그 계획과 설계를 따라 진행하시는 것은 쉬운 일이다. 복수의 능력에 따라 작은 초가집이나 시골집을 지을 정도도 있고, 대도시의 마천루를 지을 수도 있다. 목수라도 그 능력에 따라 그 짓는 집의 규모와 효용성과 시 간이 크게 차이를 낸다. 천재적 두뇌를 가진 건축가는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할 수 있는 설계와 시공을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보통 신학자가 한 달이나 두 달 혹은 그이상 수고해야 할 신학적 논술은 24시 간 하루나 이틀 혹은 1주 정도에 마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지적 능력과 신학적 이해력이 이 렇게 쉽게 일할 수 있게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자연과학의 연구와 실험들의 과정진행이 한 사람의 과학자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 되고 완결되는 예는 거의 없고, 처음부터 한 조를 이룬 과학자들이 협동해서 이룬다. 그런데 아인 슈타인은 그의 특수 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창출해 낼 때 아무의 도움도 없이 혼자의 힘 으로 해내므로, 그를 천재 중의 천재로 꼽히게 했을 뿐 아니라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같은 물리학자도 그를 희한한 천재라고 극찬하게 되었다. 20세기 문명의 경이라고 하는 컴퓨터도 한 사람이나 한 기관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미국인 위너(N.Wiener)와 반네바(Vannevar), 부쉬 (Bush)와 샤논(Shannon) 과 에이컨(Aiken), 허스키(Huskey), 폰 노이만(Von Neumann)과 영국인 윌리암스(Williams)와 튜링(Turing)과 카나다인 리이브스(Leaves)와 브라운(Brown)등이 수고하였 고, IBM과 L.A의 칼리포니아 대학과 M.I.T., 하바드 대학등이 함께 수고하였다. 지금 새 세대의 컴퓨터 개발에도 여러 나라의 여러 회사들과 여러 공학도들이 함께 수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든 기관과 연구인들의 두뇌를 종합한 것보다 더 큰 두뇌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쉽게 더 나은 컴퓨터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수고없는 창조
마찬가지 추리로,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가 다 계획하고, 작정하고, 설계 하신 우주를 지으시는데 그렇게 힘들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록 지금 천체 물리학자들이 우주를 거 의 무한대한 우주라고 계산하더라도,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은 이 우주를 지으시는데 그리 힘드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또 하나님의 창조가 수고로움없이 진행된 또 다른 근거는 창조를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 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의 말씀에 무한한 권세를 동반시키셨다. 무슨 일 을 이루거나, 진행할 때는 반드시 힘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 사물들의 유지도 어떤 형태 로든지 힘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동력(動力)이든 전자기력(電磁氣力)이든, 요사이 나타난 약력(弱力)이나 강력(强力)이든 간에 힘없이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극 빛이 있으라, 생물들을 내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 어져 나타나도록 그의 말씀에 자기의 무한한 힘을 동반시키셨다. 따라서 그의 말씀이 그대로 이 루어질 뿐 아니라, 수고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이 그로 하여금 그 의 창조를 수고로움없이 이루게 하였다. 성경의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무한히 능력이 있 으므로 그의 창조를 쉽게 이루셨다. 그러니 성경 창세기 1장 1절부터 31절까지 6일간의 창조는 아무 수고없이 이루실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창조는 특별해서 그이전 사물들의 창조처럼 쉽 게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특별한 의논을 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창조에는 보통 1일의 창조에 2 절씩 배당한 것을 무려 6절을 배당하였다. 인간창조는 별도 고찰을 요구한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찌 6일에 창조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 모든 우주를 지으셨는데, 지으시기를 시작하시기 전 에 그 만물을 지으시기를 작정하시고 계획하셨다. 창조하실 만물의 내용과 그 순서와 또 실제 집 행과 그 후 만물의 진행과정을 다 미리 생각하시고 결정하셨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경륜이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를 가지셨으므로 이렇게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시며 미 리 다 정해 놓으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존재가 영원하시니 그의 경륜도 영원하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그의 경륜에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시며 설계하였다면, 창조를 처음 이루실 때 그것을 진행하 시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또 수십 억의 인류가 탐구하여도 다 탐구할 수 없고, 감탄뿐이다. 또 같은 대상도 탐구한 자에 따라 다른 모양을 현시할 수 있다. 아마도 창조를 다 규명하고 아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의 다함없음을 알 수 있다.
영원부터 계획하시고 작정하시며 설계하셨으면 그것들이 완전하다. 따라서 처음 창조는 완전하였 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우주만물, 무한대라고 할만큼 한 우주를 지으시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이 쉽게 지으실 수 있었다.
