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 새의 표현이다.
포항 흥해군수 유응환 碑
봉황(鳳凰)은 전설의 새이다.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태평하다고 하며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를 갖추고 오색의 깃털을 가졌으며, 오음의 소리를 낸다고 전해진다.
남한에 남아 있는 벼슬아치들의 선정불망비 중에는 다양한 문양이 있지만, 봉황이 있는 것은 처음 보는 문양이다. 포항 권무정에는 있는 유응환 군수의 선정비에 문양은 다른 곳의 碑와 다르게 단순한 봉황이 새겨져 있다.
봉황의 표현은 아름답게 화려하게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는 단순하게 浮彫 형식으로 되었다. 봉황은 그림이나 기와, 도자기에 자주 표현되지만, 비음에 새긴 것은 의외의 결과로 보인다.
흥해군수 유응환은 1829년 흥해 군수에 임명되어 부역을 없애고, 세금을 덜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하여, 그 당시 흥해 군민들이 태평스런 시기를 지냈기에, 비음에 봉황이 새겨진 것으로 해석된다.
성주목사 윤자일 철비 쌍조(雙鳥)
성주에 있는 윤자일 목사의 선정불망비는 鐵로 만든 碑이다. 성주는 답사를 갈 때 하마비에 중점을 두고 향교를 방문하였는데, 하마비 촬영을 하고 나오면서 비석들을 보고 사진 촬영을 하였다. 그 당시는 하마비에 관심을 많이 두었기에 자세히 보지 않고 사진 촬영만 하였는데, 다시 철비를 보러 가니, 비석들을 옮긴다고 하여 볼 수 없었다. 3년이 지난 후에 다시 가서 철비를 촬영하였는데, 답사를 몇 번 갔는지 모를 일이다. 생각하면, 답사는 기다림이다. 공사도 하고, 이전도 하고,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기에 한 번에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철비 碑陽에 있는 쌍조는 龍의 문양 때문에 인지를 못 하다가, 성주 향교 앞에 있던 비석들이 성주역시테마공원으로 이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철비를 재촬영하는 과정에서 새의 문양을 보았다.
쌍용의 문양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새인지 아니면 龍의 이빨인지 구분이 안 된다. 새의 문양을 보면 얼굴을 마주 보고 있기에, 필자의 눈에는 자주 보는 참새로 생각되지만 철로 만들다 보니 자세한 표현이 어려워 원앙이나 기러기 등의 새일 수도 있다.
윤자일 목사는 성주에 1년간 재임하였는데, 창고를 덜고, 노인을 우대하고, 부역을 줄였다는 내용이 선정비의 명문이 새겨져 있기에, 鐵로 만든 碑와 문양이 다른 곳의 碑와 달리 쌍용과 쌍조, 비음에 태극무늬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칠곡 관찰사 이담명 관찰사 碑
관찰사 이담명의 영사비(永思碑)는 볼 때마다 독특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비양에 무늬를 보면 방형의 碑首에 상단에 마주 보는 새가 있고, 그 아래로는 여의주를 두고 쌍용이 마주 보고 있다. 그 아래로는 龍의 발이 있으며, 쑥대머리를 한 사람 얼굴이 보이고, 그 아래는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다. 관찰사 선정비는 총 높이가 260cm이다. 일반적으로 碑首에는 쌍용을 조각하지만, 이담명 관찰사 碑는 틈이 없고, 다양하고 해학적인 문양이 부조되어 있다.
조선 후기 관찰사는 순력보다는 유영 체제인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칠곡군에 백성의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고, 어려움을 많이 해결해 주어 영사비(永思碑)가 세워진 것으로 풀이된다.
비양에는 많은 문양이 있지만 비음에는 없다. 비신에는 이담명 관찰사 선정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있지만, 이 碑는 공의 死後에 새워진 것이다. 死後에 碑는 타루비가 많은데 여기는 영사비로 지칭되어 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문화유산 이야기』 上, 中권에도 이 碑는 소개 하였다. 제일 많은 언급 할 정도이니 비석의 가치만큼 문양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남양주 김상준 신도비 쌍조
김상준 신도비를 보러 가는데 입구에 이정표를 보고 動線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동네 주민이 나오기에 길을 물으니 산에는 돼지 막사와, 개를 풀어놓았다 한다. 여름이라 뱀도 무섭지만 멀리서 답사를 왔는데 그냥 갈 수 없다 하여 산을 올랐다. 낮은 산이지만, 풀도 많고 벌레도 있지만 오르니 다행히 개, 돼지는 묶여 있었다.
울산에서 경기도 답사는 당일치기가 어렵다. 갈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피로와 장거리 운전의 위험성이 항상 내포되어 있어 그렇다. 특히 묘지 답사는 겨울이 좋지만 일조 시간이 여름보다 짧기에, (관찰 시간이 많지 않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신도비에는 대부분 쌍용이 조각되는데, 김상준의 신도비는 전면과 뒷면에도 鶴이 날개를 활짝 펴고 비행하는 모습이 보인다.
떠오르는 태양 아래 화문형 구름이 빽빽하게 표현되었다. 鶴은 두 마리가 일직선상이 아니고 어긋나게 날아가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깃털의 표현도 자세히 보면 보이고, 긴 목이나 다리도 잘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마모 현상이 많이 보이지만, 약 400년 흘렀지만 보존이 잘되어 있다. 신도비에 나타나는 문양은 쌍용이나 삼족오, 日陽文이 많이 보이지만, 비수의 앞면과 뒷면에 쌍학이 나오는 것은 거의 드문 예이다.
