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케로 [Cicero, Marcus Tullius, BC 106~BC 43.12.]
<생애>
- 고대 로마의 문인, 철학자, 변론가, 정치가이다. 로마시 남동족 아르피눔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로마에 나가서 선배 정치가들로 이루어진 문화적 그룹과 가까이 하였으며, B.C. 81년에는 법정변론가로 나서 성공을 거두었다. B.C.. 79~B.C.77년에 동방에 유학, 아테네, 소아시아, 로도스에서 선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원로원의원이 되었고, B.C. 75년에 재무관으로서 시칠리아에 부임하였다. 이 때의 인연으로 B.C 70년에는 시칠리아 주민의 보호자로서 시칠리아의 악질 총독 베레스를 법정에 소추하였고, 당시 최고의 변론가였던 호르텐시우스와 논쟁을 벌여 대승리하였다. 이 <베레스 탄핵연설>은 당시 로마의 속국 지배에 관한 귀중한 사료이다. B.C 69년에 안찰관, B.C.66년에 법무관에 취임하였다. 실업계에서 활약하는 기사들과 관계가 깊었던 그는 이어 부유계급의 대동단결을 주창하여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의 전통을 옹호하였으며, B.C. 63년에는 빈민의 불만을 이용해서 반란을 일으키렸던 카틸리나 일파의 음모를 진압하여 <국부>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원로원 중심노선은 민중파 정치가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B.C.58년에 그는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B.C.49년 이후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란에서는 후자를 지지하였으며, 폼페이우스가 패배한 후 카이사르의 관용으로 로마로 돌아왔다. B.C.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로는 암살자측을 지지하였고, 원로원의 중진으로서 옥타비아누스와 손잡고 안토니우스와 싸웠다. 그러나 그는 B.C.43년 12월 안토니우스의 부하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업적>
- 수사학의 대가이자 고전 라틴 산문의 창조자이며 동시에 완성자라고 불리며, 그리스의 웅변술과 수사학 소양에서 우러나온 문체는 도도하게 흐르는 대하에 비유된다. 그의 철학은 절충적인 처세 도덕론에 불과하지만 그리스 사상을 로마로 도입하고 그리스어를 번역하여 새로운 라틴어를 만들어 그가 최초로 라틴어를 사상전달의 필수적인 무기로 삼은 공적은 참으로 큰 것이다.
<저서>
-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카틸리나 탄핵 In Catilinam> 외 58편의 연설과, <국가론 De Republica>, <법에 관하여>, <투스쿨라나룸 담론>, <신에 관하여 De natura deorum>, <의무론 De officiis> 등의 철학서와 <노년론>, <우정에 관하여> 같은 소품, 그리고 친구인 아티쿠스 등에게 보낸 서한이 있다.
<키케로의 명언>
* 강렬한 욕망을 버리고 싶거든, 그 어머니인 낭비를 버려라.
* 교수(敎授)하는 자의 권위는 흔히 교육받고자 원하는 자를 해친다.
* 끝나 버리기 전에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 남의 고통을 동정해서 흘린 눈물은 금방 마르게 된다.
* 네가 왕과 동행할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거지와 같이 있을 때 그를 업신여기지 않으면, 너는 인격자다.
* 눈썹과 눈, 그리고 안색은 우리를 자주 속인다. 그러나 가장 많이 속이는 것은 말이다.
* 명예를 가볍게 여기라고 책에 쓰는 사람도 자기 이름을 그 책에 쓴다.
* 모략, 중상만큼 빠른 것이 없고, 쉽게 발설되는 것도 없고, 빨리 받아들여지는 것도 없고, 널리 퍼지는 것도 없다.
* 민중만큼 정해지지 않은 것은 없고, 여론만큼 애매한 것은 없고, 선거인 전체 의견만큼 허위적인 없다.
* 방에 서적이 없는 것은 몸에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