하나님은 단시일에 계획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시고 설계하셨 다.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을 떠난 우연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창조의 방법
하나님의 창조의 특이점은 그의 말씀하심이 곧 창조를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창 조를 말씀으로 곧 명령으로 이루셨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말씀으로만 창조를 이루셨다. 그것 도 하나님이 내시기로 작정한 사물들의 종류대로 내시기 위해 일일이 그 종류를 다 열거하심 없 이 종류대로 내라고 만 하심으로 그가 창조하시기로 그의 경륜엣 작정하신 것이 다 나타나게 하 셨다. 단지 그렇게 '빛이 있을지어다. 땅은 그 종류대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 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고 하심만으로 만물이 발생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처음 창조를 발생시키신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구분되어 그 창조를 이 룬 말씀에는 무한한 힘을 동반시키셨다. 그러니 그 말씀은 창조의 말씀이라고 할 것이다. 말씀에 무한한 힘을 동반시키면 그 말씀이 실재화한다. 말씀으로 힘이 구체화된 것이 만물이라고 할 것 이다. 이것은 지금 물질을 에너지와 등치시하고 또 물질을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시대에는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직도 하나님께서 만물 구성에 있어서 힘을 어찌 배분하셨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볼 것이다. 대강 원자를 전자, 양자, 중성자를 거의 고정적인 것으로 받고, 이 작은 원자세계에서 더 작은 소 립자들이 주요 구성요소들간에 작용하고 소실하는 것으로 보며, 이 소립자들은 에너지의 다른 형 태이나 또 이 에너지가 응결된 입자들을 연결시키는 세력이 또 소립자와는 다른 형태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자기로부터 발휘하신 세력들의 형태가 각각 달리 나타난 것이라고 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물질들을 구성하셨는지를 살피고 탐구하는 것은 물리학자들의 일이다.
이와 비슷한 진술을 현 생존 과학자중 원로라고 할 독일의 카알 프리드리히 폰 바이젝커(Carl Friedrich Von Weizsacker)가 하였다. 그의 책 '물리학의 세계상을 위하여(Zum Weltbild der Physik)'에서 말하기를 물리학자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의장(Design)으로 세상을 창조하셨 는지 탐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물질 내부의 구성과 존속도 신비이며 또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발현된 세력이 어떤 과정과 형태로 그런 상이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지도 신비이지만, 이들 발생한 만물이 다 세력균형을 이루어 하나의 통일된 질서의 체계 곧 Cosmos 우주를 이루어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것도 큰 신비이 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내신 창조의 말씀에 의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창조의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므로, 공허하고 무질서할 수밖에 없는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룬 것이라고 할 것이다. 물질 자체도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형태화한 것이지만, 만물들 간에 법과 질서를 이루게 한 것 도 처음 창조 말씀이 이룬 것이다. 말씀이 만물을 조성하였지만 '종류대로'의 창조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 창조 말씀이 피조물들 간의 법칙과 질서가 됐다고 하는 사실이다. 부분 창조들을 이룬 말씀이 그 창조를 유지하는 법질서가 되었다. 창조를 이룬 말씀이 만물이 유지되고 존속될 수 있는 것은 법질서의 체계로 화한 창조말씀 때문이다. 이 법질서 때문에 우주가 혼돈에로 되돌 아가지 않고 우주로 남는다.
그러나 이 말은 처음 창조가 이 독립적 법질서 때문에 그냥 존속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피조 존재는 독립적일 수 없고 언제나 의존적이다. 피조물은 그 존재의 유지를 창조주에 의존한다. 피 조물의 특질은 의존성이다. 타 피조물에 상호 의존성을 뜻함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의존함을 뜻한 다. 창조주에게 의존함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은 이 우주내에 없다.
그러니 법질서가 된 말씀이 이 창조를 우주가 되게 하나, 그것은 창조주에 의해서만이 그러하 다.
창조를 이루신 말씀이 이 창조를 유지하는 법질서가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에 혼돈과 무질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법과 질서로 바뀌어 우주, Cosmos가 되었다. 지금 진행되는 우주내의 엔트로 피(Enthropy)현상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진행되고 있으나 우주의 법질서는 바꾸지 못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창조의 도구로 혹은 방편으로 사용하셔서 창조를 이루신 후 그 말씀으로 우주의 법과 질서가 되게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에 하나님 단독으로 일하셨고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 으셨다는 뜻이다. 유대교는 천사를 창조의 조력자로 보나 이것은 불가하다. 천사들도 처음 창조에 포함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단독사역인 것은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창조를 이 루셨기 때문이다. 말씀으로만 창조를 이루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셨다는 증거이다.