김상준의 신도비는 이러한 독특함을 가지고 있으며, 달이 구름 속에서 숨은 모습과 쌍학(이) 빽빽한 무늬 속에 힘차게 비행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쌍학이 어긋나게 비행하지만 뒷면은 좌우가 일직선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向 우측의 鶴은 문양이 제대로 보이지만, 向 좌측의 문양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야외에 신도비가 있다 보니 관리의 부실과 세월에 의한 마멸의 흔적으로 보인다. 신도비의 문양이 박락이 일어나고 있으니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鶴이 네 마리라는 것은 난생 설화 등이 결합된 것으로 생각되며, 김상준 仙人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생각된다. 전면의 태양은 삼족오의 다른 표현이고, 뒷면의 달은 옥토끼의 다른 표현으로 생각된다.
비수는 다양한 표현이 많지만 쌍학이 4마리가 있는 신도비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지만, 사람마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필자는 鶴으로 보았지만, 삼족오의 변이나 玄鳥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앞에 보이는 김상준 신도비와 비슷한 문양의 碑(로)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연성부원군 이정화 신도비가 있다.
碑首의 전체적인 크기나 모양은 조금 차이가 있으나, 碑首에 새겨진 문양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비음에 보이는 달은 가운데 있으며, 그 아래로 비행하는 鶴의 모습이 김상준 신도비와 흡사하다. 이정화의 신도비의 건립 시기는 1626년이며, 김상준의 신도비 건립은 1635년 전후이기에 그렇게 생각한다. 시대적으로 이정화(1520~1558년)과 김상준(1561~1635년)의 활동 시기는 77년이나 차이가 난다.
는 활동 시기가 차이가 나지만 신도비를 만든 시기가 비슷하여 동일 장인 집단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슷하게 만들었기에 이와 비슷한 신도비가 어디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상준의 비양은 비음과 비슷하게 만들어졌으나, 이정화의 신도비 경기도 고양에 있는 이정화의 신도비도 쌍조의 작례이기에 개별) 문단으로 작성해야 하나 필자의 재량으로 김상준 비에 포함시켜 글을 썼다.
의 비양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쌍용으로 꾸며져 있었다. 다만 김상준의 신도비가 더 짜임새가 있고 화려하게 보인다. 경기도 고양에 있는 이정화 신도비는 고령에 계신 정이환 선생께서 사진을 제공하셨다.
진양강씨 묘비 쌍조
한 것은 아니었다. 강씨부인 묘나 夫君의 묘에 보이는 망주석에 관심이 더 있었다. 필자의 단독 답사 이후) 나중에 문화유산 답사단과 같이 가서 묘비를 살피던 중에 鶴이 있는 것을 알았다.
여성의 묘비에 鶴은 보이고, 남편의 묘비는 없는 것은 부인의 명문가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시각으로 보는 마음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鶴은 목을 길게 뻗은 형태로 조식되었으며, 뒷면에는 상부에 龍을 새겼다. 龍 문양은 비양에 보이는 것이 묘비나, 신도비에 보이는 것이 필자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비양에 鶴, 비음에 龍을 새겨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개념을 깨뜨리고 있다.
여기의 묘역은 화려한 석조물이 눈이 띄며, 상석, 사자좌, 龍 문양은 다른 곳과 많이 다르게 조식되었다. 이채롭다는 말보다는 정성과 그 당시의 재력이 과시된 것으로 생각된다. 여성의 묘가 화려한 것은 아마 남편은) 이 지역에 처음으로 입향 하여 기반이 없(었)고, 명문가 자손이었던 부인이) 이 지역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묘비를 조성한 16세기 初이기에, 아직 조선의 이념인 남존여비 사상이 덜 여문 것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산사 부도전에 있는 혜덕왕사 탑비의 귀부는 용머리가 목도리가 선명하고, 수염은 아래로 표현되었기에, 금산사 부도전에 가면 항상 보는 것이다. 혜덕왕사 탑비 사진을 촬영하고, 옆에 있는 비석에 무엇인가 살펴보니, 글씨를 쓴 사람이 백헌 이경석이었다. 성남에 있는 이경석의 묘도 보고 온 기억이 있기에 그 碑를 자세히 연구하여 보니, 소요(당대사) 탑비이었다.
『백헌문집』에는 소요(당)대사 탑비에 글이 보이지 않아, 어떤 내용인지는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동주집 동주 이민구(1589-167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州)·관해(觀海). 신당부수(神堂副守)이다.
에는 소요 법능대사 비명이 보인다.
간단하게 발췌하여 본다.
“법사는 늘그막에 덕을 성취하여 총림(叢林)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원근(遠近)에서 법사를 숭모하여 귀의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졌다. 승려들이 모여들어 그 숫자가 항상 수천을 헤아리니, 산문(山門)이 시끌벅적한 저잣거리 같았다. 법사는 정법(正法)의 눈으로 자비와 지혜를 운용하였으니, 몇 번이나 혀끝과 붓을 썼으랴. 곧장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가리키니, 실로 중생을 건네줄 뗏목이며 법문의 동량이었다.” 고전 번역원 db에서 발췌하였다.
앞과 같은 내용으로 인해 필자의 생각은 봉황이 새겨진 것으로 보았다. 비록 글쓴이는 다르나 백헌 선생이나 동주 선생의 소요대사에 대한 마음은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봉황은 碑의 아래 부분에 있는데, 하늘을 나는 새를 碑 아래에 표현한 것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碑 상단에 표현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마음은 아직도 든다. 向우측의 봉황은 머리를 하늘로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고, 向좌측은 정면으로 날아가는 형태이다. 좌우의 구름과 입에 물린 여의주는 소요대사 탑비의 아름다움을 가중시키는 느낌이 든다. 필자의 생각은 비석에 조각된 수준을 보아서는 채색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