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의에 빠진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어 그들과 함께 걸어가신다.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하루종일 주님과 함께 걸으며 무등산의 절경에 취하였다
엠마오로 가는 여정은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 혹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뜻이다
<산행 코스> 주차장-약사암-서인봉-중머리재-중봉-서석대-입석대-장불재(점심식사)-느티나무-증심사-전주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예수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그들은 희망이 물거품이 되어 낙향하고 있었다
엠마오라는 작은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두 제자의 삶이 희망 없이 땅 끝까지 추락하는 체험이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어 우리와 함께 걸어가신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걸어가심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라고 생각한다면 내 삶은 변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변화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리워졌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평일의 무등산은 한적하여서 여유롭게 산행할 수 있었다
무등산은 삶속의 산이다.
세상이 끝나는 곳에서 솟아오른 산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내려와 있는 산이다.
산이 세상을 안아서 산자락마다 들과 마을을 키웠다.
약사암(藥師庵)
약사암은 무등산의 대표적인 명찰인 증심사 입구에서 새인봉 쪽으로 오르는 길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약사암의 건물들은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고 1984년에 다시 복원된 것들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과 한 조각씩을 나눠 먹고 지루한 계단을 올라갔다
서인봉(曙印峰) 611m
새인봉 삼거리에서 새인봉 오름은 포기하고 서인봉 쪽으로 올라갔다
서인봉은 천황봉의 서쪽 능선에 있으며, 약사암 남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덩이 산이다.
『유서석록』에는 '사인암(舍人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무등에 오르려는 것은
텅빈 그 마음 속에 무등을 담으려고
허기진 배 움켜쥐고 헐떡이며 가는 것이다.
무등이 되려고 무등산에 가는 거다.
마음을 비우고 무등에 오르면
내가 무등산인 것이다.
우리가 무등산인 것이다.
온 천하가 무등산인 것이다..............................................................나천수 <무등산에 가면> 부분
중머리재(617m)
새인봉 남쪽에 있는 중머리재는 나무 한그루 없는 억새밭을 이루고 있다.
스님의 머리처럼 민둥민둥하여 속어로 중머리재라 부르는 것이다.
이곳은 쉬어가기 좋은 곳인데...우리도 오이와 떡을 먹으며 오랫동안 쉬어갔다
날씨가 더운 탓으로 산행코스를 거꾸로 잡아서 중봉 오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 산은 사람을 찌르거나 겁주지 않고, 사람을 부른다.
아마도 이 산은 기어이 올라가야 할 산이 아니라, 기대거나 안겨야 할 산인 듯 싶다.
생각이 바르면 말이 바르다.
말이 바르면 행동이 바르다.
매운바람 찬 눈에도 거침이 없다.
늙어 한갓 장작이 될 때까지
잃지 않는 푸르름.
영혼이 젊기에 그는 늘 청춘이다.
오늘도 가슴 설레며
산등성에 그는 있다.............................................................유자효 <소나무> 전문
중봉 아래 안부에 흩어져 있는 거대한 바위들이 보였다
제멋대로 흩어진 바위들은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주상절리가 절벽에서 떨어져 나와 붕괴되는 과정에서 생긴 바위들 같아 보였다
중봉(915m)
중붕에서는 서석대와 입석대를 배경으로 광주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리도 아름다운 이곳을 광주 시민들이 마음껏 다니게 된 건 불과 20여 년 전부터다.
90년대 말까지 군부대가 있어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됐고, 이후에 산림이 복원됐다.
서석대
직경 1~1.5m인 돌기둥이 30m 높이로 촘촘하게 병풍처럼 서 있다.
동서방향으로 늘어선 서석대에 저녁노을이비치면 수정처럼 반짝인다 해서 ‘수정병풍’이라고도 불린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 광대한 주상절리가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때문에 무등산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공원이기도 하다.
서석대(1100m)
이곳이 우리가 오늘 오를 수 있는 무등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표지석 뒷면에는 '광주의 氣像(기상) 이 곳에서 發源(발원)되다',라는 글귀가 담겨 있다.
표지석 글씨는 국전 심사위원인 서예의 대가 학정 이돈흥 선생(鶴亭 李敦興)이 썼다.
학정 선생의 글씨는 남도의 기상과 함께 무등산의 수려함을 잘 담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갈 수 없는 천황봉
천황봉에는 우리나라 공군 방공포대가 주둔하고 있어 민간인은 오를 수 없다.
연중 두어 차례 천왕봉으로 가는 길을 여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개방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천황봉에 대한 아쉬움을 가득 안고서 입석대를 향하여 내려갔다
주성절리대
무등산 정상 부근에 발달한 주상절리는 용암과 화산재가 갑자기 식어 만들어진 것이다.
주상절리는 제주도와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고산지대의 주상절리는 무등산이 유일하다
무등산의 화산암을 연대측정한 결과 화산활동은 약 4500만~8500만년 전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입석대
천만년 비바람에 깎이고 떨어지고
늙도록 젊은 모양이 죽은 듯 살아 있는 모양이
찌르면 끓는 피 한줄 솟아날 듯하여라.......................... 시인 이은상이 입석대를 노래한 시구이다
장불재(919m)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광주 사람들은 고졸의 경상 출신이었던 노무현을 압도적으로 밀어줬다.
광주는 그렇게 '노풍'(盧風)의 진원지가 됐다.
"아! 참 좋다."
지금은 산이 돼 버린 그가 장불재에 남겨둔 친필 방명록 문구다.
그의 환희와 아픔을 광주사람들은 무등산 장불재에 그렇게 두고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새로 돋아난 적단풍의 여린 잎이 어찌나 예쁜지 몰랐다
마치 봄의 숲에서 가을 단풍을 보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자연의 손길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느티나무
증심사로 내려가는 길목에 무등산을 지켜온 450년이 된 노거수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다.
광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였으며, 반세기동안 무등산을 지켜온 산 증인이다.
2007년 5월 19일 노무현대통령이 무등산에 올랐는데 여기서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며 쉬어간 인연이 있다
무등산 노무현길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였던 2007년 5월 무등산을 찾아 광주 시민들과 함께 산행하였다
장불재에서 등산하던 시민들을 향해 즉석에서 산상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시민들은 그와 함께 걸었던 증심사 입구에서 장불재까지를 '무등산 노무현 길'로 지정했다
증심사(證心寺)
증심사는 기록에 따르면 철감선사 도윤이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지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려 1970년 대웅전을 시작으로 지장전, 비로전 등을 지었다
증심사는 공사중이라 매우 어수선하여 들어가지 않고 그냥 내려왔다
하루종일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시간들이 행복하였다
전주로 돌아와서 안식구들까지 초대하여 산행을 마무리하였다
첫댓글 신록이 완연하군요
행복한 시간은 만들기 나름이지요
엠마오길 토마스형님도 동행하시고 즐거운 시간 부럽습니다
광주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제단입니다
그곳에 갈 때마다 항상 죄스럽고 마음에 빚을 진 기분입니다
제단에 제물 하나 올리지 않고 지금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요