창조주(創造主)
성경이 창조주라고 할 때 이것은 자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구속주로 알리신 분이다. 창조 주에 대한 이보다 더 확실하고 나은 신분확인(idenfication)은 없다. 신약이 세상의 구속주로 알리 는 분 곧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세상의 구속주로 나타내신 분이 창조주이다.
그러니 통상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구속주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이 창조주이심을 안다. 논리적 순서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 지식이 먼저이나 사실적 순서에 의하면 구속주 하나님 지식이 먼저이고 창조주 하나님 지식이 그 다음이다. 먼저 구속받 아 자기를 구속하신 그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안다.
그런데 기독교의 고대 신경들은 다 공통으로 고백하기를 전능하신 창조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 버지 하나님으로 말한다.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라고 말하고, 공교 회의 최초 공식신경인 니케아신경에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였 다.
그래 통상 창조를 3위 하나님 중 성부 하나님에게 귀속시킨다. 이것은 만유(万有)가 아버지에게서 유래하였다는 의미로이지 모든 만상이 다 아버지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만유(万有:the All)는 성부에게서 유래하였지만 실제 건축가로서 만유를 현재의 만상으로 만드신 이는 성 자이시다. 성자가 아버지에게서 유래한 만유(万有:the All)를 현재의 만물(万物)로 조성(造成)하셨 다. 성령은 이 만물에 생명을 주고 장식하셨다. 따라서 창조는 아버지에게서 시작하여 성자를 통 하여 이루고 성령으로 종결한다. 왜냐하면 밖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은 분리불가하기 때문이 다(Opera Deiad extra indivisa) 즉 창조는 3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이다. 창조가 3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인 것은 구속사역에 있어서 3위가 공동으로 역사하심에서 알려진다.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공동사역이다.
또 하나님의 창조를 아는 것은 그의 구속에서 아는 것이다. 즉 구속에서 역사하신 이가 창조를 이루신 이로 안다.
창조 기간
성경과 전통적 기독교의 신앙 고백은 공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6일에 창조를 이루셨다는데 일치 한다. 그러면 창세기 1장 1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중대한 차이를 낸다. 6일 창조에는 고침과 변함이 없어도, 1장 1절을 1장 전창조(全創造)의 제목으로 보느냐 아니면 1장 1절을 제 1일 창조 에 넣느냐이다. 1절을 이제껏 전창조의 제목으로 혹은 포괄적인 기술로 보아왔다. 이렇게 1절을 첫날 창조에 넣지 않으면 3절에 나오는 빛 창조와 1절과 2절의 창조간에 상당한 세월이 있는 것 으로 보는 간격이론(Gap-theory)을 내게 하였다. 이렇게 간격 이론 (Gap-theory)을 내면, 1장 1절 의 바라(bara)로 나타내는 천지의 창조가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간격 이론에 의하 면, 1장 1절과 2절과 3절 사이에만 긴 세월이 낀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1일 창조와 2일 창조 사이에도 끼어, 결국 6일 창조를 6지질학적 연대와 일치시키게 되어, 진화론적 창조에 귀착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수십 만 년, 수백만 년이 걸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 교리에 전적으로 배치되며,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것에 이른다. 간격 이론이나, 지질학적 연대 이론도 다 가설일 뿐이요, 증거들에 의해 입증된 것이 아니다. 지질학적 연대로 진화론을 가능케 하기 위한 절충 내지 조화시도로서 과학적 결과들의 개연성에 성경을 갖다 맞추려는 시도이다. 지질학적 연대는 과도히 늘려잡은 가상적 연대요, 지질 연대 측정의 기본으로 삼는 화석과 지층 의 관계는 순환논법적이어서 가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학적으로 신뢰할 것이 아니 다.
또 우주의 기원과 관련하여 산출된 과학적 사실들은 과도히 개연적이요 추측적이어서 토론의 영 역에 머물지, 확정적인 것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우주의 연대측정 뿐 아니라 우주의 크기 측정도 가정적 계수들의 부당한 확대로 나온 가상적 수치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시간과 공간의 무한대에 로까지의 확대는 다 진화론의 가능성과 그 활동 영역의 확보를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 2절과 그 다음의 연결은 이제껏 잘 해결되지 않았으나 위에서 살핀 현대적 시도 의 배경에서 볼 때 1절의 천지창조를 제 1일의 창조에 포함시켜야 바르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시므로 시간을 내셨고, 또 시간 속에서 창조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1절의 천지창조를 시간 밖으로 보낼 수가 없다. 1절의 창조를 제1일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결국 1 절의 천지창조는 영원창조가 되는데, 그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진술에 배치된다. 또 영 원창조가 창조의 관념에 배치되는 것은 영원한 물질의 존재는 시작을 갖지 않으니, 창조라고 할 수 없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ios)편에 나오는 식으로 선재 물질을 정비하는 것밖에 없다. 그것은 창조가 아니다. 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의 바라(bara)가 지시하듯 무에서 유를 처음으로 만 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절의 천지창조를 제 1일 창조의 날에 넣고, 그 다음 6일간에 처음 창 조하신 물질로 인류의 거소를 정비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
첫 날의 빛 창조를 볼 것이냐, 아니면 이미 있는 빛 곧 처음 천지창조시 내신 빛을 비추게 하심 인가는 논란이 많을 수 있다. 빛 이전에 이미 천지의 만유가 창조되어 있으면 빛도 이미 창조되 어 거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땅의 창조를 3일에 배치하면 처음 1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심 과 조화되기 어렵다.
따라서 빛과 천지창조를 첫 날 사역에 배치하는 것이 가하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에 있 어서 특색은 빛 가운데서 진행하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재창조의 시작에서도 밝히 드러났다. 바 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시 그의 얼굴에 재창조의 빛을 비추게 하셨다.
그리고 그 재창조의 빛 아래서 재창조 사역을 계속하시고 완성에까지 이르게 하실 것이다.
이 재창조 사역에서 처음 창조 사역의 진행을 볼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천지의 만유를 내 신 후 빛을 자기의 영광에서 나게 하시고, 그 빛 아래서 그 다음 창조과정들을 진행하셨다. 그러 니 빛을 제 1일의 창조에 넣고 이미 창조된 빛이 첫날에 보이게 했다고 볼 것이 아니다. 빛은 첫 날 창조되었다.
그리고 빛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고만 하신 것은 그 빛이 그의 영광의 광채에서 유해하였 기 때문이다. 그의 권세를 형태화한 것으로 보기보다, 첫 날의 빛은 그의 영광의 광채로 빛 되게 하셨다고 할 것이다. 지금은 빛도 다 솔비자로 확정하므로 물질의 형태이나, 처음 창조의 빛은 발 광체로부터 나온 빛이 아니니 물질의 형태의 일종인 빛으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에 서 유해한 빛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날 천지의 만유와 빛을 창조하시고서 그 후속되는 창조는 첫날 창조된 만유의 정비 를 그 빛 아래서 행하셨다.
둘째 날은 물론 정비하심으로 땅의 출현을 이루셨다. 하늘에 있는 물을 정비하시므로 소유 궁창 들, expansio를 이루셨다.
셋째 날은 물을 한 군데로 모으시므로 물 속에 잠겨 있던 땅으로 식물들을 그 종류대로 내게 하 셨다.
그리고 제 4일에는 첫날 빛에 상응하듯, 그리고 첫날의 빛을 대치할 태양과 달을 만드셨다. 이 두 빛을 만드심으로 태양계를 이날 처음 지으셨다고 할런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창세기의 창조기록 이 지구 중심적이어서 이날 만드신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은하계에 속해 있는 별들을 지구를 위해 배치하신 것으로 볼 것인지는 더 많은 주경적, 전성경적 고찰이 필요하다. 정비하시는 일은 이미 만유가 제출되어 있으니, 그것들을 별들로 정비하심은 제 4일에 있을 수 있다.
제5일에는 바다의 생물들을 종류대로 공중의 새들을 종류대로 내셨다.
제 6일에는 육지의 짐승들과 곤충들을 그 종류대로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셨다.
창세기의 전개가 인류의 출현을 위한 준비와 정비로서 인류를 목표하고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창조 과정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김과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이고, 이 관계가 지 구상에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크기
창세기는 지구를 중심으로 창조 사역의 전개를 기술하고 있으나, 현금 천체 물리학의 보고에 의 하면 우주는 광대 무변하다고 할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구를 중심으로한 창조의 전개는 우주가 그렇게 큰 것같지 않다. 그러나 현대 천체 물리학에 의하면 그 크기가 연대와 병행해서 확정되어, 우주의 직경이 1930년대에는 17억 광년 1960년대는 50억광년, 60년대에는 100억광년, 근자에는(1970년대에는) 180억 광년으로 확장되고 있다. 1980년대에는 또 얼마로 확장될지는 기다 려 볼 일이다.
이 거리 측정은 먼 별들에 나타나는 붉은 색의 변이를 설명하는 후블레 혹은 허블(Hubble)의 계 수의 값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수치이다. 이 붉은 색의 변이를 우주의 중심에서 멀 어지는 도피 속도로 계산하는데 이것에 대해 회의가 많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문외한으로 보 기에도 후블레(Hubble)계수의 크기를 과도히 크게 늘려잡은 것 같다. 이와 비슷한 보고를 현금 생존한 독일의 원로 물리학자요 천체 물리학자인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젝커(Carl Friedrich von Weizsacker)가 보고한다. 그에 의하면 현 우리의 우주인 은하계가 그 직경이 10억 광년이며 그 나이는 6조 년으로 말하면서 빛의 속도로 10억 광년을 가면 무한대의 거리가 아니냐고 그의 책 '물리학의 세계상을 위하여(Zum Weltbild der Physics)'중 세계의 무한성(die Unendlichkeit der welt)이란 장에서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의 우주인 은하계만도 이렇게 넓은데 이런 은하계들 소위 extra-galaxy가 수천, 수만개 이상 있으니, 가히 우주를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고 하 면서 우주의 크기에 대한 견해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살폈다.
먼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공간을 정의하면서 내놓은 견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공간은 물체의 표면의 확장이니, 공간은 물체의 표면의 확장만큼 진행되니 우주는 유한하다고 하 여 유한한 우주관을 제출하였다.
그 후 기독교의 출현도 우주의 크기에 대한 견해를 제출하였는데, 우주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유한하다는 견해였다.
바이젝커에 의하면 이런 고전적 견해는 과학이 오기 전이요, 중세 말기 니콜라스 쿠산누스 (Cusanus)이후부터는 우주의 크기를 무한으로 보는 것이 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쿠산누스에 의 하면 우주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반영한다. 그런 데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따라서 그의 형상인 우주도 무한하다고 결론하였다. 쿠산누스의 견해를 받아드려 그 자신 천체 물리학자이기도 한 바이젝커는 자기의 지식을 쿠산누스의 무한성 이론에 첨가하여 우주의 무한성을 주장하였다.
재래의 견해인 어떤 크기를 수치로 나타낼 수 있으면 유한하다는 설을 배척해서, 수치로 나타낼 수 있어도 무한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찬동할 수 있는 것은 집합론에서 무한수의 집합들을 통상한 수처럼 다루는데, 그런 수적 처리가 무한수열을 유한수열로 바꾸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같은 견해에서 바이젝커는 우주의 유한성을 제창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반동적이 라고 하였다. 그의 초기 이론은 혁명적이었으나 후기 그의 견해는 고전적 견해에로 되돌아가므로 반동적이었다고 한다.
이 바이젝커의 논의는 몇가지 점에서 이의를 제기하게 한다. 첫째는 그의 우주의 넓이와 연대의 계산에 있어서 후블레(Hubble)상수의 크기를 과도히 확장한 것이요, 또 멀리서 오는 빛이 순간 원자들 속을 통과할 때 그 거리와 연대를 계산해 내는 것은 과도히 무모한 시도인 것 같다. 그러 니 독일 기센대학 생물학 교수인 요아킴 일리스(Joachim Illies)박사가 말한대로 일정한 좁은 범위 를 벗어날 때는 별의 거리와 연대는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의적인 답을 줄 수 있 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Joachim Illies, Biologieund Menschenbild, p.32)
우리는 우주의 무한한 크기에만 도취되어, 그 수치를 무한대히 확대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처음 지구가 자전할 때 방출해 낸 전자파를 포착하므로 지구의 시작연대를 계산해 낼 수 있어야 할 것 이다.
이런 우주의 무한한 크기와 연대 주장에 대항하여 유한한 연대를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소위 창조론 과학자들은 현상 연대와 실 연대를 구분하므로, 현상 연대가 실 연대보다 월등하게 많아 보이도록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건다. 가령 아담과 하와는 창조 당일 성인으 로 만들어졌으니 최소한 20, 30년의 나이를 뒤에 가진 것처럼 나타났을 것이요, 나무와 모든 생물 들도 창조 당일 다 성숙한 형태로 출현하였으니 20, 30년대의 연대를 가진 것으로 있었을 것이다.
또 지질 연대측정에 사용된 우라늄도 그처한 환경에 그 반감기를 현격하게 변화시키니 우라늄과 납의 양을 보고 그 지층의 연대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또 헨리 모림스(Henry M. Morris)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지층에 들어있는 우라늄이 처음부터 우 라늄으로만 있다고 볼 것이 아니라, 우라늄과 납이 동시에 처음부터 존재했다고 보면, 지층의 연 대를 과도히 확장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주장한다. 그래 모리스교수의 인도를 따르는 창조론 과 학자들은 지구의 연대를 약 1만 5천년으로 추정한다.
또 진화론을 반대하고 창조론을 믿는 영국인 과학자로서 제네바대학 교수인 와일더-스미스(A. E, Wilder-Smith) 박사도 현재 대기층의 변이 과정을 살표보면, 현재의 상태를 표준으로 해서 그렇 게 긴 연대를 계산해 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Nature wissenschaften kennen keine Evolution 참 조)
그러면 이제 성경 본문으로 되돌아와서 성경은 우주의 크기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찌 말하 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시간적으로 우주의 크기를 살펴보면,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현금 과학자들이 주장하고 계산하듯 무한대인 것처럼 말할 수 없다.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가 '태초에'라고 하는 시간내에서 이루어지 고 시간과 함께 이루어 졌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 고백에 의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시간도 함께 창조하셨고 또 시간내에서 창조를 계속하셨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 고 빛을 창조하시므로 시간을 피조 세계에 도입하셨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것들은 이제 시작 을 갖기 시작하였으니 시간을 갖기 시작하였고, 시간과 함께만 존재할 수 있다. 시간이 피조물의 존재방식이다. 시간은 창조와 함께 창조되고 또 창조는 시간내에서 전개되었다.
창조의 시간들이 분명히 태양력에 의한 24시간임은 4일 태양과 달의 조성으로 분명하다. 그리고 4일부터 5일, 6일 창조는 다 24시간 하루의 시간에 창조된 것을 알 수 있다. 4일부터 6일까지의 창조가 태양일에 의해 이루어졌으면, 1일부터 3일까지의 창조도 24시간 하루기간에 창조된 것으 로 추론할 수 있다. 첫날부터 3일까지의 창조도 지구와 멀리 떨어진 창조가 아니고, 지구와 연관 시켜 창조가 진행되었으며, 또 날의 계산은 지구의 견지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 제 1일부터 3일 까지도 시간-날의 계산은 지구의 자전에 기초했을 것이고, 이 자전에 의해서 태양 아닌 빛이 비 취어도 시간의 진행 곧 밤과 낮의 진행은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태양과 달이 나타난 4일 이후와 그전 3일 간의 시간도 동일한 24시간으로 봐야 맞다. 또 출애굽기에서 7일 안식일 준 수를 명하실 때(출20:10-11)아무도 24시간 외 다른 시간대의 날 개념을 가질 수 없는 이스라엘 백 성들에게,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7일에 쉬었음이라'고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쉬어야 할 제 7일에 하나님이 창조를 마감하고 쉬셨으며, 이 스라엘이 힘써 일해야 할 통상 24기간대의 6일 간에 창조를 이루셨음을 분명히 하시므로 이스라 엘과 고대 민족들이 아는 밤과 낮, 24시간의 날의 기간에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명백히 하셨다. 여 기서 초점은 분명히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이해하는 백성들의 견지에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다.
그러면 창조의 시작과 진행은 24시간대 6일간에 이루어졌어도 그 후 시간은 수백 만년에서 몇 조 년까지 진행됐겠느냐하는 점이다. 원시인에 대한 진화론적인 추측을 제외하면, 인류의 출현이 2 ,3 만 년을 넘어 가지 못한다. 그래 영국이 엇셔(Usser) 감독은 창세기의 족보 연대 계산에서 창 조시기를 약 4040B.C로 정하였다.
처음부터 완성 형태로 창조된 인류와 피조물이 오랜 세월을 지나야 각각 주어진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창조 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인류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없 다.
따라서 현 창조가 현금 과학이 상정하듯 거의 무한대 시간계열 전에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없다. 우주의 시작부터 6조년이 흘렀다고 하는 계산은 과도히 과장된 계산일 것이다.
다음 공간적 크기는 어떠한가?
공간적 크기에 대해서는 성경이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재료에서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은 시간 내에서 전개된 우주는 설혹 확장설을 따른다 하더라도 유한한 시간 대에 그렇게 무한대로 확대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 천체 물리학이 하는 별들의 거 리 측정에 무한수열에 대한 집합론적 처리의 유회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 대 현 우주는 현대 천체 물리학의 계산만큼 무한대로 넓다고 볼 것이 아니다.
이들 현금 천체 물리학자들의 우주의 크기에 대한 계산들을 받지 않을지라도 그들이 말하는 시공 의 교차는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
시공의 교차 - 아인슈타인은 민콥스키(Minkowsky)교수의 주장대로 시간과 공간을 둘로 분리할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 생각하여 시공이 합치는 세계를 4차원의 세계로 지목하였는데, 바이젝 커의 보고에 의하면 우주의 시작 시간이 손실되어 없어져버린 것이 아니라 현 우주의 끝 부분에 이르면 처음 시작 시간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우주의 끝에서 시간의 시작을 만난다면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는 지점에 이른다. 바로 이 과정을 역으로 바꾸면 종말에서 시공이 일치하는 세계 곧 영원의 세계가 도입될 수 있다. 혹 과학적 고찰이 타당하면,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 나님께서 종말에서 현 세계의 질서를 바꾸시고 재정비하실 때 바꾸시므로 도입될 질서 체계를 현 우주에 넣어 놓으셨다고 할 수 있다.
창조의 목표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런 창조를 이루셨는가? 하나님의 창조 진행 과정을 보면 빛과 별들 창조에 서 하늘의 정비, 땅의 출현, 식물과 동물의 출현등 모든 것이 인간의 출현을 목표하고 진행되었 다. 인간 이전의 창조는 마치 인간의 주거환경의 정비로 여겨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왕관으로 그 정점을 이루어 인간을 목표하고 진행된 것 같다. 그러면 이 과정은 진행되어 인간의 구원 혹은 인간의 앙양이 모든 창조의 목표인가?
현금의 신학은 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최종목표가 인간 존재의 앙양이라는데 일치한다. 특히 이 인간 존재의 앙양을 하나님의 사역의 최종목표로 신학적 논리를 전개한 신학자는 칼 발트 (Karl Barth)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와 사랑의 교재를 나누시고 그 교제후 자기가 사랑임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 그를 자기와 연합시켜 하나님의 자기 존재까지 앙양하시기를 작정하셨다. 이 앙양을 위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를 임시적으로 만드시고 인간 예 수 그리스도를 신인(神人)의 연합이 되게하여 인간을 하나님에게로까지 앙양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창조 사역은 하나님의 언약의 동반자인 인간의 출현과 그 거주 장소 마련이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인간과 맺으실 언약 관계이다. 따라서 언약이 창조를 필연적이게 하였다. 따 라서 발트는 창조를 언약의 외적 근거요, 언약을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한다.
이렇게 창조하심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이다. 이에서 나 아가 발트는 전개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위해 그의 생을 사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만드시고, 그를 위해 온갖 역사를 다 하신 후 그를 앙양시켜 자기 존 재에 동참하도록 하심으로 그의 생을 다 한다.
완전히 인본주의적 사고의 전개이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자족하시는 분이며 영광의 신이신데,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기의 생을 인간의 구원 곧 인간의 앙양을 위해 사신다는 것은 성 경 전체의 증거에 배치된다.
하나님은 본래 자족하신 하나님(Selfcontained God)이시므로, 창조를 더하시므로 자기의 영광을 더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혜와 권능 나타내시므로 그의 영광을 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의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사 자기의 선하심을 현시하시고 영광이 되게 하시므로 보시고 좋다고 하셨다. 그의 지혜와 권능의 현시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자기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하나님의 영화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목표이다. 따라서 창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졌고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 모든 피조물도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해한다.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화'이다. 왜냐하면 이 목적을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광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6일 창조와 제 7일 안식일 제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 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내에서 그의 영광을 찬양받으시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6일에 창조를 마치 시고 제 7일에 쉬시므로 제 7일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하셨다. 바로 이 예배 관계의 지 속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인간의 사명과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영광을 찬양함 곧 그를 예배함이다. 하나님 의 자기 영화와 예배받으심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의 구조를 갖는다. 세상의 창조는 성전 건축의 뜻을 가진 다. 전창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경배할 처소다. 이 성전에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으로 세움받았다. 그러니 아담은 피조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 사명의 계속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 인간이 자기 사명에 지속적으로 부착할 때 그에게 생명이 있고 그의 영광이 있다. 하나님을 섬김이 인간의 생명이요 영광이다.
인간의 창조와 사명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의 무대에 서서 자기의 영광을 증거할 사람을 필요로 하셨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합창하는 하나님의 영광송에 합창할 자를 두시기를 기뻐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 자기의 창조를 다스릴 자기의 대리 통치자를 두시기를 기뻐하셨다. 자기의 창조를 계발할 뿐 아니라 또 성별해 드리는 제사장을 두시기 기뻐하셨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특별 조물을 내시기로 작정하셨다. 피조물이나 자기를 닮은 특별한 자 를 세우기로 하셨다. 이런 특수한 피조물을 지으시기 위해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을 지으실 때 하 시던 통상한 방법을 채용하지 않으시고, 즉 명령만으로 피조물이 나타나게 하는 방법으로 하지 않으시고, 특별한 의논을 취하셨다. 보통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된 피조물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의논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 26절)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남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으 로 지으셨으므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일 뿐 아니라, 만물의 통치자 곧 왕으로 세워지게 되었 다.
인간은 지성과 의지와 양심을 가진 자로 여러 은사들을 받아 지어져, 하나님의 창조를 다스리고 성별하여 하나님께 바쳐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자기 창조에 넣어놓으신 무한한 가능성들을 계발하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현시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책임을 받아가졌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영화롭게 하며 창조를 다스리고, 그 창조를 계발하는 일이 아 담의 책임이요 사명이었다. 이 책임을 다할 때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며 피조물 위에 왕일 수 있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사역은 바로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에로 집중 되었다. 이 일을 위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사와 호의를 받아 생산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사명에 부착해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해 있어야,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만 물의 통치자이다. 그러나 이 사명을 떠날 때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고, 어두움뿐이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파기하면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느냐? 성경 에 의하면 인간은 범죄후에도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며, 그를 영화롭게 할 의무와 창조를 계발 하는 책임을 면하지 않는다. 타락 상태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창조에 대한 책임을 면치 않 는다.
창조신앙과 증명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이 창조신앙이 가장 바 르고 확실한 진리임을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임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으로 직접 자연의 사물들과 사실들에 접근하여 그것을 탐구하므로 거기서 하나 님의 창조의 사실을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직접적 방법으로는 불신자들과 불신 과학자들에게 창조신앙과 창조의 사실을 받게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실패에로 귀착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창조신앙의 증거를 위해 기독교 진리를 참이라 고 전제하는 전제주의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 변증법은 화란계 미국 신학자인 밴틸(C. Van Til)이 제창하였다. 기독교의 진리가 참이라고 전제하고서 창조신앙을 받도록 촉구하는 방법을 택 한다. 즉 창조신앙을 받아야 할 상대방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이므로 그가 하나 님 의 창조를 인정하고 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과 맺은 언 약의 파기자이기 때문에 창조를 기피하고 부인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진리만 이 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기독교진리 특히 창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들이 파기한 하나님과 의 언약의 책임회피를 위해서 그러한다.
다 그들의 마음에 그들의 내면 깊이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알면서도 그들 의 죄성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 사실을 접촉점으로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창조를 받 도 록 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구체적 사례로 창조대신 진화를 주장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경우에도 창조 신앙을 전제하고 구체적인 사례들의 경우, 진화가 그릇되고 창조가 바름을 과학적으로 제시하 는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이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기 위해 제출된 사상체계일 뿐 아니라 종교적 신앙이다. 인간 의 본성이 변한 것이 아니다. 또 창조와 성경의 역사가 증거하는 천재지변 곧 노아의 홍수등이 현 지층의 형성과 변화를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창조론 과학자들의 주장과 증거들과 창조신앙 에 근거해서만 가능해진 이론이요 결과들이다.
세상의 구원은 인류가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는데 있고, 인간 사회가 밝아지는 길도 하나님의 말 씀에 사회를 기초시키는 길뿐이다. 그 길 중의 하나는 현 인류 사회를 지배하고 주도적 역할 을 하는 자연과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바른 학문을 세워 거짓 이론들을 배제하는데 있 다. 우리의 현 창조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유지되고 속량되었으면 학문에서도 이 구 속의 사실은 증 거되고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조에 대한 창조주 자신의 해석인 성경을 학문 활 동의 원리와 빛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성경을 자연과학 활동에 있어서 지침으로 삼을 때, 진 화론과 같은 그릇된 이론을 배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른 학문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 나락 건설되는 길이 열릴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고 신앙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증거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의 연구대상 특히 자연과학 적 탐구의 대상인 자연이 지금 유지되고 파괴되지 않는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 속의 공로때 문이요, 또 속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 속의 공로 아니면 이 창조내에 존속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바로 이 진리를 부인하고 배척하기 위해 진화론이 제출되고 넓게 퍼 져 나가게 되었다. 과학적 증거가 없는 이론이 이토록 열렬히 수납되고 주장되고 변호되며 신 앙 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실제는 우리의 지성보다 커서 여러 각도 로 보여지고 해석될 수 있지만 비과학적 이론이 과학적 이론으로 이처럼 수납된 것은 르네쌍스 이후 다시 없을 것이다.
진화론을 배척하고 바른 학문원리를 세우므로 학문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우므로 학문에서 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우려는 여러분 과학자들에게 주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 바랍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